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1/6(월) 16:40 (MSIE5.5) 218.155.236.95 1024x768
|
[시집/추천사], 내 눈앞의 전선
시집 [내 눈앞의 전선]
추천사
이향지 시인의 시는 우리 시대가 기념해야 할 하나의 열정을 담고 있다. 일상의 어떤 너저분한 허울도 그의 시선 앞에서는 그 뒤에 감춰진 뜨거운 알몸을 드러낸다. 그의 눈이 허투르게 지나치는 물건이나 운동은 없다. 이 탁월한 시선의 능력을 환시라고도 사랑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사소한 특징에서 거대한 진실을 알아차린다는 점에서 그것은 환시이다. 이를테면 [둥글고 환한 구멍]의 둥글고 환한 구멍은 물론 달이지만 또한 달이 빠져나가 버린 홈통 저쪽에 뚫린 구멍이다. 달은 거기에 있지만 달이 불러온 그리움의 자리에는 도달할 수 없다. 달은 거기 없다. 달을 보는 자는 그 그리움이 뚫어 놓고 달아나 버린 구멍을 볼뿐이다. 삶은 여기 없다. 그는 어떤 망원경보다도 배율이 높은 이 홈통을 들고 다른 삶을 본다.
그러나 이 껄그럽고 눅진한 현실 어디에서나 이 맑고 깊은 구멍을 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연습해야 하는가. [바다 밖에서의 목욕]에서 그는 손등을 문지를 때, 가장 편안하게 등을 밀어 주는 바다를 느낀다. 시인의 시선을 깊게 만드는 것은 바다와 제 몸을 한 몸으로 느끼는 이 사랑이다. [엄마의 풍선을 찾아가는 풍선의 노래]에서, 자식들이 모시기 어려운 엄마를 매달아 날려보내는 풍선을 타고 그 엄마는 또 제 엄마를 찾아 날아간다. 자식들이 풍선을 타고 날아가 찾아 헤매는 것도 필경 그 엄마일 것이다. 이 시인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사랑의 감정이 되기 위해서만 생생해진다.
그러나 이 사랑은 게으른 낙관주의나 안이한 정신주의에서 온 것이 아니기에 자주 비극적이다. 그리움은 좌절이 예정된 것들의 애써 가다듬는 용기이며, 사랑은 보답도 끝도 없는 자기 희생이다. 그는 시가 되지 않으려는, 노래도 편안함도 되기를 거부하는 사물들에 끝없이 사랑을 저축하는데 시인이 여기서 손에 든 것은 그 통장일 뿐이며, 우리가 여기서 읽는 것은 그 희망이다.
이향지 시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척박한 시대의 척박한 땅에서 태어나 그 척박함으로 성장한 힘과 열정을 기념하며, 거기에 우리의 희망을 덧붙이는 일이다.
황 현 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불문과 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