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5/12(일) 19:20 (MSIE5.5) 211.221.137.48 1024x768
신동엽 시인의 산문 한 편 올립니다  

백제의 왕도 부여 취재를 가서, 신동엽 시인의 생가와 시비를 둘러보았습니다. 돌아와서 읽는 그의 산문 한편이 참 신랄합니다. 33년 전에 쓴 글이 어제 아침에 쓴 글 같군요. 여기 올려놓고 자주 읽으며, 반성과 희망의 계기로 삼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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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상황·시

시인(詩人)· 가인(歌人)· 시업가(詩業家)


 신 동 엽

 몇 년 전 나는 모 지상에서 오늘의 한국시단을 조감하면서 그 경향을 다섯 가지 색깔로 분류해 본 적이 있다.
 향토시인들, 도시감각파들, 언어세공파들, 시정(市井)시인들, 참여시인들.
 바람 따스한 이조의 정자 밑으로, 신라·백제의 논밭으로, 그리고 외래침략자들의 횡포 밑의 전원 아래로 면면히 깔려, 그 향토적이고도 재래적인 자세로 토착적 인생을 생리(生理)해 가고 있는 일군의 식물성시인들.
 이 분들은 한국풍토의 규범적인 선비들로서 그 많은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늘까지 예술지상주의적 변두리에서 그 사슴 같은 순수서정을 추구하여 살아왔다. 지금도 농촌에 가면 갓 쓴 할아버지들이 긴 장죽을 물고 봄·가을 유우(儒友)들을 찾아다니며 풍월을 읊조린다. 그들의 시어 속에는 한국의 드높은 하늘, 그 투명한 바람과 같은 정서가 깃들여 있다.
 그러나 왕조적인 이조사회에 풍월을 영탄하는 양반문학과 압제에 항거한 서민문학이 상립(相立)해 왔었음을 상기하면서, 오늘 이 분들이 처한 역사적·사회적 위치를 고려해 본다면 우리들은 여기에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향토시인들이 이렇게 전원의 아취(雅趣) 속에서 산수의 변경을 소요하고 있을 때, 거기 반발하며 약간 금속성이 섞인 언어를 가지고 머리를 들기 시작한 일군의 시인들, 이게 바로 도시감각파다.
 왕조사회에서 상층지식계급에 왕가적인 언어와 감성으로 풍월에의 율조를 가야금 뜯고 있을 때, 현대사회에서의 상층지식인들은 도시적인 언어와 구미적인 기교로 유리그릇을 닦고 있었다.
 언어세공파들은 책상 위에 단어상자를 쏟아놓고 거기에서 핀 세트로 마음에 드는 빛깔의 날말들을 골라 원고지 위에 나열한다.
 이 분들은 그 정신적 고향을 대학 실험실 속에 소속시키고 있다.
 좀 이상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이 분들은 구두장이가 구두 부속품을 만들고 브로치 상인이 브로치를 만들어 팔 듯이 단어를 화구재료로 삼아 도시 백화점문화를 장식해 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분들은 시에서 문맥적인 의미를 완전히 거세시킨다. 수년 전부터 자주 논란되었던 현대시의 난해성을, 그 현대성을 구성하는 주요 불가결한 여건처럼 옹호해 온 것이 바로 이 분들과 앞에서 말한 도시감각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한편 시작에 <지적>참여를 주창한 사람들도 바로 이 분들이었는데, 이 분들이 말하고 있는 <지적>이라고 하는 말은, 역사를 투시하고 사물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눈으로서의 지성이 아니라 다만 언어세공을 노닥거리는 데 있어서의 기교상의 손재주·눈재주를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정시인들은 유리그릇 닦기나 낱말 주워맞추기와 같은 손재주꾼들이 아니라 육성의 시인들이라는 점에서 향토시인들과 그 체온을 같이한다.
 향토시인들이 전원의 학(鶴)이나 달을 목가적인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면 시정시인들은 현대 상업도시의 급격한 비대로 말미암아 도시로 흡수되어 오는 농어촌 아가씨들의 애환, 그 애환에 후광입은 검은 도시의 하수도와 월급봉투의 서정을 상공업어적(商工業語的)인 목소리로 노래한다.
 참여시인들. 이 분들은 시는 <기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서정만도 아니라고 얘기한다.
  시는 자아와 세계에의 개안(開眼)이며, 자아와 이웃에의 애정이며, 그 성실성의 결정이라고 말한다.
 이상 다섯가지의 색깔로 오늘의 한국 시단을 개관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감도는 결코 고정되어 있는 그림도 아니며 또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살아있는 현실이란 늘 꿈틀거려 흘러가며 변동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보는 이의 눈에 따라서 세상은 한 가지 색으로도 5백 가지 색으로도 보이는 법이니까.
 그래서 이번엔 나는  그 또한 한 가지의 눈으로 오늘의 한국시의 정신구조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또 한 가지의 눈에 비친 한국시는 세가지 계층으로 유별되었다(물론 이러한 작업은 나 자신의 정서와 반성과 구도자세를 위해서만 소용되는 것이겠지만).

시업가들과 가인들과 시인

 여기서 <시인>이라고 말할 때의 <인>자는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다.
 돈벌이와 관계있는 소위 <쟁이>들의 직업명사 끝엔 <가(家)나 <사(師)>가 붙는다.
 이발사·구두수선가·요리사·의사·초상화가·성악가·소설가·철학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유독 시인만은 시업가라고 부르지 않고 <인>자를 붙여준다. 그리고 그 옆에 <철인(哲人)>이 역시 <인(人)>자를 달고 훨훨 소요하고 있다.
 시인과 철인. 무슨 업가가 아닌 시인과 철인들은 과연 무엇을 천부받고 태어난 사람들일까.
 철인은 인생과 세계의 본질을 그 맑은 예지로 통찰하고 비판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인생과 세계의 본질을 그 맑은 예지만으로써가 아니라 다스운 감성으로 통찰하여 언어로 승화시키는 사람이다.
 오늘의 문명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분업(分業)>일 것이다.
 설교는 목사가, 성가는 성가대가, 성서는 성서 전문연구가가 떠맡아 가고 있다. 한 사람의 인체에도 이미 수백명의 분업의사가 엉겨붙어 제가끔 눈·코·귀·아랫배·윗배 가운데 한 가지씩만을 떼어가지고 달아났다. 세상은 맹목기능업이 세계로 화하고 말았다. 멀지 않아 손톱·발톱 미장전문의가 새로 나타나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세상이 되었다.
 철학교수는 있어도 철인은 없다. 시업가는 있어도 시인은 드물다.
 상업문화, 물질만능의 도시문화 속에서 시인스런 소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란한 영업간판들에 매료되어 수공예품 상점 옆에다 <시업> 간판을 붙여 놓았다.
 그리하여 이웃 가게 사람들이 손끝으로 인형·도자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은 언어를 재료로 하여 손끝으로 언어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경우 그들은 <시인>이 아니라 <시업가>인 것이다.
 가인(歌人)들의 세계가 있다. 이들에게는 <인>자를 붙여주는 것이 마땅하리라. 왜냐하면 그들은 근대 상업자본주의가 전성기를 이루기 전의 이조 전원 속에다 그 정신적 소요의 뿌리를 늘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가인들은 노래한다. 두뇌의 참여를 거부하고 그 부드러운 가슴만으로 노래한다. 손끝재주를 부리거나 기구망신스런 흉내를 내려고 하거나 단어 상자를 쏟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는 눈>이 없다. 세계의 본질을 통찰하는 눈. 그리하여 자아를 갈아엎는 부단한 수도자의 자세.
 노래는 있어도 참여, 즉 자기와 자기 이웃에의 인간적인 애정,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시인>에게 기대해 본다.
 시가 주문(呪文) 대신으로 씨족이나 부락공동체의 정신적 주인역을 맡아가고 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한 사회에서의 시는 정치·종교·과학의 종합적 현현체(顯現體)로서 민중 앞에 빛났었을 것이다. 인류문화의 위대했던 여명기에 우리는 이러한 시인의 왕국을 가졌었다. 성서나 불경, 수운의 『동경대전(東經大典)』 또는 기타 여러 가지의 예언서 속의 언어들(나는 그것을 시라고 믿고 있다)은 지금까지도 2천여년 전의 그 향기높은 예술적·학술적 영향력으로 동서의 많은 문명 민중에게 짙은 구원의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다.
 오늘의 시인들은 정치는 정치 맹목기능자에게, 종교는 종교 전문 기능자에게, 사상은 직업교수에게 위임해 버리고 자기들은 단어상자나 쏟아놓고 앉아서 핀센트 장난이나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와 이웃과 세계, 그 인간의 구원의 역사밭을 갈아엎어 우리들의 내질(內質)을 통찰하여 그 영원의 하늘을, 그 영원의 평화를 슬프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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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신문' 1969년 3월 24일 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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