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32 : 나는 왜 한적한 들녘의 쑥부쟁이처럼 조용히 지지 못하겠다는 것일까

◎ 2013/2/8(금) 16:23

나는 왜 한적한 들녘의 쑥부쟁이처럼 조용히 지지 못하겠다는 것일까

<시인의 詩話>
나는 왜 한적한 들녘의 쑥부쟁이처럼 조용히 지지 못하겠다는 것일까?

이 향 지
나는 22년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 내 삶, 삶이라는 파이프. 결혼과 함께 나는 항아리에 빠졌고, 그것은 또, 끝없이 뒷걸음치면서 아득한 출구를 보여주는 파이프 속이기도 했다. 오랜 갈망을 좇아 시를 다시 붙들었으나, 나는 시단의 외계인이며, 시의 빈민에 불과하다. 나는 왜 그토록 게으르게 밀쳐두었던 시를 배밀이하듯 쓰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한적한 들녘의 쑥부쟁이처럼 조용히 지지 못하겠다는 것일까?
나는 나를 사랑하는 마지막 방식으로 시를 택했다. 나는 세상을 뒤집으려는 혁명가도 아니며, 여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섯부른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내가 쓰는 시는 인류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창한 청사진도 아니며, 지구의 멸망을 지연시켜보려는 문명비판을 주제로 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인간성 회복을 부르짖는 계몽주의자도 아니며, 시대나 정치를 풍자하거나 노동자를 옹호하는 시를 쓰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냥 나를 쓴다. 시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는 반발하지만, 시의 체면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죽을만큼 노력한다.
내가 시를 통해서 가 닿으려는 땅이 어떤 곳인지는 나도 모른다. 가장 확실한 대답이 될 죽음이란 땅. 그곳은 내가 시를 쓰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곳이다. 기다리지 않고 부르지 않아도 그곳은 이미 가까이 와 있다. 그러므로, 내 시는 장난이 아니다.
내가 시를 통해서 만나려는 땅은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저쪽이 아니라, 자세를 낮추어야 통과할 수 있는 내 삶 속에 있다. 내가 시를 통해서 만나려는 땅은, 굳어질대로 굳어진 딱딱한 대륙이 아니라,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不定型의 穴地일거라고 예감하고 있다. 나 하나를 수용하면 꽉 차 버릴. 그것은 어쩌면 한 달 먼저 세상으로 추방된 아기가 돌아가고 싶어하는 처음의 땅,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항아리 속인지도 모른다.
내 정신이 가장 고요해지는 새벽에 나는 응시한다. 내 숨끝을 짚고 피어오르는 희고 검은 공기들. 소용돌이처럼 바람개비처럼 도는 중심에서 보게되는 작은 구멍. 그것은 마치 한가닥 실(絲) 속을 관통하고 있는, 좁고, 기나긴, 움직이는, 터널과 같은 것이었는데, 그 구멍을 따라 한없이 내려가면 내가 만나고 싶어하는 땅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어느 날은 그 구멍으로부터 캄캄한 연기같은 날개가 솟아올라 갑자기 펼쳐지면서 내 머리를 덮었다. 나는 검은 악마의 보자기에 포획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내가 두려워하는 순간 그 광경은 끝이 났다. 그 이상한 날개의 침공을 거부한 후론 한동안 기쁜 시를 쓸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 속의 검은 악마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내 도망에 대한 벌이었을 것이다. 내가 하는 말들은 모두 때묻은 理性의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들은 내 시를 빌리지 않더라도 이미 누군가가 싫증이 나도록 이 땅에 퍼뜨려 놓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다시 외로운 순례자가 되었다. 누군가 이루어놓은 聖地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독충과 이끼와 뙤약볕과 불길한 소리로 우는 새들이 득실거리는 땅. 삭정이들과 가시나무 가지가 옷을 찢고 살을 할퀴는 곳. 억새와 조릿대가 내 키를 덮고 숨막히게 하는 곳. 썩은 나뭇잎들이 켜켜로 쌓여 걸음을 옮길 때마다 중심을 흔들며 쓰러뜨리려는 곳. 눈과 얼음이 바위를 붙들고 끝없이 우회하게 하는 곳. 소나기와 안개, 우박과 서리가 살과 뼈를 떨게 하며 시야를 가리는 곳.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의 자연 속. 딩굴면서 울면서 걷다보면 길이 오고, 어느 틈엔가 집에 돌아와 있었다. 텅빈 마당에 낚시의자를 놓고, 눈부신 햇볕 속에 앉아 있어도 나는 안다. 캄캄한 날개로 나를 포획하려던 그 구멍은 언제나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내가 그 구멍 속을 통과 중이라는 것을. 내가 예감하고 있는 부정형의 穴地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내 시는 완성 될 것이라는 걸. 나의 죽음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나는 오랫동안 病魔에 시달려 왔다. 나는 어릴 적에 달을 잃었다. 나는 상처받은 짐승처럼 굴속에서 신음하며 달빛을 등지고 살아야 했다. 내가 잃어버린 달은 껍데기에 불과했지만, 나는 껍데기의 환상에 사로잡힌 제물이었다. 나는 내 앞으로 오는 무수한 기회들을 모두 돌려 세웠다.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 방법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속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 또한 끝없는 수렁이었다. 껍데기의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인 존재가 반발하기 시작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존재의 말을 들어주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병은 서서히 치유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억압하는 상처를 피해 도망가지 않는다. 다만,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에 머무르지 않기로 한 뒤로부터, 나는 어디에 있으나 혼자다.
나는 내 시가 어디에서 멈출지 알지 못한다. 그 멈춘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내 시의 걸음 앞엔 늙음과 性에 대한 편견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곳은 최소한 시보다는 시 外的인 조건들에 시간과 재능을 허비해야 하는 시인들의 땅은 아니리라.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나날이 깊어져 가는 공허를 양식삼아, 내 재능없음을 탓하기보다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섭섭해 하며, 내 게으름을 탓하지 않고 내게 기회 오지 않음을 불평하면서, 내 상처 위에 엎드려 온 세상을 가해자로 몰며, 굉음을 울리며 머리 위를 나는 비행기를 질투하며,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을 겉으로만 경멸하면서, 속으로는 젓가락 하나 걸칠 데 없는 지연과 학연을 쓸쓸해 하며, 만만한 파지들이나 모아 불을 지르며, 회한의 염전에서 저물도록 水車를 밟으며, 소금 묻은 손등으로 눈물 씻으며, 쓰라리게 울면서 管같은 삶 속을 헤매고 있어야 했을까?
나는 일찌기 빈민이었고, 앞으로도 빈민일 것이다. 나는 빈민에 익숙하다. 시인된 나는 제단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내 시는 날개를 달고 자유롭기를 빈다.

(1997.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