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1/4/29(일) 00:28 (MSIE5.0,Windows98) 211.55.53.42 1024x768
|
[문선영], 90년대 말 여성시의 서사전략
90년대 말 여성시의 서사전략
문 선 영 (문학평론가)
* {{ }}는 각주를 의미함 *
1
[90년대 말 여성시의 서사전략]이란 글의 의도는 여성시의 <말하는 방식>에 모아져 있다. 많은 서사론자들은 인간을 가리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존재라고 했다. 나 역시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문제는 <누가> 말하며 <어떠한 방식>으로 말하느냐이다. 여성시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90년대 말 여성시의 서사전략]은 여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말하고 있느냐에 주목한 글이 된다.1)
{{ <여성시의 서사전략>은 한국인문학연구회 내 몇 선생님들과 <서사전략>이란 공동 테마로 공부를 하던 중에 <여성시> 부분에서 암시 받아 채택한 용어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이고, 삶에서 누구나 이야기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함께 기획한 연구가 <서사전략>이었다. 따라서 문학, 문화, 정치, 외교, 철학, 법률, 종교, 윤리 등 모두가 서사화의 맥락에서는 중요한 목록들이 된다. 곧 인간의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서사화의 전략 속에 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전략>은 짐작하는 대로 다분히 의도적인 용어이다. }}
90년대 말에 즈음하여 여성시는 두드러지게 <이야기하기>에 바쳐져 있다. "여성 자신을 위한 글"2)
{{ 조혜정,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읽기와 쓰기}(또하나의 문화, 1994), p. 249. }}
이고 또한 실존의 근원에 닿기 위한 내밀한 통찰이기도 한 여성시는 <서사의 우세함>을 바탕으로 이제 하나의 장르로 당당하게 자리잡았다. 삶의 근원과의 연계 선상에 더욱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는 여성시는 <새로운 말하기>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주목되는 것이다(물론 여기서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는 난데없는 창조물의 출현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전의 수많은 여성시인들의 말하기 방식을 발판으로 삼아 <지금 여기>의 새로운 글쓰기 방식이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먼저, 여성시란 용어부터 주목하고 넘어가자. 이 말은 여성시의 최초의 발설을 따져서 그 기원과 전개과정 등을 통시적으로 따져 정리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여성시>란 용어의 적절성을 한번 짚어보자는 소박한 바램이나 의도쯤으로 받아들여주면 될 것이다. 속마음을 먼저 들추면, 나에게 여성시는 처음부터 그다지 유쾌한 용어는 아니다. 여성시의 틀이 강박관념을 뒤집어 쓴 채 울퉁불퉁하게 솟아있는 듯한 인상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시에 대단한 애착이 갈 수밖에 없는 용어다. 이는 내가 우선 여자여서 그리고 무슨 신념 있는 페미니스트여서가 결코 아니다. 이러한 느낌은 여성이면(그리고 여자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한 사람들이면)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공유된 애정이다. 독립된 여성성을 의미망으로 하는 여성시는 우리의 경우 70년대 전후, 그러니까 강은교, 문정희를 중심으로 구체화된다. 그 이후 고정희, 최승자, 김승희를 거쳐 김정란, 김혜순, 이향지, 이경림, 노혜경, 박서원, 이수명, 성미정 등등 많은 시인들이 줄을 잇는다.
여성시는 <여성의 자의식>을 전제로 널리 쓰여지고 있는 용어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시란 장르가 분명히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여성시란 이름 하에 오늘날, 특히 90년대 후반 쓰여지고 있는 작품들의 <말하기 방식>에 주안점이 놓여 있는 만큼 좀더 세심하고도 세밀하게 여성시가 <말하는 방식>에 주목할 것이다. 고려 대상은 90년대 말 <새로운 말하기>로서 여성시를 표방한, 이른바 <386>세대 작가들의 작품들이 된다.
2
<새로운 말하기>는 여성시의 운명이다. "삶과 통풍이 되는 글쓰기" 혹은 "일리의 글쓰기"3)
{{ 김영민, {진리·일리·무리}(철학과 현실사, 1998), {손가락으로, 손가락에서}(민음사, 1998) 등 참조. 김영민교수는 "진리의 글쓰기"와 "무리의 글쓰기" 사이의 긴장을 탄력적으로 조율하는 "일리(一理)의 글쓰기"를 계발하고 있다. 다양성 속에서 정착과 방황, 질서와 혼돈, 구심력과 원심력, 그의 해석학적 용어로 말하면 "진리"와 "무리"를 창조적으로 지양하는 "일리의 글쓰기"가 그것이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우리 삶의 컨텍스트도 일리들이 끝없이 얽혀 있는 것이고, 그 와중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이해도 일리의 맥(脈)을 타면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리"는 결국 우리 삶의 실제에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다가서려는 노력인 것이다. 나는 [90년대 여성시의 서사전략]이 다분히 김영민교수가 말하는 "일리의 글쓰기"에 닿아있음을 발견하고 그의 글쓰기 <전략>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 둔다. }}
로서 여성시가 시작(詩作) 처음부터 그 의도를 강하게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시는 끊임없이 <새롭게> 말하기에 골몰한다. 90년대 말, 특히 <386> 세대의 시인들에게 이 과제는 절대적으로 보인다. 먼저, <꿈 혹은 환상으로 말하기>는 여성시가 <새롭게> 말할 수 있는 시발점이다. 꿈꾸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의 실패자, 그러나 환상의 성취자>이다. 현실에서 억압당했던 기저들이 꿈 속에서는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성취 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특히 아래의 시처럼 <여성>의 문제(페미니즘 담론에 국한되지는 않는다)를 읽어낼 때 꿈은 매우 적절하게 작용한다.
강물과 모래를 틀에 넣고 오래오래 돌려 만든 음료, 보이지 않는 전쟁의 도시 들깨주스! 주스 한 잔으로도 행복한 여자를 두고 남자는 사라진다
사명감에 불타는 전사 애인은 사라진다 빵가게 앞에서, 철로 옆에서 오늘도 여자는 남자를 기다린다 예감이 좋은 날 그렇게 서 있으면 문득 나타나곤 하던 남자, 여자는 남자가 사라진 골목만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다 망부석처럼 서 있다 맨 발의 여자, 하늘대는 발레복의 여자
(중략)
문득 미끄러져 들어온 열차가 그녀 앞에서 문을 열자, 본능적으로 열차 속으로 뛰어든 여자는 그러나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불안해진다 기차를 타고 말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여자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약속을 깜빡 잊은 애인이 지금쯤 집에 들어가 아무 생각 없이 잠이 들어버린 것이나 아닌지, 아니면 혹 이 열차의 다른 칸에라도 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쨌든 여자는 애인에게 삐삐를 쳐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 아무 역에서나 내려 일단 삐삐를 치자 삐삐를
간이역에서 발을 내려 재빨리 마을을 둘러본 여자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친다 아뿔싸! 여자는 낮게 부르짖는다 불행히도 그곳은 문명과는 격리된 산중벌판! 머얼리 바라다보이는 두어 채의 초가집에는 확신컨대 전화가 없다! 다급해진 여자는 어눌하게 변한 몸집으로 우산머리로 닫힌 문을 툭, 툭, 쳤다 기적처럼 스르르 문이 열린다
냉큼 열차 속으로 들어온 여자는, 체념하듯 비로소 소파에 엉덩이를 얹는다 여자는,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으나 어딘가 어설프고 서먹서먹한 사내승객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오로지 적합한 역이 나타나면 미련없이 열차에서 내려 애인에게 삐삐를 치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다 그 불안한 심사 속으로 한 떼의 게릴라들이 들이닥친다 약장수, 아니 엿장수로 가장한 무리들은 다짜고짜 여자에게로 다가오더니 어서 약을 사먹으라는 것이다 좀 팔아주시오, 팔아달라고요, 잉?
(중략)
자,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적이 아니니 다같이 내려서 삐삐를 쳐보도록 하자는 무리들의 뒤를 따라 뒤뚱뒤뚱 열차의 후미로 발길을 옮기는 여자의 눈에 낯익은 영상이 잡힌다 대열에서 흘러나와 무리들의 비호를 받으며 슬그머니 화장실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 그러나 여자는 그가 자신이 지금껏 그리워 마지 않는 바로 그 애인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더욱이 자신의 애인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약을 팔아달라고 생떼를 쓰던 무뢰한들의 졸개였다는 사실은! …… 여자는 단지 애인을 만나는 시간이 자꾸만 지연되는 것이 안타까워 혀를 한 번 차고는,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오르는 부아를 꾹 눌러 참고 있을 뿐이다
― 이강은, [哀愁, 1994] 부분
꽤 길게 인용한 위 작품에서 우리가 쫓는 것은 긴박하고도 숨막히는 "맨 발의 여자"의 꿈의 행로다. <애인의 자리>에 있지도 않은 애인을 찾아 나서는, 일종의 여로형 꿈의 기록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주스 한 잔으로도 행복한 여자"를 두고 떠난 남자의 정체불명성이다. 결국에 그가 "무뢰한들의 졸개"로 판명이 나기는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여자>가 그러한 사실을 끝내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꿈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구체적이고 생생한 장면들이 도리어 꿈의 허망함을 강조하는 역설로 읽히는 것, 바로 이 점이 이 작품이 지니는 생생함의 강점이다. 한 영혼이 알고 있는 세계와의 연속성에 대한 직관이 한 여자로 하여금 끊임없는 생동감으로 그의 애인을 찾아나가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 작품이 왜 상당한 내러티브를 등에 업고 의식의 검열을 회피하기 위한 <왜곡된> 형식으로, 곧 꿈으로써 발설되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꿈들은(환상도 마찬가지다) 의식의 수준에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그러한 점에서는 꿈의 근원인 욕구(욕망) 역시 마찬가지다. 의식적 상징들과 꿈의 원형적 상징들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억압기제를 해명함으로써, 혹은 신화의 발생적 근원들을 해명함으로써 꿈의 원형들은 한 꺼풀씩 벗겨지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꿈은 일련의 이미지들로서 겉으로는 서로 모순되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그 실제적 의미를 내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의식의 의미 영역을 초월하여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 성찰을 어렵게 하지만.
그러므로 <환상으로 말하기>는 <욕망>의 은근한 어법이다.
고래 한 마리 입 벌리고 날아다닌다
간신히 몸을 굽혀 들어간다
거울이 깨져 있다
바람이 불려나
빛이 흔들린다
어두운 어머니 환한 미소 앞에
애꾸눈 아버지 무릎 꿇고 손 들고 있다
바람이 불려나
꽃이 진다
노란 스커트 밑에 새 알이 있다
바다는 왜 철사줄을 닮았나
늙은 고래 한 마리
사막에 누워 푸른 고등어 토한다
하늘 가득
고래가 날아다닌다
― 조인선, [토마토] 전문
입 법리고 날아 다니는 고래, 이 고래의 입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풍경들을 만난다. 문제는 고래의 입과 풍경들을 연결하는 거울이 <깨져> 있다는 사실이다. <깨진> 거울을 통하여 우리는 왜곡된 풍경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 특히 "어두운 어머니"의 "환한 미소"라는 역설적 의미망에 주목하자. 깨진 거울, 흔들리는 빛, 떨어지는 꽃, 철사줄을 닮은 바다 등은 "어두운 어머니"의 얼굴들이다. 이러한 "어두운 어머니"들은 사막에 누워 푸른 고등어를 토하는 고래, 하늘 가득 날아다님으로써 "환한 미소"를 불러들이는, 일종의 <고복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마치 표층시를 보는 듯한 위 작품에서 우리는 <환상>을 통한 욕망의 표출을 발견한다. 욕망에 대해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욕망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필요한 것을 욕구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을 욕망한다. 욕망은 인간의 필연이고 운명이다. 문제는 욕망이 결코 객관적으로 관찰되지 않으며, 욕망이 결코 현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움직이는 감정을 속속들이 반영하는 눈길, 내면의 율동을 드러내는 높고 낮은 목소리, 그리고 피가 통하는 따뜻한 손길 주변으로 전자장처럼 퍼져나가는, 섬세하기 그지없는 감각과 감정의 뉘앙스가 바로 욕망의 집이다. 욕망은 거부인 동시에 개방이고, 부정인 동시에 사랑이다.4)
{{ 김인환, [문학과 정신분석], {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6) 참조. }}
이상의 욕망들은 각기의 얼굴을 하고서 <꿈꾸기>(혹은 <환상 갖기>)를 통해서 여성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꿈 혹은 환상으로 말하기>는 여성시의 정체성을 곧바로 찾아 나서게 한다(정체성은 자아의식이고 자아의식은 자아의 실존에 대한 인식이다. 바로 이 부분이 여성시 장르를 가능케 한 대목이다). 여성의 정체성 찾기의 첫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깨어진 언어로 말하기>다.
도시의 매연은 무겁다. 나를 담아 다오. 나는 사정없이 엎질러져간다. 내가 가는 길, 또는 가지 않았던 길로. 열리지 않는 뚜껑들은 더럽다. 열려 있는 뚜껑들은 더 더럽다. 말해 다오.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 무기력하게 속삭여 다오. 깨어진 언어로.
― 이수명, [깨어진 화병] 전문
"내가 가는 길, 또는 가지 않았던 길로" "사정없이 엎질러져"가는 나는 <담기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를 담아 안전하게 감싸줄 "뚜껑들은" 한결같이 "더럽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면 <담기기를> 원하는 나의 희망은 오히려 절망일 수 있다. 이때 시적 화자는 "깨어진 언어"를 원한다. 차라리 "깨어진 언어"가 나의 정체성 혹은 나의 근원에 닿게 하는 진정성일 수 있을 테니까. 10개의 마침표 설정도 "깨어진 화병"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기여한다(마침표에 유의하여 <쉼> 하면서 작품을 다시 읽어 보라. 그러면 여기서 마침표가 잠깐의 휴식을 제공한다기보다 오히려 다음 문장의 절박함으로 이끄는 급박한 표지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의도적인 시적 장치이기보다는 <깨어진 언어로 말하기>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된 절박함의 코드가 바로 이 작품의 마침표인 것이다).
여기서 <깨어진 언어>, 성하지 못한 말은 그러나 피할 길 없는 <내 말>이다.
유리창은 깨진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나를 읽었기 때문이다.
― 이수명, [유리창] 부분
언어가 <깨어진> 것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나를 읽었기 때문이다." 유리창은 실존의 울림을 위한 도구로 채택되고 나아가 삶의 조율을 위해 기꺼이 <깨짐>을 허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비극적 인식을 만난다. 두루 알려진 대로 비극은 한계상황 내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며, 좌절을 통해 존재 자체를 자각케 한다. 비극의 인식 문제는 실존과 본질간의 관계 문제다. 절망하는 행위는 자기 확인의 행위이며, 진정성을 획득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의식은 결국 자기 확인 활동(self-identification)인 것이다. <깨짐>으로써 실존을 읽는 여성시의 행위는 "자아는 지양된 후에 비로소 진실한 것으로 된다"는 헤겔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깨어진 언어>는 현상태를 뒤집는 반동기제다. 그리고 근원과 만나게 하는 단단한 연결고리다.
어느 아침 나는 맨홀에 빠졌다
내 정원에
내 풀 깎는 기계
기계, 기계의 사이렌소리
나는 맨홀에 빠졌다.
깎인 풀들이 나를 뒤따라 들어와
내 얼굴을 덮었다.
내 입에서 새어나오는
사이렌소리를 덮었다.
내 말은 나 대신 헬멧을 쓰고
지상의 버려진 정거장들을 홀로 달린다.
나는 맨홀에 빠졌다.
내 정원에
기계, 기계의 사이렌소리
깎인 풀들이 나를 뒤따라 들어와
내 실어의 얼굴을 덮었다.
― 이수명, [내 말은 헬멧을 쓰고 달린다] 전문
잔디를 깎다 맨홀에 빠져버린 나는 "깎인 풀들이 나를 뒤따라 들어와
내 얼굴을 덮"어 버렸으므로 꼼짝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내 말"을 지상으로 올려 보낸다. "나 대신 헬멧을 쓰고
지상의 버려진 정거장들을 홀로 달"리는 "내 말"은 곧 <나 자신>이다. 여기서 "내 말"은 일종의 도플 갱어(Doppelganger)다. 곧, 나의 <분신>인 셈이다. <도플 갱어> 한 명을 더 만나 보자.
그녀의 그림자 납작한 종이처럼
혹은 삶의 껍질처럼 그녀에게 매달려
느린 걸음으로 흙 위를 기어 다니는 그림자는
햇살에도 달빛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다만 늘어나거나 줄어들 뿐이다
그녀의 그림자 밤마다 그녀의 꿈속으로
스며들어온다 그녀의 희고 연한 뇌수와
뇌수 속에 떠 다니는 애인과 애인의 성기에
매달린 아이들을 훅훅 빨아들인다
그녀의 그림자는 밤마다 불룩해지고 그녀는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몸이 얇아져
방바닥에 붙어버린 것만 같다
어느날 그녀는 방바닥에 붙어버리고
그녀의 그림자는 일어선다
반생을 기어다니던 길 위에서
걸어다니며 그녀 행세를 한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의 그림자를
의심하지 않는다
― 성미정, [그녀와 그녀의 그림자 ― 기억이 나보다 힘이 세다] 전문
"그녀의 그림자"는 완벽한 "그녀"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의 그림자를/의심하지 않는다." "반생을 기어다니던 길 위에서/걸어다니며 그녀 행세를" 하는 "그녀의 그림자"는 바로 "그녀"의 <도플 갱어>인 것이다.
도플 갱어(Doppelganger)는 원래 독일의 전설에서 유래된 모티브로, 세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외모의 또다른 자아가 존재한다는 미신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도플 갱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 가능하다. 첫째는 심리학적 측면이다. 정상성의 검은 망령으로, 현실세계에서 매우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의 어둡고 추한 자의식이기도 하고, 인간의 악한 의식세계가 어딘가에 숨어있다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는, 때로 자아의 극심한 분열로 묘사되기도 하는 것이다. 둘째는 순수한 환상담에 가깝다. 단순한 의미에서의 <분신>으로, 현재 나와 같은 모습, 즉 같은 옷을 입고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젊었을 때나 어린 시절의 모습일 수도 있다.5)
{{ 《씨네 21》 통권 163호(한겨레신문사, 1998) 참조. }}
이수명의 [내 말은 헬멧을 쓰고 달린다]와 성미정의 [그녀와 그녀의 그림자]에서의 도플 갱어의 의미는 후자에 가깝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도플 갱어는 심리학적 측면의 어둡고 추한 자의식이기보다 오히려 <있어야 하는> 당위적 자아에 가깝다. 여성의 근원적인 것과 관계를 맺어 형식화된 것이 "내 말"과 "그녀의 그림자"라는 도플 갱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신적 의미의 도플 갱어를 통하여 시인들은 <존재 혁명>을 의도한 것이다. "언어를 통한 존재 혁명"6)
{{ 김정란, 기획 담론 [여자의 몸, 여자의 말, 여자의 시], 《현대시학》(1997년 8월호) 참조. }}
이 바로 여성시의 궁극적 의도가 아닌가. 자, 이제 여성시들이 언어를 통해 존재 혁명을 꾀하는 단계는 <깨어진 언어로 말하기>에서 <이단의 언어로 말하기>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그들은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나는 부정한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너네들의 몫이므로
휘발되는 어둠
정작 이 땅에서 아무것도 꼬불치지 않고
살아가는 낙오자의 보람
참새의 하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텃새이다)
시가 지저귀는 아침
신문처럼 이것들을 펼쳐놓고는
즉석복권을 긁듯 나는 설렌다
부모자식이라 불리는 폭력
보험증서로 간주되는 시적 매너리즘
그들이 말하는 행복은
내가 생각해온 불행이라는 단어와 동의어였다
모든 것을 방생한다
나는 행복해야 하므로
대하소설은 이제 끝났다
그것은 모든 어머니들이 머리카락으로 만든
질긴 지붕이었다
모든 딸들은 저 아득한 서사구조의 끄트머리에
뾰족한 고드름처럼 얼어 있고
지금 봄볕은 똑, 또옥, 똑 얼음을 녹이며
물방울 종족을 낙하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다
적어도
모오든 신성은 찬양되는 순간
신성모독이다
― 김소연, [이단] 전문
[이단]은 사회사적인 문맥 이전에 실존에의 부름에 대한 몸짓을 보여준다. 간명하면서도 옹골찬 남근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항을 보라. "모든 딸들"이 "저 아득한 서사구조의 끄트머리에/뾰족한 고드름처럼 얼어 있"는 상황에서 시인은 여성의 정체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추어낸다. 시 첫마디를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다. 이미 암묵적으로 묵인되어버리는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들은 시인의 시작(詩作) 이전부터 계속 지속되어 오던 것이어서 연결어법으로 자연스럽게 건너뛰는 것이다.
역사 시작부터 여성의 정체성이 사소한 것이거나 무시되어진 것임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이러한 낯익은 사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데 우리의 자아 문제가 발생한다. 자아는 <나의 있음>에 대한 자각이고 이 자아의 자각이 곧 정체성의 자각이 아닌가. 여성시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객관 세계의 상실과 자아 상실이라는 두 가지 위기감에서 야기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된 특징이나 본질로 부각되는 정체성의 대두 문제는 동시에 정체성 혼란의 위기감 표현이라는 역설적 의미의 상황에 놓여 있는 셈이다. 여성시의 <새로운 말하기> 방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새애인과 철로변에서있는데
헌애인이 지나갔다
순간그헌자위 번득거렸,
지만純全 새로이발병한착각
그저유유히세월지났다, 말해두자
동의합니까?
急行하는 화물차가달리고
정거해도 알수없을 것이다
망연자실 바라볼뿐
그누가알겠는가 달리는기관사역시
불안스레돌아다보는 짐작조차할 수 없는
그무엇
저요란한굉음
저불길천만한검은연막을
저질러대는공포의 牙口瘡으로
자, 쑤셔넣거라한껏 되물려라
목젖까지차올라
끄윽끅그을음으로 울 것이다
어느덧한세월 구획을다해
죄없는세월이新生한다 그참
입덧도없이
한
애인의팔짱건너 새애인의참신한,
― 진수미, [세월] 전문
<이단의 언어로 말하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분히 해사체의 영역인 인접성의 장애다. 띄어쓰기를 무시한 것도 급박한 시간의 흐름을 위해 매우 적절하게 작용한다. 1연 셋째 줄 "번득거렸,/지만"에서 행을 바꾸기 전의 쉼표 역시 거친 호흡을 통한 머뭇거림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낸다. 그리고 1연의 마지막 행 "동의합니까?" 물음은 전혀 청자를 지향하고 있지 않다. 시의 끝부분을 쉼표로 열어 놓고 있는 점도 시인의 <이단적인> 시적 의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주목할 것은 시인이 부리고 있는 <이단>의 말이 레퍼런스 이전에 곧바로 육체고 실존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메시지 전달 위주의 말하는 방식이 아닌, 아예 말과 함께 실존 그 자체를 싸안고 가는 것이 진수미 시인이 제기한 <이단의 언어로 말하기> 방식이다.
이수명 시인은 [탈출기]를 통해 <이단의 언어>를 부리고 있다.
컵에 담긴 꽃들은 죽어 있거나 죽어가고 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누군가 묻고 있다. 제 향기가 썩은 줄 모르고 탁자 위의 꽃들은 마지막 결단의 준비를 한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 이수명, [탈출기] 전문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뒤에 붙은 두 부호 <……>와 <?>의 차이에 주목하자. 제 모습이 황폐화된 줄도 모르고(급기야는 죽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마지막 결단의 준비"를 하는 "탁자 위의 꽃들"은 단말마의 존재다. 좀더 심하게 말하면 사형선고를 받은 시한부 인생과 별 다를 바 없다. 여기서 "탁자 위의 꽃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컵"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 같다. 컵에 고인 물은 산소가 점점 옅어지고 썩어서 마침내는 꽃들을 죽게 만드는, <죽음의 늪>이므로. <……>에서 시적 화자는 실존의 두리번거림을 행하기만 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기만 할뿐이다. 그러나 <?>에서 "마지막 결단의 준비"를 하는 시적 화자는 강한 실존에의 의문과 함께 그 극복을 꾀한다. 갇힘에 처단된 존재에의 부정을 통해 강한 <탈출>의 욕구를 구체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아직 탈출하지 못하고 있는 <죽어가고 있는> 꽃들에게 호통을 치는 것이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로 끝을 맺고 있지만, 작품을 읽고 난 후 (약간의 비약을 무릅쓴다면) 우리가 마침내 완벽하게 탈출에 성공한 꽃들의 무리들을 마치 눈앞에서 보듯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도 그의 <이단적> 말하기의 효과 때문이다.
이러한 <이단의 언어로 말하기>가 절실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짜 행복> 혹은 <가짜 진실> 때문이다. 그리고 <조작된> 행복 혹은 <조작된> 진실 때문이다. 아련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끄는 동화 속 이야기의 패러디를 보자.
처음부터 파랑새는 아니었어 당신도 저런 새를 갖고 싶다면 좋은 방법을 알려주지 위험을 무릅쓰고 추억의 나라나 밤의 나라 따위를 헤맬 필요는 없어 우선 새를 잡아와 흔해빠진 참새라도 새를 잡을 정도로 민첩하지 않다고 그렇다면 새를 사오라고 그리고 남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새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때리란 말이야 시퍼렇게 멍들 때까지 얼룩지지 않도록 골고루 때리는 게 중요해 잘못 건드려서 숨지더라도 신경 쓰지 마 하늘은 넓고 새는 널려 있으니 오히려 몇마리 죽이고 나면 더 완벽한 파랑새를 얻을 수 있지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 말하라고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왔다고 모두들 기뻐하겠지 물론 밤마다 새를 때리다 보면 둔해빠진 가족이라도 비밀을 눈치채겠지 걱정 마 그 정도는 눈감아줄 거야 맞아서 파랗든 원래 파랗든 파랑새라는 게 중요한 거야 그리고 비밀 없는 행복은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는 거야 뼛속 깊이 퍼렇게 골병든 행복 맞으면 맞을수록 강해지는 행복 처음부터 파랑새는 아니었어
― 성미정, [동화 ― 파랑새] 전문
성미정 시인은 <이야기>에 매우 능한 시인이다. 특히 그는 여성성의 온전한 정체성의 규명을 위해 <동화>들을 패러디 한다. 이때 동화에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동화가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아련하게 불러들이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많은 날카로운 지적을 통해서 이미 밝혀졌듯이 상당한 <오독>을 유도하는 것이 동화의 이중성이다. 그릇된 여성상과 유토피아를 달콤하게 포장한 것이 어린 시절 우리를 한없이 몽롱하게 만들었던 동화가 아닌가.7)
{{ 최근 들어 이전의 동화들, 즉 수동적인 여성상의 부각과 함께 그릇된 행복상을 그린 동화들을 패러디 하여 여성성을 재조명한 작품들이 많아 쏟아지고 있다. [백설공주]를 패러디한 [흑설공주]가 그 한 예다. }}
"처음부터 파랑새는 아니었어"로 시작하고 또 끝을 맺는 [파랑새]는 단호하고도 신랄한 <이단의 언어>로 <행복>의 허구성을 깨뜨리고 있다. "맞아서 파랗든 원래 파랗든 파랑새라는 게 중요한" 것이라는 지적도 대단한 풍자다. "뼛속 깊이 퍼렇게 골병든 행복"이나 "맞으면 맞을수록 강해지는 행복" 역시 강한 새디즘과 매조키즘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섬뜩한 비틀림을 갖고 있다. 마치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의 [파랑새] 작품은 <이단적인> 너무나 <이단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단적인 언어로 말하기> 방법은 한편으로 "포로들"의 이야기 방식을 표방하기도 한다.
땅
위의 바다
알을 낳는 바다
눈뜨는 거북의
수족관
밖에서 굴러다니는
검은 색연필
금요일 색연필의 일 미터 남짓한
이동
따라다니는 땅속의
쇠파이프들
틈바구니에 서 있는
땅 위의
전봇대들
대못과 대못의 궤도
위를 맴도는
잠자리
잠자리가 기르는
더 작은 잠자리의
하늘
끝에서
땅으로
비가 쏟아지네.
땅
위로
바다가
알을 낳네.
― 이수명, [이야기를 나누는 포로들] 전문
수족관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대화들을 암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포로들]은 언뜻 보면 표층시 같아 보이지만 표층시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물론이고 그 현상 속에 묻혀져 있는 수많은 속내의 대화들까지도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작품에서 제시된 모든 "포로들"의 대화방식이 매우 특이하다. 거북을 낳은 바다가 수족관에 갇힌 거북에게, 거북은 수족관 밖에서 굴러다니는 검은 색연필에게, 색연필은 색연필의 움직임을 따라 다니는 땅속의 쇠파이프들에게, 쇠파이프는 그 틈바구니에 서 있는 땅 위의 대못에게, 대못은 대못과 대못의 궤도 위를 맴도는 잠자리에게, 잠자리는 그가 기르는 더 작은 잠자리에게, 작은 잠자리는 하늘 끝에 몽글몽글 모여 있는 비구름에게, 비구름은 비를 불러 땅에게, 땅은 <다시> 바다에게, 바다는 알을 낳아 거북에게, 거북은 다시 수족관에 갇혀 수족관 밖에서 굴러다니는 검은 색연필에게 ……, 이렇게 "포로들"의 대화는 끝없이 순환된다. 바다가 알을 낳은 수족관 내의 거북, 검은 색연필, 금요일, 땅속의 쇠파이프들, 전봇대들, 대못, 잠자리와 아기 잠자리, 비 등은 모두 "포로들"이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의 포로들인가? 라고 묻는 것은 이 작품에서 무의미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 연쇄적으로 얽혀 있는 포로들이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포로들이라는 사실이다. 포로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결국 포로들의 관계를 해체시켜 버린다는 사실, 바로 이 사실에 주목하자. 처음에는 포로들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포로가 아닌, 자의식을 지닌 주체로서 변모하는 것이다.
3
이제는 <진정한 자아로 말하기> 차례다. <꿈 혹은 환상으로 말하기>, <깨어진 언어로 말하기>, <이단의 언어로 말하기> 등의 단계들은 설핏 <진정한 자아로 말하기>를 의도한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자아>란 물론 진정한 자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타자>까지 되는 것, 곧 <사랑의 자아> 개념임에 유의하자. 여성시는 특히 이 점을 주목한다. 사랑이 단순한 <합일>의 개념으로 묶여 들어가는 데 여성시는 절대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추위가 엄습했다 넌 주먹을 쥐고 울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 기대했다 그러나 커가는 만큼 추위는 심해졌다 혼자서 밥을 먹을 나이가 되었다 넌 손이 떨려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흔들리는 숟가락 밖으로 밥알이 떨어졌다 보다못한 가족들은 장갑을 선물했다 장갑은 냉기 때문에 곧 얼어붙었다 더 두터운 장갑을 끼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한번 달라붙은 장갑은 떼어낼 수 없었다 넌 살갗이 돼버린 장갑 위에 새로운 장갑을 덧끼었다 점점 손이 무거워졌다 숟가락 드는 일이 힘들어졌다 네 손은 거대해졌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게 되었다 가족들은 네게 밥을 먹여줘야 했다 몸도 씻어줘야 했다 너의 손은 사계절 내내 어둔 장갑 안에 숨어지냈다 가족들의 손은 너를 보살피느라 자신은 돌볼 틈이 없었다 점점 여위어갔다 닦지 못한 몸에선 악취가 풍겼다 가족들을 보는 게 추위보다 힘들었다 넌 밤마다 장갑을 벗기 시작했다 벗길 때마다 피가 흐르고 뼈가 시렸다 마침내 넌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손은 창백했다 자라지 못해 부드럽기만 했다 넌 그 손에 숟가락을 쥐었다 찬물에 담그기도 했다 너를 무겁게 했던 모든 장갑으로부터 벗어났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너의 손은 자라기 시작했다
― 성미정, [장갑 소녀] 전문
군더더기 하나 없는 서사구조는 <장갑 소녀>의 성장기를 치밀하게 다루고 있다. 장갑 소녀의 <진정한 자아>의 탐색 과정기 ― 여기에는 몇 단계의 극적 전환이 매우 적절하게 기여하고 있다. ①장갑 소녀가 태어날 때부터 추위가 엄습한 것, ②커 가는 만큼 추위가 심해진 것, ③혼자서 밥 먹을 나이가 되었어도 추위 때문에 불가능해지자 가족들이 장갑을 선물한 것, ④추위 때문에 장갑은 얼어붙어 소녀의 살갗이 된 것, ⑤새로운 장갑을 덧끼어 그 무게 때문에 꼼짝 못하게 된 것, ⑥그래서 가족들이 소녀를 보살피게 된 것, ⑦소녀 때문에 가족들의 엄청난 희생이 요구되자 소녀는 장갑 벗기를 시도한 것, ⑧마침내 장갑을 벗게 된 것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장갑 소녀의 <진정한 자아> 탐색은 자기 때문에 가족들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다는 데 대한 자각에서 시작된다. 이는 <진정한 자아>가 <진정한 타자>를 포함하는 대목이 된다. <진정한 타자>를 껴안았을 때만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성취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 도달한다는 사실 ― 한 편 더 보자.
태어났을 때부터 넌 너무 작았다 어찌나 작은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부모는 가끔 너란 아이를 잊곤 했다 아프거나 두려울 때 너는 목이 터져라 울었지만 목소리 또한 몸처럼 작았다 형제들의 소리에 지워져버렸다 계속 울어봐야 기운만 빠졌다 넌 더 이상 소리치지 않았다 그럴 힘이 있으면 울어야 할 이유를 없애는 데 썼다 형제들은 나이에 따라 발자국 소리 목소리 커져만 갔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너의 작은 몸은 울렸다 심장은 떨어질 듯 팔딱거렸다 시간이 흐르자 너는 그 소리의 진동에 몸을 맡길 줄 알게 되었다 심장의 떨림도 몸의 울림도 사라진 너는 자라는 데만 힘을 기울였다 네가 커지는 동안 다른 형제들은 쉬고 있는 게 아니었다 넌 부지런히 자랐지만 워낙 태생이 작았다 항상 가장 작은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자라는 동안 부모는 자란 너만큼 작아졌다 커다란 형제들은 부모의 작아진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직 작은 너만이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 성미정, [동화 ― 엄지공주] 전문
성미정 시인의 시적 역량을 볼 수 있는 동화의 패러디 가운데 한 편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시의 마무리 ― "넌 부지런히 자랐지만 워낙 태생이 작았다 항상 가장 작은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자라는 동안 부모는 자란 너만큼 작아졌다 커다란 형제들은 부모의 작아진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직 작은 너만이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부분이다. 엄지공주가 자란 만큼 작아진 부모의 목소리를 (<커다란> 형제들을 모두 제치고) 오직 <작은> 엄지공주만이 알아듣는다는 사실은 여성의 부모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작은> 엄지공주는 부모, 특히 <작아진 엄마>의 통과의례적 사랑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의 계속되는 이야기.
여행을 떠나야 했다 여행은 길고 험할 것이므로 튼튼한 가방이 필요했다 욕심을 낸다면 이미 여행의 경험이 있는 노련한 가방이었으면 했다 가방을 파는 모든 곳을 헤맸다.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발바닥엔 물집이 솟았다 어쩌면 가방을 찾아 헤맬 때부터 여행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요구를 만족시킬 만한 가방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끝에 가방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가방 엄마의 몸은 잘 무두질된 소가죽이었다 아마 나의 엄마처럼 평생을 쉬지 않고 움직인 소였을 거다 온몸을 내주고 끝끝내 비린내나는 내장까지 비운 이젠 말라버린 주머니인 가방 엄마는 나의 엄마와 다르지 않았다 여행이 시작되었다 물이 바뀔 때마다 낯선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건 두려운 일이었다 가방 엄마는 그런 두려움까지 모두 맡아주었다 여행이 계속되면서 가방 엄마도 들어줄 수 없는 상처와 추억이 생겼다 그때마다 내 몸은 조금씩 어두운 공간으로 변해갔다 여행이 끝날 무렵 가방 엄마는 끈이 떨어지고 군데군데 뜯어졌다 더 이상 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가방이 되었다 낡고 병든 가죽 쪼가리에 불과한 가방 엄마를 내 속에 품어주었다 진정한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성미정, [동화 ― 가방 엄마] 전문
"온몸을 내주고 끝끝내 비린내나는 내장까지 비운 이젠 말라버린 주머니인 가방 엄마", 바로 그 순간 시적 화자는 <가방>이 되고 가방 엄마를 품속에 품고 "진정한 여행"을 시작한다. 엄마의 희생적인 사랑, <진정한 타자>를 온전히 품는 엄마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 여성시에서는 낯익으면서도 소중한, 빠뜨릴 수 없는 제재이고 또 주제이다.
백 살까지 아기를 낳으리라
굴뚝새는 굴뚝 속에서
무너진 뚝과 내장이 터진 물고기 살점
독화살이 활개치던 물살을
하나 하나 잊을 리 없다
도토리 같은 여자아기 낳아
다람쥐 노리개 가지고 올 즈음이면
독수리가 채가고
남자아기는 생이 시작되는 순간에
유혹의 불을 켜
다음엔 남녀 구분 없이 생기는 대로 낳았다
내가 잃은 아기인지 빼앗긴 아기인지
매듭 짓기 살그러워 맥놓아버린
혼란의 폭포수들
굴뚝새는 목에 피맺힌 열매가 맺도록
실컷 울고 난 뒤
지나쳐가는 행인들이 다 보도록
굴뚝 끝에 앉는다
쭈글쭈글해진 내 모습을 지켜보리라
주름진 얼굴과 육체로
백 살까지 아기를 낳는 산고를 치르리라
사랑 스스로가 제 입을 먹이로 던져
이천 년 왕국의 파수꾼이 되었으니
백 살까지 가랑이를 벌리고 살리라
― 박서원, [産苦] 전문
여자는 미지의 것에 대해 훨씬 너그럽다.8)
{{ "찍찍 늘어나는 여성성"에 대해서는 김정란의 앞의 글에서 체계적인 도움을 받았다. 특히 그녀의 시 [생철의 여자]에서 많은 생각과 암시를 받았다. }}
여자가 <육체>를 통해 생명을 창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몸 속에는 직접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태어날 수 있는 생명들이 와글거리고 있고, 이 생명에의 확신을 통해 여자는 미지의 것과 함께 타자를 <진정한 자아>로 껴안을 수 있는 것이다. 산고를 통해 여자는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능력을 부여받는 셈이다. 그래서 "백 살까지 아기를 낳는 산고를" 기꺼이 치르고자 하는 다짐도 결코 허세나 과장으로 읽히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죽음을 건너뛰는 것,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것은 그러므로 오직 여성시에서만 가능하고 또 타당하다.
내가 한 마리
깊은 바닷속 물고기였을 때
이미 바다는 죽어 있었다.
물결 위의 물결, 떠도는 바다의 혓바닥은
침엽의 비명처럼 소리를 잃었다
. …(중략)…
내가 한 마리
깊은 바닷속 죽은 물고기 되어
죽음으로 바다와 만나려 하였을 때
나는 눈을 뜬 채 바다 위로
바다를 벗고 떠올랐다.
― 이수명, [내가 한 마리 물고기였을 때] 부분
<죽은> 바다에서 <죽은> 물고기로, "죽음으로 바다와 만나려 하였을 때" 시적 화자는 "눈을 뜬 채", "바다를 <벗고>" 떠오른다. 죽음마저도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사랑이 여성시에는 존재한다. 특별한 종교를 빗댈 것 없이 그 자체가 종교가 되어버리는 절대적 숭고함이 여성성에 내재한다. 그러므로 여성시는 그 고통스런 과정과는 상관없이 <해피 엔딩>이다. 이는 단순한 예감이나 기대가 아니다!
그녀가 태어나던 순간 영화가 시작되면서 비가 내렸다 저 아인 결국 폐렴에 걸려 죽고 말 거야 관객들은 눈물을 훔치며 소근거렸다 콜록이긴 했지만 아이는 계속 자랐다 소녀가 되었다 비에 익숙한 소녀는 흙탕길에서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관객들은 왠지 조롱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가 자라는 동안 빗발은 더욱 거세졌다 그녀는 빗속에서 사랑하고 이별했다 빗물처럼 많은 눈물이 흘렀지만 빗물에 섞여 보이지 않았다 관객들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맑은 날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든 영화 그토록 긴 우기에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몇몇 관객은 가득 찬 습기 때문에 감기까지 걸렸다 관객들은 곰팡이 슬은 엉덩이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더 이상 비로 가둘 수 없던 스크린이 찢어졌다 참고 참았던 울음이 불평만 하던 관객들을 덮쳤다 관객들은 폭우에 쓸려 멀리 떠내려갔다 스크린 밖으로 그녀가 걸어나왔다 활짝 개인 해피 엔딩이었다
― 성미정, [영화 ― 해피 엔딩] 전문
"스크린 밖"은 바로 "그녀"가 맞이할 <해피 엔딩>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획득하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여성의 삶을 한 편의 영화로 기획한 의도도 재미있고, 관객의 반응까지 아우른 전지적 작가시점의 통찰도 돋보인다. <그녀>의 삶과 이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대비적으로 보여 준 내러티브의 흐름도 탁월하고, 마침내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해체시켜버린 결단력도 통쾌하다. 여성시의 <말하기> 방법을 건강하게 예감하고 있는 점에서 특히 성미정의 일련의 이야기시들은 매우 흥미롭게 읽힌다.
4
글쓰기가 글쓰는 자의 내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때 자아정체성의 문제로부터도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정체성 찾기 문제는 문학을 비롯해서 모든 <인간 찾기>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거창하면서도 가장 소박한 담론이 바로 정체성 찾기다. 여성시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여성시의 자의식을 전제로 언어를 통한 존재 혁명을 꾀하는 것이 여성시다. 90년대 말 이른바 <386>세대 작가들은 치열하고도 건강한 여성성을 놓치지 않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서사화에 대한 인식의 폭은 삶과 문학을 연계시키는 데 매우 적절한 매개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관념이나 논리적으로 의도된 것이 아닌 <삶의 형식>이 바로 여성시임을 잘 진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존재 의식은 당연히 언술에 대한 자의식과 같다. 삶과 서사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9)
{{ 여기서 맥킨타이어의 서사이론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서사적 자아의 다른 관점은 상관적이다. 나는 설명 가능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요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존재다. 그들이 나의 이야기의 일부이듯이 나 또한 그들 이야기의 일부다. 어떤 한 삶의 서사는 맞물려서 짜여진 다른 총체서사의 일부다. 더구나 이렇게 설명을 주고받는 것 자체는 서사를 구성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신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였으며 왜 했는가고 묻고 또한 내 편에서도 나는 무엇을 했으며 왜 했는가를 말하고 또한 이러한 이것을 바꿔서 수행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적나라한 모든 서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A. Maclntyre, After Virtue(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4), p. 218 }}
이 점에 착안하여 여성시의 <새로운 말하기> 방식으로 <꿈 혹은 환상으로 말하기>, <깨어진 언어로 말하기>, <이단의 언어로 말하기>, 그리고 <진정한 자아로 말하기> 등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거듭 말하기>를 덧붙인다. 아래 작품의 끝부분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쿨 워드의 모든 밤 어느 작은 방에서 반딧불처럼 반짝이며 계속 이어질 것이다"처럼 여성시의 <새롭게> 말하기는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거듭 말하기>는 따라서 이 글의 형식적 마무리이자 다음 글의 들머리이다.
이 이야기는 쿨 워드의 어느 밤에 시작된다 이곳의 시민들에겐 추위란 공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사전에선 이미 성냥이란 단어는 사라졌다 어느 도시나 그렇듯 사라진 것들의 사라짐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성냥이 비밀리에 거래되기도 한다 그녀는 몰래 구입한 성냥을 품에 안고 방으로 돌아온다 더듬더듬 성냥 켜는 법을 떠올려본다 성냥을 켠다 불꽃이 피기도 전에 찬바람에 쓰러진다 떨리는 손으로 바람을 막는다 성냥을 켠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둥근 식탁도 푸른 잎 우거진 낯익은 정원도 없다 눈동자를 비벼본다 충혈만 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성냥을 의심한다 이것은 단지 성냥을 닮은 그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성냥을 켠다 성냥을 닮은 이것들 중에 그녀가 원하는 진짜 성냥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어본다 밤은 깊어가는데 성냥은 텅 빈 불꽃만 보여준다 밤새 성냥을 켜느라 그녀는 지친다 하얗게 말라버린다 수북하게 쌓인 성냥 위에 쓰러진다 성냥을 믿었던 시절의 따스했던 추억들로 타오르는 머리를 감싸안은 채 뒤척인다 화장당하듯 쿨 워드의 밤이 지나간다 재처럼 흰 눈이 덮인 쿨 워드의 아침 성냥이 걸어간다 밤이 깊도록 동화책을 읽던 성냥 동화 같은 건 한 장도 품을 수 없는 잘 마른 성냥 하나 걸어간다 이 이야기는 쿨 워드의 어느 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밤은 어둡고 분명 뼈가 시리도록 추울 것이다 그녀는 또 성냥을 구입할 것이다 밤새도록 성냥을 켜는 행위로 밤을 견뎌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쿨 워드의 모든 밤 어느 작은 방에서 반딧불처럼 반짝이며 계속 이어질 것이다
― 성미정, [쿨 워드 ― 성냥은 있다] 전문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