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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 들이 평평하고 산이 머니 강물은 마음껏 날개 펼치고  

0209 향토기행 /경기도 여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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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평평하고 산이 머니 강물은 마음껏 날개 펼치고

 
강물도 넉넉하고 들판도 넉넉하니 인심 또한 넉넉하네

글·사진 이 향 지 시인 www.poemgate.com


 여주! 소리내어 부르면 입안에서 여의주가 구르는 것 같다. 풀잎 위의 이슬처럼 동그랗고  맑은 소리가 난다. 여주는 실제로 여의주를 물고 있다. 여주의 심장부를 흐르고 있는 백 리 물길이야말로 여주의 여의주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강물이야말로 보배 중의 보배 아닌가. 용이 얻으면 하늘로 오르겠고, 사람이 얻으면 자자손손 넉넉하겠다. 이 보배를 여주 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른다. 여강 백 리 물길에 작은 배를 띄우고 양반들은 풍류를 즐기고, 서민들은 고기 잡아 생계를 유지했다. '들이 평평하고 산이 머니(野平山遠)' 벼농사 고구마농사 땅콩농사가 유달리 잘 되었다. 가파른 고갯길을 넘나들지 않아도 되니, 사람들은 가쁜 숨을 몰아 쉴 일 적었다. 사통팔달 도로망이 구비되면서 교통의 중심지로 들어서게 되었다. 국도와 고속도로를 연결해서 타면 동해도 서해도 두 시간 거리에 있다. 북성산 기슭엔 세종대왕 효종대왕 누워 계시고, 강변으로 가면 유서 깊은 벽절이 있다. 금모래은모래 반짝이는 강변엔 여름을 즐기러온 사람들 물장구소리 드높다.  
 여주로 가는 길은 바쁘지 않아서 좋다. 나는 지난해 늦여름 서울을 떠나 분당에서 산다. 너도나도 바다로 가는 휴가철이지만, 고속도로만 피하면 여유가 있다. 3번 국도 타고 가다 곤지암 삼거리에서 양평 쪽으로 머리 틀어 산북면∼금사면∼흥천면∼능서면 연결하며 지나가는 지방도로들도 다닐만하다. 일주일 전에는 그쪽으로 나들었으니, 이번에는 이천까지 내려와서 42번 국도로 갈아타고 능서면 쪽으로 들어간다.  
 양화천을 건너니 초록 들판이 사로잡는다. 가로수 아래 차를 세우고 드넓은 초록을 호흡한다. 줄기를 곧게 세운 벼 포기들. 빽빽하게 줄맞춰 서서 바람을 흔들고 있다. 하나하나 가려보면 여린 칼잎 같지만, 넓은 들에 가지런히 모여있으니 한뜸한뜸 공들여 심어놓은 초록 융단 같다. 멀리 보이는 마을은 능서면 소재지. 가까이 가보면 굵은 건물들 무리 지어 있다. 이젠 농촌도 예전 모습이 아니다. 견고한 벽돌로 벽을 쌓아올리고, 교회 첨탑들 솟구쳐 있다. 초록들판 앞까지 원정오신 하나님. 앉은자리 더욱 낮추어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은, 신(神)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영릉. 영면 속에 쉬고 계신 세종대왕의 침소를 보려면 몇 개의 관문을 거쳐야 한다. 첫 번째 문으로 들어서니, 대왕의 동상이 근엄하시다. 동상 앞에는 초록 잔디. 잔디밭 건너편에는 간의·혼천의·앙부일구·측우기·자격루…. 왕의 생전에 발명하신 과학기구 모형들이 노천에 널찍널찍 자리잡고 있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은 기구마다 돌아보며 이름을 외우고 기념사진도 찍는다. 부인과 함께 온 노인은 동상 주위를 돌며 구리판에 새긴 연혁 읽기에 바쁘다. 젊음과 늙음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반듯하고 단단한 돌길들이다. 돌틈에서 고개를 든 풀잎들도 여름 한철은 꼿꼿한 법. 두 번째 문으로 들어서니 숲이 훨씬 다가선다. 나무의 모양과 굵기로 보아 무척 오래된 숲인데, 나무들은 줄기와 잎이 오늘 돋은 것처럼 싱싱하다.
 초록 잔디 사이로 돌길 한 가닥 뻗어간다. 홍살문 안으로 들기 전에 네 번 절하는 마음이여. 대왕은 우리 모두가 추앙하는 성군이시니 여덟 번 절인들 마다하리. 절 마치고 고개 드니 초록언덕이 봉긋하다. 허리 굽은 소나무들 사이에 봉분 하나 엎드렸다. 폭신한 추록 이불 왕의 침소 일러준다. 어머니 품안의 아들처럼 둥글고 밝은 표정. 깨끗하여라. 초록빛 언덕에서 번지는 맑고 상큼한 공기. 내 깊은 안에서 시들시들 말라가던 초록빛을 되살려놓는 공기. 이곳의 모든 것, 찾아온 사람들까지도 무덤 안의 주인을 기리고 경배하기 위해 있는 것 같다.
 왕의 숨소리라도 가까이 들을까하고 돌계단을 올라본다. 숲이 짙어 이끼가 덮여있는 돌계단.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니 나직한 울타리가 가로막는다. 울타리 밖에서 발돋움을 해보아도 무덤은 한 쪽 귀퉁이만 보여줄 뿐이다. 산 자의 땅은 무덤 보다 낮은 곳에 있으니 내려가서 올려다보아라, 이르시는 것 같다. 무덤 앞을 지키는 돌 사람들 표정이 딱딱하고 근엄하다. 돌로 빚은 내 몸이 흙이 되도록 왕이시여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눈 부릅뜬 돌사람들의 표정에선 이런 말이 어른거린다. 일어선 이래 한번도 뽑아보지 않은 것 같은 돌칼은 아무도 침입하지 않았다는 증거. 두텁고 무거워 보이는 갑옷과 함께 거무스레한 이끼가 무늬를 만들고 있다.
 낮은 곳으로 내려와 허리 굽고 팔이 긴 소나무 아래 멈춘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확연히 구분된다. 삶은 언제나 죽음 보다 낮은 곳에 있는 것. 복닥이며 살아낸 뒤에야 만나는 평화. 평화를 되찾은 뒤에야 오르는 곳이 죽음의 땅이기 때문이리라. 향불 한 줄기 올리고 네 번 절하는 머리 위에 한 여름 초록빛 들어찬다.
 효종대왕은 안타까운 임금이시다. 그분의 무덤 앞에 서니 애잔한 슬픔이 밀려온다. 큰 나무 아래 돋은 작은 나무는 가지와 줄기가 여리다. 햇볕과 바람과 빗방울을 막아주는 만큼 스스로 단련할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 영릉(英陵)과 가까이 있는 영릉(寧陵)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묘역의 크기도 방문객 수도 눈에 뜨이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 무덤 앞이야말로 세상의 이치를 돌이켜보기에 좋은 장소다.
 효종대왕은 큰 꿈을 품고 있었다. 병자호란으로 겪은 치욕을 갚으려고 북벌을 시도했다. 이루지 못한 꿈은 한으로 남아 몸을 병들게 했다. 너무 일찍 그분은 욕망 없는 나라로 갔다. 대왕이시여, 지금도 꿈꾸시는가. 나는 당신이 볼모로 잡혀가 계시던 청나라 궁궐을 보았습니다. 유리로 만든 기와와 그 기와 지붕 아래 가득한 그늘들을 보았습니다. 성안의 건물들을 둘러싼 높고 높은 성벽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그 안에서 8년을 계셨습니다. 가장 잔인한 동물이 인간임을 겪어내셨습니다. 작은 나라 힘없는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죄. 형님이신 소현세자와 함께, 거닐었을 뜰이 어디쯤일까, 유리기와난간을 만날 때마다 손으로 쓸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늦게 당신의 무덤 앞에서 머리 조아립니다. 이제 세계는 부자가 제일인 시대로 밀려가고 있습니다. 창과 칼로 싸우던 시대는 고전 속에나 존재합니다. 당신이 한을 품고 잡혀가 계시던 청나라 왕궁도 이제는 심양 고궁이란 이름으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사람이 없듯이 영원한 나라도 없습니다. 필요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인심입니다. 이루지 못했으나, 당신의 꿈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 호젓한 숲속에서, 먼 강물 소리 들으며 누워 계시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도 깊은 뿌리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명성황후의 생가는 생각보다 외진 곳에 있다. 새로 세운 건물들. 나무냄새 시멘트냄새가 가시지 않은 기념관. 새로 만든 연못. 연못 주위의 조각품들.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건축 자재들. 뒤섞인 풍경들 등지고 문 열린 집으로 들어간다. 빈 집 방안에 인형 사람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빈집 대청마루에 인형으로 환생하신 왕비마마 앉아 계신다. 시녀도 없이 혼자 안장 빈 뜰 내다보신다. 얼굴 없는 나레이트 설명 뒤따른다.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은 나라의 힘이 쇠약해진 탓이었다. 적군이 강해질 때 스스로 자족하여 준비를 게을리 한 탓이었다. 글줄이나 읽은 선비들끼리 사사건건 편을 가르며 갑론을박을 거듭하는 사이 대포는 녹슬고 전함은 낡고, 군사들은 목숨 걸고 싸울 명분과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다. 한복이 양복으로 바뀌고, 마소가 자동차로 바뀌었을 뿐, 시정 인심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좁다란 뜰 추녀와 추녀 사이로 올려다보는 하늘만 제 빛이구나.
 이호대교를 건너간다. 내처 가면 강원도 경계를 넘어 원주에 닿겠지만, 강변유원지 표지판 따라 날개길로 내려간다. 굴다리를 끼어 나오니 42번 국도 옛길을 만났다. 조금 가니 목아박물관 주차장이 있다. 길옆에 차를 두고 걸어서 박물관 들어간다. 폐관 시간이 가까우니 까만 건물부터 보고 나오라고, 나올 때는 뒷문으로 나가시라고….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넓은 뜰 여기저기 자리잡고 선 군상들 구경하며 간다. 박물관 내부는 답답하다. 공간은 좁고 전시품은 많은데, 짧은 시간에 군계일학 고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좀 더 연구하고 충분한 준비를 하고 왔더라면 보물을 먼저 둘러보았겠지만, 내 눈에 이곳 보물들은 모두 노천에 있다. 잔디 위에 앉은 보살. 휴식 삼매에 빠진 듯 나른한 자태는 조각한 분의 심미안을 짐작케 한다. 그 뒤에 있는 나부상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 박물관은 종교에 대해 지니고 있던 고정관념을 화들짝 깨뜨리고 열어놓은 공간이다. 박물관 입구 맞은 편, 넓은 공터 중심을 비워두고 변두리에 둘러 세운 장승들도 재미있다. 비 흡족히 내린 뒤의 하늘에 가득한 뭉게구름둥둥 떠서 배경이 되어준다.  
고달사지에 도착하니 어둑해졌다. 오락가락하는 빗속에 산 그림자 짙다. 고목나무 그늘에 차를 두고 진흙길을 딛으며 간다. 나무 틈에 걸어놓은 '고달사지' 널빤지 한 장이 유일한 안내판. 입구를 가린 나무덤불 돌아서니 넓은 공터가 나타난다. 절터는 넓다. 얼마나 큰 절이 있던 곳이면, 평평한 들이 산밑까지 이어져 있다. 파헤치다 덮어둔 비닐막들 보인다. 거대한 돌조각품 보인다. 귀부와 이수만 남은 '원종대사 혜진탑비'. 돌부처는 사라지고 조대만 남은 '석불대좌'. 그 거대하면서도 정교한 무늬로, 옛 영화를 짐작한다.
 고려 때의 문신 한수(韓脩·1333∼1384)는 시에 '20년 전이 꿈같구나. 젊었을 때의 친구들은 반이나 황천객이 되었네. 이제 고달 옛절에 옴은, 원통(圓通) 큰 북전[大福田]이 있는 때문이네. 사면의 산 병풍은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과 이야기, 하루 저녁에 돌아갈 길을 잊었으니, 당시 묘련(妙蓮·부처가 영취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한 일)에 있던 것 같으이.'하였다. 푸른 하늘에 기댄 비석. 그것들은 지금 그루터기만 남았다.
내가 보려는 것은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다. 무릇 귀한 것들은 호젓하고 깨끗하고 높은 곳에 있는 법. 복닥이는 삶을 지나 평화를 회복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들깨밭 을 지나서 비스듬한 언덕길 올라간다. 저 언덕을 다 오르기 전에 만날 수 있을까. 산 속에서 만나는 돌계단은 내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길고 가파른 돌계단의 끝에서 '공사 중 출입금지' 금줄이 막는다. 소나무들이 웅성웅성 둘러선 곳에 둥그런 공터가 있고 그 가운데, 내가 찾던 보물이 있다. 700년 전의 선비도 만져보았을 보물. 아쉬워라, 하필이면 해체공사중이다. 푸른 그물 안에서 비스듬히 걸쳐놓은 옥개석만 머리를 내밀고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아도 안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푸른 그물 안에는 눈맞추는 무늬들이 있다. 내가 너무 늦게 왔거나 너무 일찍 온 것이다.
 고달사지의 조각품들은 모두 고달이란 사람의 작품이라 한다. 오직 부처만을 생각하며 돌을 쪼는 사이 그를 기다리던 식솔들은 굶어 죽었다한다. 그리하여 그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한다. 멀고 먼 고려로부터 오늘의 내 앞까지 이 탑이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은 고달의 영혼이 이 탑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 때문이리라. 내가 이 비뚜름한 탑을 향해 삼배하는 뜻은, 천년이 넘도록 바래지 않는 예술혼을 기리는 흠모의 표식이다.
 원종대사 혜진탑은 온전한 모습으로 맞이한다. 이 절터에 남아있는 네 개의 유물 중 오직 온전한 하나. 끌과 정이 매만진 돌에서 뿜어내는 힘이 느껴진다. 천년을 바라보는 돌탑 앞에서 나는 하루살이처럼 날고 있구나.  
 고목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할머니 한 분이 서성거린다. 박부전(74)할머니. 고달사지 안에 집을 짓고 사시다, 고달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이주한 주민들 중의 한 분이시다. 다리가 그렇게 아프신 데 여기까진 왜 올라오셨어요. 아들 담배도 살 겸, 살던 곳도 볼 겸. 아들 담배 핑계 대고 살던 집터와, 앉아 놀던 나뭇그늘과, 늘 마시던 샘물 곁으로 올라와 서성거리는 노인. 비오는 날 석양처럼 가슴에 얹힌다. 할머니의 새집은 절터 입구 도로변 논 가운데 있다. 조용한 산 속에서 차 소리 끊기지 않는 도로변으로 옮겨 앉은 노인. 익숙하고 정든 삶터를 옮긴다는 건 노인들에겐 더욱 힘든 일이다. 오래 건강하시기를 빈다.
 고달사지가 있는 상교리에서 상구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제법 가파르다. 우두산 정상에서 싸리산 쪽으로 뻗어가는 능선이 휘청 허리를 낮추는 부분으로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간다.  고갯마루에 멈춰 서서 내다보는 강 쪽 풍경이 신비를 더한다. 자욱한 안개. 더운 날 소나기가 만든 물안개. 한 폭의 동양화를 빚고 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니 산아래 세상이 별 천지 같다.
 고갯마루 내려서니 클럽700CC 관내다. 잘 가꾼 도로며, 숲이며 도로변 팻말들이 기분 좋은 드라이브를 도와준다. 여주군 관내에는 열 개의 골프장이 있다. 우리나라의 골프 열기를 짐작케 하는 현장이기도 하지만, 여주 땅이 산이 높지 않고 도로망이 잘 갖춰져 있어서 골프장 만들기 좋은 조건을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더운 날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 보기 미안해서 골프장 못 가겠다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여주 읍내의 밤은 대체로 어두컴컴한데, 오직 한 곳만은 대낮 같다. 여주 읍내 중앙통. 노폭 10m쯤 되는 시장통인데, 옷가게 신발가게 가방가게 화장품가게…. 저마다 촉수 높은 전등을 밝혀 거리를 함께 밝힌 것이다. 중앙통은 차 없는 거리다. 더위를 피해 밤에 나온 사람들 느릿느릿 걷는다. 아이들 마음껏 뛰어다닌다. 한 가닥 길이라도 자동차 간섭받지 않고 걸을 수 있게 열어 둔 배려. '여주'란 이름처럼 아름답다. 여주읍내와 북내면을 연결하는 여주대교는 보도 쪽에 무지개분수를 가동 중이다. 간헐적으로 분무기처럼 물을 뿌리는데, 가로등 높이에서 뿌리는 물줄기는 포물선을 그리며 강위로 떨어져 내린다. 빛을 마주하고 바라보면 무지개가 돋는다. 부슬비처럼 가는 물줄기에 보행자들은 머리며 옷이 젖는다. 젖기 위해 일부러 지나다니기도 한다. 모르고 들어선 사람들은 덜 젖으려고 애를 쓴다. 오며가며 바라보면 시원하다. 여주는 이처럼 도시다. 멋을 아는 도시다. 면소재지나 읍내에 있으면 농촌이 지척이라는 걸 잊어버리게 된다.
 신륵사 주차장 옆 모텔에서 자고, 벽절 안으로 들어왔다. 세찬 빗줄기 틈틈이 맑은 하늘이 드러나고 햇살도 비친다. 그 잠깐잠깐 비치는 햇살에 강물이 금빛 옷을 입는다. 밤 사이 내린 비로 강물은 붉어졌지만, 강물을 건너 내게로 오는 햇살은 빛나는 길을 만든다. 흐르는 물 위에 빛나는 길 한 가닥 바라보고 있으니 맥박이 뛴다. 한낮에 왔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감흥이 스멀스멀 핏줄 속을 돌아다닌다. 삼층탑과 함께 강 쪽으로 기운 졸참나무와 함께, 건너편 강변의 금모래은모래와 함께 너무 일러 아무도 없는 팔각정과 함께, 아침빛을 나누며 뛰는 맥박을 느낀다.  
 신륵사는 강변에 있는 절이다. 절이 산 속에 있지 않고 강변에 있다는 건 우리나라로선 일종의 경이다. 강변에는 암반 위에는 조그만 삼층탑이 있다. 물때가 앉아서 까맣다. 모양을 살펴보면 신라의 탑. 흐르는 강물에 마음을 뺏겨 선 채로 삼매경에 빠진, 아담한 여자를 보는 것 같다. 울타리도 없고, 안내판 같은 것도 없지만, 탑 둘레를 돌아 팔각정 오르는 사람들도 장난 좋아하는 아이들도 만지지도 건드리지도 않는다. 힘주어 밀면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 같은데, 나비처럼 가볍게 천년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나는 신륵사 경내에 있는 유물 중 이 탑이 제일 좋다. 조그맣고 투박하나 제 몸 하나 중심잡고 추스릴 균형은 갖추고 있다. 젖은 바위에 주저앉아 삼층탑을 벽탑에 기대보기도 하고, 벽탑 옆으로 올라가서 삼층탑과 강월헌을 포개보기도 하고, 강물 위에 삼층탑을 두둥실 띄워보기도 한다. 거대한 암반 위에, 낭떠러지 앞에, 이 탑을 세울 생각을 한 이는 심미안이 뛰어난 사람이다. 아침 햇볕과 빛나는 강물에 비껴보니 윤곽이 더욱 선명하다. 나는 이 탑을 보려고 세 번을 왔다. 낮에도 오고 아침에도 오고 비올 때도 왔다. 이 탑을 보고 있으면 무수한 무명인들이 떠오른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높직한 벽탑보다, 단청 입힌 지붕 아래 있는 범종이나 비석들보다 보통인의 염원을 더 잘 알아챌 것 같아서이다. 보호받지 못하기에 자유로운 영혼도 있다. 이 탑이 그것을 알게 했다.
 마을을 보자. 외곽으로 나가서 들과 사람을 더 가까이서 보자. 기왕이면 강변마을로 가자. 어딘지는 모르지만 무엇이 있을 지는 모르지만, 여주 안이면 된다. 신륵사를 등지고 원주 쪽으로 달리다 가야리 쪽으로 우회전했다. 이리로 가면 어디가 나와요. 풀 베는 청년에게 길을 물었다. 가야리! 여주처럼 예쁜 이름이다. 좁은 길. 울퉁불퉁한 노면. 천천히 오르니 황톳빛 건물들이 다가선다. 가까이 가보니 대순진리회 건물들이다. 이호대교 위에서 보이던 그 건물들이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으나 성전은 규모가 크고, 입구에는 대나무 막대기 든 처녀들이 대열을 지어 보초를 서고 있다. 건강하고 당당한 모습들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믿는 쪽으로 삶을 밀고 간다. 영원을 구가하는 노력은 예술가들만 기울이는 게 아니다.
언덕을 내려가니 마을이 나온다. 길은 좁지만, 강물은 가깝다. 강변으로 통하는 농로로 들어가서 강의 노래 듣는다. 비가 와서 그치고, 바람이 불어서 그치는 노래. 비를 실은 바람에 콩잎이 눕고, 벼 잎사귀들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일어났다 한다. 어제는 너무 뜨거워서, 오늘은 너무 비가 와서, 카메라가 고생이 많다. 못쓰게 되면 어쩌나, 내 몸 젖는 건 돌볼 틈이 없다.
 가야리 쪽은 강폭이 좁다. 건너편이 선명히 보인다. 그러나 풀들이 자욱히 자랐다. 내려가는 통로도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높이에서 강을 보려면 시야가 확 트여야하는데, 강을 가로지르는 고압선과 철탑들만 선명하다. 이호대교 위에서 내려다보고 건너다보던 강변. 차를 몰아 좀더 내려가 본다. 농로처럼 좁은 길인데 지나다니는 차량이 많다. 갯골표석 지나니 길이 굽어진다. 숲속의 밭두렁. 밭두렁 옆의 버스 정류장. 바삐 걸어가는 아주머니 마을회관 앞까지 가면 차 돌릴 공터가 있다고 일러준다. 일하러 가는 길이라고 버스정류장이 바로 여긴데 나는 이제 다 왔다고 길 가르쳐주는 아주머니 얼굴이 밝다. 아주머니가 가르쳐주신 길로 가니 영동고속도로 굴다리를 끼어나간다. 조금 더 가니 적금1리 마을회관 앞이다. 마침 비깃줄기가 가늘다. 가로수 밑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들. 그들을 앞으로 천천히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버스는 어느 길로 가는가. 내가 들어오던 그 길로 가는 모양이다. 버스 떠나고 나도 떠난다. 오던 길을 되짚어 가야리로 돌아온다. 갯골 표석 앞에 다시 멈춘다. 도심의 공중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처럼 논 위를 가로 질러가는 농수로. 그것을 담으려고 길로 내려선다. 기다렸던가 주룩주룩 하늘이 샌다. 논두렁의 콩잎들 웃는 듯 우는 듯 잎사귀 뒤집으며 흔들린다. 벼들은 머지않아 이삭이 패겠다. 논둑을 튼튼히 하려면 콩을 심어야 한다. 콩뿌리가 흙의 유실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농부는 논두렁의 콩 농사도 빠트리지 않는다. 남한강 물길은 베폭처럼 좁다랗게 보이지만, 저 충만한 강물 덕에 여주 사람들 농사는 어디로 가나 풍년이다.  
 37번 국도 변에는 그릇 파는 가게들이 많다. 백자와 청자 같은 전통도자기, 항아리 뚝배기 투가리 같은 토기, 화분, 접시 대접 주발 같은 생활도자기…. 흙으로 빚을 수 있는 그릇들은 다 모여있다. 값도 싸고 모양도 좋다. 오학리 강변 쪽에는 도예촌이 있고, 현암리·오금리·지내리·이호리 일대에도 도자기 공장과 판매상들이 있다. 여주가 도자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려시대로 올라간다. 북내면 일대에 도예가들이 많이 몰려든 이유는 싸리산에 질좋은 백토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관요 광주분원에서 싸리산 백토를 채취하여 남한강 물길로 실어 날랐다한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잡혀가고, 관요가 해체됨에 따라 급격히 쇠퇴했으나, 세계도자기 박람회를 기점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여주는 이렇게 토산이 넉넉하다. 강에서는 고기를 잡고, 흙은 그릇을 구우며, 누에를 길러 비단을 짜고, 들판이 기름지니 심는 것마다 풍년이다. 여주 사람들이 급하지 않고, 표정이 밝은 것은 모두다 자족한 땅의 후예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금리에 오니 두부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가야리에서 되돌아 나와 '지가도방' 찾아가는 길. 보배네집 왕만두로 아침을 먹는다. 논 옆에 작업장이 있고 작업장 안에는 콩물 짜는 아주머니들 있다. 허리 아파 다리 아파 하소연하며 병원 순례나 하실 연세 같은데, 콩자루를 맞들어 비틀고, 꾹꾹 누르기도 하고, 콩물 한 통을 가볍게 들어 나르는 노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를 하는 것처럼 밝은 모습이다. 기왕에 하는 일 즐겁게 하자. 마음이 몸을 이끌고 날마다 두부를 끓여왔으리. '道'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면벽참선 끝에 얻는 깨달음이 형이상학적이라면, 저렇게 부대끼며 깨달은 '도'가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을 이어온 것이다. 무쇠솥, 겅그레, 나무주걱, 체….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토종 도구들이다. 다른 쪽 벽면에선 대형냉장고가 소리내어 가동 중인데, 한 쪽에선 여전히 무쇠솥과 겅그레 체가 차지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우리 향토의 현실을 비춰주는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땡 여름 복중에 누가 불을 지피겠니. 금사면 금사토기 불꺼진 아궁이 앞에서 포기했었다. 그런데, 그러고 있었는데, 전통자기 만드는 지가도방에서 불 당기는 현장을 보여주겠단다. 나무 때는 전통가마라면 더 좋았겠지만, 요즘은 나무 때는 가마가 드물다. 구워야할 그릇들은 이미 가마 안에 차곡차곡 자리잡고 있다. 도공 지동률(43)씨는 생각보다 젊다.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부인은 촌사람(?) 같지가 않다. 이렇게 더운 날, 나를 위해 가마를 열어놓고 기다려준 사람들이 있었다. 흙 냄새 선연한 항아리들. 크기와 모양에 맞춰 자리잡고 있다. 나는 굽기 전의 항아리가 제일 예쁘다. 다음은 초벌구이한 항아리다. 유약을 바르고 무늬를 입혀서 익어 나온 항아리는 가장 나중이다. 내가 아무리 예뻐해도 가마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은 항아리는 그릇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터무니없는 희망을 태워버리라는 듯 불길이 치솟는다. 잠깐 사이에 가마 안을 에워싸는 불길. 가마 속의 항아리들 붉은 유리처럼 투명해진다. 도공은 저 불길을 지키며 밤을 샐 것이다. 우리의 도자기들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왔고, 양반가의 장식품에서 생활 속의 용기로 발전해왔다.
 살만한 땅은 어디일까? 여주읍을 등지고 능서면 왕대리 지나간다. 왕대리에서 백석리로 이어지는 365번 지방도로는 남한강 물길과 나란히 간다. 흥천면으로 들어서니 예쁘게 지어놓은 전원주택들도 보인다. 도로망의 확충과 자동차 보급은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점점 줄여가고 있다. 지가도방 지동률씨 부인은 여주가 이름도 예쁘고 살만한 땅이라 했다. 그래서 자기네들도 이사를 왔다고 했다. 지난 주 왔을 때는 나도 저런 집들 서너 채 둘러보기도 했다. 서울은 한창 바쁘고 젊은 사람들에게 비워주고 용인 양평 광주 여주 등지로 전원주택을 마련해 떠나는 사람들 많다. 나도 그런 꿈을 갖고 있지만, 선뜻 옮겨 앉고 싶은 땅을 만나기 어려웠다. 농사도 젊을 때 지어야 하는데, 농사짓지 않으면서 농촌생활 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물위의 기름처럼 떠 있으려고 들어오는 농촌이라면 토박이들도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내가 살고싶은 땅.
돌아가는 길은 느긋하다. 다시 저녁이 내리고, 어떤 골짜기를 지날 땐 동이 물을 들이붓듯 비도 내리지만, 돌아가는 길이기에 느긋하다. 왕대리 앞 지나는 남한강 물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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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어떤 곳인가?
경기도 여주군(京畿道 驪州郡)은 경기도 동남부,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경계가 만나는 접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 서쪽은 경기도 이천시·광주시, 남쪽은 충북 음성군·충주시, 북쪽은 경기도 양평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1읍(여주읍), 9면(점동면·가남면·능서면·흥천면·금사면·산북면·대신면·북내면·강천면), 145개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황효(黃驍)로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는 황려(黃驪·일명 黃利)현으로 고쳤고, 현종9년(1018)년에는 원주(강원도 原州)로 붙이고, 뒤에 감무를 두었다가, 고종44년(1257)에는 영의(永義)로 고치고, 충렬왕31년(1305)에 순경왕후 김씨의 고향이라하여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시켰다. …조선 태종조에 이르러 원경왕후(元敬王后)의 고향이라하여 여흥부(府)로 승격하고, …강원도로부터 경기도로 복구내예(內隸)하였다음죽현 북쪽 어서이촌(於西伊村)을 합하여 충청도로부터 본도(경기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고쳐 도호부로 했다.
예종 원년에 영릉을 부의 북성산에 옮기고 천령현을 혁파하여 소속시키고 지금 이름(여주)으로 승격시켜 목(牧)으로 하였다.
여주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7명의 왕비를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역대의 군명은  골내근(骨乃斤)·황효(黃驍)·영의(永義)·황려(黃驢)·여강(驪江)·여흥(驪興)·여성(驪城)·황리(黃利) 등이다.(동국여지승람, 한국지명연혁사전 참고)
여주군의 총면적은 608㎢. 이중 농경지는 178㎢, 임야는 325.39㎢. 주요기반산업은 농업이다. 인구는 35,553세대 104,786명(2002년 8월 6일 현재)으로, 증가 추세에 있다.
여주군은 군의 중심에 남한강을 끼고 있어 들판이 기름지고 경관이 수려하다. '들이 평평하고 산이 머니[野平山遠]' 논농사 밭농사가 모두 잘되어, 주민의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한다. 영릉·신륵사 관광지·고달사지·파사성지·명성황후생가·대로사·목아박물관·도예촌 등이 있어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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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이야기/여강(驪江)
 여주군 관내를 흐르는 남한강(南漢江)을 여주 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른다. 여주의 강이라는 뜻도 되겠지만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여주의 고려 때 이름이었던 황려(黃驪)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황려의 강. 여강! 여주 관내를 지나는 남한강 길이는 도상거리 48km. 이중 여주가 오로지 하는 길이만도 34km에 달한다. 남한강 백리길이 여주를 관통하고 있는 셈이다. 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곧 한강 상류이며 주 북쪽에 있다. 객관(客館)을 강을 베개하여 지었다'하였으니, 이 강변 객관에 들었던 벼슬아치들이나 시인묵객은 풍경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넉넉해져서 숱한 시문(詩文)을 남겼다.
고려의 문신이요 재상이었던 이규보(李奎報·1168∼1242)는 "계수나무 노와 모란(木蘭) 배로 푸른 물결을 가로지르니, 붉은 단장이 물 가운데의 하늘에 아름답게 비치네. 소반에 담은 것은 배꼽 둥근 계( )만 보겠고, 그물을 거니 도리어 목 우추린 편[縮項 ]을 보겠네. 10리의 연화(煙花)는 참으로 그림 같은데, 한강의 풍월은 돈을 논하지 아니하네. 모래에 앉은 갈매기야, 고기잡이 노래소리를 익숙하게 들었을 터이니, 날아와 여울앞에 이르러 배를 피하지 말라" 하였다. 이규보는 본관이 황려(黃驪)였다. 황려는 곧 지금의 여주.
 고려말의 문신이요 학자였던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시에는 "여강의 형승은 천하에 드문데, 사시(四時)의 풍경이 천지의 비밀을 헤쳐 보이누나. 내가 처음 와 놀 때는 여름철이어서,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배에 불어 옷에 가득 서늘하였네. 백 척 높은 군루(郡樓)에 두 눈으로 멀리 바라보니, 들은 평평하고 산은 멀어 부슬부슬 한데 연기가 걷히네."하였다. 그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서는 과도기에 우왕의 사부가 되고, 창왕을 옹립하고, 명나라에 주청하여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 한 죄로 유배되가도 하였다. 이성계의 출사종용을 끝내 고사하고 여강(驪江)으로 가는 도중 죽었으니, 그는 죽어서도 여강과 함께 하는 셈이다.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이요 학자였던 권근(權近·1352∼1409)은 시에서 "황려(黃驪·여주의 옛 이름)의 산수가 스스로 맑고 기이하여, 높은 관개(冠蓋)가 서로 만나매 기약이 있는 듯 하네. 별당의 거문고와 노래소리는 자리가 질서있고, 긴 강의 운월(雲月)은 밤이 더디네. 배를 띄우니 아득하게 은하수와 통하는 듯, 날리는 눈은 부슬부슬 술잔에 떨어지네. 다행히 여러분 모시고 성한 모임가지니 풍류와 문채가 당대에 제일일세."하였다.
이 강 안에는 마암(馬巖)이란 바위가 있는데, 여주읍에서 동쪽 1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 이름을 황려라 하였다. '
이규보는 또 시에서 이르기를 '웅(雄)하고 기특한 쌍마가 물가에서 나오매 현 이름을 이로부터 황려라 하였네. 시인은 옛 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증거를 캐 물으나, 오가는 고기잡이 늙은이는 어이 알리.'하였다. 이 바위의 이름은 이로 해서 났다. 좌우로 둘린 장림(長林), 옥양(沃壤)이 멀리 수백리에 가득하고, 벼가 잘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고, 나무하고 풀 베는 데 적당하고, 사냥과 물고기 잡기에 적당하여, 모든 것이 자족하다. …참으로 이른바 명구승지(名區勝地)인데' 하였다.
 여주의 여강을 품고 있는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금대봉(1,418m)에서 시작된다. 금대봉 아래 검룡소가 있는데, 흔히 검룡소를 남한강의 발원천이라 한다. 남한강이 시작되는 첫 번째 개울이름은 금대봉에서 창죽동으로 흘러내리는 골지천이다. 골지천은 정선 여량 아우라지에서 송천과 합류하여 조양강이 된다. 조양강은 한참이나 내려가서 오대산 두로봉에서 시작한 오대천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서거정의 기문에 '여강 물은 월악에서 근원하여 달천과 합하여 금탄이 되고, 앙암을 거쳐 섬수와 만나 달려 흐르며 점점 넓어져 여강이 되었다.'는 말은 옳지 않다. 과학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때의 글이니, 옳고 그름을 가름하며 읽음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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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영릉(英陵)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의 능이다. 소헌왕후 심씨와의 합장릉이다. 왕의 '능은 본래 광주 서쪽 대모산에 있었는데, 예종 원년 기축에 북성산의 양지 편에 이장하였다.' 여주는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신 원경왕후(元敬王后)의 고향이기도하다. 원경왕후는 어은 민시중의 따님으로 태종의 비가 되었었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추앙 받는 성군이다. 우리 글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여 국토를 확장하였으며,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인들의 노략질을 막았다. 학자를 양성하고 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용비어천가·농사직설 등 수많은 책을 발간케 하였다. 영릉(英陵)은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능의 하나로서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두 개의 혼유석이 있고, 봉분 둘레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12개의 석주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정 중앙에는 팔각의 장명등을 세웠고, 석호·석양·석마·문인석·무인석·망주석을 주위에 배치했고, 능 뒤에는 나지막한 곡담을 둘렀다. 능 아래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과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던 수라간, 능지기가 살던 수복방이 있고, 정자각 동편에는 능비와 비석을 세웠다. 정문 안쪽 노천에는 해시계·자격루·관천대·측우기·혼천의 등 세종 시대에 발명한 각종 과학기구를 복원해 놓았고, 세종전 건물 안에는 대왕의 업적과 관련된 유물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학습·학술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능서면 왕대리).
*매주 월요일은 문을 닫는다. 안내전화 031-885-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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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효종대왕릉(寧陵)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임금인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장씨를 모신 쌍릉이다.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과는 한자만 다르게 쓴다. 동국여지승람 여주목 능침조에 '영릉(寧陵) : 영릉(英陵) 국내(局內)에 있으며 홍제동주(弘濟洞州)로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효종대왕릉으로 기신(忌신)은 5월 4일이다. 능이 처음에는 건원릉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현종 14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인선왕후 장씨도 합장하였는데, 기신은 2월4일이다'하였다. 그런데, '쌍릉'이라 하는 것은 한 묘역 안에 2기의 무덤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작은 무덤은 나란히 있지 않고 훨씬 아래쪽에 있다. 부부의 묘를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 위로 분리한 점이 이상하다. 문헌의 내용들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다.  
 효종대왕릉은 숲이 울창하다. 인접해있는 세종대왕릉보다 찾는 이가 적어서 호젓하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드님이셨다. 1619년(광해군11) 5월 22일 태어나, 7세때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을 겪었고,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8년 동안이나 볼모로 잡혀있었다. 1646년(인조23) 소현세자가 변사하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49년(인조27) 창덕궁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청나라에 당한 굴욕을 씻고자 북벌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했다. 재위 10년 만인 1659년 5월 4일이었다. (능서면 왕대리).
*매주 월요일은 문을 닫는다. 안내전화 031-885-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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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명성왕후 생가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황후였으며, 1895년 10월 8일 새벽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시해 당한 명성황후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이 집은 원래 숙종 13년(1687)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되었던 집으로, 명성황후가 탄생하여 8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남겨진 건물은 안채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사랑채·별당 등이 복원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다. 명성황후 공부방 자리에는 '명성황후 탄강구리(明成皇后 誕降舊里)'비가 세워져 있다. 생가 건너편에는 명성황후기념관이 건립되어 각종 자료와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고, 161석 규모의 공연장에서는 명성황후 관련 영상물을 상영한다. (여주읍 능현리)
*매주 월요일 휴관. 안내전화 031-880-18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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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고달사지(高達寺址)
 고달사(高達寺)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 아래 국가가 관장하던 대찰이었다 한다. 고달사는 고달원이라고도 하였는데,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인 도봉원(道峰院)·희양원(曦陽院)·고달원(高達院)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에는 황량한 절터에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제8호인 '석불대좌' 등의 석조유물 4점이 광활한 지역 여기 저기에 흩어져 남아있다. 이 절터의 석조유물들은 화려하면서도 장엄하고 힘이 넘치는 조각품들이어서 이 터에 있었던 절의 규묘와 영화를 짐작케 한다. 고달사 석조물은 모두 고달이란 석공이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불사를 끝내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었으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다.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니 얼마나 큰절이었겠는가. 현재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중이다.(북내면 상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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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신륵사
천년고찰 신륵사(神勒寺). 창건 연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말과 고려 초로 추정한다. 고려 우왕 2년(1376) 나옹선사가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 이 절에서 입적하면서 유명해졌다. '神勒'이란 사찰명은 이 지방에 나타난 사나운 용마를 한 스님의 신력으로 제압한 일에서 유래되었다. 법당 동쪽 남한강변에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多層塼塔)이 있어서 '벽절( 寺)'이라 부르기도 했다. 고려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 2층으로 된 대장각을 세우고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으며, 이를 기념하여 대장각비를 세우기도 했다. 조선 세종 22년(1440) 여흥부원군 민제의 화상(畵像) 봉안을 위해 중수되었고, 성종 3년(1472)에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을 광주(廣州·지금의 서울 강남) 대모산으로부터 여주로 이장함으로써 영릉의 능침사찰이 되었고,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바꾸고 대규모 중수불사를 열기도 했다. 이후, 중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철종 때에도 중수불사를 열었다. 현재 이 절은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보물 제180호인 '조사당'·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 석종부도(石鐘浮屠)'·유형문화재 제128호인 '극락보전'·보물 제231호인 석등 등 보물 7점과 유형문화재 1점을 보유하고 있다. 다층전탑 앞 팔각정의 '강월헌(江月軒)' 편액은 나옹선사의 당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신륵사는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경관이 아름답다. 남한강 물길을 사이에 두고 '금모래 은모래' 강변 유원지와 신륵사 관광지가 개발되어 있다. 031-884-9300. (북내면 천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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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파사성지(婆娑城址)
 이포대교 동단 천서리 쪽에 파사산(230.5m)이 있다. 여주군 대신면과 양평군 개군면의 경계를 이루는 파사산에는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둘러놓은 석성이 있다. 둘레는 약 935.5m.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6.25m, 가장 낮은 곳은 1.4m 정도. 천서리 쪽 동문지(東門址)에는 옹성문지(甕城門地)가 남아 있고, 금사면 이포리 쪽 남문지(南門址)에는 문앵(門櫻)을 세웠던 고주형초석 2기와 평주 초석이 남아있다. 동문지는 한강으로 이어져 있고, 돌출 된 언덕에 있어서 이포리 쪽에서도 보인다. 이 성은 남한강의 상·하류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성으로, 신라 파사왕(婆娑王) 2년에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와 고구려 영역이었을 때도, 성곽이 필요한 요충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선조 25년(1592년) 에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유성룡의 발의에 따라 승군총익인 의암(義巖)이 승군을 동원하여 1,100보의 성첩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37번 국도변에 진입로가 있다. 사적 제251호. 왕복 1시간 소요. (대신면 천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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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대로사(大老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을 제향하는 사우. 여주읍 하리 도로변에 있다. 1785년 창건 당시에는 송시열에 대한 존칭인 '대로(大老)'를 붙여 '大老祠'라 사액되었는데, 1873년(고종10)에 강한사로 개명되기도 했다. 정조 9년, 김량행(金亮行) 등의 유림에 명하여 건립하게 하였고 같은 해에 편액을 내렸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은 본전, 강당, 비각, 내·외 삼문, 추향제 등이다. 특히, 대로사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전면에는 개방된 퇴간(退間)이 있고 측면과 후면에는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위패와 영정이 봉안된 감실이 있다. 부재 형태와 가구 수법 등 18세기 익공 형식 건물의 기준이 될 만큼 완벽하다.
이 사당은 다른 사당들과는 달리 서쪽을 향하게 앉혔다. 효종대왕의 무덤인 녕릉(寧陵)을 바라보게 앉혔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효종대왕이 봉림대군 시절 스승이었고, 왕이 된 뒤에는 북벌을 논의할 만큼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다.
송시열은 숙종 15년(1689년)에 왕세자 책봉 문제로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사후 5년만에 복관되었으며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여주읍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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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목아박물관
목아박물관은 '목조각장(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인 목아 박찬수 선생이 설립한 전문사립박물관이다. 불교 관련 예술품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으며, '예년미타도량참법(보물제1144호)', '묘법연화경(보물 제 1145호)', '정원본대방광불화엄경(보물 제 1146호)' 등의 보물을 비롯, 6,000여 점의 역사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나무·돌· 금속 등을 소재로 한 조각품들이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된 전시관을 둘러 채우고, 옥외와 정원까지 조화롭게 장식하고 있다. 연중무휴. 관람시간 09:00∼18:00. 안내전화 031-885-9952∼4. (강천면 걸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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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산물/도자기·토기
 남한강 물길을 사이에 두고 여주읍과 마주보는 북내면 오학리와 현암리·오금리·지내리, 신륵사가 있는 천송리와 목아박물관 주변 등에는 도자기 공장이 많다. 여주 관내에 있는 도자기 공장들은 약 600여개가 되는데, 전통도자기·생활도자기·토기 등 생산되는 종류도 다양하다. 이렇게 많은 도예가들이 여주로 밀집하게 된 경위는 고려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여주 지방에서는 고려 초부터 도자기가 제조되었고, 조선 초기부터는 공업화하였다는데, 이것은 대신면과 북내면 경계의 싸리산 언저리를 중심으로 점토, 백토, 고령토 등 전국에서 제일 좋은 도자기 원료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여주에 도요지가 조성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99년 3월 북내면 중암리에서 고려백자가마터를 발견하고 세종실록에 여주 자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점과 시중 골동품상에 여주자기가 현존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고려조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설로는 여주 싸리산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원료인 고령토를 관요인 광주분원에서 뱃길로 운반해 사용하였는데 광주분원이 쇠퇴해지자 도공 5명이 북내면 오금리로 이주해 자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조선 도예는 큰 타격을 입었다.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잡혀갔고 대부분의 요장이 파괴되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한 백자는 광해군 말기에 이르러서야 그 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여주지역은 17세기 말부터 도자기 원료 공급이 용이한 곳으로 이름나기 시작하여 '백자의 고장'이 되었다.
매년 ))월?세종대왕 숭모제전이 열릴 때 [흙과 혼 그리고 불의조화]라는 슬로건을 걸고 관내 모든 도자기업체가 참여하는 [여주 도자기 박람회]를 실시하고 있다.
※여주민속도자기조합 (031-885-3937), 여주군청 도예팀 (031-880-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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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도자기 만드는 법>
1.반죽된 흙이 물레 위에 올려졌다. 도자기는 처음에 중심을 잘 잡아야 끝까지 중심이 유지되어 원하는 그릇이 나온다.  
2.한 덩이의 흙이 하나의 항아리로 모양을 잡아가고 있다.
3.원하는 모양이 완성되면 실로 굽을 잘라 물레와 분리시킨다.
4.한 덩어리의 흙이 하나의 항아리로 모양이 잡혀, 물레에서 내려졌다.
5.완성된 항아리는 그늘에서 자연 건조한 후 가마에 넣는다. 건조기간은 날씨에 따라 다르나 3∼4일 이상 건조해야한다. 오래 말릴수록 더 좋다.
6.가스 가마에 차곡차곡 들어간 항아리들. 요즘 도자기들은 대부분 가스 가마에서 굽는다.
7.불씨가 당겨졌다.
8.활활 솟는 불꽃이 그릇들을 둘러싼다. 초벌 구이는 950∼1,000℃에서 5시간 정도 굽고, 재벌구이는 1,250℃에서 10∼12시간 굽는다.  
9.초벌 구이한 항아리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특정 면만 분칠을 했다. 이 그림은 가열하면 푸른색으로 바뀐다.  
10.그림이 완성된 항아리는 유약을 입혀서 다시 가마에 넣고 재벌구이를 해서 완성시킨다.
※여주군 북내면 오금리 [지가도방(池家陶房·031-882-2618)] 협찬. 모델은 '지가도방' 지동률(43)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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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산물/쌀·땅콩·금싸라기 참외
물 빠짐이 좋으면서도 기름진 들판에서 생산되는 여주쌀은 맛도 좋아 여주의 성가를 드높이는 특산물이다. 세종대왕 초상화를 걸고 파는 '임금님표 여주쌀'. 밥맛 또한 일품이다. 여주의 또 다른 자랑은 밭에서 자르는 고구마와 땅콩이다. 여주 관내 음식점들에서는 고구마와 땅콩을 활용한 반찬들을 곧잘 내놓는다. 그만큼 특산물의 활용방안을 연구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포면 이포리 일대에서 재배되는 금싸라기 참외는, 달콤하고 아삭하면서도 살이 두껍지 않아서 인기가 높다. 금사면 이포리 일대 도로변에는 참외 판매를 하는 가판대와 원두막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결시키는 직판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값도 싸다. 생산자마다 여주군에서 내린 일련번호를 가판대 머리에 붙이고 있어서 품질을 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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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 손맛
○신륵사 관광지구 '소문난집 태호네'  여주쌀밥
여주를 대표하는 음식은 민물고기요리와 여주쌀밥이다. 여주를 관통하는 남한강 물길 중 수심 깊은 여강에서 자란 잉어·쏘가리 등은 맛이 좋기로 소문났다. 못(池)이나 늪 등의 갇힌 물에서 자란 고기보다 강이나 냇물처럼 흐르는 물에서 자란 고기들이 맛이 좋다는 것은 옛 문헌들에도 나온다. 여주의 여강 잉어는 임금님께도 진상하였다하니 민물고기 좋아하는 분들은 여주로 별미기행을 떠나봄직하다. 여주군청 뒤쪽 강변과 여주대교 건너 신륵사 관광지에는 민물매운탕 집이 많고, 흥천면·금사면·대신면 등 강변에도 매운탕집을 겸한 횟집이 산재해 있다.
 '여주쌀밥'은 경기미의 주요생산지인 광주·이천 등지에서도 지역명을 앞에 걸고 지어내는 음식이다. 말하자면 돌솥밥정식인 셈인데, 흰쌀만으로 짓지 않고 검은 쌀과 콩 등을 섞어서 구수하게 지어낸다. 1인분에 1만원, 2만원을 받는데, 딸려 나오는 반찬이 스무 가지가 넘고, 조그만 돌솥에서 밥이 끓어 뜸이 들 동안 내오는 전채요리도 푸짐하다.
 그 푸짐한 밥상을 혼자 다 소화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 온종일 명승지를 찾아다니느라 신륵사주차장으로 들어서니 밤 9시가 넘었다. 삼복 더위에 지쳐서 밥 생각도 멀리 달아나 버렸는데, 길목손맛이 걸려있으니 건너뛸 수도 없다. 먹어두자. 누구 말처럼 먹는 게 남는 것이다. 소문난집태호네(031-882-1662. 885-1663). 숙소로 잡은 삼일장모텔 바로 옆이다. 일요일 저녁 늦은 시간이어서 다른 손님도 없는데, 한 그릇이면 어떠냐고 여주쌀밥을 끓여준다. 이 댁 쌀밥은 '여주쌀밥'을 간편화한 것이다. 반찬 수를 줄인 대신 7천원을 받는다. 그래도 반찬이 12가지나 된다. 계란찜·된장찌개·생선구이·호박전·열무김치·오이지무침·백김치·고무마조림·깻잎나물…. 밥이 반찬을 부르고 반찬이 밥을 부르니, 포만한 뒤에야 일어서게 된다. 넉넉한 강물처럼 넉넉한 인심을 느낀다.(영양밥 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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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내면 오금리 '보배네집' 왕만두·왕만두국
한 여름에, 그것도 아침 식사로 만두를 먹는다. '보배네집 왕만두(031-884-2535)'. 분당을 떠날 때부터 소문 듣고 왔다. 말하자면 떠나기 전부터 점찍고 나선 집이다. 37번 국도변 '오금리' 표석에서 마을 안으로 200미터쯤 들어가면 있다. 원래 37번 도로변에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골목 안으로 옮겼다한다. 그래도 이 집 단골들은 골목 안까지 찾아든다. 변함없는 맛과 푸짐한 인심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만두 하나가 작은 이들 주먹만한데, 한 접시에 11개나 담겨있으니, 5천원 짜리 왕만두 한 접시면 두 사람이 먹겠다. 만두맛은 속맛이다. 보배네집 만두속은 잘 익은 배추김치와 직접 만든 두부를 쓴다. 고기도 넉넉히 넣었다. 모양도 맛도 야단스럽지 않고 수수한 옛 맛 옛 모양 그대로다. 경상도 색시가 서울로 시집와서 시어머니께 배운 만두맛, 그 맛이 난다. 다른 게 있다면 투박할 정도로 크고 톡 쏘는 맛이 강하다는 점. 김치에 깊이 밴 고추맛과 넉넉히 뿌린 후추에서 나오는 맛 같은데, 그 점이 오히려 초밥 속의 겨자처럼 여름 입맛을 돋군다. 요즘 사람들은 밍밍하면 잘 먹지 않는다. 점점 더 자극이 강한 쪽으로 숟가락 젓가락을 옮겨가는 것 같다. 김치와 두부를 너무 꼭 짜서 질기고 퍽퍽해 졌다는 것. 굳이 불만을 따지자면 이 정도일 뿐이다. 주인장 한정옥씨도 자신이 만드는 왕만두처럼 크고 푸짐한 모습이다.  
아침이니 만두국으로 먹어야겠다고, 그러나, 만두찜도 먹어보고 싶다고 욕심 껏 시켜놓고는 요모조모 뒤집어 본다. 진한 뼛국물에 끓여낸 만두국은 아침 식사로도 손색이 없다. 국물맛도 구수하고 속맛도 구수하다. 구운 김을 길쭉길쭉 잘라서 고명으로 듬뿍 얹었고, 오이지 맛도 좋다. "오이지 맛을 알게 되어야 서울 사람 다 된 것"이라던 맏동서 말씀이 생각난다. 보배네 오이지가, 35년 전 서울로 시집을 왔을 때의 생소한 맛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오이지는 장마와 더위에도 탈없이 저장하며 먹을 수 있는 여름 밑반찬이다. 항아리에 오이를 차곡차곡 담고 못쓰는 대바구니를 잘라서 덮고 넓적하고 무거운 돌을 누르고 펄펄 끓는 소금물을 목이 차도록 붓는다. 다 식은 다음 뚜껑을 덮어 일주일쯤 지나면 먹을 수 있는데, 요즘은 식구가 많지 않으니 그 또한 사먹게 된다. 그런데 이 사먹는 오이지들이 너무 싱겁거나 짜다. 보배네집 오이지는 여름마다 담궈먹던 그 맛을 지니고 있다. 너무 짜거나 너무 싱겁지 않은 맛. 중부 지방의 여름 밑반찬 맛을 그대로 내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입맛이다. 내면에 저장되어 있던 입맛을 되살리고 내 앞에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들이야말로 향토의 맛이요 토속의 맛 아니겠는가.(왕만두 1접시 5천원, 만두국 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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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면 천서리 '천서리 막국수' 집의 동치미막국수·수육
이포대교 동단. 37번 국도변. 여주, 양평, 인제, 홍천, 광주 등지로 갈리는 사거리 부근에는 10여 개소의 막국수집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성업중이다.  천서리막국수(883-9799)·봉진막국수(882-8300)·봉천막국수(884-0471)·예안막국수(882-6279)·봉황막국수(882-3369)·개성막국수(881-4627)·홍원막국수(882-8259)·향원막국수(884-8826)·춘천막국수(883-5474)· 천명막국수(883-6380)·칠갑산(884-8504) 등인데, 천서리 막국수 상인회가 조직되어 있어서 어느 집으로 들어가나 맛은 비슷하다. 메밀을 주원료로 쓰고, 매운 양념을 가미하여 다른 지역보다 독특한 맛을 낸다. 또 황기 등 한약재를 함께 넣어서 기름기를 뺀 돼지고기 편육도 맛이 담백하고 고소하다. 이중 '천서리 막국수'의 대표명을 상호로 쓰고 있는 '천서리막국수(883-9799)'를 먹어보기로 한다.
여름날 점심으론 매워매워 혀를 불며 먹는 비빔국수가 좋겠지만, 나는 후환이 두려운(?) 음식은 먹고 싶어도 참는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는 냉면도 나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동치미국수를 시켰고, 오금리 사는 흥구·명구·성구 삼형제와 애들 엄마 아빠는 비빔국수·동치미국수를 취향대로 골라 시켰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이 펄펄 끓는 육수다. 빛깔은 한약 같은데, 맛이 깔끔하면서도 구수하다. 국수가 나올 동안 수육을 한 접시씩 먹기로 한다. 접시바닥에 얄팍하게 깔아서 내온 게 아니라 뚜벅뚜벅 썰어서 수북하게 담아내 왔다. 새우젖도 한 접시 딸려 나왔고, 상추와 쌈장 풋고추 마늘도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것처럼 따라나왔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백김치가 갈증을 다스려준다. 국수는 동그랗게 사리를 지어 중심에 앉혔고, 삶은 계란 반쪽과 오이채는 국수 위에 얹지 않고 가장 자리로 내려놓았다. 이름만 막국수지 모양은 얌전한 모밀냉면이다. 겨자와 식초를 조금 넣고 국수타래를 풀어서 후루룩 마셔본다. 내 몸에 왁자하던 열기가 한달음에 내려앉는다. 육수는 맑고 국숫발은 부드러우니 '여주'라는 이름과 잘 어울리는 모양과 맛이다.(막국수 4,000원. 수육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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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면 상호리 전통찻집 '만추'의 잣죽·쌍화차
 여름 여행은 오래하지 않아도 지치게 마련이다. 에어컨이 잘 작동되지만, 차문을 열면 열탕 속이다. 이렇게 지쳤을 땐, 따끈한 죽이나 전통차 한잔이 피로를 회복시켜준다. 이포대교 쪽에서 상품리와 곤지암 쪽으로 넘어가는 지름길에는 호실령이란 고개가 있다. 지도에는 없지만, 상호리 주민들이 합심해서 세운 표석이 고갯마루 직전에 있다. 대렴봉(414.9m) 정상이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곳. 대렴봉 안부, 고갯마루 바로 아래 첫 집이 '만추(031-886-8583)'라는 전통찻집이다. 흰 간판에 검은 글씨. [晩秋]라 써서 세워놓은 한자 간판만 보아도 주인의 고집을 엿볼 수 있다. 이 고집은 주인 내외가 직접 끓여내는 차와 죽에도 그대로 배어있다. 제대로 된 재료를 제대로 순서를 밟아 조리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잣죽과 쌍화차를 주문했다. 단팟죽도 호박죽도 맛이 있지만, 햇볕과 소나기 속을 드나드느라 지친 상태다. 잣죽이 소화를 돕고 쌍화차가 원기를 회복시켜줄 것 같다. 원목을 두텁게 잘라서 만든 탁자며, 토기로 된 의자들, 다녀간 사람들의 필적들…. 음식과 차를 기다리며 둘러보는 재미 또한 솔솔하다.  
잣죽은 끓이기가 쉬우면서도 어렵다. 잣죽을 제대로 끓일 수 있는 사람은 요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잣죽은 쌀과 잣을 따로 갈아서, 미음 끓이듯이 쌀물을 먼저 넣고 저어가며 끓이다가 쌀물이 뻑뻑하게 엉기기 시작하면 잣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끓여야한다. 뻐 뻑하던 덩어리가 잣물을 만나면 묽어지는데, 몇 차례 더 부어주며 끓여낸다. 지켜 서서 바닥에 눌러 붙지 않게 나무주걱으로 잘 저어주어야 하고, 쌀은 충분히 불린 것이어야 한다. 쌀과 물의 비율은 1:5 정도가 적당하다. 소금은 완성된 뒤에 따로내어 간을 맞춘다. 이렇게 순서를 밟아 끓인 잣죽을 한 보시기 먹으니 눈이 뜨인다. 여주 지방에서 구운 토기에 담아내어 운치 또한 남다르다. 강열한 햇볕과 더위에 시달린 몸이 수수한 그릇과 음식 맛 앞에서 회복된다. 잣죽과 동치미는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다. 죽 먹은 후에 마시는 쌍화차 한잔은 금상첨화다. 만추의 쌍화차는 텁텁하지 않아서 좋다. 2천 넓은 땅에 상추며 쑥갓 배추도 자란다. 커다란 수조 속엔 오리도 있고 거위도 있고 갓 낳은 오리알도 가라앉아 있다. 원두막에 누워서 하늘을 보는 맛도 좋다. 맛과 멋을 아는 집이다. 만추는. (잣죽 5천원. 쌍화차 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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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에 알차게 돌아보는 코스 가이드
여주군의 교통로는 사통팔달이다. 고속도로·국도·지방도로를 적절히 갈아타면 짧은 시간에 진입과 탈출이 용이한 곳이다. 여주는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다. 그만큼 느낌과 울림도 크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꿈을 적절히 갈무리하고 있는 교육과 체험의 현장이기도 하다. 먼저 영동고속도로로 연결해서 진입한 뒤, 여주나들목으로 나서서, 여주읍 쪽으로 들어오는 코스를 잡는다. 명성황후 생가∼세종대왕릉∼효종대왕릉∼신륵사∼목아박물관∼고달사지∼파사성 순으로 보고 남한강을 음미하는 코스를 권한다.
여주 관내의 유적지와 명소들을 골고루 보려면 최소한 2반 3일은 잡아야 하는데, 필자는 두 차례 나누어서 다녀왔다. 하루는 아침에 떠났다 저녁에 돌아오는 드라이브 코스를 위주로 보았고, 두 번째는 1박 하면서 유적지를 골고루 둘러보았다. 고속도로가 밀리는 휴가철이어서 3번 국도를 주 통로로 잡은 점이 권장하는 코스와 조금 다를 뿐이다. 신도시 분당에서 출발하여 다녀온 필자의 행보는 다음과 같다.
○제1일 : 제1일은 여주관내 남한강변 도로를 달려보는 드리이브였다. 분당 출발∼3번 국도 진입∼곤지암 삼거리에서 양평 쪽으로 좌회전∼금사면 상품리 삼거리에서 호실령을 넘음∼상호리∼하호리∼이포리를 거침. 이포대교 앞에서 금싸라기 참외 가판대 우회전하여 70번도로로 들어섬. 도로변 봉서루 구경∼금사토기 방문하고 되돌아 나와서, 이포대교 건넘. 대신면 천서리에서 우회전하여 37번 국도 타고, 천서리∼보통리∼초현리∼가산리 거침.(천서리 일대에서는 천서리막국수, 수석전시장 등 만날 수 있음). 천남리 삼거리에서 '고달사지' 표지판 따르다 331번 지방도 타고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로 들어옴.(신륵사 주차장 2000원, 신륵사 입장료 1500원) 신륵사 유원지도 절 경내에 있음. 모터보트 20,000원). 신륵사 구경 마치고, 오학리로 가서 도예촌 구경하고 여주대교 건너서 여주읍내 구경하고 여주쌀밥으로 점심 먹고, 42번 국도에서 갈라져 365번 지방도로 진입. 세종대왕릉 입구∼왕대리 쪽 강변으로 진행하며 드라이브. 왕대리∼백석리로 이어지는 강변 풍경이 좋음. 편도일차선 도로이므로 구경하며 느리게 진행할 때는 주의 요함). 율극리∼귀백리∼계신리∼이포리 거침. 이포대교를 건너 여주와 양평의 경계를 이루는 파사산을 보고, 양평 관내 양평대교를 건너 여주군 산북면 관내로 들어섬. 백자리 상품리 일대의 전원주택 구경하고 남이고개 넘어서 곤지암 삼거리로 되돌아 나옴.(약 6시간 소요)
○제2일 : 새벽에 나서려다 소나기가 퍼붓는 바람에 정오 경 출발. 3번 국도 타고가다 이천 '갈산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42번 국도로 갈아탐. [부발·여주] 표지판 따르다, 부랄 지난 후부턴 [여주·원주] 표지판 따르면 됨. 여주 읍내가 가까워지면 '세종대왕릉'표지판 따라 좌회전 할 것. 갑자기 노폭이 좁아지므로 당황하지 말고 서행할 것. 안내표지판 완벽하므로 표지판만 따르면 됨. 효종대왕릉은 세종대왕릉 경내에서 좌회전하는 연결로가 있으므로 도로까지 나가지 말고 표지판 따를 것. 효종대왕릉 보고 나면 명성황후생가를 찾아갈것(영동고속도로 여주나들목으로 나올 경우, 명성황후 생가를 먼저 들리면 됨. 세종대왕릉 쪽에서 명성황후 생가 찾아가려면 여주쪽으로 진행하다가 42번국도 진입하여 조금 달리다가 '장호원' 표지판 따라 37번 국도로 들어서야 함. 10분쯤 달려 여주대학 앞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좌회전 할 수 있게 끊어놓은 곳이 있고 [명성황후생가] 표지판 있음. 다 보고 나와서 37번 국도에 합류하여 여주읍내로 들어섬. 여주대교(분수처럼 물 뿌리는 다리)건너자마자 우회전하면  신륵사 관광지로 들어서게 됨. 신륵사 입구에 대형주차장 있음. (평일이나 노약자가 있을 경우 매표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신륵사 일주문 앞까지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도 있음. 신륵사 경내 구경 약 1시간 소요.). 신륵사 입구에서 42번 국도 타고 10분정도 가면 목아박물관 주차장 앞이다. 박물관 바로 앞에는 주차장이 없으므로,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걷는 편이 낫다. (구경에 약 1시간 소요. 목아박물관은 여주읍내에서 이호대교를 건너가도 되는데, 다리 건너자마자 강변유원지 안내판 따라 우회전하여 굴다리를 끼어서 여주쪽으로 들어오는 42번 국도를 타도된다. 그러나, 연결 도로가 애매하고 복잡하므로 신륵사 앞에서 42번 국도를 타는 편이 안전하다.) 목아박물관 앞에서 42번 국도 타고 여주 쪽으로 오다가 5분쯤 진행하면 [고달사지]표지판이 있다. 양평으로 통하는 331번 지방도로인데, 이 길을 타고 계속가면서 표지판 따르면 된다. (갈림길에는 반드시 [고달사지] 표식이 있으므로, 표지판 만나기 전에는 길이 좁아지더라도 계속 직진할 것.) 고달사지 앞에는 조그만 편의점이 하나 있고, 그 앞에 주차를 권하지만, 한가할 때는 고목나무 아래까지 올라갈 수 있다. 고목나무 앞에 고달천이 있으므로 샘물을 뜰 수도 있다. 고달사터에는 안내판이 없다. 발굴조사 중이어서 금줄을 쳐놓았다. 국보 제4호 원종대사 부도는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고목나무 뒤편 농로를 따라걸어가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 나무 있는 쪽으로 우회전하여 올라가면 된다. 숲속에 오래된 계단길이 잇는데 그 끝이 보이면 부근에 온 것이다.(얼마나 잘 찾는가는 탐방자의 능력에 달렸다. 간절히 원하는 길은 보이게 마련이므로!) 다보고 나면 상교리 도로로 내려와 우회전한다. 고갯길을 넘어서면 CC700클럽관내다. 이 고갯마루에서 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아늑한 숲속에 드문드문 사람이 보인다. 오른 쪽에 숙소도 있다. 급할 땐 구조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하림리∼천남리로 통하는 도로는 좁지만, 길은 선명하다. 37번 국도를 만나면 좌회전하여 여주읍내로 들어오면 된다. 필자는 석양을 등지고 신륵사와 마주보는 강변 유원지로 갔다. 전망 좋은 모텔에 숙소를 정하려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유원지 입구를 지나니 포장도로가 끊겼다. 유원지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으므로 물놀이를 하려면 이 주차장으로 들어갈 것.
여주읍내 중앙통은 차 없는 거리다. 전자제품 의복 화장품 등의 가게가 밤늦게까지 문을 열고 있다. 야시장처럼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주차는 도로변에 한다. 버스가 지나다니는 길이고 조명 시설이 빈약하므로 주의할 것. 햇볕이 남아잇을 때 읍내로 들어왔다면 '대로사'를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대로사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마당 안에 주차 공간이 있지만 입구를 잘 찾아야 한다.  
숙소는 여주읍내보다는 신륵사 관광지로 되돌아와서 잡는 편이 낫다. 강 건너 강변 유원지는 러브호텔들이고, 여주대교 북쪽에 있는 일성남한강콘도는 시설은 깨끗하지만 성수기에 비회원일 경우 1박에 15만원을 요구한다. 신륵사 앞 모텔들은 건물들은 오래되었으나 잘 고르면 2만5천원에 1박 가능하다. 주차장 앞에 있는 삼일장 모텔(031-886-2153)이 침구도 깨끗하고 모닝콜 시스템도 가동하고 있었다. 식사는 숙소 정한 뒤 부근 식당에서 해결하면 음주운전을 면할 수 있다.  
○제3일 : 5시 기상하여 신륵사 행. 일출 풍경을 보고 나와, 변두리로 간다. 이호대교를 건너서 '대순진리회' 안내판을 따르면 가야리∼적금리∼굴암리∼강천리를 돌아 간매리로 나올 수 있다. 대순진리회는 가야리 언덕부위에 대규모 성전을 열어놓았다. 길은 대순진리회 관내를 가로질러 간다. 언덕을 내려서면 아늑한 강변동네가 나타난다. 이 부근을 지나는 남한강은 강폭도 넓고 흐름이 느리다. 이 좁은 길로 시내버스가 다닌다. 시간을 잘 맞추면 높직히 앉아서 마을과 들판과 강물을 바라볼 수 있다. 적금1리 마을회관 앞에서 차를 돌렸다. 도자기가마에 약속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가던 길을 되짚어 나와 지내리∼오학리를 돌며 도자기 골목을 구경하고 굴다리를 끼어서 37번국도를 탄다. 오금리 표석에서 우회전하여 오금리 마을 안으로 들어감. 지가도방(031-882-2618)에서 도자기 만드는 것 보고 천서리행. 막국수먹고 파사성에 오르면 됨(파사성 입구는 천서리 사거리에서 양평 쪽으로 건너서 조금 더 가면 우측에 있음. 약 1시간 소요.). 파사성 보고 내려와 이포대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면 여주 읍내쪽으로 돌아가게 되고, 우회전하여 금사면 쪽으로 가면 곤지암 쪽으로 연결된다.
필자는 천서리에서 37번 국도 타고 여주읍내로 되돌아와서 대로사를 보고,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30일. 5일 주기로 열리는 5일장을 보았다. 신륵사를 한번 더 들여다 보고 오학리 도자기 판매상들을 구경하고, 여주 대교를 건너서 군청 앞을 지나서 365번 지방도로를 타고 곤지암 쪽으로 탈출하여 3번 국도로 진입했다.
※여주 관내 도로와 마을을 더 자세히 보려면 국립지리원 1:50,000 지형도 '이천·여주·원주·장호원·엄정' 5매가 필요하다. ※1:100,000 전국도로 관광상세도 한 권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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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
○승용차로 갈 경우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①경부고속도로 신갈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 갈아타고 여주 나들목으로 나가 여주읍으로 들어서거나, ②3번 국도 타고 이천 '갈산삼거리'에서 42번 국도로 갈아타고 여주읍으로 진입하거나, ③번 국도 '곤지암삼거리'에서 98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금사면 쪽으로 진입하여 이포∼왕대를 거치거나, ④이포대교를 건너서 37번 국도를 타고 천서리∼북내면을 거쳐 여주대교를 건너도 된다.
○중부고속도로 이용 차량은 호법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 갈아타고 여주나들목으로 나서면 되고, ○중앙고속도로 이용 차량은 만종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 갈아타고 여주나들목으로 나선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이용 차량은 가남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 갈아타고 여주나들목으로 나서면 된다.
○고속버스·시외버스
*서울 : 동서울터미널(경기,대원고속:031-884-4081이용)·상봉터미널(금강고속:031-885-3014)·강남고속터미널(동부고속 : 031-884-3182)에서, 06:30분부터 21:20분까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이천·용인·수원(경남여객 : 031-885-4404). *이천·성남(경기,대원고속:031-884-4081). *이천·용인·신갈·안산(경남여객 : 031-885-4404). *안성(백성운수 031-886-3454). *고양(화정터미널, 대원고속 031-884-4081). *양평(금강고속:031-885-3014). *원주(경기, 대원, 금강고속). *청주·온양(경기, 대원고속, 031-884-4081). *더 자세한 시간표는 관련업체나, 여주군 홈페이지 교통안내 참고.  
○관광지순환 무료 셔틀버스 운행 안내 : 여주군에서는 매주 토·일요일 및 공휴일에 군내 관광지를 순환하는 무료셔틀 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운행일시 : 매주 토·일요일 및 공휴일. *운행시간 : 매주 토요일 : 13:00 부터 30분 간격. 일요일·공휴일 : 10:00 부터 30분 간격. *탑승장소 : 여주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 셔틀버스 승차장. *운행코스 : 시외버스터미널→강변유원지→영월루공원→신륵사관광지→목아박물관→시외버스터미널→세종대왕릉→명성황후생가→시외버스터미널. *운행시간 :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5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14회차. *문의전화((031-880-1866).

*여주군 문화관광과 관광담당 : 031-880-1068∼9.
*여주군청 홈페이지 : http://www.yeoju.gyeongg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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