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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집 없는 기억  

[ 시(詩)가 있는 아침 ] - '집 없는 기억'  전문

[중앙일보   2004-11-22 21:20:04]


[중앙일보 김기택<시인>]

    이향지(1942~ ),

    집 없는 기억




    리어카를 따라갔다
    호마이카 장롱보다 작은 리어카

    모퉁이를 돌아가면 또 모퉁이
    넓은 길은 좁아지고
    등에 업힌 아이는 잠들어 축 늘어지고

    좁은 길옆에 쪽문을 열어둔 파란 대문 집
    문간 방, 연탄 광에 차린
    캄캄한 부엌, 쥐들은 밥 냄새를 맡고
    달그락거리고

    리어카를 따라갔다
    호마이카 장롱보다 작은 리어카

    한 아이는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모퉁이를 돌아가면 또 모퉁이
    한번 좁아진 길은 몇 번을 꺾어 돌아도
    넓어지지 않고

    리어카 위에는 아이들 목욕통
    목욕통 안에는 빨간 비닐곰
    조금만 눌러도 삑삑 소리를 내고

    햇빛은 장롱 위에서 번들거리고
    장롱에 딸린 거울은 쓸데없이 커다란 하늘을 담고




가난이 아무리 지독해도 기억 속의 가난은 왜 독기가 없고 순하기만 할까? 어린 시절 가난에 덕지덕지 붙은 누추한 소품들과 배고픔과 추위는 기억 속에 들어오면 왜 따뜻해지고 풍요해질까? 분해하면 리어카에 다 들어가는 장난감 같은 집, 몇번을 꺾어 돌아도 넓어지지 않는 길, 장롱 거울에 들어앉은 커다란 하늘, 이 터무니없이 즐거운 동화적 상상력 앞에 가난은 오히려 무력해 보인다.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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