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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윤극영의 동요를 바라보는 한 관점  

*다음 글은 2003년 4월 25일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있었던,  [탄생100주년기념문학인제] 기념심포지움에서 발표한 황현산 선생님의 주제발표 내용입니다. 인용한 시 '도시'에서 오자가 났던 부분(면피-->회피)을 바로잡아 놓았으므로, 인용이 필요하신 분은 여기 둔 원고를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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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100주년기념문학인제] 심포지움/윤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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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과 어린이


- 윤극영의 동요를 바라보는 한 관점

                                             황현산(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윤극영은 다양한 재능을 지닌 예술인이었다.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유족들이 발표한 유고들과 책자들을 살펴보면, 그는 110여 편의 동요를 작곡하였으며, 동요․동시 100편, 동화 12편, 시 121편, 수필 또는 시론에 해당하는 산문 60편, 중편소설 1편, 시나리오 1편, 그리고 자서전 1편을 남겼다. 그는 어린이운동가였으며, 문화예술단체의 조직․운영자로도, 직업적 성악가로도 활약하였다. 그러나 윤극영은 일반에게 동요․동시를 쓰고 작곡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것처럼, 사실상 그 재능의 본령이 거기 있었고 한국 현대문학에 대한 그의 기여도 또한 거기 있었다. 그가 한국 최초의 전문적 동요 작가로 우리 아동문학에 하나의 기원을 세우고 오랫동안 그 전범이 되어온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발표는 그가 쓴 동요․동시의 특성을, 그의 다른 글들과의 관계 속에서, 간략하게 살펴보는 데 있다.

 그가 동요에 특별한 열정을 지니고, 자기 창조력이 발휘될 수 있는 기틀을 거기서 찾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우선 소파 방정환과의 만남이 있다.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23년 동경에서 방정환·손진태·조재호·마해송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할 때, 소파가 “우리는 내일을 위하여 내일을 길러야 한다”며 “영원히 민족의 현재를 도맡을 이 현재의 아이들”이란 표현으로 회원들을 격려할 때, 그는 이 말에 담긴 민족 이데올로기를 “총독 치하에 병들고 있는 우리네 아이들을 구출하여 본래의 제 빛을 내게 하자면 우리의 애꿎은 전습적 악혈을 여과하여 청순하고도 숭고한 기품을 양성하는 데 치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자전 ꡔ반달은 비정인가ꡕ 제4회, ꡔ별ꡕ지, 1965년 1월호). 그가 보기에 민족의 미래인 아이들은 식민세력의 압정과 나쁜 구습 사이에 끼어 있다. “전습의 악혈”이라는 표현에는 이광수류의 민족개조론의 관념이 들어 있는데, 이때 어린이들은 새로운 역사를 위한 단절의 자리가 된다. 이 단절은 이후 윤극영의 동요를 특징짓는 중요한 조건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윤극영이 동요를 자신의 전문분야로 삼게 된 과정에는, 이런 민족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당시 서양음악에 대한 우리의 수용 역량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24년 소격동 자택에 ‘一聲堂’을 짓고 새로운 음악을 가르치고 대중화하려 할 때, 남녀가 함께 노래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하던 환경에서, 그가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은 노래에 대한 전통적 태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어린이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해에 그가 조직한 ‘다알리아회’는 우리말 동요를 창작하고 보급하는 단체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동요인 「반달」을 비롯해서 「설날」 「할미꽃」「고기잡이」 등 그의 대표작들을 작사 작곡한 것이 바로 다알리아회 시절의 일이다. 그의 음악당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달갑지 않아 그는 끊임없이 관습과 싸워야 했다. 어린이는 그의 예술적 재능이 개화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으며, 어느 정도는 닫혀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예술 장르를 선택하면서 동시에 어린이들을 선택했던 것이며, 이 역시 그의 동요를 특징짓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어린이를 단절의 자리라고 말할 때의 이 단절은 우선 과거와의 단절이었지만 상당 부분은 현실과의 단절이기도 하였다. 윤극영은 자신의 창조활동을 줄곧 민족적 사회적 책무감과 연결시키고 있지만, 자신의 동요 속에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적 내용을 담지는 않았다. 그의 문학세계에서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 사이에는 두터운 칸막이벽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칸막이벽은 아이들을 그 안에 가두기 위해서이기보다는 외부 풍속의 접근을 차단하는데 더 큰 기능이 있었기에 그 안의 세계는 점령지에 둘러싸인 마지막 자유의 땅과 방불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는 생활현장과 주변의 자연 사물에서 동요의 소재를 얻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환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내용은 없지만, 주제를 다루는 특별한 태도에 의해 그 내용은 삶의 구체적 드라마와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윤극영은 이 태도를  그의 수백 편 동요에서 고루 유지하고 있었기에, 어린이의 격리 보호가 그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숨은 주제이자 그 사회적 내용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특징은 그의 초기 동요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초기의 걸작 「반달」에 대해 윤극영 자신은 이 노래가 누이를 잃은 설움을 기본 정조로 깔고 있으며, 민족의 진로를 찾으려는 염원으로 노랫말의 결론을 삼았다고 말하며, “멀리서 반짝반짝 비추이는 건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로 끝나는 제2절을 생략하지 말고 불러줄 것을 부탁한다(참조, 유고 「내가 지은 애창곡」과 「나의 노래비」). 그러나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는 구절에서 곧바로 죽음에 대한 상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특히 “가기도 잘 간다”는 대목에서는 잔잔한 물결 위로 희망을 담고 흘러가는 쪽배를 연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깊고 청량한 그리움이 있지만, 그 동경의 내용은 순결할 만큼 비개인적이다. “샛별 등대”가 어둠 속에서 진로를 모색하고 창출하려는 의지와 관련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 염원이 특정한 사회의 시대적 명제라기보다는 인류학적 소망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옳다. 이 노래는 식민지 치하의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달에 대해 동일한 정서적 전통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같은 정한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人民音樂社에서 발간한 한 어린이 음악 잡지는 이 노래를 “조선민요”로 소개하며, 그 악보와 중국어로 번역된 노랫말을 싣고 있다(ꡔ兒童音樂ꡕ, 1984년 제3기, 표3). 이 창작곡이 민요로 오해된 데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문화정보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탓도 있고, 8분의 6박자의 서정성 깊은 박자와 도미솔을 위주로 한 소박한 선율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노래가 한 시대의 구체적 애환을 전달하기보다 인간의 기본 정서에 닿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식민 당국의 가혹한 압제와 음악에 대한 일반의 몰이해를 염두에 둔다면, 이 노래가 획득한 보편적 정서는 현실을 초극하여 이룩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을 괄호 속에 넣어 미래의 숙제로 남겨둔 데서 비롯된 것이리라고 판단된다.
   「설날」도 우리가 오랫동안, 특히 가난한 시절에 많이 불렀던 노래이다. 이 동요에는 호사로운 설빔과 풍족한 세찬, 널뛰기와 윷놀이 같은 흥겨운 유희, 호령과 꾸지람이 일시 중단된 가정 분위기 등이 간략하면서도 소상하게 열거된다. 그러나 이 노래는 세시의 풍정만을 흥겹게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상으로부터 단절된 시간의 개념이 들어 있다. 윤극영은 이 「설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다알리아 회원들이 일성당에 모여 노래를 연습하던 광경의 묘사를 덧붙이곤 한다. 이를 테면 유고 「그 시절의 人情, 風情」에서 그는 이 노래의 내용과 관련하여 설날의 아름다운 풍습을 상기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 “이런 풍정을 마음껏 담아 본 설날노래에 이어 나는 다알리아 회원에 싸여서 창작생활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 시절 우리들의 살림은 가난했다. 그러나 윤택했다. 콩 호떡 누룽지 쪼각에 맛을 붙였으며 때로는 왕눈사탕을 굴리다 못해 한쪽 볼에 혹이 생겼다가도 느닷없이 피아노가 전주를 울리면 어느덧 그것을 빼어들고 입술을 바로잡았다. 거기서 흐르는 노래 따라 진정 꿀맛이었다.” 그에게 동요를 만들고 아이들과 함께 연습하는 시간은 설날의 특별한 아우라를 까치의 예고처럼 예행연습하는 것이며, 그 감정을 그 이후로까지 연장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새해 첫날이 오면 다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이 노래는 제 때가 아니라도 그런 기분을 내가며 늘상 불리곤 했다.” 이것은 같은 유고에서 윤극영 자신이 하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설날의 행복과 노래하는 시간의 다사로움이 아니라, 그 기쁨과 다정함이 앞뒤로 불행한 시간과 적대적인 시선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행과 적대적인 시선의 포위가 그 도려내어진 시간에 신비로운 봉인으로 구실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기잡이」는 경쾌하고 오락적 기능이 강한 노래이다. 노랫말은 그의 다른 동요와 마찬가지로 평이하지만 따져보면 의문이 없지 않다. 첫 대목에서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라고 묻는데, 강에서의 고기잡이와 바다에서의 고기잡이가 그 규모와 방법에서 같은 것일 수 없다. 노래를 만든 사람과 부르는 사람이 고기잡이 자체보다는 말의 반복이 만들어 주는 선율의 흥분을 더 즐겼을 것이 틀림없다. 전체가 4행련 3절로 되어 있는 이 노래는 고기잡이를 떠나서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오겠다는 계획을 매우 간략하게 제시하는 가운데, 선생님과 함께 떠나고 싶은 학생들과 그럴 수 없는 선생님간의 인간관계가 끼어들어 일종의 클로즈업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인상을 남긴다. 이는 선생과 학생들이 맺고 있는 돈독한 애정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현실의 벽과 무게에 대해 어른과 아이들이 느끼는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하는 수 있나요 우리만 가야지”라고 말할 때 현실의 암담한 무게는 떠나는 아이들의 등 뒤에 과거의 몫으로 남는다. 윤극영은 이 「고기잡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유고 「漁村의 力學」에서 그는 이 동요와 관련하여, 헤밍웨이의 ꡔ노인과 바다ꡕ로 대표되는 “낭만과 의지의 역학”을 언급한 다음, 강과 바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투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윤극영에게 이 경쾌한 「고기잡이」는 도래할 시대의 주인인 아이들이 거대한 강하나 난바다에서 벌리기를 기대하는 모험의 도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해의 모험은 계획단계에서부터 한나절에 끝날 소풍으로 축약된다. 고기잡이에 참여할 수 없는 어른, 현실의 비루함과 야만스러움을 그만큼 크게 느끼는 어른의 심려가 아이들이 현실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금했던 것이다.
   아이들과 현실의 대면을 꺼리는 어른의 검열은 자주 아이들이 해야 할 생각을 어른이 대신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기도 한다. 윤극영의 동요에서 아이들은 진정한 개인으로 등장하거나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의 동요에서 사물에 대한 정서는 한 아이가 특정한 정황에서 특별한 깊이로 획득하는 정서가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모든 정황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정서이다. 이는 그에게 사물에 대한 구체적 감각이 부족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어떤 미미한 물건과 생활사에서도 적절한 시취를 끌어낼 줄 아는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와 문화가 병들어 있는 시대에 어떤 종류의 날카로운 감각도 현실에 대한 불행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아는 그는 칼을 갑 속에 묻듯 감각의 날을 다스렸다.
 이 동요들은 그가 조국의 해방을 맞고 현실의 조건이 어느 정도 개선된 이후에 쓴 중편소설이나 본격 시 작품들과 이점에서 큰 차이를 드러낸다. 내용상으로 1960년대 중반에 썼던 것으로 보이는 중편소설 「누구의 祭物이냐」는 어느 가난한 작가의 아내가 생활고에 쫓겨 다방의 마담으로 일할 것을 결심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현실에 대한 묘사는 사실적이며, 사태의 추이와 정황을 분석할 때 작가는 거의 자연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는 정치와 문화와 사회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성찰이 있고, 문인사회의 독특한 인간관계와 착종되는 애정에 대한 심리적 묘사가 있다. 그리고 생생하게 움직이는 관능의 선이 소설 전체의 문체를 이끌어 간다. 시에서도 이 태도는 마찬가지다. 모두 120편이 넘는 시에서 시인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바라보며, 늘 개성적인 자기 목소리로 도시생활의 서정성을 드러낸다. 「都市」라는 시에서 한 연을 적는다.

한 번 더 都市는 벌의집. 깊이 묻힌 盤石에 구녕을 내며, 깍아지른
절벽에 수 없이 들창을 열어, 인간의 室息을 免除하고 굳어가는
地面은 살어름과 같다. 그러나 回避의 狡猾이 미끄러워, 우연히
樂園도 되는데, 때로는 園丁의 손끝이 불을 일으켜 청둥의 過剩 - 터지는
벌집 - 群衆의 벽력이, 通路가 잘리는 채로 무인도의 피바다를 演出도 하리라

 시선은 날카롭고 감각은 선연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독창적이다. 시인이 주제로 삼고 있는바 도시적 인간관계의 회피적 평화도 반자연적인 생활이 맞게 될 참화도 모두가 우연인데,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와 이미지들은 필연적인 고리를 지니고 있다.
 이 개성적인 감각을 그의 동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어린이들이 불러야 할 노래와 어른들이 읊게 될 시가 같은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실을 바라볼 때와 똑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어린이의 개성적 정서를 바라보는 그의 창작상의 본질적인 태도에 있다. 그는 한 아이가 느낄 수도 있을 깊은 감각을 현실과 함께 괄호 속에 묶어 두었다. 감각은 인간이 현실과 만나는 접점이며, 그 깊이는 곧 불안과 비애와 절망감의 깊이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마음의 균형과 분별력을 잃을 것이 두려워 아이를 결코 무대에 등장시키지 않았던 서양 고전주의자들을 닮았다. 그러나 고전주의자들이 염려한 것은 어른이었지만 우리의 동요 작가가 염려한 것은 아이였다.
 윤극영은 말년에 이르러 드물게나마 자연에 대한 선연한 감정을 아이의 독자적 목소리로 말하는 동시를 썼다. 다음은 「꽃길」의 전문이다.

    엄마 하고 불렀더니
    아빠 얼굴 떠오르고
    아빠 하고 불렀더니
    엄마가 웃으며 달려 오신다

    왜 안 그래
    산이 산이 높아도 물 속에 깃들고
    물이 물이 깊어도 그 소리 산을 넘는데
    바람은 울긋불긋 무지개다리

    옥이야 철이야 모두 오너라
    줄 대어 그 위에서 발을 구르면
    무겁다곤 안 할거야 떠받쳐 줄거야
    좋아라 가락 높여 삼천리 꽃길을 가자

 이 동시는 아이를 격려하는 어른의 교훈적인 목소리로 마지막 연을 마감하고 있지만, 가족간의 기이할 정도로 깊은 정을 자연에 대한 색다른 시선과 일치시키는 시선은 분명 제 감정의 깊이를 스스로 짚을 줄 아는 한 아이의 것이다.
 어린이들이 어린이가 되고, 자연 사물에 대한 독자적 감각의 획득이 자아의 발견과 일치되기까지 이렇듯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윤극영에게서 한 민족의 장래가 한 아이의 자아로 발전되는 이 과정은 한국현대문학의 전개과정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한 집단의 역사가 그에 속한 개인에게서 반복된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민족 역사의 미래에서 시작하여 한 아이의 성장을 보게 되는 윤극영 문학의 발전은 그 뛰어난 예시가 된다고 말함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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