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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90년대 문학의 가능성
*이 글은 [동서문학] 1999년 여름호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김정란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옮겨둡니다. 좋은 원고를 주신 김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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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문학의 가능성
-새로운 진정한 언어의 도래를 꿈꾸며
김 정 란 (시인, 문학평론가)
1. 가벼움인가, 경박성인가?
한국문학은 90년대를 기억할 것인가? 신문을 펴들면 거의 매주 대서특필되는 젊은 작가들 중 과연 몇 명이나 문학사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신문 지면의 확장으로 인해 현재 활발하게 활동중인 젊은 작가들은 전시대 작가들에 비해 훨씬더 빈번하게 매개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문학이 전시대 작가들이 이룩한 것만큼 탄탄한 문학성을 확보하고 있는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90년대 들어와 매스컴은 유난스럽게 <뜨는> 작가들 뒤를 쫓아다녔다. 그러나, 그 <스타작가>들 중 몇 명이나 시간에 버텨낼 수 있을까? 나로서는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 어렵다. 벌써 그들 중 몇몇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들 뒤를 따라다니며 팡파레를 울렸던 비평가들도 일제히 침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요란법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도대체, 무엇이, 왜, 문학인들로 하여금 그렇게 서둘러서 부실한 문학에 왕관을 씌워주게 만든 것일까?
나는 90년대에 활동중인 작가들이 모두 빈약한 문학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 중에는 상당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스타 작가>들의 경우, 거의 예외없이 부풀려져 있다. 그들이 얼마나 부풀려져 있는가 하면, 모 대학의 문예창작과 면접시험 때, "우리 나라에 노벨문학상을 받을만한 작가가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이 신세대작가 모씨를 거명했을 정도이다. 면접위원으로 참가했던 교수들은 매스컴에 의한 부풀리기가 결국 이렇게 엄청난 문학적 왜곡을 불러오고 말았다는 사실에 고소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90년대 문학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바로 이러한 언론플레이를 통한 부풀리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전시대 문학에 접근하듯이 문학적 논리만 가지고 90년대 문학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문학과 문학을 둘러싸고 생겨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은 이미 순문학적인 현상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90년대 문학 현상은 더 이상 순진한 문학적 논리로 분석할 수 없다. <자본>과 <권력>을 둘러싸고 생산되는 문학 외적 논리가 문학환경을 구조적으로 왜곡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문학 생산이 문예지 중심에서 출판사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문학논리가 출판논리(상업성)에 포섭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80년대 상황에서 한국문학은 에콜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문학성에 대한 대체적인 합의를 이루고 있었다. 황석영과 조세희와 김지하, 이성복과 황지우 등의 선택에는 에콜 간의 문학적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기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구의 몰락과 더불어 우리 사회는 빠른 속도로 소비사회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틈새를 타서 포스트모더니즘 유령이 한동안 돌아다녔다. 그리고 적지 않은 작가들이 이 유령의 어깨에 걸터타고 마구 거품을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심의 와해>라는 현상과 더불어 문예지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동시에 각 문학 진영은 문학 논리가 아니라, 시장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출판시장으로 떠밀려들어가게 되었다. 80년대에 강력한 영항력을 행사했던 한 거대 문학 진영은 동구권의 몰락에 잠시 비틀거리는 듯했으나, 아주 빠르게 <민중>을 <대중>으로 바꿔치기하면서 정치성에 기대어 유지해왔던 문학적 영향력을 상업적 영향력으로 변화시켰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극우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매체와 손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문학논리는 빠르게 와해되어 상업논리를 추종하게 되었다. 이제 문학성은 썰렁한 펭귄의 잠꼬대 정도로 폄하되고 있다. 팔리지 않는 문학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1).
90년대 한국문학의 문제점은 이처럼 문학 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제도적인 문제이며, 문학 행태론적인 문제이다. 모든 문제는 80년대 내내 정치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한국문학이 달라진 정치 환경에 차분하게 적응하면서 문학 논리를 개발하는 대신, 영향력 유지를 위해서 급하게 대중성 있는 문화논리를 추종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무 생각 없이 언론과 유착했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권력 욕망을 문학적으로 포장했다는 점으로 수렴된다. 똑같은 오류가 90년대 들어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등장한 또다른 문학진영에 의해 저질러진다. 이 진영은 진정으로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기도 전에 세대론적인 세불리기를 위해 부실한 문인들을 언론플레이를 통해 마구 부풀려놓았다. 이러한 행태가 90년대 한국문학의 부실화를 가속화시켰고, 문학을 둘러싼 모든 담론들을 허위의식으로 둘러싸 버렸다.
이미 세계는 80년대처럼 간단하지 않다. 세계는 달라졌으며, 80년대처럼 이마에 내천자를 그린 심각한 문학만이 의미있는 문학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따라서 다양한 목소리로 다양한 문학 형태를 통해 삶을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 한국문학은 80년대에 저질렀던 오류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정치사회적인 발언만으로 일관했던 80년대 못지 않은 편류 현상이 90년대 문학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너도 나도 팔리지 않는 <무거움>의 옷을 벗어버리고, 잘 팔리는 <가벼움>을 편들고 있다. 문학의 장으로부터 정치와 사회가 물러서고, 이제 인류가 문학의 이름으로 구축해 왔던 것을 진정으로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비로소 형성되었는데, 한국 문단은 서둘러 <가벼움>을 편듦으로써 부박한 거품 위에 스스로를 실어버리고, 다양성 자체를 질식시켜 버렸다. 90년대 한국문학(권력자들이 인지한 문학에 한정해서 말한다면)은 전혀 다양하지 않다. 90년대에 <스타>가 된 작가들이 한결같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코드는 <가벼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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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히려 <대중장르>로 알려져 있었던 영화에서는 진정한 작가주의 정신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는 기현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은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언어의식을 확보하고 있다. <영상문화학회 1차 워크샵>에서 발표했던 졸고 {이광모의 {아름다운 시절}의 이미지 언어 분석}을 참고할 것. 한국 영화계는 {아름다운 시절}에 대종상을 수여함으로써 오랫동안 홀로 고투한 이 외로운 감독의 작가주의의 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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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대적 심각성의 반대항에서 소환된 <가벼움>은 과연 <경박함>과 동의어일까? 서구인들이 이야기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과연 경박성일까? 실제로, 가벼움의 전도사 쿤데라의 작품이 가벼운 작품인가? 그의 가벼움이 내용도 없는 가벼움의 포즈인가? 그를 읽어보면, 오히려 그 철학적 무게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된다. 그의 가벼움은 무겁다무겁다 질린 서구가 자신을 즐겁게 해체한 결과이다. 그것은 구축에 자신이 있는 자가 구축적 건물 옆에 달아맨 별장 같은 것이다. 수틀리면, 언제라도 이미 지어놓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서구인들이 3-400년에 걸쳐 완성한 근대적 구축을 50년 남짓한 시간 동안에 집중적으로 완수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서구인들이 <가벼움>을 얘기한다고 해서, 같이 덩달아 마음놓고 춤출 여유가 없다. 우리에겐 돌아가 살 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대 이래 제대로 된 집을 지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작가들은 무엇을 믿고 그렇게 가벼운 것일까? 나는 문학이 겉모양까지 무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겉모양은 얼마든지 가벼울 수 있다. 그러나 내적으로 우리는 아직 한참 더 무거워야 한다. 근대적 구축을 포기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IMF로 인해 거품이 걷히고 드러난 바와 같이,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전근대적 요소를 누적된 상태로 안고 있는 문제적 사회이다. 서구인들이 가벼워졌다고 덩달아 가벼워질 계제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문학이 싸워야 할 대상은 더욱더 교묘해지고 교활해졌다. 문학의 소명은 오히려 더욱더 지적인 세련성으로 무장하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명확한 인문정신을 갖출 것을 요청하고 있다. 부실한 문학에 언론플레이를 통해 아우라를 씌워주는 얄팍한 눈속임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일에 매달릴 때가 아니다. 대중은 만만해 보이지만, 절대로 어리석지는 않다. 때가 되면, 대중이 한국문학 전체에 토탈 리콜을 요청할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논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대중에게 영합하느라 급급했던 한국문학은 통째로 터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면, 한국문학은 이제 싸구려 문화상품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벌써 그런 조짐이 상당히 나타나고 있다. 의식있는 독자들은 한국문학에 대한 기대를 많이 잃어버렸다. 이제 문학은 애매한 감상주의와 나르시즘에 빠져 세계와 현실에 대한 아무런 응전 눙력도 갖추지 못한, 감상적인 독자들이 자기위안을 위하여 전철 안에서 읽는 나르시스적이고 유아적인 옹알이 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2. 내면성인가, 사사로움인가?
이러한 유아적이고 감상적인 문학을 옹호하기 위해서 한국문단이 제시한 논리는 80년대의 사회철학의 맞은편에서 소환된 <개인성>이라는 코드였다. 이 비평적 착점은 분명히 옳다. 왜냐하면, 진정한 근대문학은 고독한 개인의 존재론적 각성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근대의 환경 안에서 문학하는 자는 공동체로부터 유리되어 자아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는 자이다. 그는 이미 자연적 자아의 정체성을 누릴 수 없다. 존재론적 증명서를 발급해 주던 신과 공동체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인식적으로 언어적으로 자아를 구축해야 한다. 매순간 명징한 의식으로 세계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고,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주체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주체는 극단적으로 명민할 수밖에 없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나를 바라보는 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존재 안에 별도의 내면 공간을 갖추고 있다. 대자의식의 공간이다. 이른 바, <내면성intimit >이라는 공간이 바로 그것이다. 그 공간에 자아구축의 내용물이 쌓여있는 것이다. 근대적 자의식의 구성과 더불어 언급되기 시작한 이 <내면성>이라는 말은, 이처럼 공동체를 떨어져나와 인식 주체가 된 한 개인이 자신의 존재의 골방에 마련해놓은 일종의 정신적?영적 사이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에서 한 개인은 구축의 힘으로 세계의 참견과 억압에 버텨내는 자율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80년대 내내 <집단성>의 억압에 시달렸던 근대적 자아가 <개인>의 형태로 공동체로부터 유리되어 <나>를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문학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문학>의 본질적인 소명 앞에 맞닥뜨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동안 한국문학을 휩쓸었던 열에 들뜬 정치적 <우리>로부터 결별하고 차갑고 냉정하며 명민한 탈정치적인 <내>가 되어야만 했다. 이제 정치?사회?경제 등 모든 외적 여건들로부터 결별하고 오로지 문학의 힘, 언어의 힘, 인식의 힘에 기대어 세계 앞에 마주서는 고독한 자아를 발생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이제 한국문학은 비로소 <우리>의 집단적 정체성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보편적 의미의 <존재>를 발생시킬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성>, 그것이 90년대가 스스로의 위상을 <신세대문학>이라고 정의하면서 처음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문학적 정체성의 제1 화두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비평가들이 세대론적 야망에 떠다밀려, 80년대 문학과 차별성을 보이기 시작한듯한 개인주의적인 감상적 언술에 덜컥 <내면문학>의 아우라를 씌워주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야심은 뒤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어쩌면 단순히 문학적 근대성을 피상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개인>과 <자아>, 그리고 <존재발생>을 혼동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 뒤돌아보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 버려서 기왕 가던 길이라고 그냥 밀어붙이기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경숙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소란이 바로 그것이다.
신경숙의 <개인성>은 <내면성>이 아니다. 그녀의 문학적 자아는 그냥 시골을 떠나와 혼자 있는 민감한 한 <개인>의 특성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녀의 문학의 집은 단층집, 아니 오히려, 방, 그녀 자신의 말마따나 {외딴 방}일뿐이다. 그녀의 문학의 집에는 구조가 없다. 그녀의 자아는 구축되어 있는 자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문단은 이 혼자 있는 착한 여성의 감상적 <개인성>을 <내면성>이라는 말로 바꿔치기 함으로써, 자연인인 개인을 인식적?언어적 구축에 의해 탄생하는 근대적 자아와 혼동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단순히 <私小說>에 불과한 문학을 <內省小說>로 격상시켰던 것이다. 내성소설은 80년대에 최수철에 의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장르이다. 그런데, 문학권력자들은 그의 문학적 성취를 깡그리 무시한 채, 잘 팔리는 90년대의 감상적 문학에게 왕관을 씌워주기 위해 뒷걸음질로 달려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70년대부터 진작 심오한 형이상학적 깊이까지 담보하고 있었던 박상륭의 문학은 손도 대지 못한 채 한 귀퉁이에 내팽개쳐두었다. 90년대 한국문학의 퇴행 징후는 뚜렷하다.
<내면문학>의 동의어처럼 여겨지는 신경숙의 문학은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이다. 그녀의 자아는 아직 공동체로부터 유리되지 못한 전근대적 자아이다. 그녀는 자아 구축의 터널 입구에도 와있지 않다. 그녀의 <나>는 인식적 주체, 즉 자아가 아니라, 자연인인 개인, <따로 있는 한 사람>일뿐이다.
시에서는 80년대 말에 기형도가 90년대의 문을 연다. <요절 신화>에 의해 그의 시적 가치는 지나치게 과장된 감이 없지 않으나, 그러한 점을 걷어내고 보더라도, 그의 시는 분명히 80년대의 전체적 경향으로부터 구분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평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도시적 서정>이나 <죽음에 대한 직관>을 드러낸 시들이 아니라, <내면 탐구> 계열의 시들이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다. 시인 자신에게도 낯설었던 듯한 이 시들은, 그 자신도 생전에 몰이해가 두려웠던 듯 발표하지 않았던 것으로, {입 속의 검은 잎} 뒤쪽에 <미발표 시들>로 편집되어 있다. 기형도를 신화적 존재로 만드는 데 그토록 열을 올려왔던 그의 동료 비평가들은, 흥미롭게도, 이 시들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또는 못한 채, 기형도가 문학청년 시절에 쓴듯한 순진한 서정시들에 주로 정성을 들이고 있다. 그것은, 이 비평가들이 겉보기와는 달리, 별로 <모던>하지 않으며, 아직도 낭만적 감상성으로부터 결별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것같다.
그러나 기형도의 새로움은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그 자신이 의식했든 못했든, 상당한 수준의 내면성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딱 한 편의 예만 들겠다.
아주 작았지만 무슨 소리가 들린 듯도 하여 내가 무심코 커튼을 걷었을 때, 맞은편 3층 건물의 어느 창문이 열리고 하얀 손목이 하나 튀어나와 시들은 푸른 꽃 서너 송이를 거리로 집어던지는 것이 보였다. 이파리들은 잠시 공중에 떠있어나볼까 하는 듯 나풀거리다가 제각기 다른 속도로 아래를 향해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나는 테이블로 돌아와 묵은 신문들을 뒤적였다. 그가 조금 전까지 서있던 자리에는 무엇이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 조금 고여 있었다. 스위치를 내리까 하고 팔목시계를 보았을 때 바늘은 이미 멈춰있었다. 나는 헛일삼아 바늘을 하루만큼 뒤로 돌렸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내가 대답을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말투로 물었을 때 그는 소란하게 웃었다. '그냥 거리로요' 출입구 쪽 계단에서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 명함꽂이, 만년필, 재떨이 등 모든 형체를 갖춘 것들마다 제각기 엷은 그늘이 바싹 붙어있는 게 보였고 무심결 나는 의자 뒤로 고개를 꺽었다. 아주 작았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다시 창가로 다가갔을 때 늘상 보아왔던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거리의 아주 작은 빈곳까지 들추며 지나갔다. '빈 틈이 없는 사물들이 어디 있을려구요' 맞은편 건물 2층 창문 밖으로 길게 빠져나온 더러운 분홍빛 커튼이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듯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형도, [소리1],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 서울, 1989, p. 118
이 시는 뒤로도 길게 이어지지만, 지면상 여기까지만 인용하고 분석하겠다. 이 시는 내면의 타자가 현현하는 순간을 적은 것이다. <그>는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니다. 그는 부재하는 유령, 모든 사물에 <바싹 붙어있는> <엷은 그늘>, <사물마다 있는 빈 틈>, 존재의 자명성 한복판에서 제기되는 비자명성이다. 그는 자기가 <거리>로 가는 자라고 말한다. 즉, 그는 <나>를 존재 바깥으로 끌고나가, 일상의, 개인적인 문맥으로부터, <사람들>이 있는 곳, 보편적 문맥 속으로 끌고나가는 자인 것이다. 자연인인 개인은 이제 내적 제의를 통하여 <자아>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 구축의 명령은 이 작품 안에서 건물의 상징주의로 표현된다. 우선 3층, 시들은 푸른색. 그리고 2층, 분홍색. <3층>과 <시들은 푸른 꽃>은 시적 화자가 아직 내면의 여성성(차갑고 축축한 바람)과 화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2층>의 <보아주지 않아 섭섭한> <분홍빛 커튼>도 이 제의 안에서 아직 시적 화자가 <너>를 만나지 못했으며, 따라서 아직 정화된 육체가 아닌 <더러운> 육체로 남아있음을 나타낸다. 분홍색이 존재의 <안>과 <살>의 내재성을 나타낸다면, 푸른색은 <밖>과 <영혼>의 초월성을 각기 상징하고 있다.
이 내면적 제의를 위해서 시인이 <묵은 신문>을 들춰보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 여행이 시간 여행이기 때문인데, 대체로 제의적 시간은 <뒤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원초성을 탐험하기 때문이다. 이 시간적 특성은 정신분석학적으로는 <모태회귀>의 상상력과 겹쳐지기도 한다. 이 작품 안에서는 <세계 바늘을 뒤로 돌리는> 행위로 <원초성으로의 귀환>은 한번 더 확인되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헛일>이라고 인지한다. 스스로 이 제의의 의미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마도, 이처럼, 진정한 자기자신이 될 수 없었던 고뇌가 기형도를 일찍 세상 밖으로 데리고 간 것은 아닐까? 그는 이런 시들을 써서 책상 서랍 속에 숨겨두고 있었다.
기형도가 쓰러진 자리에서 내면문학의 진정한 물줄기는 시작되고 있다. 이 계보에서 가장 뚜렷한 성취를 이루고 있는 문인들은 여성시인들이다. 기왕에 그녀들의 문학에 대해서 나는 적극적으로 지지 발언을 해왔거니와, 앞으로 좀더 정교한 작업을 통해서 왜 그녀들의 작업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밝히도록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시인들 사이에서는(특히 김춘수, 오규원, 이승훈 등의 시론 작업을 겸하고 있는 정통 모더니스트 시인들) 이견의 여지 없이 인정받고 있는 이들의 작업의 의미가 비평가들로부터는(황현산, 김인환, 정과리, 김춘식, 오형엽, 문혜원 등 문학적 태도가 반듯한 몇 명의 예외를 제외하고는)거의 완전히라고 할만큼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녀들을 읽어낸 사람들의 작업은 다 뭐란 말인가(2)? 거짓말로 범벅이 된 자의적 해석인가?
비평가들은 <읽지 못한다>는 말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시인들과 독자 대중이 이미 충분히 소비하고 있는 당대의 텍스트를 읽지 못한다면 비평가로서 직무유기를 하는 것 아닐까? 못 읽겠으면, 공부해서라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 <안 읽히는> 여성시인들의 시가 시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매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권력자들이 차출해서 베스트셀러 시인으로 만들었던 한 여성시인이 한때 <안 읽히는> 시인의 대표 격인 박서원의 시를 교묘한 방식으로 계속 표절했던 적이 있다. 박서원을 표절했던 시인은 베스트셀러 시인이 되어 대접받고 있는데, 90년대 들어 가장 빼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인 박서원은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녀의 언어가 시인들에게는 대단한 매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시인들은 명확한 인식으로 징후를 포착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발달한 미적 촉수(또는 야심의 촉수)를 가지고 무엇이 새로운 언어인지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그 여성시인도 박서원의 언어가 첨단의 언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했던 모양이다. 이 소동은 결국 표절 당사자가 박서원 시인에게 사과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되었다. 내가 분노하는 이유는 이러한 관행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문단 안에서 횡행하고 있고, 정작 표절당한 시인의 빼어남을 아무리 기다려도 비평가들이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털어놓지 않고 침묵했다.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새롭고 진정한 언어들은 계속 제도에 의해 소외당하고 있다. 표절한 시인이 표절당한 시인보다 더 훌륭한 시인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 지금 이 나라의 문학현실이다.
문제는 문학을 불편부당하게 매개해야 할 비평가들이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문학을 읽어낼 독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비평적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권력을 움켜쥐고 한국문학을 퇴행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 비평은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언어 의식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결국 좋은 비평가와 나쁜 비평가를 가르는 기준은 그가 어떤 이론을 얼만큼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만큼 예민한 언어 감각과 감수성을 가지고 언어화된 현실인 문학을 관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소위 <지도 비평>이라는 이름의, 이론 중심적(그것도 문학 이론이 아니라 사회학 이론이나 정치학 이론)인 비평이 당대의 첨단 언어 앞에서 속수무책인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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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석에서 어떤 남성 비평가는 나의 박서원 론에 대해서 "한국 평단을 뒤흔드는 빼어난 글"이라고 나에게 말했고, 널리 인정받고 있는 어떤 남성 중견 시인도 "솔직하게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절대로 공식적으로는 표명되지 않는다. 아무리 설득력있는 글을 써도 권력가들이 인지하는 작가에 대한 글이 아니면, 전부 잠꼬대 같은 헛소리이다. 적어도 이 이상한 나라에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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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문학적 언어는 언제나 이론을 앞서 간다. 비평적 언어는 언제나 그 거리를 따라잡을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 앞에서 짜증을 부리는 자는 비평가로서의 기본적 자질이 없는 자이다. 그는 문학이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만을 반복하기를 바라는 자이다. 문학은 존재를 복제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발명하기 위해서 있다.
내면성의 문제를 우리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이 국면을 통과하면서 문학이 진정으로 심화된 근대성을 확보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면성을 관통해야만 언어로 구축된 자아의식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며, 그 자아의식을 가진 자들만이 세계와 우주 앞에 단독자로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을 가진 자들만이 자아를 확신에 찬 태도로 해체하고 탈근대적인 공동체적 자아로 움직여갈 수 있다. 이것은 서구에서 문학적 근대성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폐해가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살피는 일과 유관하면서 동시에 무관하다. 우리는 지금 어쨌든 근대성을 꾸준히 실험하면서 그것의 서구적 기원을 살피기보다는, 그것이 우리 사회의 맥락 안에서 어떤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쳐 왔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서구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를 세심하게 살펴가면서 탈근대 사회로 움직여가는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근대적 자의식을 충분히 확보하지도 못한 채, 지성을 포기하고(로고 센트리즘의 해체라고? 도대체 우리에게 해체할만큼 무거운 어떤 로고스가 있다는 말인가?) 나르시스적 감상에 빠져 가벼움에 편승할 때가 아닌 것이다.
90년대식의 <가벼움>은 <가벼움에 억압당한 가벼움>이다. 가볍기 위해서 억지로 가벼운 가벼움. 가짜 가벼움. 이 가벼움에서는 아무런 방법적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대중에게 쉽고 편안한 문학으로 아부하려는 상업주의적 고려 밖에는 읽히지 않는다.
3. 거품 아래의 가능성들
그러나 상업주의의 거품을 걷어내고 보면, 물밑에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문학의 싹들이 뾰족하게 솟아오르고 있다. 상대적으로 대중의 손때를 덜 타는 이 작가들은 오히려 그 덕택에 자신의 세계를 견지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내가 확신을 가진 작가들을 중심으로 선택했지만, 그러나 이 작가들의 리스트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고집할 생각은 없다. 내 눈길이 미처 미치지 못한 좋은 작가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미학적 기준에 의해 선택했다는 말만 덧붙여두기로 하겠다.
3-1 윤대녕, 배수아, 전경린, 허혜정 - 독립적 자아의 고투
윤대녕과 배수아의 문학은 문체의 특질이나 분위기 등으로 보아서 신경숙의 문학과 비슷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문학은 나르시스적 감상성을 상당 부분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있고, 독립적 자아의 고독을 주체적으로 다스리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변별성을 가지고 있다. 윤대녕의 경우는 과다하게 돌출되는 문화 기호들을 내적 체험의 영역으로 심화시켜야 할 숙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빼어난 몇 편의 단편에서 유감없이 확인된 이 작가의 이미지 조직 능력은 한국 최고 수준이지만, 장편에서는 아직 흔들린다. 그러나 {달의 지평선}에서 확인시켜준 바처럼, 이 작가는 사회적 사실과 개인적 사실을 물리적으로 병치하는 평면적 배치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관계, 그리고 작품의 구조를 통해서 전달하는 입체적 소설적 장치에 대한 빼어난 역량을 보여줌으로써, 단편에서 확인된 역량을 장편으로 꽃피울 날도 멀리 않았다는 믿음을 가지게 한다. 이 작품은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 반면, 아쉬움도 컸다. 그러나 한결같이 진지한 문학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이 작가는 결국 그 진지함의 힘으로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초기의 배수아는 사실 조금 불안한 작가였다. 여러 평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비문이 많고, 등장인물들의 특성도 유아적이었다. 그러나 [목요일 오후의 점심식사] 이후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은둔하는 북의 사람]은 90년대에 생산된 가장 빼어난 작품들 중 하나로 기억될만큼 훌륭했다. 감상이 배제된 드라이한 문체, 그러나 그 밑으로 아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도시적이고 단정한 우수. 게다가 이 작가에게는 타인에 대한 스토익한 배려가 있다. 강렬한 비트를 숨기고 있는 아름다운 단문들 사이로 괴기한 그림자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울지 않는, 고독을 견디는, 강하고 따뜻한 여자들. 배수아는 그런 여자들을 통해서 간접적인 사회 고발 차원에까지 작품을 밀고 간다. 그녀의 가벼워 보이는 글 아래에는 천성적으로 선량하고 순수한 사람이 저절로 지니게 되는 윤리적 힘이 있다. 그녀의 작품이 자신의 의도와 아무 상관도 없이 정치의식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문예중앙} 1999년 봄호 대담에서 보여준 것처럼, 다른 작가들이 생각 없이 가벼움에 빠져 희희락락하는 동안, 작가적 진지함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도, 이 작가가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가벼운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단서처럼 보인다.
전경린은 아주 독특한 작가이다. 그녀는 90년대가 찾아낸 작가 중에서 가장 빼어난 문학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망설임없는 문장. 그 문장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면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고도로 시적인 정조를 담고 있다. [염소를 모는 여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90년대 문학이 낚아 올린 최대의 大魚이다. 재능이 없어서 억지로 만들어 쓰는 뻑뻑한 문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려한 문장력을 자랑한다. 흔히 <불온한 여성성>이라고 불리는 그녀의 여성성은 오정희의 직계 계보에 속하지만, 그 과단성에 있어서는 오정희를 성큼 뛰어넘는다. 그러나 분명한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최근의 작품들은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작 [세번째 계곡, 세번째 묘지, 세번째 폭포]는 눈이 번쩍 뜨일만큼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한국인의 평균 정서에 맞지 않았는지, 수상의 영예를 누리지 못했다. 이 작품은 나중에 <어른을 위한 동화>로 늘려져서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로 개작되어 나왔는데, 개작된 작품은 원작의 맛과 향기를 많이 잃어버린 이상한 작품이 되어 있었다. 특히 중간에 집어넣은 성폭행 에피소드는 이 작품을 평범한 페미니즘 문학으로 만들어 버리는 데 일조한 결과밖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전경린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외로울지 모른다. 그러나 버티는 힘을 기르라고 말하고 싶다.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수감을 보면, 이 작가가 동년배의 다른 여성작가들과는 달리, 아주 치밀한 사유의 능력을 가진 작가임을 알 수 있다. 그 능력을 믿었으면 좋겠다. 조급하게 서둘러서 파괴적 여성성을 날내나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데 매달리지 말았으면 한다. 그렇게 원시적이고 파괴적인 여성성을 아무런 장치도 없이 그대로 내밀 때, 결과적으로는 또다시 남성성의 그물에 포획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화진이나 노혜경 등이 원시적 여성성을 처리하는 방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같다.
그러나 그녀는 동년배 작가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천품을 가진 작가임에 틀림없다. 자신을 믿고 흔들림 없이 걸어가기 바란다. <페미니스트>라고 공언하는 용기만으로도 그녀는 그녀의 동년배 여성작가들과 확실한 변별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그녀의 타고난 재능에 사유의 힘이 실릴 때, 아무도 그녀를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악마적 여성성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우리는 허혜정을 전경린 옆에 데려다놓을 수 있다. 그러나 빼어난 지적 능력이 이 뛰어난 여성 시인의 특장이면서 동시에 억압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자신의 여성성을 악마적인 방식으로만 인지한다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성에 의해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녀의 악마적인 시 안에는 분명히 어떤 종류의 자기 구원의 강렬한 종교적 열망이 있다. 그런데 두려움 때문인지 자꾸 딴전을 피운다. 말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다 순연하게 따라가면서 문화적 개념이 앞서는 시들을 피해 간다면, 허혜정은 아주 독특한 시인으로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의 부름을 들을 줄 안다는 것이 축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의 문학적 상황 안에서는 엄청난 억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허혜정만큼 잘 보여주는 시인도 없다.
3-2 정영문, 백민석, 박상순- 검은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정영문은 {검은 이야기 사슬}에서 카프카와 보르헤스를 뒤섞어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작품들을 써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짧은 이야기들의 연쇄는 90년대 한국문학이 건진 가장 값진 수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정서적으로 신성모독적인 강한 비트에 속하는 이 작품은 한국문학 안에서 형이상학을 바탕에 깔고 있는 형식 실험 문학이 성공할 수도 있다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80년대에 최수철이 {고래뱃속에서} 연작 형식으로 이러한 내면적 형식실험 문학을 실험한 바 있었다. 그러나 리얼리즘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80년대 상황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아쉬움을 남겼다. 정영문은 이러한 실험주의적 형식을 짧은 이야기 형식으로 시도함으로써 보기좋게 성공시켜 놓았다. 앞으로의 작업을 크게 기대해 보아도 좋을 것같다.
백민석은 일종의 잔혹주의를 실험하고 있는 독특한 작가이다. 아르토의 메아리가 울리는 그의 작품은 악마적 상상력을 바탕에 깔고, 현대인의 정체성 추구를 극단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문장을 쓰는 기술로 보아서 소프트한 감상적 문장도 잘 써낼 수 있을 듯한데, 쉽게 타협하지 않고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 믿음직하게 여겨진다. {꼬마 한스}에서 그는 성적 판타지와 접합된 자아정체성 추구를 시도하는데, 어떤 기괴한 동화적 상상력이 작품을 시종일관 경쾌하게 끌고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환상과 현실이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이상한 세계. 그 세계 안에서 근본적으로 소년인 이 작가가 약간 <삐긋한> 상태로 살아간다. 그 소년은 惡童지만, 금욕주의적이고, 독립적이며 질척대지 않는다. 그가 제시하는 판타지는 악마적이지만, 동물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주된 정조는 식물의 상징주의에 가깝다.
박상순은 기법적으로는 이른 바 <해체시> 계열에 속하는 시인이다. 많은 평자들은 그의 시를 <미끄러지는 시니피앙 놀이>로 보고 있지만, 내 견해는 다르다. 기법적으로는 이수명이 그의 시세계와 아주 가까운 것으로 보이지만, 박상순과 이수명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이수명의 시세계가 거의 투명하고 자의적인 기호 놀이로 일관하는 데 반해서, 박상순의 언어들은 일정한 심리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 상처와 고뇌를 지니고 있다. 그의 언어는 투명한 시니피앙들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박상순이 심리적인 시들을 쓰는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시들은 이른 바 <무서운 동화> 계열에 속하는데, 읽고 나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투명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아주 도시적이면서도 동시에 목가적인 언어. 그의 시적 자아는 타락한 일상 안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살아가도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집요한 순결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적 자아가 거의 언제나 소년이거나 소녀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감상적이지 않다. 외로움과 아픔. 그리고 망가진 세계. 그 안에서 부서진 마네킹 같은, 얻어맞아서 빠개진, 그러나 상처를 치료할 붕대조차 얻지 못한, 가엾고 순결하지만, 강하고 독립적인 소년과 소녀들이 조용조용 움직인다. 슬프고 아름답고, 말이 안되는 부조리한 동화. 쉽게 위안하려 들지 않는 것으로 위안하는 힘이 그들의 부서진 형태로부터 나온다.
3-3 박형준, 이경림, 이향지, 최정례- 소서사에서 신화로
박형준은 근래에 들어서 아주 빠른 속도로 자신의 세계를 다듬어가고 있다. 그 변화는 특히 일상으로부터 출발해서 신화를 향해 조심스럽게 움직여가는 행보를 취하고 있는데, 안정된 어법과 따뜻하고 단정한 감수성이 절제된 시 형식 안에서 아름답게 녹아나오는 시를 쓰고 있다. 일상이라는 개인의 서사를 신화에까지 밀고 간다는 점은 이경림, 이향지, 최정례 등의 다른 빼어난 시인들과 닮아 있는 점인데, 이경림 등이 개인 신화에 머물러있는 데 반해서, 박형준은 인류학적 지평으로 옮겨간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이 점은 박형준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문학적 비전의 제시라는 측면에서는 이경림 등의 개인신화보다 한 걸음 진일보한 선택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내적으로 충분히 체험되지 않은 문화적 지식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는 진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박형준은 아직은 내면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방식을 익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내면적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반드시 외적 상관물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실적 사실들에 여전히 매달려 있는 그의 동료들보다 훨씬 더 앞서 있다. 최근에는 <언어 추구>에 대한 관심도 아주 조심스럽게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다.
이경림은 의심의 여지없는 언어적 천품을 자랑하는 시인이다. 시를 읽다 보면, 도대체 이런 표현을 어디서 찾아냈을까, 하고 감탄을 금할 수 없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언어의 흐름이 매끄럽고 유장하다. <묘사>에 관한 한, 이 여성시인을 따를 한국의 시인은 많지 않다. 평론가들과 문학 기자들이 죽어라고 <아줌마 시인>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시는 별반 매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시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잘 쓰는 시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다. {작가세계}에 발표했던 엽편소설들은 이 타고난 여성시인의 언어적 천품을 다시 한번 더 유감없이 확인시켜주었다. 그녀는 어떤 장르에도 적응할 수 있는 언어능력과 지성을 지니고 있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뛰어난 능력, 유장한 어법에 실려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말의 물결, 그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인식 능력. 그녀의 손이 닿으면, 온갖 평범한 일상의 잡다한 물건들이 펄떡펄떡 살아 움직인다. 약간의 재주를 가지고 젊은 시절에 등단한 아가씨-아줌마 시인들을 애지중지하는 한국의 남성 비평가들은 이 정도의 부정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시인을 완강히 외면하고 있다. 그리곤 엄정한 비평적 관점에 의해서 아줌마 시인들을 평가하는 비평가들을 <아줌마 담당>이라고 비아냥댄다. 그러면 당신들은 <아가씨-아줌마 담당>이거나 <미씨 주부 담당>인가.
이향지는 늦게 등단했지만, 누구보다도 젊은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이다. 초기의 시에서는 과다한 자기 검열 때문에 어조가 불투명하고 멈칫거렸지만, 최근의 시들은 화사하고 투명해졌다. 그녀의 시는 젊은 어떤 시인들보다도 분명한 시론을 바탕으로 가지고 있다. 최근 {현대시}의 대담을 보면, 이 여성시인이 얼만큼 명징한 의식으로 시를 쓰고 있는지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시뿐만 아니라, 빼어난 산문들을 써내고 있다. 대단히 지적인 시인이다. 그녀가 어느 젊은 시인 못지 않게 실험시를 성공시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는 오히려 젊은 시인들보다도 훨씬더 전위적인 수법을 구사할 줄 안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 우리 나라 문단에서 항용 사용하는 생년월일에 의한 세대 구분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그녀의 시는 여성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의 억압과 차별을 이미지화한 방식으로 보여주면서, 개인적 상징을 사용해서 개인 신화를 써내는 데까지 나아간다. 언어는 긴장하고 있으며, 분위기는 신비하고 지적이다. 그녀의 말은 이경림처럼 흐르지 않는다. 대신 또박또박 걸어간다. 선비적 염결성을 보이는 문학적 향취를 가진 시들. 일찌기 등단해서 문단의 인지를 받은 그 어떤 여성 시인들의 시세계에 비해서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최정례는 묘사와 우화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조금씩 움직인다. 그러나 어쨌든 확실히 움직인다. 그녀는 에둘러서 에둘러서 느릿느릿 간다. 이경림처럼 단번에 사물을 향해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조심조심하면서 돌다리 두드리듯 천천히 간다. 그래서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주 매력적인 어법을 가지고 있다. 그 매력은, 흥미롭게도, 그녀 특유의 멈칫거림에서 오는데, 말하다 말다 하는 말들의 행간에서 기묘한 겹침의 미학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말하려는 것을 다 말하지 않고 내버려둠으로써, 발설된 언어 아래에 어떤 희미한 밑그림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동양적 모호함을 시적인 어법으로 체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 불분명한 시세계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가다 말다 가다 말다 하면서 그러나 끊임없이 언어의 손가락으로 비현실의 경계를 가리켜보이기는 한다. 절대로 그 공간을 향해 결연하게 달려가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이따금 분노가 폭발할 때는, 이 여성 시인이 겉보기처럼 흐릿하고 타협적인 여성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매서운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런 시들 안에서 나는 최정례의 정수를 본다. 나는 그녀가 선명해지면 좋겠다. 이대로 있으면, 현상유지는 될지 모르지만, 최정례의 본령이 완전히 다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3-4 김혜순, 정화진, 박서원, 노혜경, 허수경- 분출하는 내적 이미지와 靈性
김혜순은 70년대부터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인이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들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그녀는 일찍이 시와 언술 형식의 상관성에 주목했던 언어의식을 가진 이 땅의 몇 안되는 진짜 모더니스트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여성성을 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써왔다. 나 자신의 작업도 그녀의 이른 각성의 도움을 입고 있다. 그녀의 시의 기본적인 특징은 외적 상관물의 환상적 변용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자체로 자족성을 가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만다라를 그려낸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안에 인식의 단단한 핵이 박혀 있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과 인식이 모두 육체를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김혜순 특유의 특징이라기보다는, 모든 여성 시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바이지만, 그녀의 시에서는 특히 육체가 언제나 시 한복판에 있다. 그 몸을 매개로 이미지로 들끓는 환상적 세계가 열린다. 최근 작업에서는 문명비판적 시각을 도입하고 있다. 김혜순의 시세계는 그 동안 꾸준히 조명의 혜택을 받아온 경우이므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정화진은 80년대 말에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라는 아주 빼어난 시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눈 밝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시집에 주목했던 평론가들은 거의 없다. 이 시인은 누구보다도 래디컬한 여성성의 소유자인데, 그 점에 있어서 전경린이나 허혜정을 닮아 있다. 그러나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여성들의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는 존재 자체의 처참함에 대한 직관을 아름답게 변용시켜 보여준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천품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어떤 타고난 능력의 덕택인 듯한데, 그녀의 시가 직조되는 방식을 눈여겨보면, 시란 정말 도저히 배워서는 안되는 것이구나, 타고난 시적 재능이 필요하구나, 라는 걸 저절로 알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도 길들일 수 없는 야성의 소유자. 이미 늙은 채로 태어난 여자.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모든 탄생과 죽음을 기억하고 있는 여자. 그러면서도 순결한 아기의 혼을 가진 여자. 그녀의 시에 이르러 비로소 한 여성의 내면은 공동체적 특질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른 바 <나-타자들>의 탈근대적 아이덴티티가 출현하는 것이다. 다른 작가들이 <나>조차 구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 여성은 이미 지름길로 앞질러가 탈근대적 자아정체성을 예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든 이미지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화적 인식을 담보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녀의 모든 상상력은 인류학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육체 그 자체가 신화적 이미지의 저장고라고 할 수 있다. 그녀에게 이르러 비로소 여성의 고통은 <여성들>, 아니 오히려 <인류> 공통의 것이 되며, 공시성과 통시성은 서로 교통하는 것이 된다. 이제 시인은 시-제의를 집전하는 사제의 풍모를 가지게 된 것이다.
두번째 시집 {동백꽃을 품은 바다가 있다}는 첫 번째 시집에 비해서 조금 떨어지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언어탐구>라는 다른 길을 냄으로써 또다른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녀는 90년대 여성문학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시들 안에는 90년대 한국여성문학의 모든 씨앗이 들어있다. 한국 문단의 풍토에 절망했는지 최근에는 통 시들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런 시인들을 줄곧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한국이라는 이상한 나라의 문학적 풍토이다. 재능이 출현해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리곤 진정한 말들을 모두 파묻어버린다.
박서원은 가장 90년대적인 시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의 존재 덕택에 한국 여성시는 무의식에게 입을 달아주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른 문인들이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또 안다한들 겁이 나서 다가가지도 못할 때, 이 씩씩하고 아름다운 여성시인은 무의식이라는 위험한 짐승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질뿐만 아니라, 잘 길들여서 데리고 놀고 있다. 그녀의 초기시는 최승자가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고백시>의 맥락에 놓여 있다. 그러나 어법이나 이미지 조직에 있어서 박서원의 고백시는 80년대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전혀 다른 도시적 분위기, 그리고 탈근대적인 화사한 환상성. 매저키즘과 사디즘이 혼합되어 있는 에로틱하며 신성한 언어 공간.
박서원의 시는 이른 바 초현실주의적인 <데페이즈망>을 가장 잘 구현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손이 닿으면, 아무 상관없는 엉뚱한 사물들도 시에 봉사하기 위해서 얌전하게 하나의 동일한 차원에 모여든다. 그리곤 예상치도 않았던 제3의 효과를 낸다. 발랄하고 신비한 어법, 시를 억지로 만들어 쓰는 재능없는 시인들을 질리게 만드는 풍요로운 상상력. 박서원 역시 인류학적 근원이라는 우물에서 상상력이라는 물을 떠내는 데 탁월한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
노혜경은 어떤 의미에서는 90년대 여성시의 귀결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인 이 여성시인은 초기의 포스트모던 시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靈性> 쪽으로 유턴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시에서부터 이미 영성적 자질은 충분한 밑그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지성의 검열로 인해서 주춤거리고 버버거렸을 뿐이다. 원했다면, 노혜경은 현재 유행중인 키치시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재미있고 수준있는 지적인 키치시로 평론가들의 구미에 맞는 <문화 상품>을 제공하고, 독자와 비평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키치시라는 것이 약간의 대중문화 지식과 비평 감각, 그리고 말재주만 겸비하면 얼마든지 써낼 수 있는 시들이다. 노혜경은 이 분야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멀티베이비 자장가] 등의 이른 바 <포스트모던>시들은 그 점을 잘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그녀는 힘들고 고달픈 영성의 길을 택했다. 세계와 타협하는 대신,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발성되는 목소리를 듣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자, 그녀의 내면으로부터 너무나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현대시} 특집을 위해서 보내진 그녀의 영적 서사시 [레이스마을 이야기]를 읽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시가 한국에서 생산될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어떤 시가 생산되는지 관심도 없는 비평가들은 읽어보지도 않았겠지만, 이 시는 시인들에게는 아주 강한 충격을 남겼다. 이 서사시는 90년대가 얻어낸 가장 값진 수확 중의 하나이다. 그야말로 시인 한 사람의 힘으로 생짜로 신화 한 편을 너끈히 써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시는 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발성되는 고요한 목소리를 들을 때, 어떻게 저절로 <개인>의 운명을 지나 보편적 <인류>의 운명에 합류하게 되는지 힘차게 보여준다. 노혜경은 한국 문화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미 완전히 자아구축을 끝내고 그것을 사랑의 힘으로 해체한 뒤, 영적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나>로 자아를 재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혜경은 80년대 말에 정화진이 예시했던 나-타자들의 아이덴티티를 높은 종교적 세계에까지 끌고 올라간다. 그러나 그 종교성은 이 명랑한 여성시인이 <지렁이 바퀴벌레 쵸코칩 쿠키>라고 말하는 존재의 깊은 심층에까지 닿아있음으로써, 육체를 배제시킨 남성들의 종교성과는 분명한 변별성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비평 작업도 겸하고 있는데, 날카로운 직관으로 시를 저며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게다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기 때문에 소신있는 발언을 하고 있다.
허수경은 <민중시> 계열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시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들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미 탁월한 내면적 자질을 보여주었다. 나는 언젠가 그녀가 틀림없이 내면의 습격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 유학을 떠난 뒤였으므로, {혼자 가는 먼 길}이후의 시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잠깐 귀국했던 길에 그녀는 나를 만나기를 청했고, "이상한 이미지들이 와요. 그런데 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며 서른 편 정도의 시들을 내어놓았다. 그녀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다른 평론가들에게는 오해가 두려워 내놓지 못했다고 말하며, <바다와 여성성>, 그리고 <옛 언어>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서투른 <새 언어>에 대한 시들을 기밀 문서라도 전하듯이 내어놓았다. 망설임은 뚜렷했지만, 그녀는 분명히 새로운 길을 향해 떠나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에서도 역시 신화적이며 영적인 언어가 비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시인을 설득해서 {현대시}에 그 시들 중 열 편 정도를 소개하고 꼼꼼한 리뷰를 썼다. 그 이후로 {당대비평}과 다른 지면에서 더러 그녀의 시들을 볼 수 있었지만 {현대시}에 발표되었던 시들과의 연계성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옛 언어>로 돌아간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녀가 자신의 타고난 자질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새 언어>를 찾아낼 것이다.
3-5 김참, 정재학 - 진정한 환상을 향해, 영적 랩
9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리얼리즘으로부터 완전히 이유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목도하게 된다. 김참이나 정재학 등 1970년대 산 젊은 시인들은 자신의 내면성을 인지하는 데 있어서 매우 적극적이며 대담하다. 외적 리퍼런스를 거의 가지지 않는 순수 환상의 세계를 탐색하고 있는 이들은 이른 바 <사이버> 세대의 <판타지>가 시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인들의 <판타지>는 기계 장치에 의지하지 않는, 내면에서 막바로 떠올라 구현되는 진정한 환상성이다.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기존의 시 형태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숨결이 따라가는대로 자유롭게 받아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시는 영적인 랩에 가깝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이 때로 자신을 여성 화자로 설정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여성성>의 추구가 여성의 생물학적인 표지나 사회적인 표지를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론적 표지, 즉 내면적인 영성적 표지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60년대 산 시인들만 해도 이러한 현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문학적으로 영적으로 너무나 극심하게 억압당해 있는 한국의 남성 시인들은 빼어난 여성성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검열 때문에 도저히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젊은 세대의 이러한 추구는 문학이 죽기는커녕 끊임없이 새로운 정신에 의해 거듭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긍정적 징후로 여겨진다.
이처럼 상업주의의 거품 아래에는 다양하고 의미있는 여러 가지 문학적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대중성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발성되는 진정한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구현해내는 진정한 문학성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문학>이라는 표지는 사실상 편의상의 구분에 불과하다. 진정한 문학은 80년대적도, 90년대적도 아니며, 심지어 20세기적도 아니다. 진정한 문학은 다만 문학일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처럼 시간에 버텨내는 진정한 문학이 발생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밝힌 바와 같이, 한국의 문학 환경은 극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80년대와 달리, 모든 문화 현상이 겉보기에는 탈정치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권력의 횡포를 피해서 진정한 문학 환경을 만들기가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겉보기에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권력의 표층 아래에는 조용한 아우성이 오래 전부터 들끓고 있었다. 지반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다. 이제 새로운 진정한 언어들이 표층을 뚫고 솟아오를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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