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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종주기], 비와 땀의 능선으로  

<지리산 종주기>
   

비와 땀의 능선으로


                                                                    이 향 지
  지리산으로 가는 마음!
지리산의 화개재에서 세석평전까지! 나에게는 아직 미답의 구간으로 남아있는 능선을 연결시켜야 한다. 이것이, 쉰 세 살이 되는 여름에 내가 내린 결정이며, 장마 비에도 불구하고 배낭을 둘러메고 집을 나선 이유이다. 그 동안, 몇 차례 지리산을 찾았었지만, 이 끝봉우리 아니면, 저 끝봉우리. 이 골짜기 길 아니면, 저 골짜기 길을 헐레벌떡 남따라 오르내렸을 뿐이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떠날 때는 여럿 중의 하나로 떠나더라도, 걸음만은 나의 속도로 나의 길을 걷다 돌아오기로 하자. 가다가다 힘이 모자라면 며칠을 더, 산에서 묵어오더라도, 지리산의 고샅고샅을 고즈넉이 내려다보면서, 오래 파먹을 수 있는 추억으로 담아오기로 하자. 일상이 자신의 쳇바퀴에서 미련 없이 나를 풀어줄 때쯤이면, 나의 체력도 산을 걷기에는 이미 늦어있을 것이다. 이것이, 뜬금없이 게릴라성 호우를 쏟아 붓는 장마철에, 미루어오던 종주를 계획하고 떠나는 나의 결심이다.
1995년 7월 15일 밤 아홉 시경. 산이라면 두 손을 젖는 식구들의 시큰둥한 작별을 배낭보다 더 무겁게 짊어지고, 집을 나선다. 대문을 등지고 골목길을 벗어나 큰길을 건너고 한강을 건너는 사이, 나는 어느새 품새 큰 지리산의 부름에 만사를 떨치고 나설 수 있는 나의 용기를 도닥거려주고 있는 나 자신을 회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행스러워 한다.
<밤>과 <별>이 기별조차 없이 사라져버린지도 오래인 서울. 수족관 안의 물고기가 다른 수족관 안의 물고기를 보듯 지나 쳐가는 사람들. 달리는 간판들, 서 있는 간판들, 번쩍이는 간판들. 오늘은 나도 흐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간판 없는 세상으로 흘러가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동대문 주차장에 도착해보니, 20여대의 버스들이 중간에 통로를 마련해 둔 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앞쪽 유리창에 써 붙인 산 이름들은 달라도, <山>이라는 공통분모를 목적지로 두었기 때문일까? 이 주차장에서 스쳐가는 사람과 사람들에게서는, 비슷한 흥분과 비슷한 체취가 느껴진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사실, 그것도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어쩌면 우리 모두가 멀지 않은 과거 속에서 아득히 잊어버리고 살던 자연 속으로 회귀한다는 사실이, 구구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공감과 친밀감이라는 다리를 놓아주고 있는 것이이라.
내가 예약해 둔 산악회 버스는 동대문쪽 출구 가까운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다. 버스 안에는 이미 스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에 드는 좌석들을 선점하고 있다. 사람은 없이 배낭들만 지키고 있는 자리들에까지 밀려, 운전사 뒤쪽 두 번째 좌석에 던져진 듯 앉는다. 버스의 앞바퀴 위쪽이라 발 놓을 자리가 돌출 되어 있어서 모두들 피하려드는 자리다. 그래, 그래, 이 자리가 바로 이 세상이 나를 위하여 남겨준 자리야. 이런 생각이 문득 이마를 치고 지나간다. 약속된 22시에서 15분이 지나서야 버스는 출발한다. 서치라이트를 받고 있는 〔興仁之門〕의 전송이 왼쪽 어깨에 실려 있다.

지리산으로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엔 연휴를 맞아 서울을 벗어나는 차량들로 이미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떠나는 순간부터 돌아올 길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나직나직 술렁이기 시작한다. 저분들은 적어도 시를 쓰는 사람들은 아닐 것 같다. 대단히 생산적인 일에 매진하고 있는, 저분들이야말로 정말로 서울이 필요로 하고, 서울에서 살고 있을만한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주체 측으로부터 100,000분의 1 개념도를 받아들고, 등반대장의 설명을 듣는다. 몸에 밴 겸손과, 어눌한 듯한 태도가 오히려 손님을 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의 말씨는 만날 때마다 유려하게 다듬어져가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살고 있는 사람 특유의 어떤 달관 같은 것을 엿보이게 한다. 저런 전문성, 저런 도통함이 이 계통에서의 그의 성공을 이끌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도처에서 스승을 보고, 나의 현재를 돌아보는 버릇이 육화되어버린 나 자신을 잠시 바라보다, 서울의 경계에서 서울과 함께 놓아버린다.
우리가 버스에 앉아 가고 있는 동안에, 내일은 오늘로 바뀌게 될 것이고, 내일(16일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산행은 시작 될 것이다. 대장의 당부는 고생을 각오하라는 것이다. 내일 아침 남원땅 성삼재에서 우리를 내려준 버스는, 모레 점심때까지 산청땅 중산리로 돌아가서 기다린다는 것이다. 젊은 가이드 세 사람이 차례로 소개되고, 대장 자신은 거림에서 세석산장으로 가서, 우리들의 텐트며, 잠자리를 마련하고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내일 걸어야 할 길이 약45km, 모레 걸어야 할 길이 약20km. 회비는 6만원. 세석까지 져다 줄 것을 부탁하며, 하룻밤의 짧은 안식을 기대기 위하여 침낭 하나를 나의 소유에 보태기로 한다. 밤 11시. 산으로 가는 버스는 여전히 느린 길 안에 있다. 완전소등을 베개 삼아 내일을 위하여 잠을 청하기로 한다.

山門으로 들며!!
일어나십시오! 내령을 지났습니다!
드디어, 오늘이군! 드디어, 오늘의 고갯길로 들어섰군 그래!
지리산휴게소에서 설렁탕국물로 속을 달래고, 남은 밥을 포장하여 짐 속에 넣는다(컵라면을 사먹게 되면 말아먹을 생각으로…). 가는 빗줄기가 차창에다 짧은 사선을 그리다, 점점점 매달렸다 흘러내리곤 한다. 배낭에 방수 덮개를 미리 씌우고 옷핀으로 고정시킨다. 배낭 속 짐들은 배낭보다 더 큰 비닐 속에, 조목조목 방수포장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면수건을 접어 머리띠를 단단히 맨다. 내가 무슨 힘으로 그 많은 산자락을 더터 다니는지 아느냐? 머리띠의 힘이다! 머리띠의 힘! 했을 때, 하하 웃어주던 친구 춘자의 얼굴을 잠시 떠올리며  초록색 바탕에 흰 무늬가 얼기설기 그려진 면수건을 접어 머리부터 동여매는 것이다. 시력이 약해져서 안경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부터,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도 집중을 방해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눈 속으로 흘러드는 땀방울도 막을 겸, 길 쪽으로 뻗은 나뭇가지로부터 이마도 보호할 겸. 산으로 들기 전에 머리띠부터 매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반선 매표소 앞에서 버스가 잠시 멈춘다. 다리 건너, 뱀사골로 드는 길목은 무성한 잎새들로 가려져 있다. 작년 이맘때, 새벽 어둠을 뚫고 연곡사에서 피아골로 오르던 날이었다. 삼홍소 부근에서 일행들을 놓치고, "여기 화살표 있다!"고 부르는 웬 남자를 따라서 캄캄한 너덜지대로 들어섰었다. 그날 따라 건전지가 다 됐는지 헤드랜턴 불빛도 희미한데, 그 남자가 나를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따라온다. 갈수록 길 흔적이 희미해지고 너덜을 덮은 이끼가 중심을 흔들고, 거미줄이 얼굴을 휘감곤 하는데, 멀어졌다 가까워졌다하는 이상한 웅성거림. 걸음을 멈추고 들어보면 분명 사람소리 같은데, 야호! 야호! 신호를 해도 아무 대답이 없다. 갈수록 머리끝이 쭈뼛거려서, 아무래도 우리가 잘 못 온 것 같으니 가실려거든 혼자나 가시라고 돌아서는데, 내 앞에 섰는 사람이 조금 전에 보던 그 사람이 아니다. 옆으로 퍼졌다, 위 아래로 퍼졌다, 길어졌다 커졌다 작아졌다하는 얼굴! 소문으로만 듣던 도깨비를 만났다는 생각에, 할머니! 할머니! 천왕할머니!를 부르며, 피아골산장까지 오르막길을 치달렸다. 아, 그날. 놓친 길이란, 얼마나 우습고도 가까운 곳에, 잎새가 무거워 줄기 째 옆으로 드러누운 산죽 몇 그루에 가려져 있었던가? 자신의 걸음에 취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쉽게 같이 온 사람을 잊어버리던가? 그날처럼 밝아오는 아침과 환한 대낮이 고마운 날이 있었던가?
반야봉을 둘러서 뱀사골로 내려오며, 옷 속에도 머리칼 속에도 끈끈하게 들러붙은 것 같은 이물질을 털려고 애쓰던 내 몰골이 생각난다. 그날 저 다리를 건너오자마자, 가장 가까운 가게로 들어가서 막걸리 한 사발을 숨도 안 쉬고 들이켰었지. 그날의 그 가게들도 아직 개문(開門) 전이다. 그날 저 아래 주차장에서 우리들이 타고 온 버스엘 올랐는데, 피아골에서 사라졌던 그 웬 남자, 그 도깨비가 "이제 오세요?"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아아아! 악!

그날 그 떨리는 속을 추스리느라 헛기침하듯 써놓은 시가 있는데, '새벽 피아골에서'란 부제가 붙어있는 「길 잃은 자가 길 잃은 자를 길에 세우고」이다.

        내가, 길 잃은 자의 부름 들었다고 길을 잃었겠느냐?
        물 건널 일을 염려하여 돌팍길로 들었을 뿐이로다

        내가, 갈수록 두터워가는 돌이끼에 중심 잃었겠느냐?
        헤드랜턴 불빛 흐려 헛짚고 흔들릴 뿐이로다

        내가, 거미줄을 펼쳐 들고 기다리는 나무들을 껴안겠느냐?
        물 달리는 소리로 내 선 곳을 가늠하려는 것뿐이로다
       
        내가, 남자같기도여자같기도혼자같기도여럿같기도한그
       길 잃은 자를 두고 인기척에 놀란 고라니처럼 뛰었겠느냐?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기엔 피아골의 어둠이 너무 짙은 탓이로다

        내가, 옷 속에도 머리칼 속에도 들어 있는 것 같은 이물질을 털려고
       반야반야 반야봉으로 올랐겠느냐?
        헤매며 밝힌 지리산을 애터지게 들이킬 뿐이로다

뱀사골은 왜 뱀사골일까? 뱀이 많아서? 는 아니고, 뱀사골에는 간장소 병풍소 탁룡소 요룡소 뱀소 등 깊고 푸른 웅덩이들이 많다. 반선 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뱀소가 있는 골> 즉 <뱀소+골>에서 발음하기 쉬운 <뱀사골>로 부르게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화개천이라 불렀다고도 하는데, 짐작컨대, 화개재 너머의 하동땅 화개천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또 어쩌면 '사잇골'이라는 뜻에서 출발했거나, 지리산의 다른 골짜기에 비해서 작다는 의미에서 '새끼+골'이 '사곡(蛇谷)'으로, '사'가 '뱀'으로 엉뚱한 탈바꿈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들의 먹성과 입성이 변하듯 골짜기 이름도 변하고 산봉우리의 이름도 바뀌어 간다.
몇 년 전 우리는 저 뱀사골에서 여성 시인 고정희를 잃었다. 시집 「지리산의 봄」을 남길 정도로 이 지리산에 빠져 있었던, 또 저 뱀사골을 누구보다도 자주 드나들었던 시인이다. 그녀는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뱀사골에서 쓴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시 「지리산의 봄」에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우르르 우르르/우레소리로 골짜기 넘어가는 그대여/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삼 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철철 샘물이 흐르고/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소리/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 갑니다/구름처럼 바람처럼/승천합니다> 라고 썼다. 그리고 그녀는 큰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 날 뱀사골을 오르다 실족하여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하고 말았다.
그 여름 그녀를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도록 했던 계곡은, 오랜 가뭄 탓인가 수량이 많이 줄었다. 뱀사골 물까지 합류하는 저 계곡은, 바래봉∼세걸산∼고리봉∼만복대∼종석대∼노고단∼삼도봉∼명선봉∼삼각고지∼삼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구불 구불 둘러친 병풍 같은 능선 안쪽 기슭의 북쪽 또는 북서, 북동쪽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려 모인 물이다. 해발 1,733.6m인 반야봉에 내린 빗방울이 그중 높은 곳에서 흘러왔겠지만, 종석대에서 반야봉 사이에 위치한 코재 쪽에 내린 빗물이 제일 긴 여행을 했으리 싶다.
729번 지방도로변 이제는 여느 관광지처럼 북적거리게 된 이 마을 앞을 지나는 물도, 저 위쪽 심원계곡의 안심소, 용소 등을 채우고, 달궁을 거쳐 흘러온 물이다. 저 물은 함양땅 대정 산내교 아래쪽에서, 남원땅 운봉 쪽에서 흘러온 광천(廣川)과 합수하여 만수천(萬壽川)이 될 것이다. 또 함양땅 마천의 주흥교(注興橋) 아래쪽에서 지리산맥의 주능의 형제봉∼덕평봉∼촛대봉∼연하봉∼제석봉∼천왕봉∼중봉∼하봉 등의 북쪽 또는 북서쪽에서 흘러든 물줄기와 합류하여, 임천강(臨川江)이 되었다가, 남강(南江) 줄기를 막아 만든 진양호(晋陽湖)로 흘러들었다가 낙동강을 부풀리며 흐르다, 낙동정맥의 안 자락을 벗어나 부산의 가덕도 부근에서 남해와 손을 잡을 것이다.
아직도 729번 지방도로 안이다. 비탈지고 구불구불한 아스팔트길 오르느라, 버스도 숨이 찬지 부릉 부릉 부르릉 속도를 내지 못 한다. 학천마을, 덕동마을, 달궁마을, 심원마을, 나무들이 그르릉거리는 버스 소리에 선하품을 하듯 깨어나고 있다. 계곡 건너 산비탈에선, 늦게 핀 밤꽃들이 무스를 잔뜩 바른 염색한 떠꺼머리들처럼 드문드문 보이다 멀어져 간다.

성삼재 주차장에 내리니 오전 6시 16분. 언제 도착한 자동차들일까? 주차장은 제법 많은 승용차들로 번쩍거리고 있다. 산은 어느새 짙은 안개 속으로 덩치 큰 몸을 디밀어버리고 보이지 않는다. 는개비가 바람을 빌어 온몸을 휘감았다 놓았다 한다. 그래 그래 나는 이런 날 더 잘 걸을 수 있지 않는가? 두세 사람 지날 정도만 열려있는 자바라 바리케이드. 산문 곁 안내소엔 이른 탓일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자갈 깔린 신작로 군데군데 콘크리트 포장을 해두어서, 산문은 통과하였으나 아직 산은 아니다. 안개가 점점 짙어진다.
어제 비에 말끔해진 산기슭이 안개 저쪽에서 이따금 눈부신 연두를 연출하고 있다. 사흘 전에 내가 꾸었던 개꿈 속의 한 장면과도 같은 연둣빛 숲길이 산모롱이를 휘감았다 놓았다하며 앞서 가고 있다. 피는 중인지 지는 중인지, 몇 그루의 산목련들이 길섶까지 나와선 열매 같은 꽃봉오리들을 아래로 처뜨리고 있다. 걸음에 탄력이 붙을 때 까진 서행하리라.
그런데, 새 배낭이 등에 붙질 않고 어깨에서 따로 놀아 여간 불편하지 않다. 산행중 최대의 적인 무게를 줄이느라 준비도 불충분한, 그러나, 평소보다 훨씬 무거운 배낭이 출발점에서부터 따로 놀고 있으니 걱정이 된다. 장거리 산행에 새 배낭을 매고 나선 사연인즉 이렇다. 땀투성이 흙투성이가 된 배낭 둘을 한꺼번에 세탁기에 넣었다가, 둘다 못 쓰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 배낭이 작아서 장거리 산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다 담지 못 한다. 작은 물병과, 초장에 먹을 간식거리를 두 손에 나누어 들었더니 너무 불편하다. 두 손이나마 짐에서 해방시키자고 배낭 손잡이에다 비끌어 매었더니,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시럭거리며 이쪽 저쪽에서 목덜미를 처댄다. 고만 쳐라! 고만 쳐! 부탁을 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왼 발 오른 발 옮겨놓을 때마다 흔들리는 중심. 이것들을 다 먹어치울 때까지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 뺨 저 뺨 맞아야 할 모양이다.  

노고단 언저리에서 생각나는 사람들!
이런 저런 이유로 출발선에서부터 뒤쳐질 수밖에 없는 과적차량, 무넹기 돌계단 앞에서 배낭 내려놓고 물 한 모금 마신다. 최초의 봉우리인 노고단은 1.7km 남았다. 젊은 사람들이 바람처럼 앞질러 간다. 평지길 30분만에 냉수 먹고 속 차리고 돌계단으로 올라간다. 남 볼 것 없다. 남 볼 것 없어. 너는 남의 속도에는 흔들리지 않기로 하지 않았니? 도닥거려가며 …. 길 쪽으로 기울어진 나뭇잎과 풀잎들이 양쪽에서 바짓가랑이를 훑어대는 소로를 지나, 노고단산장에 도착하니 오전 7시 5분. 2년 5개월만에 다시 만나는 산장 둘레의 산색(山色)이 흰빛에서 갈매빛으로 바뀌어 있다. 어느 쪽을 둘러보나, 싱싱한 여름 나무들과 산꾼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나는 이 산장 사람들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다. 1993년 2월 28일 구례군 토지면 구산리에서 출발하여 왕시루봉∼문바우등∼질등∼임걸령을 거쳐 피아골로 하산하려던 날이었다.
"이런 날에 미쳤다고 저 산엘 가시우?" 토지국교 앞을 지나 첫 번째 개울에 걸린 다리를 지나게 되었을 때, 개울물에 빨래하는 아주머니에게 왕시루봉 가는 길을 물었는데, 내가 물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물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유독 나에게 눈길을 주며 매몰차다 싶을 정도로 되묻는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가 가르쳐 주는 길로 들어설 때는, 이 말짱한 날에 웬 악담 같은 말이냐고 코웃음들을 쳤는데, 왕시루봉 정상과 문바위등을 지나 질등 부근에 오니, 떡가루같은 눈보라가 거센 바람을 타고 몰려오고, 기온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갈수록 앞이 안 보이는 눈보라 속에서 걸어도 걸어도 길은 줄어드는 것 같지 않고 저체온증까지 겹쳐서 나는 더욱 뒤쳐지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 눈에는 지리산 아래 사람답게 몇 시간 뒤에 몰려올 눈보라까지도 미리 보였던 모양이다. 질매재에서부터는 그 사이 쌓인 눈 때문에 길이 더욱 희미해졌다. 평소에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 가물에 콩나듯이 매달린 시그널을 찾아가며 걷는데, 그것들마저 눈에 묻혀버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남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눈덮인 너덜겅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절대 고독이라는 말은 그런 순간에 진면목을 드러내는 단어인가 보았다. 그 고난 속에서 내가 들은 건 "엄마! 엄마!" 부르는 딸의 목소리였다. 그 환청이 힘이 되었던가, 나는 다시 일어서서 산죽 줄기들을 모아서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구산리 띠풀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느진목재에서 연곡사로 빠지거나
    싸리샘에서 물통이라도 채웠어야 했다
    후회와 갈등은 왕시루봉에 남아 백설기를 찌고

    나는 문바우등 햇살에 홀려 벅찬 산길로 올랐다

    질등 질매재 얼얼한 눈보라
    발목잡는 너덜겅 山竹 허리를 붙들고
    누가 불러 돌아보면 바람소리 돌소리
    나는 아직 피가 붉어 무서움에 떨며

    엄마! 엄마! 부르는 딸의 목소리 들었다

    다 저문 저녁에 나는 홀로 도착했다
    허연 눈사람이 되어 다 저문 산장에 도착했다
    내 짐을 내가 지고 눈보라 속을 걸어서
    겨울과 눈보라를 하직했다

              ―「지리산 하룻길」

그 참담한 골짜기를 빠져나오니 리더 김용권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오지 않아서 되돌아오는 길이라 했다. 무엇에라도 홀린 듯 너덜겅 위에서 제 자리 걸음만 걷고 있었던 모양이다. 산에 사로잡혀 빙빙 도는 걸 '환상방황'이라 부르는 모양인데, 나는 분명 길을 찾아 앞으로 앞으로 진행한 기억밖에 없다. 아무래도 노고단 산장으로 가서 쉬는 게 낫겠다고 김용권씨도 권하고 나도 한시 바삐 어디엔가 눕고 싶었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노고단 산장까지가 또 다시 저승처럼 멀게 느껴졌다. 길목마다 멈춰 서서 함박눈을 맞으며 기다려주던 김용권씨도 피아골 쪽을 포기하고 남원으로 내려가야 했다. 20km의 산길을 9시간 30분에 걸었으니 몹시 느린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바쁘고 막막했던 것일까?
건너편 사람이 안 보일 정도로 산이 어두워 졌을 때, 배낭이고 사람이고 허연 눈투성이가 되어 들어서는 나에게, 산장 안으로 밀려드는 눈을 빗자루로 쓸어내고 있던 산장 아저씨의 첫 마디는, "아이고! 이 할머니가 이 눈 속에! 혼자!" 였다. 그때의 그 고마운 분들은 모두 다른 데로 가셨단다. 아무 준비도 없이 찾아든 나에게 자신들의 저녁까지 나누어주어서 먹이고, 따뜻한 방에 재워주었다. 계산을 하려니까 계산할 항목이 아니라고 한사코 손을 젓던 사람들. 나도 돌아와서 책 몇 권과 간식들을 꾸려서 부치긴 했지만, 그 물품들은 가장 절박한 순간에 내가 입은 커다란 고마움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것들이었다. 새로 왔다는 산장직원으로부터, 건강하시라는 덕담을 선물로 받아지고, 노고단 고개에 선다.

노고단(老姑壇·1,507m) 정상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휴식년이다. 덕분에 튼튼한 철책 안에 갇히게 된 나무들이 무성한 가지들을 펼쳐들고 있다.  
"오랫만이요 아지매! 반갑소!"하듯 달려오는 바람. 땀투성이가 된 몸을 식혀주고 가는 바람 속에서 나는 또 한 사람의 얼굴을 본다. 그날 밤 난생 처음으로 산장이란 곳에 누워본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산 아래로 내려간 산우들로부터 안부 전화도 걸려오고! 혼자 다닌다고 큰소리치던 내 산길 무엇이었나 싶어 참담하기도 했다. 감사와 뉘우침으로 새로운 힘을 충전하던 밤. 눈발은 그칠 줄을 몰랐다. 감기가 들었다고 콜록거리는 30대 여자를 안쪽으로 눕혀서 재우고 나는 벽쪽에 누워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누군가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따라 떠날려고 밖을 내다보며 들락거렸다. 그때 그 사람을 만났다.
한 남자가 출입문 안쪽에서 스패츠를 두르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내려가세요?" 내 또래로 보이는 그 남자는 허리를 구부린 채 눈만 들어 "피아골로 갑니다" 했다. 피아골이라면 내가 어제 못 간 길이다. "기일 아세요?" "예?" "저 좀 따라가면 안될까요?" "그러세요." 대답은 선선히 하더니, 배낭을 들고 나오려고 방으로 뛰는데 "장비는 있습니까?" 묻는 소리가 뒤통수로 날아왔다. 내 몰골을 보니 아무래도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나는 "예!"라고만 대답하곤 미리 꾸려두었던 배낭을 들고 나와, 그 사람이 보이는 곳에서 등산화 끈을 고쳐 매고 스패츠부터 둘렀다. 방한모를 눌러쓰고 두툼한 장갑을 끼고, 우모복 입고 스틱까지 들었다. 일차 심사엔 합격인 모양이다. "가입시더" 하며 밖으로 나가더니 우뚝 서 버린다. 눈발은 그때까지도 휘날리고 있었고, 평지에 쌓인 눈도 등산화가 통째로 빠질 정도다. 산장 주변이 그런 정도니 지리산 주능선과 피아골의 형편은 예측불허였던 것이다. 성삼재로 내려갈 사람들도 날씨가 좀 더 좋아지기를 기다리느라 꼼짝도 않고 있었다. 바람은 씽씽 불고 천지가 하얀 세상은 얼음 속처럼 추웠다. 같이 가자고 대답을 했지만, 막상 밖으로 나와보니 '이런 날에 귀찮은 동행을 만들었구나' 후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나는 앞장을 서서 노고단 고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돌계단을 덮고 있었다. 그 희고 부드러운 눈밭에 첫 발자국을 남기는 맛. 돌계단을 따라 오르는 철망 안의 나무들도 무거운 눈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추운 나무들에게 "밤새 안녕?"할 여유도 없었다. 노고단 고개에 올라서니 날려버릴 듯이 찬바람이 불었다. 그 사람은 노고단 고개에서 임걸령쪽으로 내려서서 두어 걸음 떼어보더니, "아주머니!" 불러 놓고는 한참을 말을 않는다. 그 사람은 깡마르고 키가 큰데, 허벅지까지 잠기도록 눈이 깊었다. "아주머니! 조금 더 기다리다가 사람 많이 갈 때 가이소!" 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나?) 구산리 개울에서 빨래하던 아주머니 말처럼, 이런 날 미치지 않고야 누가 이 산엘 오겠는가. 그래서 나는 "거기만 그렇겠지요"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대답을 않는다. "제 염려마시고 가세요" "……"  "겨울산 많이 타 봤으니 귀찮게 안 할게요" "……" "발자국 따라 갈테니 제 걱정마시고 먼저 가세요" 그 사람은 에라 모르겠다 싶은 표정으로 "모리겄십니다. 마아 가보입시더" 했다.  
그래서 나는 성도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사람을 따라, 그 전날 못 내려간 피아골을 향해 지리산 눈 속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거기는 언덕 밑이라 눈이 수렁처럼 모인 곳이었다. 거기 지나니 눈은 걸을만했다. 내가 생각보다 잘 걷는다 싶었던지, 갈수록 얼굴이 조금씩 펴지더니 말문을 텄다. 부산서 왔단다. 정년 퇴직을 하고 나니 '열불이 나서' 매주 지리산으로 온단다. 이제는 지리산엘 안오면 못 살 것같이 빠져버렸단다. 식구들이 말려도 안되니까 이제는 '묵고나 댕기이소' 한단다. "댕기다가 군부라지몬 다리를 사알 흔들어 보능기라요, 다리만 괜찮으몬 집에 가겄구나" 한단다. 산에 오면 그렇게 가고 싶은 집과 집에 있으면 그렇게 가고 싶은 산을 오가며 산다던 남자. 나는 그분 덕분에 지리산 주릉에 수북히 쌓인 백설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그날 아침 발자국 하나 없는 서설에 전신을 던지며 들어섰던 오솔길은 진 구렁이 되어 있다. 이 길 안에 이토록 많은 돌들이 박혀 있었던가? 돌부리에서 눈을 떼면, 잠깐 사이에 미끄러져 흙투성이가 되어버릴 것 같다. 그날, 신비스러울 정도로 은세계를 열어 보이던 나목들은, 칙칙한 잎새들을 가득히 달고, 실낱같은 바람에도 물방울들을 후두둑둑 떨어뜨린다.   그날, 그 백설에 묻혔던 길섶에는 갖가지 풀들이 빽빽하게 돋아 젖은 잎새들을 반짝거리고 있다. 잎새도 꽃도 쓰임새도 같지 않은 풀들이, 길섶의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돋아나 얽혀 있는 것이다. 그래, 오늘 이 산에는 어디에도 빈곳이 없다. 그날, 그 순백의 고요와 경이로운 정적에 사로잡혀 걷던 길을, 헐레벌떡 오가는 사람들에 섞여, 헐레벌떡 엇갈리며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으로 들며!!
눈앞이 훤해진다. 시원한 바람이 달려든다. 이제야말로, 주능선이다. 산청땅 유평리 대원사 쪽에서 써레봉∼중봉을 거쳐, 천왕봉∼촛대봉∼영신봉∼덕평봉∼명선봉∼토끼봉∼삼도봉∼임걸령∼돼지령 등, 지리산 주능을 거쳐온 백두대간으로 들어선 것이다. 이 노고단에서 종석대∼만복대∼운봉땅 여원치(女院峙)를 거쳐, 남덕유∼북덕유∼추풍령∼속리산∼조령∼죽령∼태백산∼두타산∼삽당령∼고루포기산∼대관령∼한계령-설악산∼미시령∼신선봉∼진부령을 거쳐 휴전선 너머 백두산까지, 물을 건너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분수령인 백두대간. 그 끝구간이자, 처음 구간에 해당되는 50여km를 앞에 두었으므로 가슴이 뛴다.  
이 능선 길의 이 쪽도 저 쪽도 아직은 구례 땅이다. 안개가 너무 짙어 산아래 마을은 커녕, 가까운 곳에 있는 등성이들마저 가뭇하지만, 나는 이 길이 반갑고 이 길섶의 나무들이 반갑고, 무엇보다도 시원한 등성이 바람이 고맙고도 반갑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추억이 가장 오래 남는 모양이다. 주능선에 들어 처음 만나는 헬리포트. 오전 7시 48분이다. 왕시루봉 쪽이나, 천왕봉 쪽이나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질매재 쪽으로 통하는 소로가, 이 어디쯤에 있음직한 데, 쥐다래덩굴들이 창궐해 있어서인지 찾을 수가 없다. 돼지평전에는, 몇 동의 텐트가 울긋불긋 펄럭거리고 있다. 오이를 깎아서 나눠먹는 사람들, 떠들고 부르는 사람들, 텐트를 철거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내처 걷는다. 임걸령 삼거리에 도착한 것이 오전 8시 26분. 이태 전, 그 눈보라 속에서도 1시간 20분만에 달려온 길인데, 오늘은 20분쯤 지체되었다. 내가 너무 장거리를 의식하는 것인지, 나의 주력이 그만큼 퇴보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길 머리를 오른 쪽으로 돌려, 소나무와 참나무 가지들의 사열을 받으며 비탈길을 구르듯 내려가면 피아골인데, 구례로 나가서 국밥 한 그릇 사먹고 기차 타고 서울로 가도 되는데, 나는 오늘 그리로는 가지 않는다. 그날 새하얀 능선을 등지고 피아골로 내려가며 쓴 시가 '피아골 눈속에서'란 부제가 붙은 「銀嶺을 등지고」이다.

    은령(銀嶺)의 노래를 불러야지
    치렁 치렁 불러야지
    고도를 낯출수록
    등진 것들이 가까우니

    눈덩이 돌덩이 따라 구르는
    이 비탈이 어떤 곳이냐?
    시장끼 고단끼 허우적거리는
    이 골짝이 어떤 곳이냐?

    어떤 피의 소용돌이가
    섯돌다 빠진 곳이냐?
    어떤 시간이 살을 저미다
    백골로 삭는 곳이냐?

    걸어라 은령의 나무여
    떠들썩함의 바깥 길
    태양과 바람과 눈부심과
    총탄과 비탄의 바깥 길

    그러나, 노래는 불러야지
    치렁 치렁 불러야지
    어제의 돌밭도 내일의 별밭도
    오늘의 발밑으로 불러, 불러야지

지리산은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경남 하동·산청·함양 등, 3개도 5개군에 걸쳐 있는 거대한 산으로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로는 밑둘레만도 800여리. 주능선의 길이만해도 100리를 넘고, 길이 7km가 넘는 계곡만해도 40골이나 된다.  
구례땅 토지면에서 왕시루봉∼문바우등∼질등∼돼지령∼삼도봉∼불무장등∼통꼭봉∼황장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안자락 산비탈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피아골의 고샅을 훑고 가는 연곡천이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능선의 오른쪽(남쪽) 방향에 그 물길이 있을 것이다. 쉬지 않고 낮은 곳으로 몸을 기울여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물길이 돌돌 거리고 있을 것이다. 남해로 가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것이다. 또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의 왼쪽(북서쪽) 비탈에서도 남해로 가는 또 하나의 물줄기가, 구례땅 산동면 좌사리 쪽, 심원계곡∼달궁∼반선을 거쳐 진양호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것이다. 한 산줄기에 내린 빗물이 분수령을 경계로 서로 다른 길을 가다가, 바다라는 큰집에서 해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세대와 우리 아이들의 세대가 알고 있고 가르쳐온, 우리 나라의 산맥이름들. 태백산맥, 광주산맥, 소백산맥 등은, 우리의 선대(先代)가 규정하고 남긴 우리 고유의 산줄기 개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1903년 일제가 자기 나라 학자인 소등문차랑(小藤文次郞)을 시켜 지질학적 구조에 기초를 두고 규정한 이름들이다. 일제가 규정한 산맥개념은 영조 때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1712-1781)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산경표(山經表)에 비해 비합리적이다. 그 이유는 산맥이 물을 건너서 이어지게 되어있는 곳이 많다는 데 있다. 우리 선조들은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수계(水系)에 기초를 둔 산계(山系), 즉, 분수령(分水嶺)을 중심으로, 이 땅의 산줄기들을 합리적으로 가름하여 놓았다.
그 내용은 하나의 대간(大幹·白頭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長白正幹)과 열세개의 정맥(正脈·淸北正脈, 淸南正脈, 海西正脈, 臨津北禮成正脈, 漢北正脈, 漢南正脈, 漢南錦北正脈, 錦北正脈, 錦南正脈, 錦南湖南正脈, 湖南正脈, 洛東正脈, 洛南正脈)과 거기서 뻗어나가는 지맥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6년째 휴전선 이남의 정맥(正脈)들을 답사 중이다. 내 발과 눈으로 현장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우리 고유의 산경개념이 일제가 지질학적 이론에 기대어 규정한 산맥개념에 비해 합리적이다.
백두산을 정점으로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으로 이루어진 한반도의 등뼈에 해당되는 산줄기가 백두대간이다. 휴전선 이남의 진부령에서 이 지리산의 천왕봉까지 현재 답사 가능한 산줄기의 길이는 650여km에 이른다. 지금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백두대간 찾기 열풍이 불고 있다. 그 첫 구간이자 마지막 구간이기도 한 지리산 주능선을 안개에 갇혀 걸으며, 나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해방 반 세기에 이르도록 일제의 의도, 일제의 치적, 그 치욕의 흔적들이 우리 후세의 교육현장에 여과 없이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반야봉 근처에 이를 때까지!
젖은 나무들 젖은 길이 오히려 숨쉬기에는 도움이 된다. 햇볕 쨍쨍한 날이었으면 이만큼도 걸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반야봉이 가까워지면서 길은 다시 오르막으로 바뀌고, 나는 자꾸 엉덩이 붙이고 쉴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게 된다. 새 배낭이 어깨와 허리를 짓눌러 종종 내려놓고 쉬어야 하기 때문에, 산행중 좀처럼 앉아서 쉬지 않는 내 버릇이 자꾸 무너지고 있다. 바위들은 젖어서 앉았다 일어서면 엉덩이가 척척하다. 어차피 땀이 물처럼 몸을 씻기고 있으니 좀 더 젖는다고 아까울 건 없다 싶은데도 10분이 멀다하고 쉬는 내 꼴이 도무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느새 나를 알아보는 일행들이 생겼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던 사람들이다. 벌써 여기까지 오셨네요? 어디서 오셨어요? 어디까지 가세요? 연세는 몇이세요? 혼자 오셨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물음표와 감탄사 사이에서 나는 그저 미소 짓는 사람이어야 한다. 미소짓는 것마저 힘이 드는 이 오름 길에서도, 우정어린 그들의 관심에 계속 미소로 답해주어야 한다?
또 한 차례 눈앞이 훤해진다 싶더니 바람이 훅 달려든다. 아! 드디어 노루목이다! 당귀차 장수가 기다리고 있다. 세발 당귀를 주전자에 넣고 푸욱 끓인 당귀차! 천원입니다! 뜨겁습니다! 종이컵을 건네주는 아저씨는 나만큼은 세상을 살아온 것 같은데, 나보다 훨씬 여유와 품이 넉넉해 보이는 미소로, 검게 탄 얼굴의 주름살을 커버하고 있다. 지어서 짓는 웃음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표정. 그래 그래. 이따금 이 산을 찾는 나와, 이 산자락에서 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사람의 품새가 같을 수는 없으리라. 모처럼 푹 쉬고 삼도봉으로 향한다. 서북쪽으로 2km를 더 올라야하는 반야봉은 오늘은 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안개 속에서도 반야봉은 이미 나를 보았을 것, 나의 발소리를 들었을 것, 나의 숨소리를 들었을 것, 노루목에 앉아 당귀차 후루룩거리는 소리도 들었을 것. 가고 오는데 십리 길, 아니 아니지, 오리 길도 오늘은 아껴야 한다.
반야봉(般若峰·1,733.5m)은 노루목에서 서북쪽으로 2km쯤 더 올라야 있다. 만복대∼다름재 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의 경계이기도 하다. 이태전 이맘때쯤 볕좋은 날에 올라서 둘러보던 산아래 마을들도 오늘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산머리 잔 돌탑들도 오늘은 안개 속에서 고요할 것만 같다.

삼도봉에서도 ‘날라리’는 불어보지 못하고!!  
삼도봉(三道峰·1,550m)을 토박이들은 날라리봉이라 부른다. 전북 남원군 산내면과 전남 구례군의 토지면과 경남 하동군 개면(開面)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라하여 삼도봉이라 부르게 된 모양이다. 민주지산(岷周之山)에도 삼도봉이 있다.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와 경북 금릉의 경계를 이루는 삼도봉. 그야말로, 한반도를 팔도(八道)로 나누었던 그 시절부터, 경상·전라·충청 삼도의 경계를 이루는 삼도봉과는 달리, 이 지리산의 삼도봉은 전라도를 북도와 남도로 갈라 붙이면서부터 부수적으로 생겨난 삼도봉이다. 영동과 무주와 금릉의 경계를 이루는 삼도봉은 지금, 어느 도시의 갈래 많은 길목의 로터리처럼 산머리를 평지로 깎고 닦아서, 삼도화합(三道和合)의 상징탑(화강암으로 조각한 거대한 거북이의 등에, 세 마리의 화강암용을 조각하여 등끼리 기대세우고, 저마다 제 길만을 보느라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리고 있는 그 세 마리 돌 용들의 뒤통수엔 거대한 오석(烏石)여의주가 얹혀, 검고 무거운 애드벌룬처럼 허공을 장식하고 있다)을 거창하게 만들어 세워 두었다. 거기 비하면 비록 이름은 바뀌었을망정, 이 날라리봉은 본래의 모습을 아직 깎이지 않아 다행이구나 싶다. 노루목에서 당귀차 팔던 아저씨 말씀처럼 본래의 이름인 날라리봉으로 불러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느 한 시대, 어느 몇 사람의 주민, 어느 행정가들의 무분별한 공명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을 이용하지는 말아야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저러나, 안개 속에서 앉아보는 이 삼도봉. 불무장등∼통꼭봉 쪽으로 고도를 낮추며 뻗어 가는 전라·경상 경계의 봉우리들도, 촉촉한 안개 속에서 사람이 만들어 준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하나가 되어 있다. 이 널찍한 바위봉우리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용수암쪽 계곡에서 불어 올리는 바람에 날라리!를 실어보던 옛 사람들의 여유는, 돌아가야 하는 시간에 매인 사람들로서는 불가능한 거리에 있다.
그러나, 무얼 좀 먹고 가야지. 습기찬 바위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뜯어먹는 어포와 누룽지 조각이 목이 메이는 참인데, 물 있어요? 물 가진 사람 있어요?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온 분들인데, 라면을 끓이다 물이 모자란다며, 빈 컵을 들고 돌아다닌다. 이 산등성이에서 누가 물을 주겠는가? 그때 마침 작은 물병을 들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이리 오세요! 불러놓고는 아차! 한다. 나보다 열 살은 더 젊어 보이는 남자에게 물 한 컵을 따뤄주고는 나는 안 할 말을 기어이 덧붙이고야 만다. 이 산꼭대기에서 여자가 지고 온 물을 얻어 드시다니!
그래 나는 산으로 와도 산 이기엔 까마득히 멀었다. 화개재로 구르듯 뛰어내려오면서 나는 회개하지만, 토끼봉으로 오르는 길은 더욱 멀고 가파르게 앞을 막고 서 있다.  
화개재에 이른 것이 오전 10시 20분. '나는 이제 힘이 다 빠졌다'고 수첩에 쓴다. 앉거나 서서 쉬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서, 북쪽 비탈로 내려서서, 뱀사골로 내처 뛰어내려가면 반선인데, 아무 차나 얻어 타고 집으로 가면 되는데, 달궁 쯤 가서 놀다가도 괜찮을 텐데, 안개에 가려져 있는 남동쪽 비탈로 내려서서 하동땅 목통 쪽으로 험로를 더터가느라면, 홀로된 긴장감에 정신이 번쩍 들지도 모르는데…. 유혹이 구름처럼 일다 스러진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며!
이제부터 남은 길은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다. 화개재에서 세석까지…. 나는 이 능선 상의 미답의 구간을 연결시키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지친, 설레임탓일까? 화개재에서 토끼봉(1,534m)으로 오르는 데, 무려 1시간 30분을 허비해버렸다. 후딱후딱 걸으면 30분이면 된다는 길을 한 시간이나 더 써버린 것이다. 그러나, 넓디넓은 헬리포트로 변해버린 토끼봉! 어느 쪽을 둘러보나, 사람과 나무들로 무성하다. 남동쪽 나뭇가지에 산악회 시그널이 보인다. 하동땅 칠불사(七佛寺)로 내려가는 길인 것 같은데, 오늘 가지 않을 길은 묻지 않기로 한다.
그전에 노루목에서 당귀차 팔던 젊은이가 토끼봉으로 옮겨와 있다. 그는 나를 못 알아보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가 반갑다. 일회용 컵에 분말 당귀차 한 잔을 받아놓고 보니, 기대하던 맛이 아니다. 두 모금도 마시지 않아서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한다. 어둡고 무겁게 그렁거리던 하늘이 기어코 한 줄금 터트리는 모양이다. 헬리포트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쉬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술렁거리며 바빠지기 시작한다. 나도 재빨리 윈드자켓을 꺼내 입고, 방수모를 쓰고 배낭 위에 펀초까지 뒤집어쓴다. 비에 젖으나 땀으로 젖으나 무겁긴 마찬가지겠지만, 겹겹으로 입고 걷는 것이 지고 걷던 때보다 더 무겁고, 더 귀찮고, 더 걸리적거린다. 소로로 접어들어 한참 오다 생각하니, 거스름돈 사천 원을 받지 않았다. 빗발은 오락가락 변덕을 부린다. 한 시간쯤 더 걸어가니, 총각샘인가 보다. 무리 지어 쉬고 있는 사람들이며 원색의 텐트들이 즐비하다. 물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다. 더구나 여름 아닌가!
지리산을 예찬하는 글들을 읽어보면, 해발 1,400m가 넘는 봉우리만 해도 20여개. 지리산 국립공원의 면적만해도, 총면적이 438.9km2. 주능선의 길이가 100리가 넘는 이 거대한 산은, 능선에서도 물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노고단의 선도샘, 임걸령 샘, 뱀사골 산장샘, 명선봉 아래의 총각샘, 벽소령의 뱀실샘, 덕평봉 아래의 선비샘, 세석평전의 세석샘, 제석봉 아래의 장터목샘, 천왕봉의 천왕샘, 중봉샘, 치밭목샘, 등이 있어서 물 걱정 없이 능선종주에 나설 수 있다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시즌에는 차라리 나처럼 산아래서 부터 짊어지고 오르는 게 나을 듯 하다.

총각샘은 지나치고, 연하천산장에선 줄서고!!
길은 어느새 네 발을 써야하는 바위 길로 이어져 있다. 철책에 매어둔 쇠줄을 잡고 오르며 '속도가 나지 않는다 죽을 지경이다'라고 수첩에 쓴다. 명선봉(明善峰·1,586m) 정상은 오른쪽에 있는 모양이다. 험상궂은 암봉은 우회하여야 마땅하다. 다시 능선에 서니 숨쉴 만 하다. 조금만 더 가면 연하천 산장이 있을 것이다. 비탈길 허위허위 내려가는데, 흙흐름을 방지하려고 깔아두었는지, 검은 그물 같은 pvc깔판이, 물기 어린 신발바닥의 미끄럼을 유도한다. 우정 길섶을 골라 딛는 건 나만이 아닌 것 같다. 이건 왜 깔아뒀나! 흙은 안 미끄러져도 사람은 미끄러지겠네. 어! 어! 어! 어! 모두들 비틀거리며 속도를 줄인다.
와아! 사람 좀 봐! 연하천 산장, 사람들 좀 봐! 이건 나만의 말이 아니다. 저마다의 말이다. 그러면서 나도 그리로 빨려들고 있다. 이 넓은 마당이 이리 좁아라! 저마다 버너와 코펠을 차려놓고 라면을 끓이는 사람들 틈으로 빨려들고 있는 것이다. 샘가엔 물 받는 줄이 7∼8m는 되어 보인다. 나는 남은 물로 세석까지 가기로 하고, 물 받기를 포기한다. 매점에서 식혜 한 캔과 사발면 한 그릇을 3천5백원에 받는다. 라면 사이에 누룽지를 서너 조각 넣고, 앉을 곳을 두리번거리지만, 나는 혼자다. 아, 마침 창아래 벽쪽에 걸쳐놓은 통나무 위가, 나 하나 걸터앉을 만큼은 비어있다. 내 앞마당에 자리를 펴고 밥과 라면을 들던 두 아가씨와 한 총각이, 초대를 한다. 그 사람들의 도움으로, 즐거운 라면을 먹었고, 반찬을 나누었고 간식을 나누었다. 그중 한 아가씨는 코오롱등산학교 출신이라 했고, 또 한 아가씨와 스무 살은 갓 넘은 듯한 젊은이는 남매지간이라 했고, 집은 전주에 있다 했고, 산에서 또 만나자고도 했다. 성별로 하나씩뿐인 간이화장실에도 같이 갔었는데, 화장실로부터 최대한으로 멀찍이에 코를 막고 킥킥거리며 한동안 줄을 서서 같이 기다리기도 했는데, 여자 화장실은 줄이 길어 그 두 아가씨는 비어있는 남자용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는데, 도망치듯 낄낄거리며 배낭 있는 곳까지 같이 가기도 했었는데, 조용한 산길로 되돌아와서야, 휴! 생각하니 통성명을 서로 않은 것! 또 한 사람, 임걸령 부근에서부터 몇 번 스친 젊은이, 빨치산들이 무얼 먹고 이 산 속에서 살았겠냐며, 내가 참나물을 가르쳐준 젊은이. 그의 팀으로부터 얻어 마신 커피 한 잔과 따뜻한 작별. 내 걸음이 느리니 한 시간 뒤쯤 출발하여 세석에서 만나자고 했었는데, 그들 또한 그후론 만나지 못하였다. 그 이름과 사는 곳은 몰라도, 지리산이 있었기에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후미를 보는 가이드에게 나 먼저 간다 인사를 남기고, 연하천 떠난 시간, 13시 55분. 천왕봉은 이제 27km 남았다. 다시, 혼자가 되어 젖은 숲길을 걸으며, 나의 졸시 「도봉산 포대능선」 한 구절을 떠올린다. <내가 향하는 산과/ 나를 향하는 산에는/세상의 뒤안길을 웃으며 가는 사람들이 있다/…>
안개는 여전하다. 어차피 먼 풍경은 물 건너 간 것이다. 한동안의 기분 좋은 휴식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한 듯, 걸음걸음이 가뿐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앞에도 뒤에도 남은 시간과 남은 거리를 묻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둡기 전까지야 세석에 도착하겠지, 설령 어둡도록 닿지 못 하면, 랜턴에 의지하여 걸으면 되겠지.

삼각고지 부근!
밋밋하던 숲길이 다시 꾸불텅거리기 시작한다.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의 경계를 이루며 영원령∼삼정산∼약수암∼만수천 쪽으로, 北으로, 西로, 東으로, 다시 北으로, 고도를 낮추며 뻗어 가는 산줄기가, 이 지리산 주능으로부터 갈라지는, 정수리께인 삼각고지(삼각봉·1,462m)부근이다. 저 갈래능의 서쪽 비알로 흐르는 물과 저 갈래능의 동쪽 비알로 흐르는 물은 임천강의 이름으로 만나 남강을 향하여 흐를 것이다.
이 삼각고지를 정수리 삼은 남쪽 산비알. 그러니까, 구례와 하동의 경계를 이루는 황장산∼통꼭봉∼불무장등∼삼도봉까지 이어지는 능선의 동쪽 비탈과, 삼도봉에서 길 머리를 동으로 꺾어 토끼봉∼명선봉∼삼각고지∼형제봉∼덕평봉∼영신봉∼촛대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주능의 남쪽 비탈과, 영신봉(靈神峰·1,651.9m)에서 남으로 달려 청학동 삼신봉(三神峰·1,284m)까지 이어지는 능선의 서쪽 기슭으로 흘러내린 물은, 목통·범양·빗점·심정·의신·대성리 등, 하동땅 민초들의 목마름을 달래고 화개천으로 흘러들었다, 섬진강이 되어 남해로 간다.
또 삼각고지를 정수리 삼고 영원령∼삼정산 쪽으로 북쪽으로 뻗어 가는 산줄기, 그러니까 남원의 산내면과 함양의 마천면의 경계를 이루는 지능의 동북쪽 산비알로 흘러내리는 물은 광대골을 이루며 하정∼가채 쪽으로 흘러 임천이 되어 진양호 쪽으로 흐른다. 또 이 지능의 서남쪽 산비알로 흘러내린 물은 뱀사골에서 반야봉∼삼도봉∼토끼봉∼명선봉을 분기점으로 흘러내리는 물들과 합류하여 임천강의 상류인 광천이 된다.
 
 달 없는 벽소령에서!!
형제봉(兄弟峰·1,442m)은 길만 보고 걷는 사이에 지난 것 같고, 벽소령은 뒷걸음을 치는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바위들이 울퉁불퉁 내민 나무들의 터널을 벗어나니 광활하다 여겨지는 능선에서 툭 트인 바람이 놀고 있다. 반갑다, 바람아! 여기가 벽소령인가? 네가 벽소령이냐?
복숭아, 참외, 캔에 담긴 음료수들을 파는 사람들에게서, 사이다 한 캔을 샀으나 내 구미가 탄산음료를 받아들이질 못한다. 두 모금째 마시다 두고, 다시 길을 떠난다. 길은 넓고 왼쪽을 올려다보면, 괜찮은 바위들과 괜찮은 나무들이 고산의 품격을 펼쳐 보이고 있다. 지도를 보니 1,426m봉 부근인가 보다. 오른쪽 아래는 까마득한 비탈일텐데, 안개란 고도(高度)가 안겨주는 환희와 공포로부터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들어버리는 마력을 지닌 물건이다. 빗발은 다시 후둑거린다. 두어 차례 펀초를 입었다 벗었다 한다. 한동안 걷다보니, 길 안에 1톤짜리 트럭이 올라와 있다. 참외 둘과 오이 둘을 3천원에 사들고, 또 조금 가니 짚차며, 텐트들이며, 느긋한 사람들이 전을 벌리고 있다. 벽소령 달구경이 일품이라던데, 또 오늘밤, 여기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게 된다는 산정산악회 팀은 나와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러나 오늘 나는 세석까지 도착해 있어야 한다. 벽소령 등진 시간이 16시 30분이다.
벽소령 등지니 오르막길이다. 느릿느릿 오르며, 지리산 10경을 더듬어 본다. 제일이 천왕일출(天王日出)이요, 제이가 반야낙조(般若落照). 제삼이 노고운해(老姑雲海). 제사가 직전단풍(稷田丹楓). 제오는 세석철쭉(細石철쭉). 제육은 벽소명월(壁宵明月). 제칠은 불일폭포(佛日瀑布). 제팔은 연하선경(烟霞仙境). 제구는 칠선계곡(七仙溪谷). 제십경이 섬진청류(蟾津淸流)란다. 필경 이 산자락을 삶의 터전 삼아 섬진강 물을 젖줄 삼아 음풍농월하던 선비들이나,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거사들이 이 산을 베개삼아, 저 하늘과 바람을 이불 삼아, 이 산의 고샅 고샅을 더터 다닌 끝에, 보고 느끼고 음미하며 지은 것들이리라. 그러나, 오늘 이 길 안의 우리 중, 어느 몇 사람이나 이 변화무쌍한 산의 표정 안에서 그것들을 모두 만나 볼 수 있겠는가?

선비샘에서의 헛걸음!
덕평봉(德坪峰·1,521.9m)전후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닌데, 빗줄기가 끈질기게 주룩주룩 매달린다. 이 빗방울들중 태반은 북쪽 산비알을 타고 흘러, 한신계곡으로, 백무동계곡으로, 때로는 소리치며 뛰어내리는 폭포가 되었다가, 때로는 잔잔한 소(沼)를 이루었다가, 때로는 목마른 산꾼의 몸안으로 흘러들었다가, 때로는 발 부르튼 산꾼의 땀에 절은 나신을 씻겨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물도 비탈을 만나면 멈출 수 없는 걸음을 자신의 의지대로 서 있거나, 흘러내린 길을 치오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만이, 오직 인간만이, 인간 중의 하나인 나만이, 순응하는 자연의 태도를 역행하여, 내 삶을 뒤늦게나마 내 의지대로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살갗을 타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도 생각의 뼈대를 허물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미끄럽게 오르내려야 하는 빗길은 여름 사람을 더욱 지치게 한다. 이제는 별로 말을 붙이는 사람들도 없다. 가진 물도 부족하니, 벽소령에서 산 참외나 깎아 먹고 갈까? 빗속에 혼자 앉아 깎아먹는 참외가 궁상맞기 짝이 없다. 그런데, 빗방울쏘스 끼얹어가며 먹는 참외가 진짜 꿀맛이다. "꼴은 이래도 맛은 좋아예!"하던 벽소령 트럭 옆의 그 젊은 여자가 생각히어서 혼자 웃는다. 끙끙거리며 올라오던 남자가 멋모르고 따라 웃는다. 먹었으니 걸어야지, 길은 오직 한 갈래!
또 한차례, 숨이 턱에 닿을 무렵에야 눈앞이 훤해진다. 비도, 오다 오다 다리 아파 잠시 쉬는 모양이다. 덕평봉 정상은 왼쪽에, 안개 속에 숨었다. 산기슭에 터를 고르고, 젖은 흙 위에 풀을 뜯어다 깔고 텐트를 치려는 사람들. 하룻밤의 잠자리를 만들기 위하여, 애를 쓰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조금 더 내려가니 선비샘. 이곳 또한 아예 원색의 텐트촌이 되어 있다. 시계를 보니 17시 15분. 표지판을 찾다가 텐트들 사이로 길이 있어 내려가니, 이상하게도 길이 희미해진다. 텐트 밖에 태극기까지 세워놓은 사람이, 수저를 든 채 "어디로 가시오?"묻는다. "세석은 되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가시오. 그러길레 이리로 오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꼭 물어봅니다" 내려간 길 다시 오르기 누군들 좋으랴만, 또 두어 차례, 물어본 끝에야, 다시 산길로 든다.

바우야! 바우야!!
바우야! 바우야! 바우야! 어디서부터였더라? 아무튼, 오래 전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오던 사람들인데, 그중 가장 연장인 듯한 남자가, 자기 걸음 빠른 생각은 않고, 못 따라오는 일행들을 부르느라, 아무데서나, 아무 옆에서나, 바우야! 바우야! 고함을 질러대는…. 아무튼, 그 사람들과 또 같이 가게 되었다. 그 남녀노소 뒤섞인 일행 중에 여덟살 열살된 형제가 날다람쥐같이 산을 잘 탄다. 저 아이들 귀여워서라도, 나는 그저 묵묵히 귀막지 않고 바우야! 바우야! 저들과 함께 걸어주리라.
칠선봉(七仙峰·1,756m). 세석 3km전. 왼쪽 팔목을 놓을 줄 모르는 시계바늘은 18시 43분을 지나고 있다. 정붙지 않는 새 배낭은 완전히 내 어깨를 지배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평지를 만나면 나는 두 손으로 배낭 끈을 들어올리고 걷는다. 울퉁불퉁하지 않은 오르막길에서는 배낭 밑동을 받쳐들고도 걷는다. 비와 배낭과 바닥이 닳은 등산화가 합동으로 연출하는 삼중고(三重苦)! 다소간에 즉흥적으로 종주의 시기를 택한 나의 잘못에 대한 벌을 단단히 받는 셈이다. 숲길이 뚝 끊기고 철책을 박아둔 너덜지대가 기다리고 있다. 바우야! 바우야! 진짜 바윗길이 쇠동아줄을 삐뚤 빼뚤 걸쳐놓고 기다리고 있다. 올려다보니, 까마득하다. 영신봉(靈神峰·1,651.9m)뒤쪽인지 칠선봉 옆쪽인지 분간이 서지 않는다. 마음은 급하고 걸음 서툰 산꾼들이 언제 실수로 머리 위에서 돌을 굴릴지 모른다. 쏟아질듯 내려서는 젊은이들도 아슬아슬 맞닥뜨린다. 속도를 늦추며 능선으로 올라서니, 놀라워라! 어느 사이에 비가 개이고, 낮은 구름 몰려가는 사이사이로 갈맷빛 산등성이들이 돋아나고 있다. 바람이 휙휙 구름을 밀어붙이고, 새털구름 몇 자락을 하늘에 흩어놓고, 고운 분홍으로 물들이고 있다.

영신봉 落照!
서쪽! 아직 덜 걷힌 구름사이로 지는 해가 언듯언듯 펼쳐 보이는 장관은, 황혼의 의미를 뼛속 깊이 절감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도 숨막힐 듯한 찬탄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다. 나는 더더욱 말을 잃었다.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 몇 장 찍는다. 모두들 사진을 찍는다. 여기 선 사람들은 이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오랜 비 끝에 돋아나는, 하늘 본래의 빛깔을 보고, 오랜 고난 끝에 이 산과 이 하늘이 내리는 상을 함께 받아드는 동지들 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구름이 가뭇해질 무렵에야, 다시 걸음을 옮긴다. 낙조를 바라느라 반시간 이상을 이 산머리에 발을 붙이고 있은 셈이다. 이제, 깜깜해지면 어떠리. 비 그쳤으니 별 돋아날 테고, 비박한들 어떠리!
영신봉 정상은 왼쪽이다. 촛대봉은 실루엣처럼 평전을 사이에 두고 우뚝 마주선다. 세석평전은 만개한 철쭉 철보다 더 울긋불긋한 텐트들의 집성 촌이 되어 버렸다. 산장으로 들어서니 오후 8시 10분이다. 성삼재 떠난 지 14시간 만이다. 박성환씨가 알아보고 달려와서 반긴다. 이제 오늘 길은 다 걸었다. 하루에 백리가 넘는 길을 걸어낸 것이다. 화개재에서 세석고원까지 미답의 구간을 연결시키려던 나의 계획은 현실로 이어진 것이다. 고맙습니다. 천왕할머니!

3년 전에 내려오던 길, 다시 오르며!!
새벽 네 시에 잠이 깨었다. 17일이다. 산장 신축공사를 위한 일꾼들의 거처이다. 아는 이의 주선으로 몇 사람의 산꾼들과 함께, 비좁지만 넉넉하고 따순 잠을 잤다. 빗길을 열 네 시간이나 걸어온 고단이 가장 포근한 이불이었다. 수도가 있는 곳을 찾아서 비어있는 물통을 채우고 천왕봉을 향해 출발한 시간 오전 4시 30분이다. 부부팀 네 사람과 랜턴을 켜들고 같이 나섰으나, 길까지 뒤덮어버린 텐트 사이로 누비며 촛대봉 오르는 길을 찾느라, 하마터면 한신계곡 쪽으로 내처 갈 뻔하였다. 서두르는 사람들과 헤어져 나는 다시 혼자가 되기로 한다. 방향을 고쳐 잡고 느릿느릿 오르니 어둠이 가시기 시작한다. 촛대봉 안부. 3년만 이다. 컴컴한 새벽 공기를 랜턴 불빛으로 가르며 세석고원을 헤매느라 1시간이나 걸려서 올라왔다. 촛대봉 정상 바위 무더기가 밝아오는 여명 속에 우뚝하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것인지 길은 넓어지고 고개는 흙이 깎여서 낮아졌다. 풀들은 좀더 뒤쪽으로 밀려나서 엉성하게 나풀거린다.
3년 전 그날은 비가 오다 말다 하던 날이었다. 나는 저 바위 위에 올라가서 젖은 비옷을 벗고 청학동 쪽을 굽어보며 신선처럼 앉아서 쉬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 비맞은 옷까지 무겁게 짊어지고 천왕봉을 보겠다고 걸어가고 있는 오늘은, 20m 아니  10m라도 불필요한 걸음을 아끼고 싶다. 촛대봉 정상은 아니더라도 이 안부에서도 일출은 충분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람 속에 앉아서 해가 뜨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잣 한 줌 입에 넣고 씹고 있으려니, 청승맞은 생각이 든다. 어제 낮 연하천 산장에서 컵라면 하나 먹은 것뿐. 엊저녁도 오늘 아침도 먹지 못했다. 버너와 코펠을 무게 때문에 가지고 오지 않은 때문이다. 하루 이틀 행동식으로 지내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다. 공복이 주는 맑음이란 배고픔을 커버하고도 남을 만 한 것이지만, 남은 길을 걷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먹어두어야 하는 것이다. 천왕봉 쪽 포기하고 거림 쪽으로 하산을 하려 했더라면 늦으막이 일어나서, 아무 팀에나 곁다리로 끼어 아침도 얻어먹고 세시간 남짓 편한 길 뛰어내려가면 밥집도 있고, 술집도 있었을 테지. 3년 전이던가. 세석에서 거림 쪽으로 내려가던 날, 길가의 웅덩이에 징글징글 부풀어있던 개구리알, 두꺼비 알들. 그놈들도, 이제쯤 증손자 고손자 불러 앉혀놓고, 개굴개굴 옛날 이야기 들려주고 있는지. 겨울잠 자다가 인간들 보신용으로 잡혀 황천객이 되었는지 궁금하군 궁금해. 누룽지 한 조각 뜯어 넣고,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 볼 참인데….

촛대봉 日出!
저기 봐라! 저기 봐라! 나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해가, 해가, 해가, 뜬다. 천왕봉 실루엣을 오른 쪽에 두고, 산청 땅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나직한 산자락을 지평선 삼아, 오늘의 해가 떠오르고 있다. 거무스레한 구름바다를 잘 벼린 무엇인가로 세로 금을 긋듯이, 또 그 선(線) 순간에 붉게 열리면서, 한쪽뿐인 눈썹처럼 내다보다가, 엎어놓은 그믐달같이 내다보다가, 엎어놓은 반달같이 내다보다가, 턱주가리 없는 맨 얼굴같이 쑤욱 내밀었다가,  아! 드디어 완전하게 무르익은 보름달 덩어리 같다가, 아! 아! 드디어 내 숨통을 막으며 선혈을 뚝뚝 떨구며, 내 뱃속까지 환하게 불을 밝히며 나를 삼키는 해! 가뭇하던 구름들 순식간에 열고 나와 눈 감겨놓고, 흔적도 없이 태워서 먹어버린, 둥근 잉걸불 하나! 나는 어느새 두 손을 모으고 있다. 나는 어느새, 제 빛으로 세상을 덮기 시작한, 떠오르는 태양의 맹신도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저 해는 나의 바람(望) 속 기다림에 답해주기 위하여, 멀고 어둡던 저 구름바다 속 누군가가 밀어 올린 것이리. 마악 허공을 지배하기 시작한 해는 아직도 수직의 상승을 계속하고 있다. 풀잎 스치는 소리 같은 자연의 선율이, 지금 나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다. 이윽고, 오늘의 허공이 마련해둔 옥좌에 안착한 것일까? 해는 눈부신 금실 같은 빛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한다. 나도 잠깐 사이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나는 어느새 해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내가 기다린 해의 실체를 바로 보아야 한다. 두 눈의 조리개를 줄였다 늘였다 조절하면서, 저 해의 눈부심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해 본다. 아! 그렇다! 어느 사이엔가, 해의 존재는 가득 찬 밝음이 아니라 텅 빈 밝음이라는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저 해는 꽉 막힌 붉고 뜨거운 존재가 아니라, 한군데도 일그러짐이 없는 둥근 원(圓)으로 둘레를 삼은, 신선하고 환한 빛들이 쏟아져 나오는 텅 빈 길인 것이다. 저 둥근 원(圓)안의 빈 길을 빠져 나온 빛은, 나에게로 달려오는 속도만큼의 빠르기로, 나를 그 빈 길, 그 텅 빈 구멍 쪽으로 이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꼼짝 않고 앉아있는 동안에도 해는 상승을 계속한다. 산자락 가득하게 햇살이 퍼지고,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 이미 떠오른 해를 향하여, 해 봐라! 해 봐라! 떠드는 사이에, 해는 그 동안 보여주던 투명한 길을 닫아버리고, 멍한 밝음으로 허공 가운데 떠 있다.

 分水嶺의 비애!
 백두대간. 이 지리산 주능상의 촛대봉을 정점으로 북쪽 기슭으로, 즉, 함양땅 마천 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한신계곡이다. 한신폭포, 오층폭포, 가내소폭포, 첫나들이폭포 등, 이름난 폭포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는 한신계곡은, 상백무 위쪽에서 제석봉 연하봉 쪽에서 흘러온 물줄기와 합류하여 백무동계곡을 채우며 흘러가다, 강청 아래쪽에서 삼각고지 벽소령 북쪽 기슭을 타고 흘러내린 광대골 물과 합류하여 임천강이 되고, 경호강이 되고, 남강이 되었다가,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천왕봉 북서 내지 북쪽에서 시작하여 추성리 쪽으로 흘러가는 칠선계곡(지리산에 있는 계곡중 가장 길고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17km. 마폭, 대륙폭포, 삼층폭포, 칠선폭포, 선녀탕 용소 등의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음)도 하봉(下峰)쪽에서 발원한 국골의 물까지 합류하여 의탄리 부근에서 임천강으로 흘러든다.
반면, 촛대봉∼삼신봉∼연하봉에서 동남쪽 기슭으로 흘러내린 물은 도장골 청냇골 등의 이름으로 거림으로 내대리로 흐르고, 장터목∼제석봉∼천왕봉을 분기점 삼아 유암폭포 법천폭포를 거쳐 중산리지구로 흘러내린 물줄기는, 유평리의 대원사계곡에서 흘러온 물과 장당골에서 흘러온 물들과 합류하여 덕천강이 되어 진양호로 흘러드는 것이다. 물은 물일뿐인데, 산줄기가 그 흐름을 가르고 사람이 그 흐름을 막는 사이에 본래의 빛깔과 맛과 향기를 잃어버리고, 폐수에 가깝도록 낡은 물이 되어서야 바다로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지리산 줄기에 내린 빗물은, 전라도 땅에서 경상도 땅으로 흘러드는 남강 줄기와, 경상도 땅에서 전라도 땅으로 흘러드는 섬진강 줄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내 발아래 밟히는 이 돌멩이 이 모래 이 흙들은 여기 내린 물이 나뉘어 가는 길을 모를 것이다. 아니다. 알 것이다. 아무렴, 백두대간의 돌이요, 모래요, 흙 알갱이들이 아닌가!

다시, 사람 속으로!!
삼신봉은 촛대봉과 연하봉에 가려져서 잘 안 보이고 낮지만, 그 언저리는 바위길이다. 울퉁불퉁한 길이 오히려 집중에는 도움이 된다. 걸음이 빠를 필요는 없다. 천천히! 천천히! 꾸준히 가다보니, 연하봉(烟霞峰·1,667m)이다. 이제 천왕봉은 4.5km 남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고사목들이 짙푸른 녹음보다 더 시선을 끈다. 비 그친 뒷날이라, 충분히 비를 먹은 바위와 흙과 풀잎과 나뭇잎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건강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내 눈이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사물을 보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의 숨소리를 나의 숨소리에 겹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숲그늘이 짙어지면서, 텐트촌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장터목산장. 오전 7시 10분이다. 여기서도 컵라면은 팔지 않는다. 물도 사람이 많아 받을 수가 없다. 포카리스웨트 한 캔과, 양갱하나를 사들고 제석봉으로 오른다. 선두를 보던 가이드가 홈바위 쪽으로 내려가지 그러느냐 묻는 것을, "내가 늦으면, 차 떠나도 원망 않을 테니 말리지 마라" 이른 끝이다.

 제석봉 고사목들과 통나무울타리!
 제석봉(帝釋峰·1,806m)오르는 내 걸음은 거북이보다 느리다. 가다 쉬고, 가다 쉬고, 앉아 쉬고, 서서 쉰다. 이 환한 산자락. 모두들 숨차서 죽겠다 죽겠다하면서도, 정말로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발로 걸어야만 만나볼 수 있는 세계로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땀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사람들일 것이다. 멋모르고 따라온 초심자들도, 차츰 산을 알아가게 될 것이다. 몇 해 전인가, 거친 바람과 짙은 안개 속에서 상고대를 피우고 있던 고사목들은 부드럽고 건강한 푸른 풀들을 발목 가득 두르고, 명상에 잠겨 있다. 그러나, 더 자랄 일도, 더 살아갈 일도 없는 죽은 나무들을, 목장 속의 소들처럼 통나무 울타리 속에 가둬놓아야 할만큼 무분별한 사람들까지 산으로 오는 것은 딱한 일이다. 가지 마라! 하지 마라! 막을수록 더 저지르고 싶은가. 고사목들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도, 꼭 그 울타리에 걸터 앉으려드는 사람들 좀 보게!
아! 그보다도, 내가 걸어온 길, 노고단으로부터 꿈틀꿈틀 살아서 나를 따라온 길과 이 산자락의 모두! 땀투성이가 되어 돌아보는 뻐근한 기쁨. 그러나 구례와 하동. 내가 아는 마을들은 모두 눈부신 구름 아래 있다. 구름보다 높은 제석봉에 앉아 구름 아래 마을들을 생각하며 한참을 쉬다 떠난다.
통천문(通天門·1,890m)끼여들어 철사다리 오른다. 내 무게가 질러대는 시끄러운 금속성 때문에 산(山)께 미안해진다. 천왕봉은 0.5km만 더 오르면 된다. 오전 8시 26분이다. 이제부터는 시계를 보지 않기로 한다. 오직, 오늘 걷는 나의 길, 그 목표의 정수리에 서게 될 때까지 나는 시간 밖에 있기로 작정한다. <운봉11·1991년 재설> 그 삼각점이 있는 좁다란 평지로부터, 젖 먹던 힘까지 모아 솟구친 자리. 천왕봉(天王峰·1,915.4m)이다. 박단오씨가 알아보고 반긴다. 기다려준 그가 나도 반갑다. 백리 저쪽 반야봉까지 살아서 달려가는 듯한 갈맷빛 능선! 저 먼길 저 넓은 산자락을 평균보폭 30여cm, 평균시속 3km로 걸어온 것이다. "물 드릴까요?" 기념메달에 글씨를 새겨주는 사람이 먼저 눈치 채고 물을 나누어준다. 아! 할머니, 천왕할머니가 삼도봉에서 나누어준 물 한 컵을 여기까지 들어다, 이 지친 목마름을 달래주시는군! 나는 속속들이 산에 대한 감사에 젖어 갈증도 잊고 있었는데….  
발아래 함양 땅 백무동 쪽 칠선골 쪽, 빙글 돌면 산청 땅 대원사 쪽 중산리 쪽, 목을 쭈욱 뽑아서 넘겨다보면 남원 땅, 하동 쪽은 운해에 가려 구름 위로 본다.

지리산은 두류산(頭流山) 또는 두류산(頭留山), 방장산(方丈山), 삼신산(三神山)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하며, 두류(頭流)란 백두산의 맥락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르렀다하여 부쳐진 이름. 삼신산이란 중국의 신선 사상에 근거한 이름으로, 봉래산(蓬萊山·금강산), 영주산(瀛州山·한라산), 방장산(方丈山·지리산), 3개의 산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라 한다.
지리산은 신라의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으로 중사(中祀)를 올리던 산이며, 고려와 조선도 그 예를 따랐다하는 것을 보면 이 산이 얼마나 오래도록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었나를 알 수 있다. 지리산의 산신은 성모천왕(聖母天王)이란 여신이라 한다. 천왕봉에 성모사(聖母祀)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지금 이 산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사람의 발길에 밟혀서 흙투성이가 된 바위들, 너도나도 껴안고 사진을 찍어서 반들반들해진 천왕봉 표석이다.
아니다. 또 있다. 언제나 이 산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람. 정상에 오른 사람의 모자와 머리카락을 들볶는 바람이 그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햇볕 좋은 날. 실실이 풀리는 구름 속에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오르고 내리는 날에 비하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정상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참았던 비를 한꺼번에 쏟아버린 뒷날의 푸른 하늘을 이고 구름 위에 앉아서 좀더 쉬고 싶어도, 밀려드는 인파에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내가 걸어온 백이십여리 길 또 한차례 봉우리 봉우리 짚어가며 이름을 불러보다  천왕봉을 내려선다.

어둠 속에서 오르던 길, 밝음 속에서 내려가며!
남은 길은 9km 안팎. 잔돌들이 중심을 흔들어대는 비탈길이 한동안 계속 된다. 내림 길에선 자신 있다 큰 소리쳤지만, 오래 걸어온 끝이라, 여엉 아니올시다, 이다. 비탈아 오너라! 울퉁불퉁 돌계단을 만들면서 오너라! 자꾸자꾸 오너라! 나는 아예 게처럼 옆으로 걸어주겠다!
개선문에 이르는데, 반시간이 죽었다. 내려가는 사람이 올라가는 사람을 지나쳐놓곤, "지금은 웃지만 저 봉우리 넘어가면!"해놓곤 킬킬거리며 웃는다. 내려가는 길에 섰다는 여유가 저런 이죽거림을 유발하는 것이리라. 이제 이 길엔 등산객보다는 유산 객이 더 많아진다. 바위 바위 건너뛰는데, 거리를 무시하고 뛰어들지를 않나, 마주 오다 밀어붙이며 지나가지를 않나, 사람들이 몰려오면, 아예 피해 섰다 걸어야 할 지경까지 되었다. 법계사 입구, 로타리산장에 이르니, 오전 10시20분이다. 여기서도 요깃거리는 팔지 않는다. 화장실 옆길로 내려가면,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있다고 했다. 나는 쓰레기 소각장을 스쳐서 직진한다. 큰 바위가 가리고 있어 내가 놓친 것일까? 그 언저리엔 이정표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쓰레기 태우는 이에게 길을 묻고 있었다.
이 길은 몇 년 전 헤드랜턴 목에 걸고 새벽에 오르던 길이다. 설악산 오색에서 대청봉 가는 독주골 옆 깔딱고개보다, 더 정이 붙지 않는 길이다. 첫째 너도나도 정상을 향하여 몰려들기 때문에, 사람에 떠밀리며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후로는 아예 법천폭포 쪽으로 해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편법을 썼던 것이다.
뙤약볕 아래 모습을 드러낸 중산교를 건넌다. 1995년 7월 17일 낮 12시 15분. 천왕봉 떠난 지 세 시간, 어제 아침 성삼재 떠난 지 27시간만에 중산리에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오직 나의 속도 나의 걸음으로 지리산으로 걸어 들어가서 지리산을 걸어 나왔다. 어제 14시간, 오늘 7시간, 총 산행 시간 21시간. 이틀 동안 걸어온 총 산행 거리는 65km. 평균 시속 3km. 배낭 무게는 출발 시 약15kg, 하산 시 약 8kg였다. 버스에 올라보니, 하산을 못 한 사람이 반 이상이다. 안심하고 밥 한 그릇 사먹고 가도 되겠다. 쉰 세 살은 죽기에 좋은 나이가 아니라 걷기에 좋은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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