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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신춘문예 당선시(수상소감/심사평) 모음(완료)  

2005년 신춘문예 당선시 모음

*조선일보

    소백산에 사과가 많다



     김 승 해


    소백산엔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
    푸른 사과 한 알, 들어올리는 일은
    절 한 채 세우는 일이라
    사과 한 알
    막 들어올린 산, 금세 품이 헐렁하다


    나무는 한 알 사과마다
    편종 하나 달려는 것인데
    종마다 귀밝은 소리 하나 달려는 것인데
    가지 끝 편종 하나 또옥 따는 순간
    가지 끝 작은 편종 소리는
    종루에 쏟아지는 자잘한 햇살
    실핏줄 팽팽한 뿌리로 모아
    풍경 소리를 내고
    운판 소리를 내고
    급기야 안양루 대종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쩌자고 소백산엔 사과가 저리 많아
    귀 열어 산문(山門) 소식 엿듣게 하는가


[2005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소감

“삐딱이 부처님 본뒤 절을 꼭 올리고 싶었다”
▲ 김승해
1971년 대구 출생
2003년 대구 계명대대학원 문예창작과 수료

화순 땅 운주사, 누운 부처를 처음 보던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곳엔 부처 아닌 돌이 없었다. 뭉툭하게 문드러진 돌들이 부처라니. 코가 닳은 못생긴 부처님, 귀가 떨어져 나간 삐딱이 부처님을 처음 본 그때, 내게 어떤 간절함이 있었기에 천하 귀신들도 탄복할 절을 꼭 한 번 올리고 싶었던 걸까?

내 마음 안에 돌탑 하나 세우고 돌아선 그날 이후 가끔 꿈속에서 운주사 가는 그 옛길을 타박타박 걷곤 했다. 그저 한 무더기 돌덩이를 만나도 그것이 탑이 되고 부처가 되게 하는 간절한 천불천탑의 땅. 이제 나는 떨리는 첫 마음 모아 새로 돌탑을 올린다. 그러나 이 간절함이 어디에 가 닿게 될지 지금은 모른다. 다만 나를 위해 불문 훨훨 열어놓고 뜨겁게 데워주는 내 고마운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염려와 기도 안에서 운주사 가는 옛길을 가듯 멀고 낯선 길을 간다.


늘 따뜻한 가르침을 주시는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선생님들,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 주는 학형들, 부족한 시를 세상에 내놓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05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
“水壓 센 한국詩의 바다서 보물 건질 능력있어”
    문정희·황지우 시인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장성실 ‘소금쟁이 메모’, 이병일 ‘빈집에 핀 목련’, 이다연 ‘가설무대’를 최종심 대상작으로 좁혀가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이는 이들 네 작품이 최소한, 누가 읽어봐도 “이게 시야?” 하는 의문이 들지 않게끔, ‘스스로 시를 성립시키는’ 구성의 내구력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당선작을 고르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결정을 두 번이나 번복할 정도로 우리 두 심사자들을 꽤 괴롭혔다. 이들 네 작품이 두루 괜찮았다는 말도 되겠지만, 동시에 눈에 확 띄게 스스로를 구별시키는 작품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결국 우리가 이번 심사에서 기대하고 예감하고자 한 것은 누가 보다 오랫동안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수압이 센 한국시의 해저에 누가 더 오랫동안 잠수하여 보물을 건져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를 당선작으로 최종 결정했다. 이 시가 그 자체로 잘 다듬어진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과 대등한 수준의 다른 응모작들을 고루 보여줌으로써 앞으로도 그가 계속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가 한 권의 시집을 가지고 나타나서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부릅뜨게 해 주길 바란다.

<문정희, 황지우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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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국일보 신춘문예 詩 당선작]

    나무도마



     신 기 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2005 한국일보 신춘문예] 신기섭 당선소감


얼마 전 안과에 갔었다. 왼쪽 눈의 각막이 좀 벗겨졌단다. “당신은 눈물이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에 따르면 눈물이 없는 눈은 쉽게 상처가 난다. 안과의 처방전대로 약국에서 인공눈물을 샀다. 그걸 자주자주 눈 속에다 몇 방울씩 떨어뜨려야 했다.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인공눈물을 눈 속으로 떨어뜨렸다. 웃기고 슬펐다. 그것은 정말 꼭 한 편의 희극이었다.
플러그 빠진 냉장고 속의 고깃덩어리처럼, 두고 온 고향의 집이 머리 속에서 썩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할머니가 없는 빈집, 썩는 냄새가 후욱 풍긴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시가 당선되는 일이 9급 공무원시험 합격같은 것으로 생각하셨던, 할머니가 지금 곁에 계셨다면 많이 기뻐하셨을 것이다. 9급 공무원 감투를 쓴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을 것이다. 우습지만 이제, 죄책감에서 아주 약간은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고마운 분들이 많이 계시다. 모교의 존경하는 은사님들, 김혜순 선생님과 신수정 선생님께 큰절을 드린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도 함께 드린다. 곁의 문우들, 우리들의 김점진 조교님, 후배이자 선배이자 친구인 김원, 그리운 시골의 친구들, 서울의 친구들,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이들,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정이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함께 고향집에 다녀와야겠다. 가족처럼.

[2005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존재론적인 고통 생동감있게 풀어 내

당선작을 선정하는 동안, 언어를 다루는 능력과 구성력이 뛰어난 시들이 많아 그 가치를 어디에다 두느냐에 대한 고심이 많았다. 결국 아름답거나 쓸쓸한 것들을 얘기하는 것만이 아닌, 뭔가 고통스러워도 육화되어 있어 속이 후련해지는 작품에 심사의 척도를 두는데 이견이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신기섭의 ‘나무도마’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뽑는다. 존재론적인 고통을 풀어냄에 있어서 고통의 근육을 느끼게 하는 생동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서로 오가는데 걸림 없어 자연스러웠다.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통찰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형상화하는 솜씨가 시를 오래 써온 장인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을 축하하고, 시의 길을 가는데 있어 몸을 끝까지 싣기를 기대한다.


이번 응모작품들을 통해 한국 시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았는데, 예술에 온 정신이 팔려 지극히 자아적인 것에 머물러 있거나 언어를 다루는 세련미에 몰두한 흔적들이 엿보여 보는 이의 마음을 아쉽게 했다. 함께 응모한 심은섭의 ‘북쪽 새떼들’과 ‘몸의 악보를 더듬어’의 박신규, ‘대마찌’의 조길성, 등도 최종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심사위원= 김정환 장대송 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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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얼음을 주세요



    박 연 준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 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2004 중앙신인문학상] 시 당선 소감

      박연준

"내 여윈 손가락 닮은 그런 시 쓰겠다 다짐"


이른 아침 학교 가는 길에 별안간 날벼락을 맞은 아이처럼 두려워 벌벌 떨고 있습니다. 누군가 날 두드려 주길, 날 꺼내가 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이렇게 빨리 밖으로 나오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눈곱도 못 떼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인사드리게 되어 숨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저를 오래도록 뱃속에 품고 기르다, 예쁘게 낳아주신 김사인 선생님, 제 시의 뿌리, 존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옥동의 한 아이'처럼 씩씩하게 걸어갈게요.) "너는 차오르는 달이다. 시가 목구멍까지 차올라 조금만 움직여도 울컥! 쏟아져 나올 때까지 써야 한다!"고 가르치고 붙잡아 주신 장석주 선생님, 감사합니다. 글쟁이로서의 삶을 직접 보여 주신 이만희 선생님, 하일지 선생님, 조병무 선생님, 귀한 가르침들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특히 아무렇게나 흩어지던 아버지, 눈썹부터 꼼꼼히 늙어가던 아버지, 감사합니다. 멀리 미국에서 응원해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그동안 습작했던 노트들을 꺼내어 보니 결코 가볍지 않은 낙서 형태의 글들이 만져집니다. "내겐 연필이 아닌 손가락 하나만 있어, 나는 여윈 손가락을 닮은 시를 쓸 거야. 내 시가, 내 덜 익은 김치 같은 날것의 시가 세상을 비출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손가락을 부지런히 깎고, 깎을 테야!" 능력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목숨만 질겼던 저의 '꿈'에게 키스를 보냅니다. 눈물을 흘리며 했던 이 다짐을 항상 기억하고 실천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시인들과 '부도 난 눈물공장'에서 아직 눈도 못 뜬 '아기 시인'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박연준 약력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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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중앙신인문학상] 시 심사평

발랄하고 생생한 시어 매력적 경험·상상 아우른 솜씨 뛰어나

이 가을에 신인들이 쓴 새로운 시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골방에서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와 삶의 현장들이 반응하는 시적 사유를 개진하고, 한국어의 새로운 울림에 골몰하는 신인들을 생각하면 정말 뿌듯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인문학상은 한 사람의 신인만을 골라내야 한다. 전체적으로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고나서 본심 위원들이 개진한 의견들은 공통되었다.

우선 시를 많이 써본 경험이 풍부한 응모작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작품일수록 편안하게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시인들이 생산해온 시의 틀, 어조, 수사를 그대로 답습한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시를 쓴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이 쓴 시의 어디에 숨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반면에 패기만만하게 자신의 시적 스타일을 개발해본 응모작들의 경우엔 어법에 맞지 않는 오문과 생경한 관념의 직접 노출이 지적되었다. 왜 그런 내용을 유독 시라는 장르를 선택해 써야만 했을까 하는 장르에 대한 자의식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주영중의 작품들은 병치적 언술과 공간에 대한 사유가 새로웠다. 행인들이 스쳐지나가는 찰나적 공간을 볼록하기도 하고, 오목하기도 한 렌즈로 낯설게 하여 탐구하는 그의 시적 전개 방식도 새로웠다. '푸른 알을 낳는 거위' 등에서 구축한 공간은 하나의 회화 작품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구축된 공간에서 암시적 목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미약했다.

반대로 강호승의 작품들은 시간을 탐구했다. 진지한 목소리로 하루 중 어느 시간대에 처한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이처럼 세밀하게 발굴해내는 시구들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복과 나열, 과다한 비유, 설명적 어투 등은 개선해야 할 문제로 지적되었다.

최영동의 시들은 얼핏 보면 밋밋하고 단순하지만 그 속에 나름대로 촌철살인의 지혜를 감추고 있었다. 더구나 단순한 시구들 속에 감춰진 슬픔의 정서는 시를 읽고난 여운을 길게 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의 소품이 아닌 작품들을 읽고 싶었다. 소품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몇 마디 작은 세밀묘사 속에도 커다란 규모가 숨쉴 수 있는 것이 시라는 장르가 품은 특징이기 때문이다.

박연준의 시들은 생동하고 자연스럽다. 다른 신인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그 어조와 언술 내용이 훨씬 생생했다. 자신의 내밀한 직접 경험과 욕망의 상처를 드러내는 상상적 경험을 결합하는 솜씨도 뛰어났다. 상투적이지 않고, 발랄했다. 자연스럽게 툭툭 던지는 말 속에 생의 비의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시를 써나가는 과정 속에서 자극적인 말들의 생산이라는 또 다른 타성에 젖을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박연준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에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즐거운 심사 과정을 거쳤다. 새로운 시인의 새 목소리의 탄생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김혜순.이시영(대표집필:김혜순)

◆ 예심위원=고형렬.김경미.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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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단단한 뼈



    이 영 옥  



    실종된 지 일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 있던 빈 병에
    는 바람이 울었다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
    가 사내의 유골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
    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를 알
    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센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이영옥 ; 약력 및 당선소감
<약력>1960년 경북 경주 출생 △2002년 경남신문사 신춘문예 시 당선 △2004년 계간 ‘시작’ 신인상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당선소감>
함께 있어도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못해 밖에서 서성거리게 했던 내 외로웠던 시들아! 나를 용서하기 바란다. 문제는 늘 내 안에 있었다. 내가 본 죽음이란 것은 또 하나의 완벽한 실존이었다. 그는 뼈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바람의 울음을 듣고 있었다. 세상의 빛들은 일순간 그를 위해 적막해졌다.

나는 너무 일찍 알아버린 삶과 죽음의 근사치에 대해, 근접해 있는 존재와 소멸의 함량에 대해, 세포처럼 끊임없이 분열하는 것들을 쓰고 싶었다. T S 엘리엇은 말했다. 시는 언제나 모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면 나의 도전은 무모했다. 시의 중심을 알 수 없었던 나는 늘 이방인이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난 후, 성탄 캐럴이 울리는 번잡한 거리를 혼자 걸었다. 마치 동굴에서 탈출한 크로마뇽인처럼…. 나는 그날, 화석 속에서 튕겨져 나온 구석기인처럼 외로웠다.

나를 믿고 지켜봐 준 남편과 자신감을 뿌리 깊게 심어주신 하현식 교수님, 이재무 선생님, 감사합니다. 호된 비평가인 딸 다혜와 아들 정빈이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하고 뽑아주신 심사위원 두 분께 내 안의 혹독한 다짐을 바친다.

<심사평>
짧은 분량에도 많은 것 담아내
황동규(서울대 명예교수·시인) 정진규(시인)
(예심=반칠환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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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심에서 올라온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을 거듭 읽고 검토한 끝에 남은 작품이 배대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코드(CODE)’ 외 9편과 이영옥의 ‘단단한 뼈’ 외 4편의 시들이었다. 다른 응모시들이 지니고 있는 상대적 결함들이 이들 시에서는 극복되고 있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분명한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까닭 없는 우회나 굴절이 야기하는 몽상의 어눌한 언어들을 자제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특히 이른바 화자 우월주의에 빠져 시를 수다스러운 설명으로 이끌거나, 대상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독단의 왜소성으로부터 깔끔하게 벗어나 있었다.

장고 끝에 우리는 이영옥의 ‘돛배 제작소’와 ‘단단한 뼈’로 의견을 압축했다. ‘돛배 제작소’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선 안과 밖을 하나로 짚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호감이 갔다. ‘설계도면에는 오래된 고뇌까지 꼼꼼히 그려져 있었고/돛배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그의 환멸은 정교해져 갔다’ 같은 대목 말이다. 그러나 ‘단단한 뼈’에서 더욱 중요한 대목들을 확인했다. 짧은 분량으로도 많은 것을 담아내는 자재로움과 절제된 감정이입을 통해 죽은 것들을 또 다르게 살려내는 전환의 힘, 그 핵을 이 시는 지니고 있다.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는 비극적 삶의 전력에 대한 암시도 놀랍지 않은가. 이 시를 읽고 나면 ‘섬쩍지근한’ 침묵 같은 것이 남는다.

배대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코드(CODE)’ 등은 언어의 활달성, 또는 뜨거움을 지니고 있었다. 순수한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천착도 돋보였다. 그러나 표현의 조밀함이 모자라 적잖이 설명으로 기운 흠이 있었다. 지니고 있는 정열의 운용에 따라서는 새로운 시를 열 가능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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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흔한 풍경



    김 미 령


    시청 앞 작은 연못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단잉어가 산다

    몰락한 귀족처럼 느릿느릿 헤엄치면

    양귀비꽃 수면에 비쳐온다

    우리는 그걸 주홍빛 슬픔이라 부른다

    허기진 햇빛이 정수리 위에 어른거린다

    메마른 광장의 오후 2시가 아가미 속을 들락날락하는

    지루한 염천(炎天)의 대낮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벽을 두드려보듯 지느러밀 움직여

    물의 파동을 느껴본다

    배에 와닿는 물의 감촉이 따스하다

    눈앞이 침침해지고부터는 소리에 집착하게 된다 좁고 가늘어진 바 람소리

    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

    무수한 소문들이 물기를 머금고 부풀었다 사라진 벤치에

    빈 종이컵이 실신할 듯 입벌리고 있다

    새우깡을 무심히 던지던 손이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무엇일까

    生의 마지막 들숨을 쉬듯 물위로 솟구칠 때 무심코

    돌아서던 누군가의 하얘진 귓불을 보았을 수도 그때 잠깐 흔들린 듯

    눈을 깜빡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서로가 엿본 것은 아무 것도

    들킨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 동안에도

    애초에 누구의 관심거리도 아니었다는 듯

    개미들이 떨어진 여치 다리를 십자가처럼 옮기고 있었고

    체인을 오래 매만지고 있던 자전거 옆으로 은색 승용차가

    서류뭉치를 신생아처럼 안고 급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두 외로움을 흙먼지처럼 껴입고 있지만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벤치 밑에 조금 구부러진 쇠뜨기풀이 다시 일어서는 동안

    내 어슬렁거림은 어떤 사소함에 비유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에 열중하는 순간 누구나

    제 몸에 딱 맞는 표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므로

    모두 서로에게 그림 속 배경일 뿐이라는 듯

    과자 부스러기들이 바람에 흩어진다


■ 서울신문 시 당선소감

    김 미 령

막 외출하려던 참에 옷장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깜빡 잊고 나가려던 참인데 간신히 받은 전화 속 상대방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였다! 나는 실감을 도둑맞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무슨 일의 ‘기미’는 그렇게 희미하게 온다. 시가 내게 오는 방식도 그러하다. 시의 기미를 다행히 감지했을 때 나는 납작하게 엎드려 코를 벌름거리며 그 냄새의 방향과 거리와 크기를 탐색한다. 그리고 그것의 실체를 확실히 기억해둔 뒤에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유유히 사라진다. 며칠동안은 부단히 그 실체의 환영에 시달리다가 내림굿을 받듯 어느 날 정신없이 받아 적곤 한다.

그러나 날것의 실체를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해 좌절을 맛보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보편성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감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평범한 감정들을 아름다운 충격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부터 내 시 쓰기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아웃사이더 같던 내 말들과 행동이 조금씩 보편성을 찾아가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가 나를 세상에서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시가 내 속에서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확실히 믿고 있다.

오래된 일기장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보며 시 비슷한 것을 끄적거리기 시작한 10년 전 일이 생각난다. 그때 내 시를 처음 읽어봐 주시고 많은 조언을 해주신 남송우 교수님, 한동안 외면했던 시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시기에 훌륭한 스승이셨던 손진은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든든한 후원자인 남편과 철의 여인 엄마, 가족들, 또 함께 기뻐해 준 선화, 희경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약력

1975년 부산 출생
부경대 국문학과 졸업


■ 서울신문 시 당선작 심사평


예심을 거쳐 두 선자에게 전해진 작품들은 다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응모작들에 결정적인 그 무엇이 모자란다는 인상을 주었다. 발상의 참신성이 돋보이는 작품은 흔히 언어의 밀도가 따라주지 않았고 감각적인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은 호흡이 짧다는 인상을 주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시정신을 엿볼 수 있는 패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아쉬움을 주었다. 치열함이나 당돌함이 제거된 시적 수련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상념에 젖게 했다.

결국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당선권에 근접했다고 여겨지는 네 명의 응모자의 작품을 추려내 논의를 거듭했다. 그 결과 김미령의 ‘흔한 풍경’이 마지막으로 낙점을 받게 되었다. 얼핏 보아서 무더운 날의 나른한 도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별 무리없이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흔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 현실의 단면에 대한 담담한 소묘가 돌연 삶의 무상함을 환기시키는 절실성을 획득하고 다가온다.“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나 “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 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같은 표현도 대범하게 씌어진 듯하지만 응모자의 만만치 않은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다 일정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한층 믿음이 갔다. 앞으로 자기만의 개성적인 시세계의 구축에 보다 신경을 쓴다면 한 뛰어난 신인의 탄생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최종심에서 논의된 작품 가운데 김영수의 ‘들키지 않은 걸음걸이’나 ‘어두운 독서’는 선자들을 오랫동안 망설이게 했다. 시에 담긴 사유의 깊이가 만만치 않았으나 그것이 시를 너무 건조하게 만든 감이 있고 불필요한 추상어의 남발도 거슬렸다. 이밖에 ‘오징어 등불’을 투고한 이병일과 ‘사나운 연어떼가 밀려갔다’의 박성현도 숙련된 솜씨를 선보이고 있지만 충분한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하고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분발과 정진을 부탁드린다.
   (김명인·남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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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 시 가작]

    항해



    손병걸

     
    비린내 그윽한 다대포 바닷가
    꼼장어 구이집 방문 앞에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다른 구두에 밟힌 채 일그러진 놈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드러누운 놈
    물끄러미 정문만 바라보는 놈
    날씬한 뾰족구두에 치근대는 놈
    신발 코끝 시선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어느새 젓가락 장단 끝이 나고
    사람들 한 무더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다대포 앞바다 썰물 빠지는 소리가
    꼼장어 구이집 창 너머로 아득하다.


    연방 뭐라고 중얼거리는 꼼장어 안주 삼아
    슬며시 쓴 소주 몇 잔 들이켜고는
    담배 한 개비 입에 문 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시 정박했던 배들이
    저 푸른 바다로 떠난 것이었다.


    그 순간, 꼼장어 구이집 안으로
    환한 웃음 실은 만선(滿船)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부산일보 시 당선소감] 새 생명 하나 부여받아

손 병 걸  

베란다를 두들겨 대는 저 육중한 바람은 제 몸에 힘이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을 때 비로소,뒤를 한번 돌아본다는 그런 생각이 근래 들어 부쩍부쩍 떠오른다. 그것은 실명 전,아무 생각 없이 스치고 지나버렸던 그 아슴아슴한 사물들과 사소한 사건들이 요즈음,내 머릿속에서 다시금 환해지는 탓이리라!

사물들의 촉감,미세한 소리,그윽한 냄새,눈이 보일 때보다도 외려,요즘 더 예사롭지 않다. 시각 장애 이후,더욱 집중했던 시(詩) 창작은 사실,죽음의 유혹을 뿌리치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오늘 당선 소식은 새 생명 하나를 부여받은 셈이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더 멀고도 험하겠지만 한참 부족한 제 시(詩)를 뽑아주신 부산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시(詩)와의 만남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보답의 길이라고 믿는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물심양면 힘 써 준 고마운 사람이 많다. 이 자리를 빌려 하해와 같은 감사를 드린다.

◇약력:1967년 강원도 동해시 망상 출생. 대관령종합고 졸업. 2004년 백병원 동아일보 주최 투병문학상 입선,2004년 대한민국 장애인 문학상 가작.

[시 심사평] 정진 가능성에 높은 점수

응모된 시들 중에서 1차로 20여편을 건져올리면서,우리 시의 현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예비 시인들의 관심이 서정시에 가 있다는 점,소재는 일상적 체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발랄하고 참신한 이미지는 내보이나 내면의 깊이가 없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응모 시의 전반에서 실험적인 요소를 찾는다는 것은 힘들었다. 이는 패기 있는 개성적인 시를 쉽게 만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 대신 잘 꾸며진 소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1차로 걸러진 20여편은 시 공부를 한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는 시편들이었다. 그러나 소품이 갖는 한계를 시적 응집력을 통해 극복하고,새로운 세계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는 시적 정신을 토대로 자기만의 세계를 창출해 보려는 의욕보다는 시의 기교 습득에 너무 기울어져 있는 결과로 보였다.

이런 아쉬움 가운데서도 마지막까지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첩자''소라''항해'였다. 그런데 '첩자'는 너무 기계적인 구도와 시적 언어가,'소라'는 너무나 단정한 틀과 일상화된 이미지가,'항해'는 기성 시에 나타난 이미지의 원용이 각각 문제로 지적되었다. 힘들게 '항해'가 지닌 긍정적 세계 인식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믿어,이 작품을 가작으로 뽑았다. 정진을 빈다.

*시인 이시영·최영철,문학평론가 남송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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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시 당선작

    오페라 미용실



     윤 석 정



    능선으로 몰려든 검은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죽삐죽 나온 지붕에 한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 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처마에 모아둔 나뭇잎 음표들이 옹알거릴 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동,
    백지에 오선을 긋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측백나무에서 음표를 떼어 내던 앙상한 어머니를 목격하였다
    어머니를 마구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옥타브를 높이며
    구름 떼를 몰고 오기도 했다
    미용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내 벌려 예리해진 가윗날을 접는다
    머리숱이 적은 손님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음치인 울음이 미용실에서 뛰쳐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선
    울음이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변주해 울려 퍼지고
    측백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음표가 눈썹처마에
    떨어질 때
    낮은 지붕 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에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2005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겨울가뭄 극복할 큰 힘 생겨”

<윤석정 ㅣ ▲72년 전북 장수 출생 ▲원광대 국문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문예창작과 재학중 >

거주민만큼 계단이 많은 동네, 흑석동에서 겨울을 두 번 맞는다. 시간은 어떤 맨홀에 빠져 허우적거렸을까. 되돌아보면 어둔 구멍에 빠져서 며칠 묵었다고 여기게 된다.

애벌레처럼 웅크린 잠에서 깨던 날이면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인지 녹슨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릴 때가 많았다. 그런 소리들은 적막을 밀어내는 음계 같은 거였다. 혹은 내 가슴속에서 총총히 계단을 만드는 시 같은 것. 나는 반지하방에서 꿈틀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곤 했다. 가끔 퇴고를 하는 꿈도 꾸면서.


고교시절, 나의 유일한 친구는 시였다.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소중한 존재로 어느새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시가 내 곁에 그냥 있는 게 아니라고 알았을 때부터 나는 절망을 알게 되었다. 줄곧 비가 내리던 날이 많았다. 겨울이 오면서 눈이 내리길 간절히 기다렸다. 내게 있어 희망이란 어디서나 공평하게 내리는 눈발 같은 거였기에.


눈 쌓인 거리를 이유 없이 걷고 싶었다. 꼭 그래야만 지금을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으므로. 드디어 청천벽력처럼 전해진 당선소식은 눈발이 되어 쏟아졌다.


그 순간 나는 사유의 계단을 찬찬히 오르 내리게 해준 흑석동이 참 고마웠다.


나의 긴 겨울가뭄에 눈발을 내려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마운 분들이 꽤 많습니다.


존경하는 교수님들. 묵묵히 믿어주신 이승하 선생님, 나에게 내릴 눈발을 간절히 기다린 지우 경주. 친구들. 내 시의 고향 그루터기, 시동, 생각만 해도 치열해지는 원광문학회, 멋진 14기 동기들, 선·후배님들, 포에티카 선배님들. 식충이를 한없이 믿어준 사랑하는 부모님과 뚝섬 고모, 미순, 석완, 언제나 봄날 같은 누나 미선, 내 귀여운 동생 석민.

이제는 길이 가려진 눈길을 더 힘차게 가야겠습니다.

[2005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발랄한 상상과 비유 돋보여”
<심사위원 ㅣ 신경림·김승희>


예심을 넘어온 시편들의 기교적 수준은 일반적으로 높았으나 개성과 다양성이 조금 부족한 듯한 느낌이었다. 한 편의 시란, 아무리 작은 규모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재현(현실)의 축과 표현(개성)의 축, 그리고 언어(기호)의 축을 가지고 있게 된다. 어느 한쪽이 너무 과부하를 받거나 결핍되면 진정한 시의 역동적인 생명감이 태어나지 않는다. 시 텍스트는 그러한 삼위일체 긴장의 아비투스 속에서 고유한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된다.


많은 응모작 중에서 심사위원은 최명희의 ‘비닐 하우스’와 이해존의 ‘이곳은 난청이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에 주목했다. ‘비닐하우스’는 현실감각과 현실의식은 뛰어난데 시속에 들어있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전개에서 조금 상투성이 엿보였다.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 같다. 아니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라 하더라도 자기만의 상상력과 언어의 힘으로 표현해낼 때 새로운 자기 작품이 태어난다.


‘이곳은 난청이다’는 아주 단단한 작품이다. 그러나 상상력에 한계가 있는 것 같고 ‘나는 비참하다’라는 엄살기가 조금 엿보인다. 그러나 이미지의 전개에 밀도가 높고 단단해서 적지 않은 재능을 느낄 수 있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을 당선작으로 선택하는데 두 심사위원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오페라 미용실’은 ‘늙은 측백나무’와 ‘미용실’이 마주 보고 서있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낯익은 마을 풍경을, 신선한 상상력과 생생한 비유로 하나의 생동감 있는 음악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현실 감각도 없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진부한 재현의 세계는 아니며, 아주 발랄하고 풍부한 상상력인데 그렇다고 낯설게 멀리 나아가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재현의 세계와 표현, 언어의 세계가 잘 어울려 아주 맛있게 배합된 시의 맛을 그득하게 한 상(床) 잘 차려 놓았다. 어디까지나 요약과 압축을 전제로 하는 한 편의 시는 잘 차려낸 ‘모국어의 한 상(床) 성찬이어야 한다’는 시의 매력을 잘 보여준 이 시인은 다른 응모작인 ‘마늘’에서도 그 섬세하고도 단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만삭인 나는 아랫배 쓸어본다./ 아기는 얼마나 여물었을까/ 어머닌 내가 태아였을 때도 씨 뿌려두고/ 탯줄이 잘 이어졌는지, 더듬이가 돋은 마음/ 자라는 것에 먼저 닿게 했으리라”와 같은 아름다운 섬세함과 상상력의 고요한 역동성은 살아 있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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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시 당선작

    母女의 저녁식사


     
    윤 진 화



    배추김치.... 파김치.... 상추겉절이.... 오이소박이.... 어머니.....

    .... 어머니.... 우리 집 식탁에는 온통 풀뿐이네요

    우리의 저녁 식사는 말들이 좋아하겠어요

    보세요? 하얀 접시 위에 그려진 말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저녁 식탁에 와 있잖아요. 그래요. 거기요. 가만히,

    아이처럼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또 다른 말이 들길을 지나 마을 건너

    가난한 우리 식탁으로 달려와요. 들리세요?

    주인을 버리고 달려오는 말울음 소리요

    저기 먼 곳에서는,

    젖가슴 하나 달린 여자들이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드넓은 대지를 흔들며 산다던데... 히잉! 어머니

    주홍빛 하늘이 몰려와 대지를 덮으면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여자들이

    말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리 식탁을 향해 자신의 말들을 찾아

    고단한 하루치 태양을 쉬게 하고 달려와요

    ... 히잉!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처럼

    하늘이 물들어갈 때, 그녀들이 달려와요

    가슴 하나를 도려낸 그녀들이, 자꾸만 자꾸만

    초대받은 손님처럼 달려와요

    어머니, 유방암에 걸린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여

    듣고 계신가요?

    전사들이

    우리의 밀림으로 몰려오는 소리,

    그 침묵의 소리들이요

    … 히잉! 어머니.



■당선 소감
                     윤 진 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 당선
"더더욱 감사… 열심히 하겠습니다”


올 한해 더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이번에 당선된 시는 제 시중에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그래서 본심 심사위원들께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할머니! 당신처럼 곱고 따뜻하고 깔끔한 분이 세상을 떠나려 하신다는 의사의 말이 믿기지 않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지금은 가지 마세요.
 
전에 말씀하신 앙고라 스웨터, 이참에 좋은 걸로 사드릴 수 있다고요. 그리고 지금은 너무 춥다고요.


시계 속, 작은 톱니가 큰 톱니에게 머리를 지긋이 눌리며 내지르는 비명- 착각. 이 끔찍한 아비규환에 하루를 열고 닫고, 웃고 우는 아둔한 착각.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맘- 착각. 저 무수한 착각의 셔터를 누르는 거역할 수 없는 시선.

Thanks to:서형순 여사, 테오 같은 동생들과 안나, 아득한 이국의 언어 아버지, 사랑하는 ZEUS, 우리는 시를 믿는다 詩川, 언제나 그 자리 선배 미영, 허방을 향한 농담 스스와타리, 너무 고마운 사람 승렬이 아재, 하늘 아래 효부 큰엄마 황숙자 여사, 삶을 연극처럼 연극을 삶처럼 연극마당, 획을 긋는 국립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따뜻한 명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참삶 참문학 어의문학회·19기, 국정호, 이주영, 김주현, 박상남, 최혜선, 전지원, 경아언니, 안치윤·박수현 부부 그리고 기꺼이 시가 되어준 여러분의 삶.

Special Thanks to: 아픔을 드러내는 법 닥터. 키팅, 한걸음에 달려와 안아주신 이사라 선생님, 죽기 직전에 만난 정신과 주치의 詩와 ‘아무도 몰래 묻어주고 싶었던’ 그들의 詩集에게, 예심 심사하신 선생님께

▲1974년 전남 나주 생

▲국립서울산업대 문예창작과 졸업, 명지대 대학원 수료

■세계일보 심사평

당선작 발상탁월… 우리詩 지평 넓힐것


마지막 후보작 2편도 만만찮은 솜씨


윤진화, 강호정, 이우경의 시들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윤진화의 ‘母女의 저녁 식사’는 발상이 아주 신선하다.

풀뿐인 식탁-말-아마존의 여왕 히포리테-유방암에 걸린 어머니의 연상도 재미있지만, 이미지가 청승맞거나 구질구질하지 않고 쌈박하고 날렵한 점도 호감을 갖게 한다.
 
많은 사람들의 시가 내용이나 형식에서 서로 닮아 있는 데 반하여 이 시는 다른 사람의 시와 전혀 같지가 않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리라.

역시 어머니의 잃음을 노래한 ‘두 개의 꿈’도 뛰어난 시다. 슬픔이니 아픔이니 하는 직접적인 표현 한마디 없이도 더 강하게 그것을 느끼게 하는 점, 시인의 만만치 않은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강호정의 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다. 시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며 진실을 찾아가는 자세도 돋보인다. ‘몸을 들여다보는 순간’이며 ‘선언에 대하여’는 시적 완성도나 안정감에 있어 결코 손색이 없지만, 다 죽음을 다룬 시여서 신춘시로서는 좀 무겁다. 당선 여부에 관계없이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우경의 시 중에서는 소시민의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난 ‘문패’가 가장 뛰어나다. 이미지도 선명하고 표현도 아주 매끄럽다.

그러면서도 억지가 없고 자연스럽다. 흠잡을 데 없이 날씬하게 빠진 시라는 칭찬이 조금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한데 다른 시들이 뒤를 받쳐주지 못한다. 너무 편차가 심한 점은 조금 안심이 되지 않는다.

이상 세 사람의 시 중에서 윤진화의 ‘母女의 저녁 식사’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시가 가진 분방하고 건강한 상상력은 우리 시의 지평을 크게 확대할 것으로 기대되는바, 앞으로의 활동에 크게 기대를 건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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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일보 시 당선작

    바람과 뱃사공



    김 면 수


    갈잎의 노래로 자란 바람이 구름에게로 가 입김을 불면

    입김의 무게 만큼 쏟아지는 햇살을 한 올 한 올 모으고

    저녁 강가에 산란을 하며 물이 든 노을은

    수심 깊은 바다로 가 유년의 추억이 된다

    밤이면 낡은 목선에도 훤히 불 드는 전구

    그물마다 달과 별과 스무 살 꿈이 싱싱하게 꿈틀거린다

    세월은 어머니 이마에 주름진 햇살 눈부시게 그려 놓고

    갈잎의 노래로 손을 든다 이제 나는 깨어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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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보] 시 당선작

    즐거운 제사



    박 지 웅



    향이 반쯤 꺾이면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

    열린 시간 위에 우리들 一家는 선다



    음력 구월 모일, 어느 땅 밑을 드나들던 바람

    조금 열어둔 문으로 아버지 들어서신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어머니, 메 곁에 저분 매만지다 밀린 듯 일어나

    탕을 갈아 오신다 촛불이 휜다 툭, 툭 튀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삼색나물처럼 붙어 다니는

    아이들 말석에 세운다. 유리창에 코 박고 들어가자

    있다가자 들리는 선친의 순한 이웃들



    한쪽 무릎 세우고 편히 앉아 계시나 멀리 山도 편하다

    향이 반쯤 꺾이면 우리들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엎드려 눈감으면 몸에 꼭 맞는 이 낮고 포근한,

    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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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시 당선작

    안개



    최 재 영


    길을 나서면 안개가 먼저 다가온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내력
    지상의 열린 틈마다 안개가 스며들고
    사람들은 한번쯤 기침을 호소한다
    새들은 노래하지 않으며
    길은 늘 젖어있다
    세상의 새벽은 잠 못 이루는 곳에서 먼저 개어나
    충혈된 소음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밤새 안개에 젖어 퉁퉁 불은 가로등이
    불면의 문장처럼 침침하다
    정오가 되기까지는 완전한 침묵이다
    이곳의 시간은
    안개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다
    사물들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쯤이면
    정오의 햇살이 길의 한복판까지 나와 있다
    지루한 변명들이 길게 꼬리를 남기고 사라진다
    내 안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것들처럼
    대부분의 안개는 길 위에서 소멸해 버리고
    구부러진 생의 길목마다
    어둠은 먼저 찾아드는 법
    새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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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시 당선작

    철거지역



     정 경 미
                

     굴피집 처마 끝에서 포크레인이 홰를 친다
     노란 살수차가 산동네의 새벽을 깨우며
     을씨년스런 거리를 적신다
     콘크리트 더미에서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철지난 전화부가
     다이얼을 돌리며 안부를 묻는 동안
     재개발 택지 분양 프랭카드는
     부푼 몸을 날리는 햇살에 눈을 뜬다
     비닐 하우스의 골담초는
     봄을 기다리며 세간들을 살피고
     떠도는 개똥지빠귀새 추운 어깨에
     살풀이구름이 내려앉는다
     찢긴 연체료 고지서가 수화를 건네며
     검은 입술에 묻은 상처를 펄럭이고
     왼쪽 어깨가 밀려나간 외등이
     백밀러 속으로 뒷걸음질 친다
     멈춰버린 괘종시계는 언제나
     뜨거운 한낮에도 저무는 하늘을 가리킨다
     팽팽한 오후가 하수도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골목길은 말 잔등처럼 출렁거리며
     어두운 길목에서
     희미한 등불을 켜고 있다



경인일보당선 소감
시 부문-정경미

뙤약볕 내려 쬐는 자갈길을 맨발로 걸어왔습니다. 발이 부르트는 지경에서도 시에 대한 믿음 하나로 마다 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시를 향한 우직한 집념으로 더러는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더욱 시에 대한 오기와 열정을 용솟음치게 만들었습니다.
 
한때는 바닥이 두껍고 편안한 신발을 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에 대한 절명의 애착 때문에 외로운 수행자의 고행처럼 세속적인 소망을 애써 저버린 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결코 앞으로도 평탄한 걸음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름다움만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노래한 키이츠의 행로를 따라 걸어갈 것입니다.

가장 진실한 지혜는 사랑하는 마음이라 여겨왔습니다.

신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곳에 빛나는 시의 소재가 숨어있고 현란한 관념과 이미지가 내재해 있음을 깨달아 왔습니다.
 
그것이 곧 진실의 표정이요 지혜의 속내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다짐해 왔습니다.
 
당선 소식을 접하자 문득 봉숭아꽃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릴 적 봉숭아꽃 속에는 시의 텃밭이 되어주신 아버지의 영상이 겹쳐져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버리신 아버지께서 사랑과 망각을 깨우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8년 전 가을 어느날 봉숭아꽃이 피었다고 나들이 오라시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그리움의 울타리 안에서 피어오릅니다.

부족한 글을 눈여겨 살펴주신 경인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부르튼 맨발을 말의 붕대로 감싸주신 하현식 교수님과 이신정 시인을 비롯한 문우들과 악동님께 감격을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고집스런 시의 길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준 가족들과 아들 성로, 그리고 올케 송인숙님께 고마움을 전하면서 이 영광을 아버지 영전에 드립니다.


◇약력

 1960년 경남 거제시 연초 출생
 현재 부산 금정초등학교 영양사 재직

경인일보 시 당선작 심사평
▲시 부문

시의 위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시인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좋은 시와 좋은 시인이 눈에 띄게 늘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원래 그저 좋은 것은 희귀하게 마련이지만 시의 기본적인 품격조차 갖추지 않은 시의 과도한 생산은 시의 위력과 본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한 번쯤은 되돌아 볼 일이다. 영상 매체의 발달에 따라 활자 매체의 존립 근거가 퇴색해 가고 있다는, 단순하고도 문학 외적인 진단에 의한 시의 위기론보다는 좋은 시의 위기를 우려해야 할 시점이 지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좋은 시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시는 기존의 시적 상상력을 무너뜨리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언어 표현이 생기를 얻을 때 발아한다. 단 한 편만 뽑는 신춘문예를 의식해서일까. 모두들 수준이 엇비슷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오래된 집'은 크게 나무랄 데 없는 깔끔한 시다. 시에서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도 오랜 수련의 결과로 생각된다. 하지만 소품이라는 점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때로 시의 스케일을 크게 잡아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밥상'은 발상이 참신하고 평범한 소재를 평범하지 않게 그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은 앞으로 시를 세밀하게 다듬는 데 더욱 신경을 써야 할 듯하다. 난데없는 돌부리들이 곳곳에 출현해 시의 품격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경마장 풍경'과 '철거지역' 두 작품을 놓고 고심했다. 앞의 시는 세상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바탕으로 시에 삶의 온기를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군더더기가 거의 없고 감각적 표현도 아주 볼 만하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본 듯한 몇몇 이미지들이 신선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당선작으로 고른 '철거지역'은 주체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한 객관적 묘사의 시다. 특별히 눈에 띄는 표현은 없지만 안정적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는 점이 믿음직스럽다. 상처 입은 것들에 시의 렌즈를 들이대는 시인으로서의 자세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가기를 바란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 정희성·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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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라훌라



    최 해 경


    -길모퉁이에서

    누군가를 부르며

    부르트며 바람이 거리를 휘감는다

    어둔 밤 얼룩처럼 드문드문 가로등이 번지고

    막차를 기다리는 내 등뒤에서

    멀어져라 뒤돌아보지 마라
    바람은 쉰 목소리로 다그치듯 나를 자꾸 떠민다

    그는 저 만치서 나를 향해 말없이 서 있을 것이다

    자울대다 눈을 거푸 치켜 뜨는 길모퉁이 가게 불빛 사이로

    밤은 더욱 자우룩해지고

    여전히 그의 눈빛은 차게 떨리겠지

    스무 살 적, 객지에 나를 처음 떨구고

    곧 목놓아 울 듯 그렁그렁하던 그 눈빛이

    내 가슴에 단단히 말뚝을 박고는

    녹작지근한 해질녘이면 어지러이 발길질을 해대곤 했었다

    어미 소의 말간 눈망울에 들이치던 석양빛처럼

    빛의 눈물 자국 다 떠메고

    차마 못다한 말 되새김질하듯

    그리움도 순하게 견뎌야한다는 것

    오랜 후에야 그 눈의 얼룩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한여름 소낙비가 얼룩져 시린 겨울 강 핥는 여울이 되고

    사랑은 얼룩져 돌이킬 수 없는 그러나

    돌이킬 밖에 없는 괴물같이 눈부신 추억을 매달 듯

    얼룩이 마냥 뼈아픈 얼룩만은 아니지

    이제서야 나는 나를 다독여준다

    언제나 뒤돌아보면

    나의 짓무른 가슴의 얼룩, 아버지가

    끝내 저기 서 있다

    세상 없어도.



*산스크리트명은 라훌라(Rahulla)이다. 장애로 의역되고 있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아들이 태어나 "라훌라(장애)가 생겼구나!"라고 통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선 소감

"詩는 모든 사람 손을 잡아주는 일"




그토록 바라던 것이 언젠가는 온다는 말을 밤새워 되뇌이곤 했습니다. 시는 순결한 영혼에만 깃드는 축복이라 여겨져 저의 불순함에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간절히 원하기도 했지만 감히 다가갈 수 없었던 그 시의 손을 처음 잡게 된 것 같아 설렙니다.

어렴풋이 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시간들, 기억들, 풍경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손을 잡아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 꼭 붙들고 부지런히 쓰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들었던 지난 22일이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외치는 소리를 듣고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며칠이나 남은 터인데 왜 벌써부터 크리스마스라고 말할까 한참 생각하면서 몹시 웃다가 그 웃음 끝에 살짝이 눈가가 얼룩졌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제가 무엇이나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한 짐이나 되는 그 무수한 눈물의 출처가 늘 저였기에 그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이제는 그 짐 부려두고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걸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할머니, 막내 고모, 오빠, 무엇이든 해주고픈 아우, 가족 모두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전합니다.

가볍게 내려와 손등에 스르르 녹아 스미는 하얀 눈 같은 시를 쓰라고 말씀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학교에서 항상 애정어린 마음으로 가르쳐 주신 교수님들과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박경희 선생님, 김문주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와 친구해 준 사랑하는 친구들, 동기들, 선배 그리고 좋아하는 언니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제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익숙한 주제를 남다르게 펼쳐"

    <최해경·신경림·김명인>

올해의 시 부문은 응모자의 양과 질에서 예년을 압도하였다. 최종심사로 넘겨진 20여 분의 시편들은 면면에서 저마다의 솜씨와 개성이 두드러졌다. 심사위원들은 숙고를 거듭한 끝에 조은수씨의 '통장정리' 외, 김상윤씨의 '달빛 충전소' 외, 이인주씨의 '모자를 쓴 사철나무' 외, 최해경씨의 '라훌라' 외 등을 마침내 선고 대상으로 압축시켰다.

조은수씨의 장점은 일상이라는 거울 속에 가둬넣은 마음을 시의 세필(細筆)로 그려가는 섬세함인데, 오히려 그 점이 시를 소품이라는 너무 아담한 그릇에 담아버린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판단되었다.

김상윤씨의 시편에서는 시어의 정제를 실현하면서도 환상을 끌어안는 견고한 짜임새가 돋보였다. 그럼에도 생각의 결이나 매듭을 좀더 활달한 상상력으로 풀어헤쳤으면 한층 잘 읽히는 작품들을 선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인주씨의 경우는 환상을 리듬으로 교직시켜 완결로 이끄는 사유의 힘이 매력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관찰과 묘사의 굴곡에 겹쳐드는 말의 파문이 편편마다 시의 파장으로 읽혀져서 응모 시 전체를 출렁거리게 하고 있다.

최해경씨는 시가 감싸 안아야 할 삶의 풍경과 음영을 표 나지않게 드러내면서도 포개진 환상을 읽게 만든다. 그러나 감동적인 것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선의 투명성이 옅었더라면 그의 작품들 또한 익숙한 주제의 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자들은 마지막까지 이인주씨와 최해경씨의 시편들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읽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라훌라'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익숙한 주제라도 남다르게 펼쳐보려는 최씨의 노력이 이씨에게 거의 기울었던 저울추를 그의 편으로 끌어당긴 까닭이다.


*최해경
△2005년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예정
△2002년 용아 백일장 운문부 장려상
△2002년 토지 백일장 운문부 장원
△1982년 전남 순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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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매일신문

    집시가 된 신밧드



    권 기 호



    대리석 바닥 틈으로 발을 밀어 넣은 이끼
    널브러진 빵조각을 뜯어먹는 푸른 곰팡이
    빌붙어 사는 것들도 푸르를 수 있는 그 곳
    서울역 지하도 바닥에 사내가 잠들어 있다
    종일토록 모래를 이고 날랐을 머리칼 사이
    탈출한 사막의 알갱이들도 빌붙어 잠잔다
    맹독의 백사처럼 또아리 틀고 치켜든 고개
    수건 하나만 사내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신밧드처럼 사내는 저 수건을 머리에 감고
    대 낮 온통 사막을 짊어 날랐을 것이다

    신밧드를 태우고 날던 양탄자 끝이 풀려있다
    드문드문 찢어진 흔적, 상처들이 선명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어둠에 길을 잃은 양탄자
    캄캄한 비행, 도시 어느 빌딩 숲을 헤치다
    빌딩을 박고 도시 아래로 추락했을 것이다
    사고는 어린 신밧드의 꿈들을 바스러뜨리고
    양탄자의 나는 기능을 상실케 했던 것이
    영혼은 밤이면 막차를 타고 어디로 떠나는가
    멀리 해가 뜨는 사막을 비행하는 꿈으로
    양탄자를 돌돌 말고 잠든 신밧드

    그가 따뜻해 보이는 이유는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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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중 심



        심 수 향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결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둘렀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새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추수 끝난 들녘에 종대로 서 있는 배추들
    늦가을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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