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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새벽잠을 떨치고 백운대로 오르는 사람들  


<북한산 / 인수봉>
*그림 / 서시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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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세이>

새벽잠을 떨치고 백운대로 오르는 사람들



                                                                                 이  향  지
 
신선한 새벽 공기와 정적에 잠긴 골목, 추운 날일수록 영롱해지는 별빛을 기대하면서―. 등산화 끈을 조이고 배낭을 메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밖에서 기다리는 별빛이 아니라 빗방울이다. 1998년 새해 첫날의 일출을 북한산 정상에서 보리라던 기대를 소리 없이 무너뜨리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산이 가까워지자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새해 첫날이지만 비와 눈이 뒤섞여 내리는 새벽에 누가 산으로 갈까 싶었는데, 고향산천 앞에 도착하니 자동차들이 얽힐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왔다. 혹은 혼자,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서로 격려를 하거나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며 눈 덮인 비탈길을 활기차게 걸어 오른다.
나는 한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북한산을 오르내리며 '북한산은 내 산'이라고 생각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 보니 어림없는 옛말이 되고 말았음을 알겠다. 북한산은 이제 누구의 산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눈덮인 아스팔트길을 30분쯤 오르니 묵은 어둠을 쫓아내는 목탁소리 들린다. 도선사 주차장 중앙의 돌부처 앞에는 한 무더기 촛불들이 타고 있다. 어두운 하늘에서 내려온 눈송이들이 부나비의 날개처럼 지직지직 탄다. 그때마다 촛불들이 풀썩 풀썩 주저앉았다 일어선다. 흩날리는 눈발에도 꺼지지 않는 촛불 앞에서 무엇을 비는 것일까? 한 남자가 두 손을 모으고 나무처럼 서 있다. 주차장 주변의 가게들도 새벽부터 문을 열었고, 가게 앞에는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알전구 불빛처럼 웅성거리고 있다. 우리 앞의 산은 그 모든 것들의 뒤에 조용히 앉아, 어둡고 미끄러운 오솔길 한 가닥을 열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가로등 없고 우산 없는 산길을 가리라.
    산에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
    가지마다 눈을 얹고 침묵에 잠긴 나무들.  
    혹은 혼자, 혹은 가족, 친구와 함께
    서로의 우산이 되고, 작은 빛을 나누며
    돌들도 밟히면 돌아눕는 산길을 걸어 오르리라.
    새들도 둥지를 떠나려 않는 새벽에
    지붕 아래 안식을 떨치고 백운대로 오르는 사람들.
    아무도 내리는 눈을 탓하지 않고,
    볼 수 없게 된 일출을 안타까워 않고,
    산이 있고 걸을 수 있기에 행복을 알게 된 사람들.
    숙명처럼, 사명처럼, 산정을 향해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산길을 걸어 오르리라.

       ― 「새벽 산을 오르며」

도선사 주차장에서 하루재까지 이르는 이 길은 오월의 정오 무렵이 가장 아름다웠다. 연둣빛 햇잎들이 하늘에 뜬 해와 나 사이에 신비로운 반 그늘을 드리워 줄 때, 나는 씌어지지 않은 시들을 얼마나 많이 읽으며 지나갔던가! 시의 이름으로 기록해두지 못한 말들, 한 잎 두 잎 낙엽이 되어 돌 틈에 쌓일 때, 헛되이 보낸 여름처럼 가슴이 아파 올 때, 가을 하늘을 물고 돌아오는 어치 소리는 또 얼마나 쓸쓸한 겨울 산을 예감하게 하던가!
그러나 오늘 이 길에는 그 고요하고 여린 추억들을 뭉갤 만큼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하듯이 앞지르곤 한다. 어둡고 미끄러운 산길을 평지처럼 뛰어오르는 사람들에게선 오월의 솔밭에서나 맡을 수 있는 솔꽃 냄새가 난다. 지나간 오월이여, 아니, 아직 오지 않은 오월이여. 나는 때아닌 솔꽃 향기가 퍼질 때마다 길옆으로 비켜섰다 다시 걷기를 되풀이한다.
날씨가 맑았더라면 먼동이 틀 시간인데도 산은 아직 어둡고, 랜턴 불빛에 사로잡힌 눈발들이 먼저 간 이들의 발자국 위로 내려앉는다. 내가 그것들을 밟고 지나가면 새로운 눈이 내려서 내 발자국을 덮고,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새로운 발자국을 만들면, 새로운 눈이 내려서 그 발자국을 덮고….
눈과 사람이 엎치락뒤치락 만들고 지우는 발자국들의 행렬을 따라, 천천히, 천천히, 하루재 마루턱에 올라서니 오전 7시 10분. 예정된 일출까지는 40여분이 남았다. 눈앞의 세상이 온통 흐릿한 미명 속에서도 구름인지 안개인지 알 수 없는 젖빛 어둠이 골짜기와 능선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알겠다. 인수봉 뿌리를 밟고 숨은벽 쪽으로 돌아가는 길도 짙은 안개 속이겠다. 인수봉의 위용은 더더욱 오리무중이겠다. 답답한 마음들이 웅기중기 모여서 신발 바닥에 아이젠을 붙이고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인수산장 앞을 지나서 구조대 앞을 지나서 미끄러운 계단 길을 올라서 얼음 깔린 계곡 길을 치올라서 백운산장 마당으로 돌아드니 와! 나도 모르게 와! 소리가 나올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산장 안과 마당을 가득히 차지하고 앉아서, 불빛 아래서 무엇인가를 먹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져 있다. 슬픈 식욕이여, 나와 서시환씨도 처마 밑 통나무 위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녹차 한 잔씩을 마셨다.
백운산장에서 위문으로 오르는 비탈길은 대부분 얼음 투성이가 되었는데, 내려오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들이 줄줄이 얽혀서 병목현상을 빚는다. 투덜거리는 사람, 교통 정리를 하는 사람, 손을 잡아주는 사람, 비명을 지르는 사람…. 아무튼 우리가 지나는 동안은 그 조용한 북새통 속에서도 아무도 다치지 않고 비키고 잡아주며 올라가고 내려갔다.
위문에서 백운대 정상까지는 더 아슬아슬하다. 고요하던 바람이 잠을 깨어 불기 시작했고 기온도 뚝 떨어졌다. 좁은 능선과 백운대 사면을 돌아 오르는 강철말뚝과 로프들엔 속속들이 눈과 얼음이 박혀서 말뚝 너머를 잡지 않으면 줄줄 미끄러진다. 무수한 발길이 오르내린 바위의 표면은 빙벽처럼 반들거린다. 게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젖빛 허공이 곳곳에 입을 벌리고 있다. 그런데도 되돌아서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줄줄이 서서 기다리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곡예사들처럼 줄을 잡고 올라간다. 마치 오늘 이 길을 오르지 않으면 새로운 일년이 몽땅 무너질 것 같은 엄숙한 표정들을 하고….
나는 왜? 저 아저씨는 왜? 저 아이는 왜? 바람불고 춥고 눈발 흩날리는 이 아침에 백운대에 매달린 우리 모두는 왜? 어떤 욕망의 사주를 받아 이토록 미끄러운 길에 온몸을 걸고 매달려 있는 것일까?
정상에 올라보면 대답이 있을까? 그러나 정상엔 아무 것도 없다. 위문(衛門)에서 정상(白雲臺·836.5m)까지 무려 한 시간이나 걸려서 밀고 당기며 올라왔지만, 산아래 세상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짙은 구름과 바람을 안고 펄럭이는 태극기. 눈과 얼음이 뒤덮고 있는 바닥. 추락을 방지하는 안전 철책. 내 머리 위가 진짜 정상이라고 주저앉은 바위 한 덩이. 나는 그 바위의 이마에 발자국을 찍는 대신 두 손바닥을 가만히 올려놓고 입술을 잠깐 맞추는 것으로 신성한 의식을 대신했다. 그리고 나는 내 정신과 육체의 갈피에 물결처럼 번지는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쌀쌀한 바람 속에 꼼짝 않고 서서 나와 함께 이 산정에 올랐던 얼굴과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햇빛이 오는 방향에 따라,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에 따라, 눈 아래 골짜기를 메운 나뭇잎들의 빛깔에 따라, 전혀 새로운 표정으로 다가오던 산. 산. 산. 일년에 단 하루라도, 발은 대지의 정수리를 밟고 머리는 거칠 것 없는 하늘 가운데 두어 보라. 화석처럼 굳어져 있던 시간의 껍질을 뚫고 새싹처럼 돋아나던 말 한 마디도 떠올랐다. 그리고 보니 이 산정엔 참 많은 것들이 남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백운대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초심(初心)을 일깨우는 현장으로 우뚝 서서 한 치 밖이 안 보이는 안개 속으로 나를 불렀던 것이다.  
정상은 보이는 것을 잡혀주지는 않지만, 온몸으로 올라본 사람만이 느껴서 간직하고 살아가게 하는 이상한 에너지를 준다. 특히 오늘처럼 어려운 길을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무사히 통과했을 때, 그 경험으로 다른 곳에서의 삶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는다.
미끄러운 암봉을 오르느라 전전긍긍한 탓인지 둘러서서 차를 마시는 사람은 있어도, 뜀바위 쪽으로 건너가는 사람은 없다. 또 다시 앞사람 뒷사람의 손과 발을 빌리며, 위문으로 내려서니 오전 10시가 넘었다.
만경대 서쪽 사면을 끼고 노적봉 쪽으로 돌아가는 길도 빙판이 된 구간이 많아서 백운대 만큼이나 힘이 든다. 이 길은 백운대∼염초봉∼원효봉 기슭과 북한산성 계곡에 단풍이 절정을 이루었을 때, 비스듬한 바위 비탈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앉았다하며 가을을 만끽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용암문∼동장대∼대동문∼보국문을 거쳐서 대성문까지 왔지만 하늘도 땅도 나무도 서울도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대남문을 지나서 문수봉까지 올라본들, 승가봉 비봉 향림봉까지 달려가 본들, 어느 태양이 이 깊고 두터운 안개를 벗겨주겠는가. 대성암을 둘러서 행궁터를 스쳐서 중성문∼대서문으로 나서기로 했다. 새해 첫 날 하루해가 파김치가 되어, 행주산성 쪽에 걸렸을 무렵에야 원효봉과 의상봉의 옆얼굴을 본다.    

    이 땅의 모든 산은 전쟁터였으니, 얼마나 많은 왕이
    이 산을 차지하지 못해 잠을 설치고
    얼마나 많은 군사가 피 흘리며 죽어갔을까?
    아무리 지혜롭고 힘센 왕이라도 이 산보다는 짧았고
    아무리 강한 군사를 가진 나라도 이 산보다는 짧았다.
    마한이,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 고려와 조선이 지나가고
    정수리에 쇠말뚝을 박는 치욕의 세월도 지나갔다.
    가슴이 가슴을 겨냥하는 총부리의 계절도 지나가고
    얼음 얼고 안개 짙은 오늘 아침엔 우리가 지나간다.
    순수비를 남긴 진흥왕도 북한산성을 남긴 숙종대왕도
    구구한 공덕비를 남긴 당대의 관리들도 죽어서 하늘로
    가지 않고 땅에 뼈를 묻었다. 오늘 우리가 지나가고 나면
    새로운 내일이 새로운 사람들을 이 산으로 부르리라.
    그러나 언제나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이 산과 바위와
    나무와 풀뿌리들뿐. 철따라 꽃 피우고 잎을 떨구며
    오는 자를 오게 두고 가는 자를 가게 두는
    이 산뿐이리라. 부아악! 삼각산! 북한산!
    스스로 지어서 제 이름을 말한 적 없는….  

                       ― 「북한산」


                              (『월간 산』'9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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