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4/30(수) 21:14
[시안/시인의 영감과 시의 모티브], 여행에의 초대  

'시인의 영감과 시의 모티브'

여행에의 초대



      이  향  지


 ‘지도와 판화를 사랑하는 어린이에겐/우주는 그의 엄청난 식욕과 같다./아! 등불 아래 비치는 세계는 얼마나 크냐!/추억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얼마나 작으냐!’(―보들레르 시, ‘여행’부분.)

 어린이뿐일까. 제 발로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어른은 더 자주 배가 고프다. 어린이가 꿈꾸는 여행이 새로운 세계로 뻗어가려는 호기심에 있다면, 어른이 가고 싶어 하는 여행은 답답하고 지리멸렬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와 탈출에 더 큰 이유가 있다. 나도 여행을 좋아하지만, 진실로 떠나고 싶은 때와 장소로의 여행은 좀처럼 기회를 잡기 어렵다.

 나의 여행은 어린이의 호기심과 어른의 꿈이 동행하는 형태다. 내가 늦은 나이에도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호기심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사라지는 날, 그날이 바로 내가 시를 접는 날이 될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집 아닌 곳으로 떠나기를 즐겨하였다. ‘현재 내가 살지 않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다’는 말은 나의 경우 어릴 때부터 유효하였다. 그러나 기회는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가 오면 머뭇거리지 않았다. 큰 탈출을 꿈꾸는 돼지는 탈출 전에 큰 소리로 꿀꿀거리지 않는다. 기회가 왔을 때 날렵하게 우리를 벗어날 뿐이다.

 혼자 하는 여행이 가장 홀가분하다. 나는 대부분 혼자 떠난다. 내가 가려고 하는 길이 너무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나의 여행은 대부분 즉흥교향곡이다. 두려워마라. 지도를 보고 방향을 짐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낯선 곳이 전혀 두렵지 않다. 해가 지는 곳에서 자고 배가 고픈 곳에서 먹으면 된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외국일지라도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특별히 다르지 않다. 외국의 경우는 준비를 철저히 하고 떠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나를 일으킬 자 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내 간을 이렇게 키워놓았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다니길 좋아하였다. 앞 서 다녀간 사람들에 의해 거론 된 장소와 길들은 앞 사람의 생각과 말을 답습하기 쉽다. 나는 내 여행에 남다른 두근거림을 가미하였다.

 나에게 여행은 참으로 늦게 찾아온 행운이다. 제주도 여행을 마흔 일곱 살 되던 해 봄에야 처음 갔었다. 그때까지 나는 다람쥐 쳇바퀴만 돌리고 있었다. 지금도 쳇바퀴를 돌리고 있지만 그때의 쳇바퀴는 이미 아니다. 늦게 온 행운을 몇 배 즐기기 위하여 여행을 만들어서 다녔다. 일을 겸한 여행. 가는 곳마다 심층 취재를 하고 그 지역의 역사와 지리와 사람살이까지를 연구한다. 르포나 기행문을 써서 파는 것이다. 까마득히 모르고 살던 지역의 땅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내 나름의 방식. 다람쥐 쳇바퀴만 수 십 년 돌리던 여자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었다. 원고료는 다음 여행의 경비가 된다. 산문을 쓰면서 시의 골격을 챙기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거양득. 이보다 더 좋은 일거리는 없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일을 접었다. 그러나 여행은 접지 않았다. 시를 위한 에너지 비축. 이것이 유일한 이유다.  

 여행은 무엇인가. 내가 살지 않는 곳으로의 이동이다. 사람은 사람이기 전에 동물이어서, 한정된 공간에서 한 가지 일에만 붙잡혀 있으면 못 견뎌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한 편의 글에 전력투구한 뒤에는 새로운 공기가 필요하다. 신선한 자극이 기다리는 곳으로의 이동. 마음 따라 몸도 간다.

 여행에도 절정이 있다. 벗어나지 못해서 몸부림치던 지리멸렬한 현실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바로 그 순간이다.

 여행! 그 절정의 순간에야 나를 바라보는 눈이 그윽히 눈뜬다. 바라보는 모든 것들마다에서 내가 못 보던 나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저마다 말 한마디씩을 품고 있는 나. 무수한 나의 말들을 받아 적으며 나는 내게 참 할 말 많은 인간이란 사실에 놀란다. 세상에 대해 참 할 말 많은 인간이란 생각이 들던 때로부터 나 자신에 대해 할 말 많은 인간으로 바뀔 때까지 참으로 많은 여행이 있었다.

 산행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집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가 나에게는 산이다. 산은 가장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산은 자연. 산은 내가 잃어버리고 살던 자연까지 느리게, 느리게, 되살려주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감사하며 풀과 나무에 입 맞추었다. 나비와 잠자리와 새소리에 인사하였다. 그것들로 인하여 입을 떼고 귀를 뜨고 오금을 풀 수 있었다. 내가 산이 될 때까지 산을 향해 걸어갔다. 나의 일부였으나 내 밖에 있던 것들이 차츰차츰 되돌아왔다. 나의 시에 형체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산은 나에게 기적을 베풀었다.  

 여행은 나와 시를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다. 여행에서 얻은 신선한 공기와 낯선 풍경과 언어와 다른 인종들의 풍습이 기댈 곳 없는 외톨이로 만들어 나 자신에게 더욱 밀착 시키는 것이다.  

 여행시와 행사시는 대접받지 못한다. 정말 그렇다. 나는 여행에서 많은 씨앗을 싹틔워 왔다. 이 숱한 싹들을 여행시 이상으로 완성시킬 수 있을까. 이것이 나의 오랜 과제였다. 그러려면 단순한 묘사를 넘어서야한다. 풍경 속의 풍경, 풍경 너머의 풍경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적합한 이미지와 비유를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에서’라는 제목을 가급적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섬이다 섬으로 왔다
바람 불면 뱃길이 끊기는 하늬바다 작은 섬
힘센 손이 쥐었다 놓은 것 같은
대해 속의 고깔모자

스스로 찾아든 유배지
자청한 볼모
바다는 뱃길을 끊고 너그럽게 풀어놓는다

모자 위의 햇살은 번철 같다
너무 타서 집적거리지도 않는 에그프라이

모자 속의 시간은 느리다
돌담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처럼 느릿느릿 간섭하며 간다
머리카락 끝에서 발톱 끝까지 흡,착,흡,착, 훑으며 간다
어느 쪽으로 가나 수평선에 갇힐 것이므로
반짝이는 수면마다 지나간 것들이나 가득히 펼쳐질 것이므로

트럭 짐칸을 얻어 타고 곧추선 언덕을 넘는 동안이
풍경과 속도의 궁전이다

궁전 밖에는 해당화
해당화 발등에는 뜨거운 몽돌밭
몽돌밭 위에는 태엽 풀린 시계 하나
파도의 잔소리 듣고 있다

아무리 작은 배도 섬보다 덜 흔들리고
모자보다 신발이 덜 고단하며
죽음 보다 삶이 덜 지루하다

- 이향지, 「대해 속의 고깔모자」

졸시 「대해 속의 고깔모자」는 백령도엘 다녀와서 완성한 시다. 문학사상 2002년 8월호에 발표하였고, ‘제4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작이기도하다. 살면서 내가 겪었고 바라보았고 오르기도 했고 배가 끊어져 조바심치기도 했던 여러 섬에서의 경험을 뒤섞어놓은 시이기도 하다. 그 무렵 나는 한 월간지에 ‘시인 이향지의 향토기행’이란 연재물을 집필하고 있었다. 짧은 기간에 2백매 가까운 산문을 쓰면서 시도 같이 완성하였다. 이 시에서 가장 고민한 부분은 맨 마지막 연이다. ‘아무리 작은 배도 섬보다 덜 흔들리고/모자보다 신발이 덜 고단하며/죽음 보다 삶이 덜 지루하다’ 이 부분을 얼마나 많이 지웠다 살렸다 했는지 모른다. 장고 끝에 ‘파도의 잔소리’로 떠밀어버림으로써 살려놓고 발을 뽑을 수 있었다. ‘더’를 택하지 않고 ‘덜’을 택함으로써 흔들림을 겹쳐놓은 점이 내 마음에 든다. 이 시에서 가장 나중 손 본 부분은 1연 1행의 앞자리에 끼워 넣은 ‘섬이다’ 세 글자다. 처음엔 그냥 ‘섬으로 왔다’였는데, 거듭 읽을수록 허전하였다. ‘섬이다 섬으로 왔다’로 겹눈을 달게 되면서 운율도 살고 뜻도 중첩되었다. 이제 이 시에서 내가 더 손 볼 곳은 없다. 그때 그 미친 기운을 되살려 다른 시도 쓰고 싶다.

 나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새로운 몸과 말을 내 시에 주고 싶은 욕심. 혀는 짧아도 침은 멀리 뱉고 싶은 욕심이 좋은 시를 지향하는 것일 때만은 전혀 추하지 않다. 설령 욕심에 그치고 말 욕심일지라도 의무를 동반하는 욕심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시는 내 안에 있고, 내 안은 과거의 뭉치다. 시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다. 과거의 내가 보았거나 들었거나 만졌거나 맛보았거나 냄새 맡았거나 한 것들이 알게 모르게 내 세포 속에 내장 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를 만났을 때 뜻밖의 단어 하나를 떠올려준다. 돌과 돌이 만나서 일으킨 불꽃처럼 반짝하고 켜진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가만가만 줄기를 잡아당겨본다. 끊어지지 않고 달려 나오는 열매와 뿌리들이 많고 실한 것일수록 성공 확률도 높다.

 나는 내 시의 어미다. 아이를 낳은 뒤엔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서 유용한 인간으로 길러주어야 하듯이, 한 편의 시도 자립의 순간까지 기쁘게 안고 얼러주어야 한다. 어떤 뼈와 살을 붙여주는가보다, 어떤 내장 어떤 이목구비를 달아주는가보다, 어떤 생각을 지니고 어떤 숨을 쉬게 하는가가 우선이다.

 내 안의 시를 가장 잘 불러낼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 어떤 때일까. 그것을 정하고 목적지를 찾는 일도 때론 필요하다. 나의 시 대부분은 우연과의 조우에서 발아하였다.
 
 싹은 틔웠으나 나무로 자라지 못한 씨앗들이 내 둘레에도 무수히 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면 앞질러 절망에 빠지게 된다. 원숭이가 죽은 새끼를 놓지 못하고 미라가 될 때까지 끌고 다니듯이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고 안 되는 것을 가려낼 수 있는 눈이 단박에 길러지는 것은 아니다.

 끈질겨라. 무수한 실패를 거듭 한 끝에 동전만한 빛 한 줄기가 찾아온다. 한번이라도 그 빛줄기를 만난 사람은 중독자가 된다. 그 순간을 다시 만나기 위해 있는 숨을 다 불어 넣는다.
*<시안> 200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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