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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6/13(금) 09:50 (MSIE6.0) 218.155.237.105 1024x768
[제4회 현대시 작품상], 발표문 및 심사평  

제4회 현대시 작품상 발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여 월간 『현대시』는 <현대시 작품상>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미 제1회 김혜순 시인과 2회 함성호 시인, 3회 김영승 시인을 수상하여 많은 관심과 격려를 받았으며 한국 시단에 중요하고 공정한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본상은 한 해 동안 가장 뛰어난 작품 활동을 한 시인에게 수여되며, 한 시인이 한번밖에 수상하지 못하는 기존의 문학상과는 달리 언제든지 가장 뛰어난 작품을 발표한 시인에게 수상함을 원칙으로 합니다.
  본지 6월호에 특집호가 나가며, 시상식은 6월중에 있습니다.

*수상자 : 이향지 시인
*수상작 : 대해 속의 고깔모자 外
*상금 : 500만원
*본심 심사일 : 2003년 3월 15일(토) 현대시 사무실
*심사위원
〔예심〕
  박주택(시인, 경희 사이버대 교수)
  오형엽(문학평론가, 수원대 교수)
〔본심〕
  이승훈(시인, 한양대 교수)
  원구식(시인, 현대시 주간)
  정과리(문학평론가, 연새대 교수)

* 수상자 발표 및 심사경위, 심사평 발표 지면 : 월간 <현대시> 4월호
* 수상자 특집 지면 : 월간 <현대시> 6월호
* 시상식 : 6월중 내정



제4회 현대시 작품상 심사경위  

 현대시는 우리 시단의 중요한 문학상으로 자리잡은 <현대시 작품상>을 독자들과 함께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하기 위해 매호 추천작을 선정하여 발표하기로 했다. 편집회의에서는 매달 올라온 추천작을 작품상 후보작으로 삼기로 하고 이를 본지를 통해 공고한 바 있다. 지난 해 상반기 작품들에 대해서는 예심위원인 박주택 시인과 오형엽씨가 맡아서 16편의 시를 선정하고 이를 본지 2003년 1월호에 함께 발표하였다.
  시인의 지명도나 문단 내에서의 위치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작품만으로 수상자를 결정하자는 취지 아래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올라온 33명의 시인들의 작품을 꼼꼼하게 숙독하였다. 그리고 각각 5명의 시인들을 천거하여 본심 심사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본심 심사는 3월 15일 오후 5시 현대시 사무실에서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우 차원에서 조정권, 최승호 시인을, 같은 시로 수상한 채호기 시인을, 그리고 본지 주간인 원구식 시인과 편집위원인 박주택 시인을 심사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하였다. 본심 심사위원들이 각각 천거한 시인들은 다음과 같다.

이승훈 ― 이수명, 이장욱, 김 참, 유홍준, 이재훈
원구식 ― 이지엽, 정일근, 송재학, 이향지, 배한봉
정과리 ― 박주택, 장경린, 이향지, 강 정, 이장욱

 심사위원들은 천거된 시인들 중에서 표를 많이 얻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논의하기로 하였다. 우선 이향지, 이장욱 시인이 2표를 얻고 나머지 시인들은 각 1표씩을 얻었다. 심사위원들이 적어낸 시인들은 서로가 너무 달랐다. 이어서 이향지 시인과 이장욱 시인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두 시인에 대해서 숙고한 결과 이향지 시인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정리 :  현대시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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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현대시 작품상 심사평

시 쓰기의 열정과 열정의 시 쓰기


  이 승 훈 (시인·한양대 교수)

  제4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작으로 이향지의 「대해 속의 고깔모자」를 선정함에 동의한다. 동의한다는 것은 이의가 조금은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대체로 이 정도면 무난하다는 것. 무엇보다 함께 참여한 두 분 심사위원의 견해에 이의가 없음을 뜻한다. 이 정도면 무난할 뿐만 아니라 이 정도면 문제가 없고, 내가 이향지의 작품에 대해 다소 망설인 것은 그의 문학관, 그가 가고 있는 길, 우리 시의 역사와 그의 작업의 관계가 다소 분명치 않았다는 점이 이유가 된다. 언제나 그렇지만 우리는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우리를 쓰고, 이 말은 근대시라는 제도 속에 우리가 있음을 의미하고 따라서 이 제도, 근대적 제도로서의 시에 대한 의식이 중요하고, 이런 것들을 기준으로 나는 심사에 임했고 특히 이런 제도와 싸우는 새로운 시에 대한 편애가 심한 편이다.
  그러나 이번 이향지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시를 수상작으로 결정하면서 우리가, 그러니까 문학상 심사위원들이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이런 시인의 입장과 업적과 능력과 정열을 새롭게 정의하고 가치를 매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점에서 이번 수상작은 손색이 없다. 이향지가 주는 시적 매혹은 무엇보다 시쓰기에 대한 열정이고, 이런 열정은 특히 그의 나이를 전제로 하면 매우 놀라운 데가 있다. 그는 우리시의 병폐 가운데 하나인 조로(조루가 아님) 현상을 비판하고 이런 열정은 그의 경우엔 열정의 시쓰기가 된다. 시쓰기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지만 열정이 시를 쓰는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다. 대해 속의 섬에서 고깔모자를 연상하고 이 모자 위에 내리는 햇살, 모자 속의 시간에 대한 상상력은 그동안 발표된 많은 섬노래를 제치고 단연 새로운 목소리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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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자의 눈


원 구 식 (시인·현대시 주간)  

  내가 보기에 한국시는 최근 몇 년 동안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는 것 같다. 1990년대에 보여주었던 빼어난 시적 성취들이 새 천년 들어 힘이 빠진 느낌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시를 열심히 써보아야 별 볼일이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우리에게 있는 것 같다. 시인들은 지쳐있고, 평론가들은 시를 건성건성 읽는다. 엄청난 시 전문지가 쏟아져 나오지만 눈에 쏙 들어오는 좋은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며, 밥그릇을 독차지하고 놓지 않으려는 몰염치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목숨을 걸고 묵묵히 시를 쓰고 있는 일군의 시인들이 있다. 오늘의 한국시를 지탱해주는 힘은 이들에게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심사에서 내가 추천한 다섯 사람은 이지엽, 송재학, 정일근, 이향지, 배한봉 시인이다. 송재학 시인은 언제나 평균작을 유지하는 저력에 신뢰가 갔고, 이지엽 시인은 자유시 속에 녹아있는 정형적인 리듬에 마음이 끌렸다. 이지엽 시인은 언제나 이 부문 때문에 손해를 본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 들어 다른 어느 때보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정일근 시인의 작품들도 나는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지난 해 읽은 시집 가운데 가장 빼어난 성취를 보인 이향지, 배한봉 시인을 천거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향지 시인을 제4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시인으로 결정하는 데 심사위원들은 모두 동의하였다. 이향지 시인은 견자의 눈을 가진 시인이다. 이번 수상작 「대해 속의 고깔모자」는 이향지 시인이 갖고 있는 시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보여주는 시이다. 최근 이향지 시인이 보여주는 일련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삶 자체의 깨달음에서 우러난 새로운 미적 감동을 전달해 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40대 후반 늦깎이 시인으로 시단에 나와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며 잠시도 쉬지 않고 밑바닥을 기어 이순에 이른 이 시인에게 이 상은 너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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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으로부터 솟아나는 시


정 과 리 (문학평론가·연세대 교수)  

  나는 지금도 시가 생으로부터 솟아난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 시는 삶의 고뇌이고 삶의 박동이며 삶의 변형이라는 것 말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미리 시적 정황을 가정하는 시들로부터 큰 감흥을 얻지 못해왔다.
  시적 정황을 사전에 가정하는 시쓰기는 점점 도드라지고 있는 경향이다. 최근에는 시적 정황을 가정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시적 정황을 아예 처음부터 구축한 후에 언어를 그 주형 안에 배치하는 수준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그런 시는 우선 머리 속에 ‘그럴 듯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형상 혹은 존재태들 그리고 배경이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불가능성을 현실화하고자 하는 것은 시의 본래적 동경에 해당하는 것이라서 그것만으로 시적 정황을 미리 가정했다고 할 수는 없다. 또 하나의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이 (불)가능성의 천칭 위에서 제기 되는 것이 아니라 (재)조립의 판 위에서 제기된다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이다. 삶의 사건들은, 문득 시의 판 위에 옮겨지는 순간, 그것들을 구속하고 있던 시 공간의 무게로부터 해방되어, 상상하는 자의 필요에 따라 새롭게 기능과 의미를 부여받아 상상세계의 구성에 동원된다. 현실의 사건들은 각각 상상세계를 그리기 위한 소도구들 혹은 기호 그물의 코를 이룬다.
  그런데 나는 자꾸 꺼림칙한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나날의 사건들, 혹은 펼쳐지는 권태롭거나 장관인 풍경들, 그리고 우리 스스로 겪는 그것들은 저마다 나름의 삶의 권리와 그 권리에 대한 그 자신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시는 상상 세계의 창조라는 권능을 핑계로 그것들을 함부로 넣었다 뺐다, 잘랐다 붙였다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제재의 입장에서 보면 폭력이 아닐까?
  물론 내 취향은 사사로운 것이며, 시의 성취는 공적인 것이다. 우러나왔든, 공작놀이를 했건 간에, 문제는 시의 궁극적인 효과, 즉 감동이다. 이빨이 썩으면 뽑고 의치를 심는 게 당연해진 현실이다. 인공 이빨이 더 저작 기능이 뛰어나다면 본래의 이빨을 아쉬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지금은 얹어 놓을 지붕도 없어서 그냥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린 옛날의 신체발부를 그리워한다면, 그 심사는, 그게 사실 내 취향인데, 낡아도 한참 낡은 것이다.
  이빨의 저작 기능에 해당하는 것이 시의 감동일 것이며, 감동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방식으로 썼느냐는 하찮은 문제다. 그러나 이 감동이라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다. 내가 감동하는 시구에서 타인은 전혀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법이고,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다수의 감동을 시적 우월성의 표지로 삼을 수는 없다. 물론 우리는 통상 고급한 취향과 평범한 취향들의 차이를 전제함으로써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흔히 취향의 질은 문학 외적인 것들, 그러니까 인식의 수준, 윤리적 태도, 사유의 굴곡 등의 우회로를 거쳐 풀이되어 왔을 뿐, 보편적 미적 원칙을 통해 해명된 적은 없다(아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내적 필연성에 의한 반전이 우연한 사건들에 의한 그것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그에 대한 상반되고 이질적인 수많은 주장들은 미학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이 제기되었고 또 상용되었는가? 게다가 ‘내적 필연성에 의한 반전’이란 사유의 굴곡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단 말인가?) 하긴, ‘모든 것은 그 아닌 것으로부터 온다’는 이제는 상식처럼 되어버린 명제를 염두에 둔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타자들의 형성물로서의 ‘자아’도, 그 재료들의 취사선택과 조합의 방식과, 그리고 시간과 공간 등의 우연성의 개입이라는, 그 스스로가 되고 마는 나름의 사정(알고리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안마다 너무 달라서, 일반화시키기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인류의 두뇌 진화사와 두뇌의 구조가 완전히 해명되는 날이 오면, 혹시 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글쎄···· 그날이 인류 종말의 날, 사과나무 한 그루가 외로움에 떠는 날이 되지나 않을까?
  각설하고, 이번에 후보작으로 추천된 시들에서도 나는 그런 경향이 꽤 강력함을 다시 확인한다. 이향지씨의 「대해 속의 고깔모자」도 얼마간은 그런 유형에 속한다. ‘얼마간’이라는 유보를 단 것은 이 시가 ‘섬은 고깔모자처럼 보인다’라는 순간적 직관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 직관 자체는 사물에 대한 섬세한 시선(발견)에서 오는 것이지 인공적인 조작을 통해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시인은 그 직관의 비밀을 탐구하는 대신 이 가벼운 직관(왜 가볍냐하면, 이 직관은 삶에 대한 통찰은 아니기 때문이다)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바깥으로 더욱 뻗어나간다. 섬 → 모자 → 달걀 → 시계로 이어지는 연상의 흐름은 그러한 상상의 자유에 힘입고 있다. 그러나 이 연상의 흐름 속에서 시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삶의 숙명적인 하찮음, 그 하찮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그 또한 운명적인, 집착, 아니 차라리 안달복달이라는 형용사로 표현해야 할 마음의 번잡한 움직임(아, 그 고깔스러움), 그러나 그 번잡함이 아무 결론에도 이르지 못해 번잡함의 주위에 연기처럼 피워내는 무척 지루하다는 느낌들, 그리고 이 모든 마음의 움직임들의 숙명성에 대한 불가피한(그 역시 숙명적인) 수락과 그 수락 자체를 다시 삶의 에너지로 삼는 은근한 용기 등등의 마음의 내력, 아니 차라리 마음의 역사를 새겨 넣고 있다. 방법은 인공조작이었으나 그것의 생산품은 장난감도 기형아도 아니라 자연인이었던 것이다. ‘돌리’가 아니라 ‘둘리’였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작품을 특이하다고, 혹은 멋있다고, 본 이유이다. 나의 의견이 얼마나 보탬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이 시가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나로서는, 이 결정이 90년대 이래 생장해 온 새로운 시적 경향에 대한 하나의 공적 인정이자 동시에 그 경향이 도달한 어느 한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내기 보다는 축복의 폭발물을 보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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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2003년 4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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