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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11/14(수) 00:08 (MSIE5.0,Windows98) 211.198.158.89 1024x768
[서평/산아, 산아], '시인의 산'을 엿볼 수 있는 드문 기회  

서평/이향지의 산행에세이, [산아, 산아]

'시인의 산'을 엿볼 수 있는 드문 기회


              이 혜 선 (사진가)

 
 가을이다. 몸이 그걸 느끼고 길 떠나자고 조른다. 가을 숲이라도 담을까하고 촬영장비를 챙겨 집을 나서는데 책 한 권이 배달됐다. 시인 이향지씨의 산행기 <산아, 산아>(도서출판 창해 간).
이 책은 자연스레 내 가을 여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여행 도중 시간 나는대로 읽기로 한다. 월간《山》에서 그림산행으로 연재했던 것으로 아는데,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묶이고 보니 새롭고 반갑다.
 목차를 보니 백두에서 한라까지 유명한 산에서부터 생소한 산까지 스물 다섯곳의 산행기가 실려있다. 내가 가보았던 산도 있고 모르는 산도 있다. 자연스레 내가 가보았던 산부터 읽게 된다. 남해금산, 내 고향 뒷산이다. 내 고향 산을 가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저자인 시인이 피붙이라도 된양 살갑게 다가온다. 내 유년의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 있던 풍경들이 시인의 아름다운 언어를 빌려 살아나고 있다. 아 그래, 그랬었지. 흔들바위는 흔들리고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와 작은 섬 세존도를 감싸고, 보리암 가는 길섶에는 해풍에 시누대(細竹)가 살랑거리고 있었지. 시인의 눈은 마이크로렌즈와 같이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있다. 나는 곁에 놓아둔 카메라를 보면서 자문해 본다. 내가 카메라를 통해본 남해 금산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사진을 찍을 생각도 않고 책 속으로 빠져든다. 책 속의 문장은 마치 산줄기처럼, 오솔길처럼 내 눈앞에 흘러간다. 시인의 손에 이끌려 내가 가보지 못했던 백두산을 오르고 금강산을 오른다. 일생을 엎드려 이름없이 살다간 이 땅의 아낙들을 생각나게 한다는 금대봉에서는 눈 속에서 핀다는 복수초를 만나기도 했다.
  곰배령을 읽는다. 시인의 정겨운 입담을 들으며 진동리를 지나고 강선리를 지나고 곰배령으로 가고 있다. 곰배령은 지형이 곰배팔이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단다. 시인의 우리 산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랑을 책 곳곳에 숨겨 놓았다. 거대한 백두대간과, 여러 정맥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흐르는 많은 강줄기들을 시인은 하나같이 꿰뚫고 있다. 곰배령 고갯마루를 훑는 시인의 묘사에서 나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을 느낀다. 풀꽃머리에 내리는 달빛에서부터 저 설악과 점봉산의 봉우리들까지 그 속에 깃든 여러 유정 무정들과 교감하고 향유한다.
 시인의 곰배령은 예전에 내가 보았던 곰배령과 같은 산이면서도 다른 산이다. 눈에 보이는 산은 하나인데 마음 속에 담겨지는 산은 사람마다 제 각각인 것이다. 나는 시인의 마음에 그려진 산을 앵글에 담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산은 오직 한 사람의 산이다. 그나마 행복한 책 읽기를 통해 시인의 산을 엿보고 내 마음의 산과 시인의 산이 서로 교감한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나 세상 살다 추운 날이면 이 숲으로 돌아오리
    생각만으로도 돌아오리
    산죽떼가 발을 걸면 걸려 넘어지리
    단풍나무 붙잡고 일어서다 머리 위 구름을 보리
    세상의 모든 잎새들 떨어지기 전 한 때를 붉게 앓느니
    새벽 비에 얼굴 씻고 돌아오는 가을 해를 보리
    나 너무 눈부셔 한참을 눈감았다
    가을 해와 나 사이에 뜬 단풍잎 구름을 보리
    투명한 유리잔에 담아 비춰보던 포도주빛 구름
    나 아직 가보지 못한 땅의 향기에 사로잡혀
    어질어질 비틀거리던 어느 날 낮꿈빛 구름
    나 지니고 살던 추억의 잔을 모두 꺼내어
    저 단풍잎 구름에서 흘러내리는 술을 받으리

    -- '점봉산' 중 <너른이골 단풍 숲에서>  
           

 산은 발로 오르되 가슴과 마음으로 올라야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해가 어둑어둑해진 숲 속에서 책을 다 읽고난 뒤였다. 주말엔 카메라를 챙겨 가을 산에 다녀와야 겠다.

*월간《山》, 2001년 11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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