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10(화) 06:23 (MSIE6.0) 218.155.187.54 1024x768
[김수영], '거대한 뿌리'와 인경전, 그리고, 몇 가지 생각  

<거대한 뿌리>와 인경전, 그리고, 몇가지 생각

<이 글은 2000년 5월 23일, <현대시 다락방> '김수영을 위하여'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그동안의 작업들을 모아두는 의미에서 여기 옮겨 둡니다. 이 글을 인용하시는 경우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巨大한 뿌리

    김 수 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南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以北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八·一五 후에 김병욱이란 詩人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四年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强者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女史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一八九三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英國王立地學協會會員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世界로
    화하는 劇的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無斷通行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外國人의 종놈, 官吏들 뿐이었다 그리고
    深夜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闊步하고 나선다고 이런 奇異한 慣習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天下를 호령한 閔妃는 한번도 장안外出을 하지 못했다고……

    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다 나는 光化門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埋立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追憶이
    있는 한 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女史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進步主義者와
    社會主義者는 네에미 씹이다 統一도 中立도 개좆이다
    隱密도 深奧도 學究도 體面도 因習도 治安局
    으로 가라 東洋拓植會社, 日本領事館, 大韓民國官吏,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좃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無識쟁이,
    이 모든 無數한 反動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第三人道橋의 물 속에 박은 鐵筋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怪奇映畵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964.2.3.)


*민음사刊. 金洙暎전집. 12쇄본의 것이다.
*************************************************

<거대한 뿌리>와 인경전, 그리고, 몇 가지 생각



          이 향 지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에는 김수영 자신도 모르고 썼을 법한 오류가 있다. 제3연 3행의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이 바로 그것인데, 이 구절은 '인경소리가 울리면…'이나 '인정(人定)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혹은 '보신각 종소리가 울리면…'이나, '종루에서 대종이 울면…'등으로 썼어야 옳았다.

김수영이 이 시에서 '인경전'이라 부른 건물은 없었고, 그 시대 인정(人定)과 파루(罷漏)를 알리던 종은 보신각(普信閣) 종이었다. 인경은 큰 쇠북 즉 대종(大鐘=great bell)을 뜻하고, 보신각은 대종(大鐘)이 있는 건물이니 [인경+전(殿)]이라 붙여도 무방할 것 같지만, 이 시에서의 인경전은 복합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쓰였다. 또, 종(鐘)이 걸린 건물은 '전(殿)'이 아니라 '각(閣)'이나 '루(樓)'가 적합하다.
인경전이라 불리던 종루는 일찍이 없었다. 광해군 때 창덕궁 경내 깊숙한 곳에 인경궁(仁慶宮)이란 궁궐을 지은 적은 있었으나 인조반정 때 없어졌다 한다. 인경전과 비슷한 인정전(仁政殿)이 창덕궁 경내에 있으나, 종루는 아니다. 경복궁 경내,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報漏閣)이 있었으나, 그 또한 '인경전'은 아니고, 원각사 대종소리가 보신각 종소리와 같아 혼동을 일으키니, 큰 제가 있을 때만 허락을 받아서 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인경전이란 종루는 없었다. 그러므로 김수영이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글을 통해 들은 인경소리는 보신각의 큰 쇠북소리였다. 무엇보다도 민비가 살아있고,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KOREA를 다녀가던 시대(1894∼1897년). 보신각 종소리로 인정과 파루를 알려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하던 시대. 조선조 말기, 그 암울한 시대의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쓰여졌다.

인정(人定)이란, 조선시대에 치안 유지를 위하여 매일 밤 10시경에 28번의 종을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알렸던 제도를 말하는데, 다음 날 새벽 4시 33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종소리는 파루(罷漏)라고 하였다. 인정 때도, 파루(罷漏) 때도, 종(쇠북)을 친 곳은 지금도 종로 통에 있는 종각(鐘閣:普信閣)이다. 종루에 물시계와 함께 대종을 걸어놓고, 밤 10시경에 28번을 쳐서 인정(人定)을 알리면 도성의 문이 닫히고 통행금지가 시작되며, 새벽 4시경인 오경삼점(五更三點)에 33번을 쳐서 파루를 알리면 도성의 8문이 열리고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인정 때 28번 파루때 33번의 종을 울리는 것은 불교의 교리와 관계 있는 것으로, 인정은 우주의 일월성신 28수(宿)에 고하기 위하여 28번을 치는 것이고, 파루는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 고하여 그날의 국태민안을 기원한 것(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이다. 일출·일몰의 시간차와 계절에 따라 그 시각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나, 이 제도는 조선시대 내내 계속되었다.

김수영은 이 시를 영국의 소설가이자 지리학자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도서출판 살림, 이인화譯>>을 읽고 썼는데, [인경+전]이란 이상한 복합명사를 탄생시킨 바탕이 다음에 인용하는 글 속에 있다. 이 책 '제2장 서울의 첫 인상' 중 한 대목이다.

"…저녁 8시 경이 되면 대종(大鐘)을 울리는데 이것은 남자들에게 귀가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이며 여자들에게는 외출하여 산책을 즐기며 친지들을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거리에서 남자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이 제도는 때로 폐지된 일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꼭 사고가 발생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폐지되었던 제도가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었다고들 한다. 내가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 깜깜한 거리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밝히는 몸종을 대동한 여인네들만이 길을 메우고 있는 진기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밖에는 장님과 관리, 외국인의 심부름꾼, 그리고 약을 지으러 가는 사람들이 통행금지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범인 도피에 악용되기도 하며 어떤 자들은 일부러 긴 지팡이를 짚고 장님 흉내를 내기도 한다. 자정이 되면 다시 종이 울리는데 이때면 부인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남자들은 다시 외출하는 자유를 갖게 된다.…."

인용 부분의 원문을 일부 옮겨보면 이렇다. "About eight o'clock the great bell tolled a signal for men to retire into their houses, and for women to came out and amuse themselves, and visit their friends. ..."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이 글에서 'great bell'이라고만 썼고, '보신각'이나 '인정' 등 구체적인 명칭들은 거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원서로 읽었을 김수영은 'great bell'을 인경으로 직결시켰고, 있지도 않은 전각 이름을 지어 시에 남긴 것이다. 큰 종을 쳐서 통행금지의 시작을 알리던 인정(人定)의 시작 시간은 계절에 따라 약간 씩 차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봄과 여름엔 조금 일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시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당기고 늦추고 신축성있게 운영했던 제도였고, 인정과 파루를 둘러싼 무수한 논의들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본 것은 본격적인 인정이 시작되기 전에 부녀자를 위한 틈새시간이 허락되던 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우리나라 사람들(그 당시 글을 아는 선비들)의 글로 고증할 길은 없고, 그 무렵 이 나라를 여행했던 외국인들의 글에만 남아있으므로, 그 시대의 제도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손정목 선생의 <<조선시대도시사회연구>>에서 몇 토막을 옮긴다.

*F.A. Mckenzie ; The Tragedy of Korea
'일몰에서 한시간 후가 되면 남자는 모두 집으로 들어가고 여성이 가두에 나오게 된다. 그것은 여성들을 위한 시간이며 이 시간에 그녀들은 시가를 자유로이 유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그녀들 여성군(女性群)의 한 복판에 서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남성의 재난이여! 마침내 시내 중앙부에 잇는 큰 종이 은은하게 경고를 발하면서 울려 퍼진다. 이것은 만종(晩鐘)이며, 이때부터 서울은 휴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I.G. Edmonds ; 종로 이야기
'해진 뒤의 종로는 쉽사리 사람이 없어졌다. 늙은이는 담뱃대를 들고 집 속으로 들어갔다. 장사치는 가게를 닫았다. 행상들은 과실 목판을 들고 사라져버렸다. 아이들은 집 속으로 모였다. 해가 져서 성문을 닫은 뒤에는 부녀자만 집 밖으로 나다니게 된 것이 법규로 되어 있었다. 물론 관리들은 예외이었다.'

*George W. Gilmore ; Korea from its Capital
'저녁에 새로운 손님들이 느끼는 기이한 감상은 도시의 완전한 정적이다. …만일 외국인이 이 정적에 마음이 울적해져서 산보하려고 …거리를 지나가노라면 그는 어떤 그림자가 마치 밖에 나온 것이 큰 잘못이란 듯이 대문 속으로 급히 뛰어가는 것을 볼 것이며, 또는 홀로 걸어가는 부인네나 한 패의 부인네가 그중에 한 사람이 등을 들고서 얼굴을 안보이게 가리고서 조용히 걸어가는 것을 볼 것이다.…'

*信夫淳平 ; 韓半島
'인정에서 파루에 이르기까지는 성내 남자의 통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백주에 시가를 통행하지 못하므로 인정이 울리고 난 다음에 비로소 시가에 나갈 수 있다.'

그 당시 외국인 여행자들이 본 KOREA란 나라는 이처럼 기이한 전통을 가진 나라였다.

김수영은 44세이던 1964년에 <거대한 뿌리>를 썼는데,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이 서울을 처음 다녀간 1894년으로부터 70년 후였다. 70년 전에 다녀간 64세의 여자의 글이 김수영에게 이 시를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고 말하는 시인. 그것은 그 때가 정말 좋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더러운 전통도 역사도 진창도 우리끼리 부대끼면서 겪을 때가 더 좋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처음 이전 다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