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월출산을 처음 만난 것은, 바람골에서 불어 올리는 연둣빛 바람이 구름다리를 후들거리게 하던 오월이었다. 밤새도록 버스를 달려, 키를 돋우며 일어서는 첩첩한 암봉들을 아침 햇살 속에서 마주했을 때, '힘·젊음·또 하루 벅차게 밀며 올라야 할 벽' 등등의 토막말들이 떠올랐다. 남들이 아침 먹는 시간까지 오름 길에 쏟아부었다. 사자봉 철사다리 오를 땐, 내 심장이 내 발아래서 쿵쿵거리는 것 같았다.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초라해 보이던 천황사. 꽃 진 자리에서 돋아나던 동백나무 햇잎들. 바람에 뒤집히지 않으려고 단체로 흔들리던 참대나무 줄기와 잎새들. 사랑한다! 사랑한다! 목청을 다해 짝을 불러 쌌던 왼갖 잡새 소리들. 울룩불룩한 암봉들도 드러내고 울 일 있었던지 꺼뭇꺼뭇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오히려 마음을 끌었다. 온 산을 태울 듯이 능선까지 기어오른 연두 불길 속에서, 새치 섞인 머리카락 펄펄 날리며, 이 산 깊이 안았다.
입춘을 나흘 앞두고, 일몰을 세 시간 쯤 앞두고, 13번 국도를 따라 영암으로 들어서며 다시 보는 월출산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오는 봄을 먼저 보겠다고 줄기차게 남쪽을 향해 달려온 끝이다. 시선을 압도하는 장엄한 산머리엔 잔설 얹혔고, 뿌연 가스가 장막처럼 산을 휩싸고 있다. 깃대봉·시루봉·매봉·연실봉·사자봉·천황봉·장군봉이 한 덩어리로 얼크러져서 울퉁불퉁한 스카이라인을 불티재 쪽으로 흘리며, 제 그림자에 갇혀서 굼틀거리고 있다. 그 덩어리는 천황봉 쪽으로 주둥이를 모으고 웅기중기 모여 앉아 귀를 쫑긋거리는 흑곰들 같다.
영암이 자랑하는 월출산이, 호남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긍지로 삼아온 산이, 한 번이라도 다녀간 사람이면 못 잊는 산이, 오늘 내 눈엔 왜, 영암으로부터 등 돌린 흑곰들처럼 보이는 걸까? 장군봉에 케이블카를 놓는다는 소문 때문일까? 바다의 지도를 바꾸는데 맛들린 사람들이, 월출산의 지도조차 바꾸려한다는 우려와 개탄 때문일까?
불티재를 넘어 강진 땅으로 들어서니 산 빛은 또 다시 달라진다. 월남리로 들어서며 보는 천황봉은 저돌적으로 다가드는 남성미가 아니라, 몇 걸음 물러앉아 식솔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같다. 동산처럼 완만한 곡선에 삐죽삐죽한 바위들을 '창검처럼!' 세워들고 서쪽으로부터 어깨를 내리는 향로봉 줄기와, 양자처럼 동남쪽으로 불거져 앉은 양자봉(養子峰)에서 팔을 뻗는 갈맷빛 능선이 저고리 동정처럼 여미고 있는 산자락. 저 산자락 사이가 경포대계곡이다. 세월의 훈장인 주름살 석양에 맡긴 채, 손님이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걱정 벗어난 늙은이처럼 천황봉은 졸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 바로 턱 아래 우묵한 혈(穴)을 지닌 육봉(肉峰)이 하나 자태를 숨기고 있다. 그 우묵한 가운데가 바로 명당이란다. 죽은 자의 명당이 저 산비탈에 있다면, 살아있는 자의 명당은 신발 신고 걸을 수 있는 이 황톳길이 아니겠는가?
경포대계곡과 나 사이엔 아무 추억거리도 없었다. 그런데, 바다로 가는 물길과 산으로 가는 사람길 사이에 울타리처럼 늘어선 동백나무들. 반들거리는 잎새 사이에서 부풀어 가는 동백꽃 봉오리에 시선이 팔려, '금릉경포대(金陵鏡布臺)' 새겨진 바위가 있다는 계곡의 풍광을 놓쳤다. 나 어릴 때 심심하면 찾아가서 놀던, 통영 충렬사 앞 늙은 동백나무들. 조그만 발 앞에 아낌없이 툭툭 떨어뜨려주던 핏빛 동백꽃들. 흙 위에 떨어진 동백꽃 주워, 짚풀에 꿰어 목에 두르고 놀던 추억 때문인가. "동백은 져 붓고, 춘백은 안 피었어라우!" 해남 사람 천기철씨의 구수한 사투리의 안내를 받으며 월남사지, 무위사∼백련사∼다산초당을 돌며 확인을 하고도, 성급한 춘백 몇 송이는 피었으려니 싶었다. 바람재로 통하는 길을 왼쪽으로 흘리고, 돌팍길을 흔드는 징소리를 듣고서야…!
여우꼬리만큼 남은 겨울이
쌀쌀한 바람을 풀어놓고 동백잎을 흔들면
너에게로 가던 길을 깜박 잊으리라
꽃 속의 꽃보고 싶은 마음이
콩알만한 봉오리 쪼개며 어린 봄을 울리면
여울이 곁에서 불러도 물소리 못 들으리라
갈림길이 달려오고 이정표가 서고
갈꽃처럼 갈증이 도지고
후회가 징을 치리라
지징징징 징소리의 파도 흘리며
꽃 없는 샘터에 굿판이 벌어졌으리라
너에게로 가는 물을 한 잔 마시리라
― 「금릉경포대」
미련아, 미련아, 네가 저 징이로다. 해발 560m 이정표가 서 있는 약수터에, 경포대 골짜기가 벌렁거리도록 징을 쳐대는 굿판이 벌어져 있다. 음문처럼 바위가 가리고 있는 곳에 옥수가 졸졸 흘러내린다. 30대 남자 둘과 여자 둘이 징 치는 무당을 따라 절을 하고 치성을 드린다. 그들 뒤에는 한 숫봉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다. 아하, 자손을 비는 사람들이구나. 해가 중천에 오른 일요일, 등산로 샘터를 가로막고 징을 쳐대는 무당의 숨결이 절정을 향해 치달린다. 대명천지에서 운우(雲雨)가 내리기를 비는 모습들 저리도 간절하니 우리가 비켜주자.
너무 일찍 와서 동백꽃도 못 보고, 굿이 안 끝나서 떡도 못 얻어먹고, 비탈길을 조금 더 오르니, 삼존암터. 세죽(細竹)들이 제멋대로 쓰러져 있고, 마른 덩굴이 뒤덮고 있는 돌담 아래 口 모양의 샘이 있고, 그 샘에 잇대어 네 겹의 돌층계를 둘러친 중심에 口 모양의 허드레 샘터가 붙어있다. 口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口 위에 발을 놓고, 口 안의 물에 손 씻고 구름 보던 스님들 다 어디로 가고, 낙엽들만 빠져서 구구한 속진을 씻고 있는고!
널찍널찍하던 등고선이 촘촘해지면서 내 속도는 점점 더 떨어진다. 주능선에 오르니 10시가 넘었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웃고 있지만, 바람은 덧옷을 껴입게 한다. 불티재(火峴,火峙)∼누릿재(黃峙)를 거쳐온 양면석불릉과, 사자봉을 거쳐온 동북릉이 만나는 지점에 솟구친 680m봉이 막아, 칠치폭포 쪽 골짜기들은 보이지 않는다.
통천문으로 태어나니 빙판길이 기다린다. 설설 기며 천황봉(天皇峰·808.7m)에 오르니 우리가 기를 쓰며 달려온 길이 아슴하다. 북쪽을 보면 드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지만, 서남쪽에선 용트림하는 산줄기들이 손짓한다.
누가 이 산을 이름 없는 산맥 위에 서 있게 했을까?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남진하던 백두대간이, 장수와 함양의 경계를 이루는 영취산(1,075.6m)에서 서쪽으로 가지를 치며 금남호남정맥을 흘린다. 장안산∼수분치(水分峙)∼마이산∼부귀산 등을 거쳐온 금남호남정맥이, 완주군 소양면 조탁치(鳥濯峙)에 이르면 입봉(笠峰)∼황조치∼현석산∼왕사봉 쪽으로 북진하는 금남정맥과, 웅치∼갈미봉∼내장산∼무등산∼구봉산∼봉미산을 거쳐 섬진강 줄기를 감싸며 광양의 백운산을 향해 구불거리며 뻗어 가는 호남정맥으로 갈린다. 그 호남정맥이, 장흥과 영암과 화순의 경계가 세 갈래의 머리를 모으는 바람재(分界峙)에 이르렀을 때, 영산강 줄기들을 남쪽에서 감싸 안으며 월출산 쪽으로 서진하는 산줄기를 흘린다. 바람재∼덕룡재∼계천산∼서일봉∼가음치∼불티재∼천황봉∼향로봉∼월각산∼별매산∼흑석산을 거쳐 잠두봉에서 서해로 잠겨드는 70km가 넘는 산줄기. 바로 그 산줄기 위에 월출산은 솟아있다. 이 산을 거쳐서 해남 땅끝으로 가는 산줄기는 분명, 금남호남정맥보다 길고, 금북정맥이나 한남정맥보다 높은 봉우리들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왜 조선시대 산경표에서는 이름을 얻지 못했을까?
이 산줄기를 영산남정맥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가, 영산강 수계(水界)가 백두대간에 머리를 대지 못했다는 데 있다면, 별매산∼잠두봉 사이의 13km의 산줄기를 무시하고, 별매산∼서기산∼첨봉∼두륜산∼달마산을 거쳐 갈두로 이어지는 60km 남짓한 산줄기, 해남반도를 동서로 가르는 이 분수령(고산자의 대동여지전도를 보면, 월출산만 돌출해 있지만, 등고선 마루금을 따라 가보면, 월출산을 거쳐서 갈두로 이어진다)과 연계하여 117km여의 산줄기에는, 우리 고유의 산경(山經) 개념에 따라, 무슨 무슨 간(幹)이라는 이름이라도 주어졌어야 했을 게 아닌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백두산에서 갈두까지, 더 먼 곳부터 말하라면 장백정간이 발을 담그는 두만강 변에서 한반도의 땅끝까지, 물을 건너지 않고 이어지는 분수령이 있으며, 그 끝머리의 일부는 서맥(庶脈) 취급을 받으며 이름조차 못 얻었다는 것이다. 권력의 초점이 왕(王) 한 사람에게로 모아지던 시절의 산물. 모든 산계와 수계를 백두산과 연계하여 생각하던 시절의 산물. 조선시대 산경표에 허점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땅의 끝에서 돌아서면 땅의 시작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마한에서 백제로, 나당연합군 5도독부에서 신라로, 왕씨의 고려에서 이씨의 조선으로, 일제 36년 식민지에서 대한민국으로 해방을 맞은 강진. 고을나의 후예 고후가 구십포(구강포의 옛 이름)에 배를 대고 신라 왕으로부터 탐라(耽羅)라는 이름을 받아서 돌아갔다는 탐진(耽津·강진의 옛이름). 유배의 땅 강진. 다산 정약용이 18년을 귀양 살며, 목민심서·아방강역고·대동수경을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기게 한 강진. 그 다산이 바라보던 구강포를 공장지대로 매립해 버린 강진과, 케이블카를 놓으려는 영암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는 월출산. 지질학적 이론에 근거를 두고, 일제가 고또분지로(小藤文次郞)를 시켜 만들었다는 산맥개념에 따르면, 이 산은 소백산맥의 끝머리에 솟아있다. 해방 50년이 넘도록 우리 교육현장에 여과 없이 방치되어 있는 이 산맥개념은, 우리 고유의 산경개념에 비해 비현실적이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대간(大幹) 찾기와 정맥(正脈) 찾기. 우리 고유의 것이라고 하여 무조건 수용하기보다는 적절한 비판과 보완이 뒤따라야 선대의 수고와 업적이 더욱 빛날 줄로 안다.
이름 없는 산맥 위에서 창조주는 한껏 솜씨를 부렸다. 천황봉에서 구정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만 지나보아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바위는 금새라도 허공을 가르며 건너뛸 도롱뇽 같고, 어느 바위는 천년을 기어온 거북이 같고, 어느 바위는 수줍음을 놓아버린 조개 같고, 어느 바위는 꽥꽥 소리 지르고 있는 어린 돼지 같고, 어느 바위는 액자 속에 비스듬히 끼어 놓은 미식 축구공 같다. 어느 바위는 실바람에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 얹혀있고, 어느 바위는 지진에도 흔들리지 않을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그네 마음은 신기함을 탐내니, 험난함을 잊고서 뱀처럼 몸 굽힌 채 힘든 줄 모르겠네. 길이 막히고 큰 바위 가로막누나!(고려의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시)'
구정봉(九井峰·738m) 머리에 오르니 날아갈듯 바람이 분다. 이 부근 어느 벼랑 위엔가, 한 사람이 흔드나 천 사람이 흔드나 움직임이 같다는 기이한 동석(動石)이 있다는데, 내가 선 곳에선 보이지 않는다. '월출산 서쪽 고갯마루에 희한한 바위덩이 있다네. 내 그냥 지나갔다가는 이 땅 신령에게 큰 꾸지람 듣겠지. 산아래 와서 걸음을 멈추니, 나뭇가지에 날 듯한 신발이로다. (김극기, "動石")'
이제 이 땅 신령은 출입금지 표지판이다. 오솔길에 얼어붙은 잔설을 달래며 용암사지로 내려가서, 국보 144호 마애불의 높고 높은 무릎 위에,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백원짜리 동전을 던져 올리며 킬킬거리는 것으로, 오늘 우리가 소주도 라면도 없는 빈민임을 잊었다.
구정봉으로 다시 올라가서, 향로봉을 돌아, 숨바꼭질하는 암릉길을 비틀비틀 돌아, 갈대도 말라 허리 꺾은 미왕재에서 발봉(鉢峰)을 끼고, 홍계골로 쏟아져 내려가면 도갑사를 보겠지만, 돌거북을 타고 가는 도선국사수미비와, 이끼 앉은 수미선사비와, 용수폭포 옆 언덕에 새 집 짓고 집들이도 하기 전인 석조여래좌상까지 보고,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있는 해탈문으로 나서겠지만, 오늘은 물길을 따라 저수지 쪽으로 내려간다. (『월간 산』'97년 3월호)
[월출산], 누가 이 산을 이름 없는 산맥 위에 서 있게 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