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6/14(토) 08:52 (MSIE6.0) 218.155.237.154 1024x768
|
[작품론], 관계의 시학
제4회 현대시작품상 수상자 특집호/이향지론
관계의 시학
― 이향지론
고 현 철(문학평론가·부산대 교수)
올해 현대시 작품상 수상자인 이향지 시인은 47세 때인 1989년에 늦깎이로 등단한 시인이다. 그동안 시집으로 1992년에 『괄호 속의 귀뚜라미』, 1995년에 『구절리 바람소리』, 2001년에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2003년에 『내 눈앞의 전선』을 발간한 이향지 시인은, 시쓰기의 열정을 시단에서, 무엇보다도 시를 통해서 보여준 시인이면서 늘 겸손함의 자세를 함께 보여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 시쓰기의 열정과 겸손함을 겸한 시인이 갈수록 드물어가는 상황 속에서, 이향지 시인이 상당히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겸하고 있는 시인이라는 점은 그 시적 성취와 함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또한 이향지 시인은 근래에 나온 시집에서 ‘관계’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관계를 성찰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새롭게 환기하는 바 크리라 생각한다. 근래의 시집 가운데 2001년에 나온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은 ‘산시집’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관심의 폭이 어느 정도 한정적인 시집에 해당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근래의 시집 가운데 올해 2003년에 나온 시집 『내 눈앞의 전선』에 특별히 주목하여 이향지 시인의 시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바람이 늘어진 전선을 흔들면
전선은 박태기나무 안 푸른 저수지를 흔든다
전선은 나무를 흔들면서 제 不變을 흔들고
나무는 전선을 치면서 제 不眠을 치는 것이다
― 「내 눈앞의 전선」 부분
시집 『내 눈앞의 전선』의 표제시이기도 한 이 시는 이향지 시인의 시세계의 단초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텍스트로 이해된다. 이 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적 화자의 눈앞에는 전선이 있다. 그런데, 이때 전선은 시적 화자와 관계없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나와 전선은 어떤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위에 인용한 부분을 보면, 바람은 늘어진 전선을 흔들면서 전선과 관계를 형성하고 전선은 시적 화자의 시선을 통하여 박태기나무 안에 보이는 푸른 저수지를 흔듦으로써 저수지와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저수지는 어디까지나 박태기나무 안의 구도 속에서 풍경으로 제시되는 저수지이다.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면, 전선은 저수지가 아니라 박태기나무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나무가 흔들리기 때문에 그 구도 속에 있는 저수지가 흔들리는 것으로 시적 화자는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선은 나무를 흔듦으로써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된다. 문제는 나무와 관계 속에 있는 전선이 그 자신의 고유한 속성이 변화되는 데에 있다. 그래서 불변은 흔들려 변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나무도 전선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속성이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주변도 중심도 물도 기름도 밥도 죽도
사라진
둥근 배 안
나는 다시 노를 든다, 앉았던 항구를
두 삿대를 일으켜 밀어낸다
식탁, 이 불멸의 항구를 찾아
어깨가 처져서 돌아올 저녁 뱃사람들을 위해
― 「밥으로 죽 끓이기」부분
위에 인용한 시는 유비(類比)적 사고에 바탕을 둔 비유를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는 텍스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비적 사고는 이질적인 존재 상호간에 동질성을 발견하는 사고로 비유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인용한 부분은 밥으로 죽을 끓여먹고 난 뒤의 냄비 안을 유비적 사고에 의한 비유를 활용하여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냄비를 둥근 배로, 숟가락을 노로, 그리고 식탁을 항구로 유비적 사고에 의하여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밥으로 죽을 끓였을 때 이것은 밥도 죽도 물도 기름도 어느 하나가 아닌 뒤범벅이 되어있어 그야말로 중심도 주변도 없게 된다. 이 시는 밥으로 죽을 끓여서 중심도 주변도 없이 다 동등한 사물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심도 주변도 없는 인간공동체를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족 공동체이다. 시 내용에서 ‘어깨가 처져서 돌아올 저녁 뱃사람’은 바로 가족을 말하는데, 역시 유비적 사고에 의하여 가족 구성원을 뱃사람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 시는 이와 같이 유비적 사고에 의한 비유로 사물들을 서로 관계 맺게 함으로써 시적형상화를 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진정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동등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는 텍스트에 해당한다.
섬이다 섬으로 왔다
바람만 불어도 뱃길이 끊기는 하늬바다 작은 섬
힘센 손이 쥐었다 놓은 것 같은
대해 속의 고깔모자
스스로 찾아든 유배지
자청한 볼모
바다는 뱃길을 끊고 너그럽게 풀어놓는다
········(중략)········
아무리 작은 배도 섬보다 덜 흔들리고
모자보다 신발이 덜 고단하며
죽음보다 삶이 덜 지루하다
― 「대해 속의 고깔모자」부분
앞에 인용한 시에서 유비적 사고에 의한 비유로 냄비를 배에 비유하고 있다면, 이 시에서는 섬을 고깔모자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섬은 큰 바다에 떠 있는 큰 고깔모자인 셈이다. 섬을 고깔모자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에 섬은 작은 배보다 더 흔들리고 고깔모자는 신발보다 더 고단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많이 흔들리고 고단한 이 섬을 자청해서 찾아왔다고 분명하게 발화하고 있어 주목된다. 시 내용에서도 명백하게 ‘스스로 찾아든 유배지’ ‘자청한 볼모’라고 밝히고 있기까지 하다. 뱃길이 끊긴 섬은 유배지와 같으며 그 속에 갇힌 사람은 볼모와 같은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도 시적화자는 섬을 반기며 나아가 경이롭게 생각하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시의 첫머리에서 대뜸 ‘섬이다 섬으로 왔다’라고 하여 발견하고 기대에 찬 존재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적화자가 섬을 자신과 일정한 관계에 놓여있는 존재로 보고 또 이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기 때문이다. 이 시가 ‘섬보다 덜 흔들리고’와 대응하여 ‘삶이 덜 지루하다’로 끝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시적화자는 섬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섬과 일대일의 관계 속에 있는 존재가 되는 셈이다.
깊은 우물이 하나 있다
지은 지 88년째 되는 낡은 집이 있다
米壽에도 생일상을 받지 못한 볍씨 한 톨이 있다
············(중략)················
깊은 우물 옆에는 단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단감나무는 갈비뼈가 하나 더 모자랐다
― 「노파」부분
이 시도 유비적 사고에 의한 비유를 활용하고 있는 시인데, 관계의 문제가 인간 사이의 문제로 수렴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시에 해당한다. 제목이 ‘노파’이며 위에 인용한 시 내용의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노파를 유비적 사고에 의하여 ‘깊은 우물’, ‘낡은 집’에 비유하고 있다. 이들은 많은 세월을 보낸 존재의 표상인 것이다. 이향지 시인의 시에서 우물 옆의 감나무 이미지는 “마당 넓은 집 우물가에 감나무 한 그루 있다”(「청렴」)는 구절처럼 낯익은 것이지만, 이 구절과 달리 위에 인용한 시에서는 깊은 우물 옆에 있는 단감나무는 노파의 남편에 대한 비유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나 지금은 옆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있었다’라는 과거시제로 표시하고 있다. 서정시의 시제가 본질적으로 현재시제이며 주로 이야기를 수용하고 있는 서술시(narrative poem)에서 과거시제가 활용되어 있는 것에 비추어보면, 이 시에 드러난 과거시제는 의도적인 표지가 된다. 이는 앞의 현재시제와 대비됨으로써 더욱 부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노파의 남편을 단감나무로 비유하고 있는 더욱 확실한 표지는 그 단감나무를 ‘갈비뼈가 하나’ 더 모자란 단감나무로 형상화하고 있는 데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남편을 갈비뼈가 하나 더 모자란 존재로, 아내를 그 갈비뼈에 상응하는 존재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성경에 연유하고 있는 바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나아가 이향지 시인이 기독교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향지 시인은 어떤 시에서는 “연꽃 한 송이 돌 속에 꽃 핀 몸을 새겨 넣을 동안”(「낙관」)처럼 불교적인 이미지를 뚜렷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이향지 시인은 포괄적으로 전통적인 가치관에 입각해 있는 시인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관계도 끝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시에서도 산 노파와 노파의 죽은 남편도 일정한 관계에 있다는 인식을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앞에 든 ‘돌 속에 꽃 핀 몸’이란 구절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생명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에 해당한다.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른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이향지 시인은 “뼈 부러진 아내를 위해 우족을 씻고 있는 남자의 물 묻은 손등 위”(「내 사랑은」)라는 구절과 같이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르면 사랑은 헌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된다. 여기서도 묘하게 ‘뼈’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사랑의 매개가 되고 있다.
전통적인 가치관을 소중히 여기는 이향지 시인의 태도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현대적인 가치관이 대립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시 「뚜껑이 덮인 우물」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른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포용하고 있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완강하게 뚜껑을 잡아당기며
악취로 대답하는 여자
내 힘으로는 도저히 바꿔놓을 수 없는 여자
죽어서 살기에 꼭 좋은 곳에 두고
수수꽃다리 향기를 좇아 돌계단을 오른다
― 「뚜껑이 덮인 우물」부분
인용한 부분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인데, 우선 전통적인 가치관과 현대적인 가치관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는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인용 부분의 앞에서 “들어올리려는 힘과 누르는 힘 사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인용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에서 전통적인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는 존재는 ‘여자’이며 현대적인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는 존재는 시적 화자인 ‘나’이다. 이 시의 제목 ‘뚜껑이 덮인 우물’은 바로 전통적인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에 대한 이미지에 해당한다. 여기서 나는, “완강하게 뚜껑을 잡아당기며/악취로 대답하는 여자”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통적인 가치관에 매몰되어 있는 여자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 여자는, 인용한 부분의 앞에서 직접 밝혀져 있는 표현을 쓰면, ‘체념’과 ‘숙명’에 익숙한 여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마지막 대목인 위에 인용한 부분 “죽어서 살기에 꼭 좋은 곳에 두고/수수꽃다리 향기를 좇아 돌계단을 오른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시의 화자인 ‘나’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그 여자를 포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어쩌면, 여기서 ‘여자’는 다름이 아니라 시적 화자인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자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바꿔놓을 수 없는 여자”일지도 모른다. 자기 속의 또 다른 자아는 반성의 대상이면서도 포용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죽어서 살기’라는 모순적인 발화는 모순적인 두 면을 지닌 존재에 상응하는 발화가 된다. 그리고 꽃의 향기를 좇아 돌계단을 오르는 상황은 이러한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외적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다시 「노파」라는 시에 초점을 두어 논의를 계속하면, 이 시 내용에서 “米壽에도 생일상을 받지 못한 볍씨 한 톨이 있다”라는 구절은 그 앞의 “깊은 우물이 하나 있다/지은 지 88년째 되는 낡은 집이 있다”와 이미지상으로 상충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깊은 우물과 낡은 집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노파에 대한 비유에 해당하는데 많은 세월을 보낸 존재를 표상하는 유비적 사고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볍씨 한 톨’도 노파에 대한 비유로 활용된 것인데, 이 경우는 깊은 우물과 낡은 집처럼 많은 세월을 보낸 존재의 표상이라는 유비적 사고에 따른 것은 아니다. 볍씨 한 톨은 88세를 ‘米壽’라 하는데에서 연유한 비유가 된다. 실제로는 八 十 八 의 합자로서 米를 써서 ‘米壽’이지만, 이 시에서는 米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88세의 노파를 볍씨 한 톨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 비유는 더욱 깊은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것에 해당한다.
이향지 시인이 노파를 볍씨 한 톨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세계의 중요한 점을 내재하고 있는 사항의 단초가 되고 있는 것이므로 주목해야 마땅하리라고 본다.
내가 찢고 미궁 벗어날 때 어머니 물
모두 나를 따라와 내 딸에게로 갔지요
어머닌 나로 인해 질긴 돌이 되었으나
나와 내 딸이 붙잡고 빠져나온 긴 끈
질기게도 아직 그 풀밭 어귀에 이어져 있지요
― 「돌 속의 넓은 풀밭」부분
노파를 볍씨에 비유한 것은 소멸이 소멸로 끝나지 않고 생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생명체가 연대(年代)적으로도 연대(連帶)되어 있다는 의미로 확대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시는 바로 이런 생명의 수직적 연관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에 해당한다. 이 시의 내용에 따르면, 시적 화자의 어머니가 지닌 생명성은 어머니의 생명성으로 끝나지 않고 시적 화자 나의 생명성으로 이어지고 또 시적 화자 나의 생명성은 내 딸의 생명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어머니의 생명수인 ‘물’은 “나를 따라와 내 딸에게로” 갔다고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 발화는 할머니와 손녀가 생명성으로 연관되고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일종의 생명성의 고리가 된다. 그런데, 이 시에서 “어머닌 나로 인해 질긴 돌이 되었으나”라는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시적 화자의 생명성 때문에 어머니는 생명성을 잃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긴 돌은 바로 생명성을 잃은 존재를 표상하고 있다. 어머니의 생명성이 전이됨으로써 앞선 존재는 생명성을 잃고 뒤따라온 존재는 생명성을 얻게 된다. 앞선 존재가 생명성을 잃음으로써 뒤따라오는 존재가 생명성을 얻게 되는 이미지는, 이향지 시인의 다른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변주되기도 한다. “꽃받침이 내려앉도록 크고 무거워진 열매를/목 못 가누는 갓난이처럼 보듬고 있었던 거다/제 몸이 까맣게 타서 넝마가 되는 줄도 모르고”(「감을 깎으며」). 여기에서는 감꽃이 생명성을 잃어 까맣게 타야 열매가 생명성을 얻어 갓난이 같은 막 잉태한 생명체에서 크고 무거운 열매와 같은 성장한 생명체가 됨을 표현하고 있다. 이들 시에서 ‘돌’과 ‘감꽃’은 희생과 헌신의 이미지에 해당한다.
위에 인용한 시 「돌 속의 넓은 풀밭」에서 끈질기게 이어지는 생명성의 매개는 다름 아닌 생명의 원초적인 이미지인 ‘긴 끈’ 바로 탯줄이다. 이 탯줄은 이향지 시인의 다른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 말이 바로 드러나면서 변주가 되기도 한다. “수도꼭지를 잠그면 끝없이 딸려 나오던 탯줄. ···(중략)··· 먼 바다는 남은 탯줄. 다시 돌아간다”(「바다 밖에서의 목욕」) 「돌 속의 넓은 풀밭」에서 ‘물 - 질긴 끈’은 이 시에서는 ‘물(바다) - 탯줄’로 변주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물’, ‘바다’, ‘줄’, ‘탯줄’은 생명성에 대한 원형적인 이미지나 상징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원형적인 이미지나 상징들은, ‘다시 돌아간다’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순환적인 것이 되고 있다. 아무튼, 위에 인용한 시 「돌 속의 넓은 풀밭」에서 생명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돌 속’에 무한한 생명성인 ‘넓은 풀밭’을 내재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시의 제목인 ‘돌 속의 넓은 풀밭’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돌 속에 꽃 핀 몸”(「낙관」)도 이와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노파」에서 노파를 볍씨에 비유하는 것과 「돌 속의 넓은 풀밭」에서 돌 속에 존재하는 넓은 풀밭은 서로 상통하는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이향지 시인의 다른 시에 보이는 “내 어깨에 매달려 있었으나 내 팔이 아니었던 新生의 모습. ···(중략)··· 나는 폐경기를 넘어섰다.”(「잠깐 본 항아리」)라는 구절에서는, 폐경기의 존재에 新生의 존재가 매달려 있는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낡은 현재적 존재는 새로운 미래적 존재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향지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관계의 시학은,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거시적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깨달음은 생명성의 수직적 연관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남편과 아내 또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 그리고 가족공동체를 전통적인 가치관을 포괄한 관점에서 표현하기도 하고 인간과 사물 또는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시의 형상화 면에서는 유비적 사고에 바탕을 두거나 생명의 연관성에 따른 비유를 통한 관계적인 형상화 방법론을 활용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이향지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관계의 시학이 그 열정에 힘입어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고 본다.
---------------------------------
*<<현대시>>2003년 6월호 게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