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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이상화 <나의 침실로>
*이 글은 필자이신 황현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현대시다락방에서 옮겨둡니다. 귀한 원고를 주신 황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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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제10화
李相和의 침실
이상화는 문학과 삶에 대해 대단한 정열을 지녔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잘 알려진 시 몇 편만을 놓고 본다면 식민지시대의 시인들 가운데 그를 정열 제일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가슴에 가득 담겨 있던 뜨거운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처럼 보이는 이 시들은 대개 웅변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시는 고르지 않다. 그가 남긴 60편 남짓한 시를 다 읽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의 寢室로」, 「離別을 하느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정도의 수준에 이른 시를 한 편 더 찾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에는, 같은 시대 다른 여러 사람의 시에서처럼, 말이 너무 많다. 어떤 말들은 열정의 진정함을 증거하지만, 나머지 더 많은 말들에서는 그 절반의 울림도 기대하기 어렵다. 열정은 끝났어도 일단 터져나온 말의 폭포는 막을 수 없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보다는, 말을 먼저 쏟아 놓고 그 말들의 도움으로 어떤 감정이 창출되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말이 이상이고 감정이 현실이라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말은 여기에도 해당되는 것일까. 이상화는 말에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거기에 공을 들인 드문 경우에만 성공했다. 소재가 구체적이고 써야 할 이야기가 분명하여 말에 거는 헛된 기대의 방해를 받지 않아 순탄함에 이른 시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면, 말이 감정을 타고 토로되고 감정은 그것을 표현하는 말에 의해 고양되는 방식으로 말과 열정이 일치하여 성공한 시가 「나의 寢室로」이다.
「나의 寢室로」로 구두점을 찍는 방식이 매우 이상하다. 그러나 이 구두점을 염두에 두고 시를 천천히 읽어보면 그것이 말에 단속적인 리듬을 주어 감정의 흐름을 조절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속에만 있어라 - 내 말>이라는 다소 유치한 부제가 붙은 이 시를 현대의 철자법과 띄어쓰기로, 그러나 구두점은 원문을 존중하여 적는다.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疲困하야 돌아 가려는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므나, 네 집에서 눈으로 遺傳하던 眞珠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댄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 뭇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둔 寢室로 가자, 寢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위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맘의 燭불을 봐라,
洋털 같은 바람결에도 窒息이 되어, 얄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림애가, 도깨이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 ―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므나, 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어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寢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므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
내 몸에 피란 피 ― 가슴의 샘이, 말라버린듯, 마음과 목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 내 寢室이 復活의 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歲月 모르는 나의 寢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살아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1)
김학동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시는 1923년 9월 『白潮』 제3호에 발표된 직후부터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다. 김안서는 그 해 말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寢室로」는 뒤덮인 눈 위에 찬 바람이 뒤설랠 때에, 다사로운 황금색의 일광을 마음껏 받은 듯한 시입니다. 그의 시은 상징입니다. 외부적 노래가 아닌 것만큼 내부에는 모든 것을 잡아 모아두는 힘이 있어, 여기에 可見을 통하여 不可見의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그 세계는 더 넓어지며, 더 깊어집니다. 이것이 현실과 꿈이 얽히어, 신비로운 조합을 내이는 것입니다.2)
안서는 이 말 끝에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수작이라는 뜻의 말을 덧붙였다. 가볍다는 것은 표현에 거침이 없다는 뜻일 것이며, 묵직하다는 것은 주제가 심각하다는 뜻이리라.
우리보다 먼저 이 시의 구두점에 주목했던 김기진은 "구두점 찍은 곳을 툭툭 끊어가며" 낭독하면 그 격한 율격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며, 시의 <기이한 환상>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의 <이미지>의 세계임은 의심없다. 이것은 그의 우울성과 병적으로 발달한 그의 관능이, 殉情에 목이 메어서 훌쩍어려 우는 울음에 불외하다. 그리고도 이 시 전편에 흐르는 것은 모든 것을 사르고자 하는 정열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시의 도처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정열은 폭죽과 같이 불꽃을 올린다.3)
김학동은 <月評類에 해당하는> 이 비평들에 큰 가치를 두지 않지만, <감상과 퇴페적 경향을 뚜렷이 보인 작품으로 그 표현이 관능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들이 그 특색을 이룬다>4)는 말로 이 시를 규정할 때, 그가 안서나 팔봉의 <월평>에서 크게 멀리 나간 것은 아니다. <관능>과 <환상>은 김기진이 벌써 사용했던 말이며, 김학동이 덧붙인 <감상과 퇴폐적 경향>에 관해서도, 선배 비평가는 <훌쩍어려 우는 울음>과 <殉情>이라는 더 구체적이고 어쩌면 더 적절할 수도 있는 표현으로 이를 벌써 짚어두고 있다. <꿈과 현실이 얽히여>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조합>이라는 안서의 말은 모호한 것이 사실이지만 열정적이고 힘찬 시어들의 효과를 그가 직감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여러 연구자들은 <마돈나>의 <실대상인물>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애썼다. 물론 이런 노력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인물이 명백하게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다. 이 시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 누구이건 시인이 그를 <마돈나>라는 특별한 말로 부른다는 데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화는 이 <마돈나>를 <나의 아씨>라고도 <마리아>라고도 각기 한 번씩 부른다. 이와 관련하여 김춘수 시인이 젊은 날에 썼던 글의 한 대목은 인용할만 하다.
<마돈나>는 아씨이면서 절대적인 대상이 된다. <아씨>, 즉 육체는 어느 순간 <마돈나>가 되는 동시에, 그것은 또 추상이 되어 사변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육체는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이 시의 사변과 음율을 이루고 있다. <마돈나>는 아씨의 美化이면서 그 以上이기도 하다. 상화에게는 <마돈나> 외에 부를 수 있었던 적당한 이름이 없었다. 그것은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의 안타까움이다.5)
이 인용문을, 특히 마지막 문장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상화가 한 여자의 (또는 단지 여자의) 육체를 이 호격으로 정신화하려 했다는 내용만은 또렷이 전달된다. 그러나 옳은 해석일까. 시는 실상 <마돈나>의 육체에 관해 더 많이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젊은 비평가가 종합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 정체의] 애매성은 이상화 자신이 <마돈나>라는 시어를 선택함으로써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마돈나>라는 외래어가 주는 분위기는 나의 아씨라는 말이 주는, 사랑하는 인물을 지칭하는 듯한 구체성도, <마리아>라는 말이 주는 종교적 분위기와도 다르면서 동시에 이 둘을 포함한다.6)
시인이 마음 속에 상정하고 있는 대상 여성은 <아씨>와 <마리아>로 분해되고, 이 둘은 다시 <마돈나>로 종합 정리된다는 말이겠다. 아무튼 이 비평가가 언급하는 모호성은 이 시의 전체적인 성격일 뿐만 아니라 그 의미의 핵심이다. 이 시를 아마도 최초로 깊이 있게 읽었던 김흥규는 <나의 침실>이 지니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이 침실은 "관능과 쾌락과 도취의 장소인 동시에 죽음의 장소"이다.
<수밀도의 네 가슴>, <이슬>, <몸>, <나의 아씨> 등 감각적이고도 신선한 이미지의 도움을 얻어, 그리고 <마돈나>를 부르는 간절한 호흡과 <침실>이라는 말이 주는 연상에 힘입어 이 관능적 도취와 쾌락의 의미는 전반부에서 행을 거듭할수록 강화된다. 제7연의 "네 손이 내 목을 안어라"는 이 상승과정의 한 절정이다. [...]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 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은 지상적 번민과 집착의 저편에 있으며, 그곳에 가지 위해서는 비상한 결단이 요구되는, 그리고 한 번 가고 나면 어느 누구도 문을 열 수 없는 장소이다. 제10연에 와서 이러한 의미는 최종적으로 명료해진다. 거듭 가자고 부르는 <나의 침실>이란 언젠들 안갈 수 없는 곳, 누구라도 끌려가야만 하는 곳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죽음이다. 이 작품은 그 열정적 어조나 관능적 암시에도 불구하고 실은 죽음에의 초대를 노래하는 것이다.7)
추론은 명료하며 높은 설득력이 있다. 김흥규는 이어서 이 죽음에 대해 <낭만화된 죽음>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고, 이상화가 "죽음을 생의 종결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시작, 속악한 세계를 넘어선 참 가치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건너뜀으로 노래하였던 것"이라는 말로 그 의의를 밝힌다. 다른 비평가와 연구자들이 감상과 퇴폐만을 보았던 곳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주목함으로써 오히려 삶의 정화와 재생을 향한 비상한 결단을 발견한 것이다.8)
「나의 寢室로」는 <緋音> 연작 가운데 일편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한에서 이 연작시들의 주제는 모두 죽음과 다소간의 관련이 있다. 한 친구의 죽음을 조상하는 시 「二重의 死亡」에서는 살아 남은 사람의 삶도 죽은 사람의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럽고 비참한 죽음일 뿐이라는 비명을 듣는다. 「末世의 희嘆」은 밑없는 동굴 속에 꺼꾸러져 도취의 집을 세우겠다고 자탄의 말이다. 「虛無敎徒의 讚頌歌」에서는 목숨과 행복이 미지의 새 나라에만 있으니 이 세상의 소유와 목숨을 포기함으로써만 진정한 목숨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선언한다. 이들 시의 내용은 죽음의 침실론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상화가 그의 애인을 <나의 침실로> 부를 때, 상징적이든 실제적이든 간에 그녀를 정말 죽음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일까. 이들 여러 증거에도 불구하고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매우 미묘하여 표현하기 어려운 의문이 남는다. <緋音>의 다른 시들에서 읽게 되는 죽음의 권유가 분명한 반어적 성격을 띠고 있는 데 반해, 침실로의 초대에서 육체의 정열을 죽음에의 정열과 겹쳐 놓을 때 거기에서는 결코 반어적 해석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만을 미리 말해두고, 이 시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하여 두어 구절에 나타나는 사소한 문제들을 먼저 정리하는 게 좋겠다.
두 번째 연의 "네 집에서 눈으로 遺傳하던 眞珠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라는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얼핏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1) 네 혈통의 유전인 진주 같은 눈빛은 다 놓아두고 몸만 오너라.
2) 네 가문의 대물림인 진주 같은 눈물은 이제 그만 흘리고 네 몸을 뽐내며 오너라.
3) 네 집안에서 대물림하여 눈요기거리로 삼던 장식물은 다 두고 맨몸으로 오너라.
한 가지 해석이 더 남아 있다. 바로 다음 시구에서 시인은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댄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라고 쓴다.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승인을 받아 낮의 밝음 앞에 드러내 놓을 수 있을 만큼 떳떳한 것이 아니다. 여자도 활기차게 올 수는 있어도 떳떳하게 올 수는 없다. 그녀는 제 집안이 대대로 누구의 안전에서도 가보처럼 자랑삼는 가례와 격식를 갖추어 올 수는 없다. 시인은 이 두 시구로 그들의 사랑이 침실에 들어가지 전에 넘어야 할 금단의 벽을 말하고 있다. 비상한 결단은 여기에도 필요하다.
제11연의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요청된다. <밤이 주는 꿈>이 잠을 자면서 꾸게 되는 무의식적인 꿈이고, <우리가 얽는 꿈>이 우리의 의식이 설계하는 미래의 희망이라면,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은 그 둘을 연통하는 성애적 도취의 환상밖에 다른 것일 수 있을까. 시인은 다음 구절을 "아, 어린애 가슴처럼 歲月 모르는 나의 寢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라고 쓴다. <세월 모른다>는 것은 철 모른다는 말이며 현실의 제약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의식의 결단으로 무의식을 경험하는 성애적 도취는 현실의 압박 속에서 홰손되고 벌써 잊혀져 버리기도 했을 어린 시절의 꿈, 곧 "아름답고 오랜 거기"를 회복해 준다. 이상화는 침실에 관해 말하면서 그 침실이 열어 줄 더 먼 길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상화는 스물 세 살 나이에 식민지의 한 청년으로 이 시를 썼다. 신민지는 회유와 억압의 땅이다. 한 인간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은 회유에 의해 주입되고 현실에 의해 억압된다. 회유에 의해 제시되는 미래가 진정으로 찬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발걸음은 <끄을려 가는> 형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젊은이는 제 존재를 확장할 길이 없다. 현실은 궁핍하고 제약적일수록 그 가치가 강조된다. 순결, 사랑, 자유 같은 것들, 그것들로 자신의 존재를 충만하게 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이 정황에서 일종의 탐익으로 비치기 쉽다. 자기 설계가 불가능한 땅에서는 가치 있는 것과 타락한 것의 경계가 불분명하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이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그 성취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결단이 요구된다. 죽는다는 결단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는 결단이다. 이상화는 자기 존재를 충만하게 확장하려는 젊은 열정으로 죽음을 걸고 관능적 도취를 꿈꾼다. 그는 죽음을 거쳐 새롭게 태어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죽음을 걸고 한 식민지 젊은이의 삶인 제 삶을 새롭게 해석하고 폭발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에게 말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은 그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1) 金학東 편저, 『李相和 全集』, 새문社, 1987, pp. 25-26. (상기한 것처럼 철자법 등을 수정한 외에 외래어를 나타내는 부호 『 』를 < >로 바꾸었다. 이 시의 말미에 <緋音 가운데서>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는 점도 밝혀 둔다.)
2) 金岸曙, 「詩壇의 一年」, 『開闢』, 4호 (1923년 12월). 위의 <전집>, p. 193에서, 철자법을 바꾸어 재인용.
3) 金基鎭, 「現詩壇의 詩人」, 『開闢』 제58호 (1925년 4월호). 위 <전집> p. 194에서 같은 방법으로 재인용.
4) 金학東, 「李相和의 詩世界」, 위 <전집>, p. 195.
5) 金春洙, 「頹廢와 그 淸算」, 『文學春秋』 제9호 (1964년 12월), p. 251.
6) 黃貞産, 『李相和 詩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4, p. 26.
7) 金興圭, 『文學과 歷史的 人間』, 창작과비평사, 1980, pp. 241-242.
8) 김기진도 이 시에서 <죽음>에의 갈망을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언급하는 <殉情>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를 지니는 반면에, 김흥규가 말하는 비상한 결단은 오히려 죽음을 위해 사랑을 바친다는 뜻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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