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26(금) 09:33 (MSIE6.0) 218.155.236.149 1024x768
[오서산], 서해의 등대산 물결치는 억새 너머로  

오서산 산행 에세이
-----------------
 

서해의 등대산 물결치는 억새 너머로



                                                                           이 향 지

   간밤에 눈이 왔다. 첫눈이 왔다. 오서산 가슴팍이 희끄므레 하다. 까마귄가? 한 무리 새들이 해를 안고 솟구치더니 가까운 하늘을 한 바퀴 돌고 산그늘 속으로 돌아간다. 추수가 끝난 논바닥엔 볏짚들이 깔렸고, 한 해의 꽃과 열매를 다 날려 보낸 억새들이 수로에 모여 서서 빈 머리로 바람을 흔들고 있다.
  광천 읍내를 벗어난 길은 논두렁과 밭두렁까지 버리고 오서산 기슭으로 치오른다. 소나무와 잡목 뒤섞인 그늘길을 한동안 치오르다, 산모롱이 감아 오르는 길에서 돌아보는 마을은 평화롭다. 무더기무더기 햇솜을 던져 놓은 듯 뭉게구름 뜬 하늘이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르다.
  저 눈부신 하늘이 발목에 감길 때까지 우리는 걸어가리. 저 구름 빠르게 흘러가는 곳으로 왁자지껄한 지상의 시름들 실어 보내리.
 우리 차는 광천(廣川)에 두었다. 오서산(烏棲山·709.7m) 발치에는 너무 많은 길들이 얽혀 있어서 첫길에 헤매지 않으려면 광천 읍에서 택시를 타는 것이 낫다. 정암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독경소리 드높다. 자녀들의 수능 시험을 앞둔 불자들이 무릎이 닳도록 절을 드리는 모양이다.       백제 무왕 때 무렴국사가 창건했다는 정암사는 강원도 함백산 그늘의 '淨巖寺'와 똑 같은 한자를 쓰고,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절을 앉힌 모습도 비슷하다. 둥치 큰 느티나무들이 천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고찰을 에워싸고 동안거에 들어있다. 느티나무 가지에 맺혔던 눈이 정오 무렵의 햇살에 녹아  떨어지는 소리가 귀에 정겹다. 얼마 만인가 이 서늘한 자연의 소리. 음미할 겨를도 주지 않고 스피커를 타고 우렁거리는 독경소리가 묻어버린다.
 절집은 아슬한 축대 위에 돌아앉아 있어서 일주문을 겸한 종루 아래를 지나가야 하는데, 흰 개 한 마리가 종루를 차지하고 난간 사이로 내려다본다. 내려다 볼 뿐 짖지 않는 것을 보면 저 개도 이 절의 객인 모양이다. 종(鐘)의 배꼽을 맨머리로 들이받아 개로 태어난 억울함을 시방세계에 호소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개는 꼼짝 않고 내려다만 본다. 주인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저 개는 저렇게 앉아 기다릴 것이다. 개 한 마리가 차지한 종루 그늘을 피해 추녀 밖으로 돌아간다. 종루 기왓골에서 눈 녹은 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극락전 문은 닫혀있어서 치성 드리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심검당 뜰에서 올려다보는 '처녀바위'가 아슬하다.
  종루 기둥 밖을 다시 돌아 정암사 서쪽 능선길로 오른다. 수령이 30년쯤 되어 보이는 검은 소나무 숲길을 10여분 오른 다음, 굴참나무가 주종을 이룬 활엽수림 사이로 삐뚤빼뚤 치오르는 길이 제법 미끄럽다. 2cm 정도 내린 눈이 반은 녹고 반은 남아 신발창이 닳은 등산화가 시작부터 절절 맨다. 남쪽 산이라고 허술하게 차리고 나선 벌을 톡톡히 받는다.
  발아래 길에만 눈을 붙이고 한동안 오르다 보니 오른쪽이 휑하다. 한 무더기 너럭바위가 오솔길 옆 단애 위에 걸쳐져 있다. 서북쪽 전망이 좋다. 전망대 바위라 불러 본다. 일락산∼석문봉∼가야산∼수덕산으로 이어져오는 산줄기와 홍성 시가지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천수만 쪽에서 불어 올리는 바람과 정오의 태양이 합작하여, 머리 위 하늘을 뛰어들고 싶도록 푸르게 닦아 놓았다. 숨 한 번 들이쉴 때마다 내 가슴 안 깊은 곳 허파꽈리들이 일제히 문을 열고 거칠 것 없는 허공을 가로지르던 바람을 빨아들인다. 깊은 숨 한 번씩 내쉴 때마다 내 안에 갇혔던 바람이 더운 김을 토하며 대기 속으로 흩어진다.
  서해 바다와 천수만(淺水灣) 뻘밭이 내려다보이는 능선에 오르니 낮12시 20분이다. 삼거리 쪽 암릉에서 야호!를 외치던 사람들이 줄줄이 내려온다. 20명도 넘을 것 같다. 옆과 옆이 툭 트인 암릉을 지나, 거대한 초가지붕처럼 보이는 주릉으로 향한다. 황금빛 억새들이 뒤덮고 있어서 억새지붕 같다. 억새지붕 골골이 흰눈이 쌓여있어서 걸으면서 보면 산머리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 같다. 점점이 떠있는 섬들을 거느린 바다는 이제 등 뒤에 있다. 되돌아서서 계속 내려가면 던목고개. 던목고개 옆산은 아차산(424.4m)이다.
  잎새 푸른 소나무와 회빛 바위가 어울려서 아기자기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암릉길. 오를수록 시야가 넓어지고 더 많은 바람이 분다. 한 무더기 바위를 돌아서거나 넘어설 때마다 촬영 포인트를 만난다. 전망대 구실을 하는 바위들도 햇살이 닿지 않은 쪽은 눈이 덮여있고, 다복솔 가지마다 동글동글한 눈송이들이 맺혀있어서 소나무가 두 번째의 꽃을 피운 것 같다. 볕 좋고 우묵한 곳에는 어김없이 억새들이 차지하고 있다. 절정은 지났지만 얼마쯤은 남아 있어서, 억새꽃 뒤쪽에 해를 두고 보면 반짝이는 솜털들이 광섬유를 보는 것 같다.
 저 반짝이는 솜털 하나 하나가 저 억새꽃의 날개들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전신을 흔들어 나머지 꽃을 털어 보내고 있는 억새들에게서 농투산이 어머니들의 모습을 본다. 나는 비록 이 바람 찬 산머리에 서 있지만 내 일생의 꽃인 너희들은 이곳보다 나은 흙에서 뿌리 내리기를 빈다. 저 억새의 몸짓을 사람의 언어로 풀이해보면 이런 뜻이 아닐까.  
  주능선 삼거리에 오르니 오후 1시. 정암사 출발한지 1시간 30분에 1.5km쯤 왔다. 경치보고 사진 찍고 하느라 어지간히 늦었다. 왼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광천읍 담산리 하담이다. 우리는 우회전한다. 오른쪽엔 바다 왼쪽엔 들판을 두고 이어지는 능선은 2km쯤 된다. 이 능선 끝까지 갔다가 내원사를 거쳐서 광제로 내려가면 도합 8km쯤 걸을 것이다.

  중계탑을 지나서 헬기장을 지나서 패러글라이딩 활공장까지 왔다. 광성리 쪽에서부터 산기슭을 파며 올라온 자동차길이 주릉까지 이어져 있다. 오서산이 불쌍하다. 초가지붕의 용마루같이 좁은 능선에 제법 긴 자동차 길이 이어져 있다.
 지도를 보면서 위치를 확인하던 김대장이 "우리가 오서산으로 온 게 아니라 조루산으로 왔네"한다. 맙소사! 나도 못 봤네. 금북정맥 찾아다니느라 이 지도가 이 모양으로 구겨지도록 들고 다닌 나도 못 봤네! 국립지리원 2만 5천 분의 1 지형도에'烏棲山(오서산)'이 아닌 '鳥樓山(조루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5만 분의1 지형도에는 '鳥棲山(조서산)'으로 역시 오기 돼 있다(산 이름 옆의 한글은 편의상 필자가 덧붙인 것임). 그 동안 수정을 했겠지 돌아와서 최신판 지도를 구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웃다가 생각하니 웃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천재 시인 이상의 시 '烏瞰圖(오감도)'가 '조감도'로 잘못 쓰이거나 읽히는 경우처럼, '새 조(鳥)'에서 가로 획 하나가 빠진 '까마귀 오(烏)'는 쓰는 이들도 읽는 이들도 흔히 지나치기 쉽다. 우리나라 지명이나 산 이름에는 '오'자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고, 오서산처럼 두드러진 산이 아닐 땐 그 진위를 알 수 없으므로 지도를 만드는 이들과 해당 지역민들의 세심한 점검과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 덧붙여 오서산 동북쪽 들판 건너에 있는 금북정맥 상의 구봉산(九峰山·480m)도 '五峰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수정을 바란다.  
  나는 1993년부터 <산경표> 산줄기 답사를 계속하고 있다. 요즘은  오서산을 최고봉으로 삼은 금북정맥을 답사 중이다. 내가 답사하고 의문을 품고 검토한 바에 따르면 오서산은 금북정맥에 속하지 않는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즉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한남금북정맥이 안성 칠장산에 이르면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나뉘는데, 칠장산∼칠현산∼성거산∼차령고개∼봉수산 등을 거친 금강 북쪽 산줄기는 청양의 백월산(白月山·570m)에서, 금강 줄기를 염두에 두고 장항∼서천 쪽으로 남진해야 한다. 그런데 <산경표>에 나타난 금북정맥은 백월산에서 오서산 쪽으로 거슬러 올라 홍성∼서산∼태안을 거쳐 태안반도의 끝인 안흥진 포구에서 끝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산경표의 금북정맥 상에 표기되어 있는, 백월산 이후의 산줄기에 내린 빗물은,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흘러내리건 서해로 바로 들어가지 금강으로 흘러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청양 사람들이 월산(月山)이라 부르는 백월산 이후의 실제 금북정맥은 백월산∼월치∼성대산∼반고개∼월하산∼지티고개∼부시치고개∼놎점이고개∼봉림산을 거쳐 서천읍 사곡리 오석산(烏石山·127.1m)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호남정맥과 포개져서 흐르던 금남정맥도 운장산과 왕사봉을 지나면서 완주∼익산∼군산 쪽으로 서진해야 하는데, 금산∼논산 쪽으로, 즉 계룡산 쪽으로 끌고 올라간 것 또한, 이 책 '월출산' 편에서 지적한 것처럼 명분에 치중한 조선시대 산경표의 무리수의 일단이라고 본다.

  바람이 분다. 정상이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시골마을의 농로보다 넓은 길을 따라 산불감시 초소가 서 있는 쪽으로 바람을 안고 간다.
  오서산 정상에는 광천산우회에서 세운 조촐한 표석이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준다. 이 표석이 없다면 어느 곳이 정상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서산 주릉은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광천읍 쪽에서 보면 뾰족하던 산이, 오서산 동쪽에 해당되는 청양이나, 서쪽에 해당되는 안면도 쪽에서 보면 거대한 지붕 또는 지게 위에 얹고 다니는 바지게를 엎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정상은 주릉에서 살짝 비켜 앉은 남릉 상에 있다.  

  바람이 분다. 마른 억새들이 우우 우는 야트막한 등성이를 돌아 산불 감시초소까지 왔다. 눈 아래 풍경에서 우수고개, 명대계곡, 꼬챙이저수지(화암제), 백월산, 등을 찾아본다. 모두들 잘 있다. 지난 여름 어느 날 주룩 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저 길을 지나갔었지. 그래 그래 잘 간 길도 못 간 길도 모두 눈 아래 있다.

  바람이 분다.
  대천 해수욕장에서 일광욕하던 바람이, 초겨울 억새머리를 흔들며 분다.
 광천 토굴에서 새우젖 찍어먹던 바람이, 처녀바위를 돌아와서 들썩들썩 분다.
 보령 땅 청라 언덕에서 백합 피우던 바람이, 명대계곡 거슬러 올라 아리랑스리랑 분다.  
 청양 땅 지지바위에서 점심 먹던 바람이, 황금들을 건너와서 상모 돌리며 분다.
 홍성 장날 난전에서 토마토 흥정하던 바람이, 꽃조개고개 국밥 뚝배기를 넘어서 분다.
 우수고개 찾아가던 삿갓버섯 바람이, 삼복 더위 장대비를 뚫고 나와서 분다.
 꼬챙이 저수지에서 빙어 잡던 바람이, 떡밥 담긴 그물통을 빠져나와서 분다.
 안면도 삽시도에서 소라 잡던 해녀바람, 천수만을 건너와서 짧은 휘파람 분다.
 천수만 뻘밭에서 게눈 감기던 바람이, 다복솔 이파리 사이 눈송이 동글리며 분다.
 수염 하얀 고래 떼 파도는 아득한 바다에 머물고, 억새발등을 덮은 눈은 바람 속에서 녹는다.

 오는 새 가는 새 깃들어 사는 새 오냐 오냐 떠안고, 한쪽이 밝으면 한쪽이 어두워야하는 서해의 등대산이여!
 소나무 참나무 대신 억새나 잔뜩 키워야했던 바람 센 산머리여!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노끈처럼 남기고 가는 길 차마 떨칠 수 없어서, 신음소리 안으로만 삭이는 지붕 같은 산이여!
 나 또한 발밑에 달고 온 길 지울 수가 없어서, 그대 어깨 그대 머리에 가는 길 한 가닥 남기고 간다.

―「오서산에서」

 되돌아서서 정상을 한 번 더 밟고 바람을 가려주는 우묵이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는다. 도시락을 먹고 나면 내원사를 거쳐서 용문암을 거쳐서 광제로 내려가서 택시를 부를 것이다. 하산 길은 산그늘 속에서, 낙엽 위에 서설을 잔뜩 깔아놓고 어서 내려오라는 듯 바람을 올려 보낸다. 그러나 우리는 한 시간 가까이 일어설 생각이 없다. 빛나는 태양 아래 빛나는 바다. 물결치는 억새 너머로 오후의 바다를 본다.

새벽부터 따라온 길이
억새 물결 앞에서 우뚝 서버렸다

빛나는 태양 아래 빛나는 바다

크고 작은 섬들은 그림자를 포개며
긴 날개를 펼치고

가슴 쪽이 밝은 우리는 섬을 만나려고
산에서 뛰어 내려갔다

천수만을 건너서 하룻밤을 자고나자
피안이 서로 바뀌었다

― <오서산>

******************************************
* 『산아, 산아』에서

                    수정/삭제     다음글                  

 
처음 이전 다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