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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권 혁 웅


  그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물에 뛰어들었다 우물 입구가 낮고 좁았으므로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 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서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 갔다

  칼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床 위에서, 紙錢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 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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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혁웅 시인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구효서 소설 [낯선여름]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제목을 그대로 쓰고 있다.
권혁웅은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원작 [낯선 여름]을 비교한 평론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우리를 스쳐 가는 것들, 혹은 우리 안에 숨어 있던 것들]이란 긴 제목의 글에 이 시를 쓰게 한 씨앗들이 숨어있다.
그 들머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우물은 자기 안에 숨은 고요와 명상의 공간이다. 윤동주의 <자화상> 이래, 자기반성의 공간으로서 우물이 우리의 상징체계에 추가되었다. 그곳은 내면의 공간이므로 대개는 폐쇄적이고, 아주 조금이나마 하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조금은 개방적이다. 그런데 비추어보아야 할 그곳에 돼지가 빠져버렸다. 이것은 자기를 비추지 못하고 자기에 함몰되어 버린 일상적 인물들의 비극을 암시한다. 일상의 둔중한 무게로 인해 침윤되고 몰락해가는 인물들이 바로 우물 안 돼지들이다. 제 존재의 무게로 제 안으로만 침잠하는 돼지. 나르시스의 자리를 차고 앉은 이 돼지들은 대개는 자기 안의 진실만을 바라본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그들은 늘 명상적이고 순수하다. 그러나 그들은 가끔은, 아주 조금 열린 외부로 눈을 돌린다. 바깥 세상에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천리만리 격절되어 있다. 우물은 모여 있지 않은 법이다. 우리는 멀리서 그들을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그들의 모습은 늘 어리석고 멍청하다. 우물은 그들에게 피난처이면서 함정이고, 보금자리이면서 늪이다. 그곳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들이, 일상의 권태와 비극, 우연과 콤플렉스, 부조리의 삶을 사는 이들이 돼지가 아닌가? 조금은 낯선 이 영화의 제목에는 이런 풍자와 반성이 뒤섞여 있다.>>------

  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자.
  돼지는 칼을 피해 우물로 뛰어 들었다. 칼에 죽으나 물에 빠져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돼지는 스스로 우물을 택해 죽었다. 여기에 돼지의 기쁨/슬픔이 있다. 물론 우연히 우물이 거기에 있었지만, 죽어 우물을 메꿀망정 자신의 시체를 인간들의 식용으로는 돌리지 않겠다는 (돼지의) 의지를 읽게 되는 부분이다. 어슬픈 칼질이 입힌 상처는 안으로 흘러 대지에 스미게 된다. 상처는 입었을 망정, 통째로 대지로 돌아간 돼지!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차고 우물을 메꾼다. 돼지는 대지의 한 부분이 되었다! 남은 <칼들은 녹이 슬었고> 돼지를 죽인 사람들의 <식욕은 사라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대지는 단순한 망각을 딛고, 돼지를 다시 표면으로 밀어올린다.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동물이던 돼지가 식물로 환생한 것이다. 동물이미지에서 식물이미지로의 변환! 남성에서 여성으로? 아무튼, 돼지의 시체(를 덮은 흙) 위에서 꿀꿀거리는 노란꽃! 꽃으로 되살아난 돼지! 노란빛은 경고의 빛이기도 하다. 시인은 경고하지만, 세상의 돼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돼지를 죽이려는 칼도-.
'現實'과 '幻', 표면과 이면의 대비가 눈부시다.
  이 시의 구도는 트라이앵글이다. '사람'과 '돼지', '우물'. 이 삼각구도는 물론 '우물'로 대변되는 대지에 수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돌고도는 圓을 바탕으로 삼고있다. 순환, 또는 환생. 죽어돌아오는 자들의 무덤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되살리는 존재인 대지 위에서의 사건들. '무덤'이자 '자궁'인 대지 위에서, 겉으론 돼지를 삼킨 우물처럼 말짱한 얼굴을 하고 우리는 살아간다. 때로는 어슬픈 칼질을 하기도하고 때로는 그런 칼질에 쫓겨 (우연히 만난) 우물로 뛰어들기도 하면서 죽고/살면서, 사는 것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 시는 무엇보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읽는 재미가 있다. 소설 [낯선 여름]과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遠景으로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소재로 한 시가 삶을 말하고 있다.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 등, 갈피 갈피에 숨겨놓은 당착어법과, 관능 또한 눈부시다.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했지만, 권혁웅이 그 증거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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