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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에 읽은 좋은 시들
올 여름 좋은 시들(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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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첼로
김 승 희
이른 아침 신촌의 뒷골목
어젯밤이 아직 길거리에 많이 남아 있다
차도인지 모르고 차도에 웅크리고 앉아
잠을 자고 있는 하얀 풍선
어깨가 가느다랗다
누군가 질겅질겅 불어 흰 실로 간신히 매 놓은 하얀 풍선
가출한 조카가 있기에
차에서 내려 난 하얀 풍선의 몸을 마구 흔들었지
날이 밝았구나, 얘야, 출근 차량이 밀리는데, 너는 이제 일어나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
하얀 풍선은 웅크림을 풀지 않고 차도에 계속 앉아
옆에 어젯밤의 소주병과
자그만 여행 가방을 사직서처럼 당당히 내놓고
얘야, 소녀야, 얼굴을 들고 싶지 않은,
얼굴을 들어 바라보고 싶은 생각이
조금치도 들지 않는 이 개떡같은 세상,
소녀야, 집 나간 내 조카, 명주야, 응?, 명주야,
어제에서 아직도 빠져 나오지 못하여
오늘의 차도를 가로 막고 있는 저 하얀 풍선
언제 차도로 뛰어들지 모르는
속옷만 입은 저 하얀 풍선
어제 끓인 가락국수 같은 머리카락에
하염없이 꿈결 같은 햇빛이 내리고
졸려서 죽겠다는 하얀 풍선
햇빛을 꾸러 집나간 이후 만나지 못한 몇 해
이제야 햇빛으로 된 제대로의 집에서
오늘이 온지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저 하얀 풍선
*《현대시》200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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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댕이를 먹으며
이 가 림
무게없는 사랑을
달아보고 또 달아보느라
늘 입 속에 말을 우물거리고만 있는
나 같은
반벙어리 보라는 듯
영종도 막배로 온 중년의 사내 하나
깻잎 초고추장에
비릿한 한 움큼의 사랑을 싸서
애인의 입에 듬뿍 쑤셔 넣어준다
하인천 역 앞
옛 청관으로 오르는 북성동 언덕길
수원집에서
밴댕이를 먹으며
나는 무심히 중얼거린다
그렇지 그래
사랑은
비릿한 한 움큼의 부끄러움을
남몰래
서로 입에 넣어주는 일이지.......
*《한국문학》200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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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조개들
김 기 택
칼국수에서 조개를 건져 먹는다.
갑옷처럼 튼튼하게 껍질을 키워온 조개들은
제 살을 모두 떼어먹으라고
모두가 힘껏 입을 벌리고 있다.
젓가락은 그 속으로 들어가
강간하듯 조갯살을 속속들이 발라낸다.
칼국수 그릇 옆에는
해골처럼 살이 다 빠져나간 껍질들이
패총(貝塚)처럼 쌓여가고 있다.
텅 빈 조개들.
아직도 보호해야 할 무엇이 있다는 듯이
돌처럼 단단한 등을 웅크린 조개껍질들.
손, 발, 머리, 눈 모두 생략한 채
제 몸을 동그란 돌로 만들다가
죽으면 몸 그대로 무덤이 되는 몸들.
제 돌무덤 안에 들어가
한 세상 컴컴하게 살아가는 몸들.
다 내주고 텅 빈 몸들.
*《문예중앙》200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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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가에 서서·2
원 재 훈
저 강은 항상 어디론가 사라지면서
꼭 그런 모양으로 사라지지 않고
저 새는 항상 어디론가 날아가면서
꼭 그런 모양으로 되돌아오고,
임진강가에 서면 내가 잃어버린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다
하늘의 문을 두드리면서 날아가는 저 새들을 보게 된다
작은 사람 마음문 하나 열지 못하고 동네 어귀 서성거릴 때
아주 그렇게 하늘 문을 활짝 여는 임진강물
궁금했던 모든 사연들이 빛나는 물빛이었음을
사랑했던 모든 여인들이 빛나는 물빛이었음을
임진강가에 서면 내가 보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그저 그런 바람으로 지나간다
심심한 겨울 바람 갈대와 장난치면서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머리카락 같은 세월이 지나간다
그러나 저 반짝이는 노래의 씨앗들,
가슴 설레는 나에게 밀려오는 저녁 임진강물 속에
쏘가리 같은 침 번뜩이면서 살아 있구나.
그래 너, 살아 있었구나
*《문예중앙》200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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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마루에 해가 머물러 있다
문 태 준
대낮 대청마루에 아버지의 늙은 심장이 누워 있다
한때는 토란잎에 젖는 가늘은 여름비의 숨결이었으나 젖은 불 들어가는 소리가 아버지의 가슴께로부터 흘러 나온다
아버지는 꿈에서 지게를 지고 아슬아슬한 이녘의 논둑을 건너가고 있나보다
내가 바라보는 동안은 늙은 심장 위에 아직 해가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것도 옮아 간다는 눈치였다*
대청마루 언저리가 설핏설핏 서늘한 그늘에 젖었다
*金宗三의 詩 「해가 머물러 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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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상》200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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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백이 있는 집
박 형 준
누가 가지에 밥바구니를
매달아 놔서
가지가 찢어지게
밥바구니를 매달아 놔서
몇 천 리 바다의 絲모래에
불을 피우는 사람의
목이 저리 쉬었다냐
저리 꽃송이가 희어졌다냐
보길도하고도 보옥리 가는 길
붉은 동백,
거품 이는 바다로 떠밀리는데
바다를 향해 달려가다
멈춰버린 흰 말떼같이
古宅의 오동나무 마루에
머물다 간 내력같이
좀 슬프고도 쓸쓸한
바람벽에 기웃거린다냐
누가 가지에 밥바구니를 매달아놔서
몇 천 리 바닷가에 불 피우는
사람의 쉰 목소리 저리 들려온다냐
*<신생> 200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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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밭 묘지
안 정 옥
그때 그 소리를 들었다 관이 기울자 안에서
한쪽으로 쏠리는 소리를, 곧 안에서는
다시 기척이 없다
우렁우렁한 목소리의 장대 같은 사람이
결박의 자세로 들어가 있다
관은 들어가고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적선하듯
흙을 뿌려준다 흙 사이로 구더기가 꿈틀댔다
밖으로 파헤쳐진 몸을 숨기지 못해 안달이다
울음소리 들으며 나는 슬픈 듯 구더기 본다
내가 구더기에 몰두하는 걸 아무도 모른다
날씨는 화창했다 죽은 이가 가꾼 산기슭
감나무 밭 그늘에 풀어 놓은 점심 밥상
밥 넘기는 쩝쩝 소리, 가득 배를 채우고
다시 울었다 감나무는 잎을 틔우려 애쓰고
관은 땅속으로 들어가려 애썼다
돌아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적선하듯 흙을
덮어준 것이 아니었다
죽은 이가 마지막으로 내게 적선을 베풀었다
자리를 마련하여 밥 한끼를 대접하고 배꽃 같은
흰옷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하기 싫은
죽음의 실체를 견본으로 보여주었다
죽은 이의 육수가 감나무로 흘러들어 올 감들은
아주 달아 사람들을 진저리치게 할 것이다
*《시와 반시》200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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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키스
안 정 옥
날개는 종잇장처럼 얇다 꽃에 남겨져
나비들이 날면서 내는 욕망을 듣는다
우리는 왜 나비가 되지 않는가
너는 부드러운 양쪽 날개로 내 뺨을
깜박거렸다 분가루 듬뿍 뿌리면서
나의 날개는 한숨쉬며 네 뺨에 닫는다
몇 번은 날지 못하고 부딪쳤지만
하늘을 가로질러 훨훨, 날 수 있을 것이다
엉겅퀴의 꿀이나 빠는 흰무늬 나비처럼
삶은 자연을 모방하는 일 그리하여 인생의
한 주기를 완성하면 다시 왕숙천 되어 보는 것
네 뺨에서 나비가 되는 것은 내가 살아
네가 살아 함께 하는 분할, 나비를 만드네
*《愛知》200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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