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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박양균/立像  

*이 글은 황형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현대시다락방>에서 옮겼습니다. 좋은 글을 주신 황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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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제15화
 

박양균과 오르페우스의 시선



       
                                                황 현 산 (문학평론가)



단기 4294년, 그러니까 1961년에, 신구문화사에서 <전후문학전집>의 하나로 발간한 『韓國 戰後 問題詩集』에는 50년대에 크게 활동하였거나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서른 세 시인의 시가 실려 있다. 고원 고은 구상 구자운 김관식 김남조 김수영 김윤성 김종문 김종삼 김춘수 민재식 박봉우 박성룡 박양균 박재삼 박태진 박희진 성찬경 신동문 신동집 유정 이동주 이원섭 이형기 전봉건 전영경 정한모 조병화 조향 황금찬이 바로 그들이다. 손가락을 꼽아보면 현재까지 시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시인들과 작고한 시인들이 반반인 것으로 계산된다. 이 가운데 많은 시인들이 크게 문명을 떨치고 한국 최현대시사의 기둥이 되었으며, 몇 사람은 그 작품이 교과서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잊혀진 시인들도 없지 않다.

유명한 시인들이 유명해진 이유를 되짚어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잊혀진 시인들이 잊혀진 이유는 그렇게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완전히 잊혀졌다고는 할 수 없어도 크게 거론되지 못한 시인들 가운데 하나인 朴暘均의 시를 지금 살펴보면, 이 시인이 시의 언어에 매우 고양된 감각을 지녔던 것이 분명하며,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한 시 이론을 확보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각고한 흔적 또한 역력하다. 거기서 얻어진 시작품들도 한국 현대시의 가장 훌륭한 결실들과 같은 자리에서 거론되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가 합당한 정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 역시 간단하게 추스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의 <난해시>를 받아들이기에 힘겨웠던 우리 문단의 여러 여건을 우선 상기해야 할 것 같다.

우리 시사의 귀중한 자산 가운데 하나일 그의 작업들을 어둠 속에 묻어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의 시 한 편을 골라 설명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겠다. 다음은 그의 두 번째 시집 『氷河』에서 뽑은 시 「立像」의 전문이다.



    地球가 도는 것이 눈에 보인다면

    그것은 꼭 그렇게 돌고 있었다.



    모양지을 수 없으면서도

    빈 주먹을 쥐어 볼냥이면 무엇인지 體溫이 오고

    눈짓으로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따시한 것이라 생각해 보았으나

    구태 찬 것이라 여겨지기만 한다.



    그건 없는 故鄕처럼 그리워지는 것이었으며

    그와 나는 또한 그러한 距離만은 언제나 保存할 수 있을 것만 같었다.



    때로 터지는 열매알같은 보람은 있었으나 그 아련함에 다하지 못한 젊음의 안타까움이 있어 直接的인 對決을 作業하던 날



    그것은 내 곁에 와 停止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만져볼 수 없는 것이었으며 모양 지을 수도 없는 것이었으며

    아무런 觸感도 느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실은 하나의 點으로서 나의 가슴 한복판에 와 부딪치곤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야 다시는 메꿀 수 없는 허전한 空間에

    가슴의 그 무거운 點과 나는

    가장 가까운 距離를 가지게 되면서



    그건 움직일 수 없는

    또한 잇닿을 수 없는 立像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곁에서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도 없이 돌고 있는 것이었다.1)



시는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육체적 감각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운동과 위치가 짐작된다는 점에서 구체적이면서도, 그에 대한 감각을 물리적으로 서술하는 일이 결코 성공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관념적이다. 그러나 이 서술의 실패가 곧 시의 실패는 아니다. 그것의 실체가 곧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구처럼, - 다시 말해서  한 축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고른 속도로, - 자전하고 있다. 그것이 회전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사각형 종이를 세워 돌리면 원통처럼 보이고, 동전을 돌리면 구슬처럼 보인다. 회전체 속에는 실체와 비실체가 섞여 있다. 시인이 말하려는 그것은 운동을 통해서만 실체처럼 나타난다.

제2연은 부연 설명이다. 그것은 일정한 형태를 지니지는 않았다. 시인은 <無形>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 말은 형태가 고정되지 않았다는 뜻에서부터 물리적 형체 자체가 없다는 뜻까지를 포함한다. 시인은 그것을 쥐어보려 하나 주먹은 늘 빈 주멱이다. 그 빈 주먹이 어떤 온도를 느낀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주먹 그 자체의 체온일 뿐이리라. 다시 말해서, 붙잡히지 않음이 오히려 그것을, 그 실체가 아니라 그 실체의 특수성을, 증명한다. 그에 대한 시각의 표현은 더 미묘하다. 눈짓으로는 그것을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보이지 않으나 시각에 어떤 인상을 만들고 있다. 짧게 말해서, 그것은 감각을 넘어선 것이지만, 그에 대한 상상은 감각적이다.

제3연에서 시인은 그것의 온도에 대해 상반된 추측을 한다. 따시함이란 그것이 지녔을 본래의 온도에 대한 추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태여 찬 것이라 여겨지기만" 하는데, 이 차거움은 시인의 육체가 그것을 접촉할 때 느낄 온도이며, 한 존재의 본질과 그에 대한 육체적 감각 사이의 거리감이다. 이 두 온도 사이에는 그것에 대한 시인의 신앙고백 같은 것이 있다. 믿는 자는 언제나 자신의 몫인 차거움으로 저 따뜻함을 안다.

신앙의 가장 큰 원기일 그리움에 관해 제4연이 말한다. 그것은 고향만큼 따뜻하지만 고향보다 더 먼 곳에 있다. "그러한 距離"는 내 일상의 초라함과 그것 사이의 거대한 간격일 터이지만, 또한 그 아득함으로 오히려 그 존재를 확신하는는 나와 그것 사이의 유대감이다. "그릴 수 있을 것만", "여겨지기만", "그러한 距離만" - 벌써 세 번이나 나타난 이 <만> 속에는 그것이 아득하다는 느낌과 손에 잡힐 것 같다는 느낌이 한데 겹쳐 있다. 이 거리는 사실상 모든 그리움의 거리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리움으로만 유지되는 그것과의 관계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따금 시인에게 어떤 재능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거기서 결실을 얻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의 전체를 현실 속에 드러내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제5연은 그 관계를 개선하려 했던 한 시도에 관해 처음으로 말한다. 시인은 "直接的인 對決을 作業"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을 현실 속에서 확연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단 1행으로 그치는 제6연은 이 작업의 성공과 실패에 관해 말한다. 그것은 "내 곁에" 다가왔지만, 그러나 "停止하고 마는 것이었다". 시인은 그것을 현실 속에 구체화할 수는 있었지만, 그 전체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 실체 자체이기도 한 운동의 영원함을 잃어버리고 운동의 한 파편으로 고정되어 현실 속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나타나지 않았다 : "실은 하나의 點으로서 나의 가슴 한복판에 와 부딪치곤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순간의 한 파편으로 파악된 그것은 무와 다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7연에서 제8연으로 이어지는 이 고백에는 비통함이 없지 않다. 시인은 이 대결 작업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것을 적어도 눈짓으로는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아련한 확신과, 그 온도와 촉감에 대한 기대를 잃었으며, 무엇보다도 "어제나 保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러한 거리"를 잃었다.

그 그리움의 거리는 "허전한 空間"으로 바뀌었으며, 그것의, 또는 그 운동의  죽은 모습인 "무거운 點"으로서만 시인과 가장 가까운 거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건 움직일 수 없는

  또한 잇닿을 수 없는 立像이 되고 만 것이었다.



본질적인 것은 죽음의 형식으로만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그것은 이제 다시 움직이지 않으며, 그것을 온전하게 만날 수 있으리라는 뜨거운 열망은 사라졌다. 시인 앞에 서 있는 立像은 저 그리움의 형해일 뿐이다.

마지막 연은 이 비통한 사연에 대한 해석이다. 저 먼 곳에서, 또는 "내 겉에서" 돌고 있었던 것은 다른 어떤 것도, "누구도" 아닌 "내가 돌고 있는 것이었"으며, 그의 그리움이 돌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이 시는 그리움을 현실적 가치로 교환하고, 파악할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 했던 시도에 대한 실패담이다.

실패담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장르를 형성한다. 순수시라고 이름 붙은 모든 시는 크게 보아 이 실패담의 장르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실 이 장르에서 초점은 실패에 있지 않다. 실패의 고백은 핵심을 실패의 주체인 시인이 아니라 실패로만 한순간 끌어안을 수 있었던 그 대상에게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며, 이때 중요한 것은 파악하지 <못함>이 아니라 파악할 수 <없음>이기 때문이다. 이 파악할 수 없음은 시의 신화에서 그 본질적 내용을 이루기도 한다. 오르페우스가 동굴을 벗어나며 밝은 빛 아래서 에우리디케를 파악하려 했을 때, 여자는 돌이킬 길 없이 죽음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러나 말은 이성이고 따라서 빛이며, 시는 말로 기억하기이며 따라서 빛 속에서 되돌아보기이다. 박양균이 <그것>과 성급하게 <직법적인 대결>을 벌렸던 순간은 뒤돌아보는 시선의 순간과 같다. 그의 <난해어법>은 이 시선의 순간을 가능한 한 멀리 연장하려는 그 나름의 방법이었다. 그의 시문법은 명증하지만 그의 산문에는 서투른 구석이 많다. 그는 말이 긑없이 어두운 동굴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1) 우리는 이 시를 김원중과 최종환이 엮은 『朴暘均 全集』(도서출판 새벽, 1996)에서 인용한다. 박양균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 주시고 이 전집을 구해 보내주신 문인수 시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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