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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괄호 속의 귀뚜라미>> 해설
도시적 삶의 탐구와 그 그릇
홍 신 선 (시인·동국대 교수)
시집 <<괄호 속의 귀뚜라미>>에는 서너 갈래의 두드러진 흐름이 보인다. 그 흐름은 변별성이 뚜렷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대체로 뒤섞여 있다. 이 뒤섞임이 이향지 시집의 두드러진 개성을 찾는 데에 애를 먹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러나 생각과 삶이 어디 하나의 그릇에만
골라 담을 수 잇는 것이던가?
앞으로도 내 시에 애써 굴레를 씌울 생각은 없다.
― <독자를 위하여> 일부
라는 열린 마음의 자세를 무리 없이 이해하게 만든다. 굴레 씌우기를 거부한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고 잇는가. 하나는 삶의 일상성에 매인 움직임이며, 다른 하나는 소위 해체시에 관계된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는 남한강변에서 티벳 근방의 막고굴까지 떠도는 마음의 편력이 잇다. 이 세 갈래의 큰 흐름은 이향지의 시력(詩歷)이 만만치 않은 것임을 드러내면서 이른 바 그동안의 우리 시의 흐름에 닿아 있는 것임을 알게 한다. 최근 도시시라고 일컫는 시들은 도시 삶의 일상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상이란 사소한 사건과 정서 그리고 트리비얼리즘이라고 할 이런저런 일들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현실의 세부를 뜻하는 것이다. 사회의 중심 원리 내지 삶의 중추라 할 커다란 집단세계의 합법칙성이 소멸된 자리에 떠도는 크고 작은 일상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삶은, 특히 개인의 삶은 바로 이 같은 일상의 연속이고 그 축적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동구를 비롯한 사회주의의 몰락은 이 같은 추세를 가속화했다. 소위 유토피아의 과학화라는 큰 이념의 몰락은 우리의 삶이 저 일상을 떠나 존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시켜준 터이다. 아무튼 일상의 세부가 삶의 구체적 실체이고 또한 그 삶을 생산한 사회의 단서라는 점에 최근의 우리 시들은 합의하고 있다. 일찍이 30년대 우리 모더니즘이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아닌'한갓 '정신노동자'로서의 지식인(시인)의 일상을 탐구하였듯이 오늘의 시인 역시 평균인으로서의 익명의 삶을 탐구하는 셈이다. 해체시도 이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비록 기성문화 혹은 공적인 이념의 파괴라는 일면이 있기는 해도 그 드러난 결과는 파편화된 현실의 시화(詩化)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도시시이든 해체시이든 그 공통의 기반은 일상이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일상의 트리비얼리즘을 벗어나는 길이란 무엇인가. 이향지 시인에게서 그 탈출은 여행에서 나타난다. 막힌 그리고 자동화 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은 낯선 곳으로 떠도는 여행밖에 없을 것이다. 여행시들이 일정한 양식으로 자리잡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세계의 실체를 발견하고 또 깨닫는다는 옛 서사시 이래의 순례 형식은 오늘 날 여행이란 틀로 변모 된 게 아닐까.
성공한 옛 친구와 점심이나 하자며
손잡고 마주보며 쉴새없이 지꺼이며
우리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1, 2, 3, ....14, 15.
내 마음의 엘리베이터는 15, 14, ....3, 2, 1.
우리 사이엔 새하얀 식탁보 사각 식탁이
― <엘레베이터와 냉수> 일부
인용한 작품은 우리의 일상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 그 일상은, 성공한 옛 친구를 만나고 점심을 함께하는 그런 범속한 것이다. 특히 시의 화자는 다음과 같은 음식물의 대비를 통해서 곧,
친구 접시엔 빵과 샐러드와 스테이크와 푸딩
내 접시엔 팥밥과 묵무침 냉채와 매작과
의 대비를 통해서 성공과 비성공,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들의 의미를 찾고 있다. 이 경우 양식과 한식명의 대조는 시속의 변화와 불변이란 차원을 넘어 정신적인 뜻까지 함축한다. 대체로 음식을 기반으로 한 입맛은 사람에게 있어 매우 완강한, 변할 줄 모르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본능에 가까운 완강함을 지닌 감각인 것이다. 그것은 아주 어린 시절 욕망의 충족과 쾌감이 구순(口脣)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욕망과 보상체계는 오랜 뒷날까지 강한 기억으로 보존되는 것이다. 지난 날, 白石이 갖가지 음식물의 내재화를 통해서 공동체의 신성공간을 확보하려 한 사실은 그 좋은 본보기일 것이다.
어쨌든 작품 <엘리베이터와 냉수>는 음식물의 대조를 통하여 변화의 뜻을 되새기고 더 나아가 변하지 않는 '냉수'의 의미, 즉 두 사람이 공유한 맑은 시간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일상의 작은 일들을 통하여 삶의 일면을 드러내는 이 같은 기법은 도시시의 주요한 특징일 터이다. 바둑을 두는 이야기인 작품 <手順>이나 <종이비행기> <口> <취중일기> <밤비> 등 일련의 작품들에는 모두 이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부에 실린 일련의 시편들은 도시 일상의 병리현상, 갑갑함 등을 노래하고 있다. 예컨대 도시 공간의 답답함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작품 <새알>은,
바람의 부리여
태양의 부리여
나를 쪼아다오
이 도시의 손안에서
이 도시의 벽 틈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
라고 화자의 강한 원망(願望)을 들려준다. 곧, 도시의 물화(物化)된 삭막함 속에서 시의 화자는 일상의 껍질을 깨고 어디론가 날고 싶은 것이다. 이는 지난 30년대에 '날자, 한번만 더 날자'라고 서울 공간을 벗어나고 싶어했던 李箱의 외침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도시의 병리현상은 이 같은 갑갑함에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비정함으로도 드러난다. 곧,
지하철 창 밖에 내리는 비는
젖은 찬송가 자락 끌고 다닌다.
오른쪽 왼쪽 등돌린 채 열리고 닫히는 물결
더듬더듬 떠내려오는 백색 지팡이
옴팍옴팍 마마자국에 고였다 흐르는 불빛
비어서 속 쓰린 플라스틱 바구니
― <창 밖에 내리는 비> 일부
가 그것이다. 이 시는 ⅰ)시의 화자는 만원의 지하철을 타고 있다, ⅱ)어두운 창 밖엔 비가 내리고 불빛이 흐른다, ⅲ)찬송가를 부르는 맹인은 차 안을 누비며 구걸을 한다, ⅳ)그의 동냥 바구니는 비어있다라고 산문적인 풀이를 가능케 한다. 특히 ⅲ)과 ⅳ)는 메마른 세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 세태는 모든 인간적인 정서와 값이 물질 속에 어느덧 잠재화되었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 같은 물화현상 속에서 시인이 할 수 잇는 일은 무엇인가.
작품 <활짝 핀 목련>에 의하면 시인은,
나는 어디에 피어
어떤 모습으로 질까
라는 자성(自省)의 물음으로 물러서고 있다. '문제적 개인'이란 표현도 어느덧 빛 바랜 말이 된 바이지만, 시인은 그 병리현상 앞에서 본질 적인 것, 자신을 되살리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의 못 박는 소리도 '나를 일구는 가락'으로 듣거나 '사랑과 내일을 노 저어 오는 음악'으로 들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상성을 깨고 근원적인 세계로 돌아가는 일은 이향지 시인의 경우 여행을 통해서 보다 더 확연해진다. 특히 그 일은 남한강변에 서서 '날개를 찾아 달' 때에 가능해진다.
*
서울 도심을 벗어나 퇴촌까지 가는 도정을 작품으로 만든 시 <남한강변의 하루>는 꽤 단단한 작품이다. 여행시 특유의 서사를 주된 틀을 하면서, 지배적인 인상의 세부묘사들이 이루어진 점이 그러하고 적절한 마음의 표백이 드러난 사실이 그렇다. 이 경우 마음의 표백은 이 일 저 일의 의인적인 해석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마실 나온 칡넝쿨 몇 가닥/흙 묻은 손을 털고 있다'와 같은 구절이나 '무궁화 겹꽃이/초록 망울 속에서/비비작거리며 붉어지고 있다'와 같은 대목들이 그것이다. 이런 대목은 단순한 묘사의 차원을 벗어나 마음의 정황을 보여주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 가운데서 시인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날개를 찾아 달고
하늘을 본다
높고 푸른 하늘가에
바람이 흘리고 간 새털구름 몇 오라기
나를 기다리며 떠 있다
나는 오늘 저 구름에 불을 지르는
노을이 되리라
사위지 않는 불꽃처럼
하루를 간직하리라
꽃이 되어
산이 되어
토종 잔디가 되어
인용된 대목의 중심 이미지는 '새털구름'이다. 그 구름은 이름 그대로 새털 모양을 하고 있다. '날개를 찾아단' 화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구름은 새처럼 날고 싶은 욕망의 상징이다. 뿐만 아니라, 그 구름은 불이 타는 붉은 노을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을은 휘황한 빛밝음으로 화자의 심리적 원망(願望)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중심 이미지로서의 새털구름에는 시적 화자의 마음의 원망이 투영되어 있다. 곧 ⅰ)나는 날고 싶다, ⅱ)그리고 찬란한 삶을 누리고 싶다라는 바램이 그것이다. 시인의 이 같은 바램은 도시 일상의 갑갑함, 병리현상 등을 벗어나려는 강한 뜻을 함축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시짐의 3부인 '뿌리 잇는 슬픔'은 모두 여행시들로 채워져 있다. '더운 날 웃지 않는 택시에 실려'서 서울을 벗어나는 일로부터 (<길이 보인다>) 그 여행은 시작된다. 북한산과 숨은 백을 찾는 일이 그것이며, 그 여행은 더 나아가 덕유산과 설악산, 그리고 중국에까지 이른다. 그러면 시인이 이 여행길에서 만나는 것은 무엇인가.
ⅰ)신발을 신고 걸을 수 있어야
비로소 살았다 한다
ⅱ)향적 바위 봉우리에 다섯 자 키를 더하니
안개 속에 접혔던 길 햇살 아래 펼쳐진다
오십 년 걸어온 길 하루에 걸어보았으니
ⅲ)모래의 비바람 시원시원 맞으며
줄지어 오르고 있는 저 사람들께
내려가는 사람의 홀가분한 뒷모습과
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보여주리라.
작품 ⅰ)은 <죽어 있는 시간>에서, ⅱ)는 <가을 깊은 날>, ⅲ)은 <下山을 생각하며>에서 이끌어 온 것들이다. 이들 대목들은 여행길이나 등산길에서 만난 일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곧, 길 떠나는 일이 살아있음의 확인이며, 굴곡 심한 산행(山行)이 바로 삶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특히 ⅲ)은 마음의 일체를 버린 홀가분함을 진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정상 정복을 달성한 뒤의 혹은 깨달음 뒤의 가벼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여행은, 일상의 깨달음과 달리 삶의 큰 이치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 아마도 이는 '날개를 단' 높은 자리에서의 정신적 부감이 시인에게서 이루어지기 때문일 터이다. 그런데 작품 <눈 덮인 능선의 새>는 광주산맥의 산행을 '수족 마비된 어머니를 밟아드리는 일'로 그리고 있다. 특히 유년시절 노쇠한 어머니의 등허리를 밟던 체험의 세부들이 들어 시적 울림을 더해주고 있다.
立春은 지났으나 雨水는 먼 날.
눈부신 햇살 풀어 눈밭을 어루만지는
해
머리에 이고,
어머니 등허리 밟아드렸다.
마비된 수족 좀 나으시냐고
이처럼 산행에서 능선을 타는 일은 어머니 등허리를 밟는 일로 겹쳐진다. 그 겹침은 동시에 시인에 시인의 마음의 새들로 하여금 지척을 날다 돌아오게 만든다.
이 점은 앞에서 말한 부감이 막혀지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곧, 하나의 내면에 피어오른 정감 때문에 전망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
시인의 내면에 피어오른 정감은 서정성으로 작품에 드러난다. 우리의 자연서정시들이 세계에 대한 의인적 해석과 정감을 주로 하고 있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향지 시인은 <눈 덮인 능선의 새>뿐만이 아니라,
순정은 시가 된다
순정이 시가 된다
―<순정은 시가 된다>일부
라고 말하고 있다. 말 할 것도 없이 이 순정은 일종의 생명감각이기도 하다. 곧, '하이얀 목련이 후둑후둑 지는데/삐줄삐줄 돋아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구경성(究竟性)을 탐구하는 자리에 지난 날 자연서정시들이 많이 정신적 주소를 두었던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사실은 너무 쉽게 이해되는 것. 그러나 이향지 시인이 듬물게 이 시집에서 보인 재래적 서정성은 '눈물 말려 흩뿌리는 배꽃 이파리'(<첫눈>) 등 앞에 적은 몇 작품에서 확인 될 뿐이다.
이 점은 '내 시의 길 찾기'에 한 지표가 되었다고 술회하는제6부의 시편들을 읽을 때에 더 분명해진다. 곧, 그의 시들이 재래적 서정성보다는 모더니즘의 지적 태도에 더 많이 기대어 오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향지 시의 도시적 삶의 일상의 탐구와 그 대척적인 자리의 여행시들 역시 그 뿌리를 모더니즘에 두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더욱이 해체시의 일면까지 보이는,
S#1. 사람하나밭에서날마다사람 人
일 一
밭 田
일 日
―<기억의 계단> 일부
과 같은 작품은 이런 사정을 아는 데에 좋은 본보기이기도 하다.
하나의 장면이 변환되는 과정을 기술해 보인 듯한 이 작품은, 대개의 해체시들이 그렇듯 구범적인 문맥을 찾을 수 없다. 이들 시는 그 규범성이 깨뜨려지는 자리에서 새로운 의미, 새로운 미학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작품 <기억의 계단> 역시 하나의 기억이 인지 대상(여기서는 계단 끝에서 만난 사람)을 만나 해체되기까지 유동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아마도 이 같은 작품의 의도가 일련의 장면부호를 문맥 가운데에 삽입케 했을 것이다.
기존의 문맥이나 언어를 통해서는 시인이 의도한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는 생각은 이처럼 언제나 새로운 방법을 모색케 하는 것이다.
크고 까만 口 위에 작고 하얀 口를 펴면
덮어주지 못한 口들이 둘레에,
더 작은 口안에
몸, 맘, 밤, 숨, 꿈 같은 口를 펴면
무거워진 口들이 아랫장에
구겨진 口들 수국송이처럼 뒹구는 口의 숲 나서면
口 깔린 길 口 입힌 벽 口口 빛나는 빌딩 창문들
―<口> 일부
인용된 작품 <口>는 일상적인 말보다 도형의 회화적 이미지를 통하여 담론을 구성해내고 있다.
일찍이 시에 추상적인 숫자들을 배열하거나 그림을 삽입하는 등의 전형적인 실험성을 이 작품도 보여주고 잇는 것이다. 다만 그 실험성이 극단의 과격성을 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미발표 작품 73편을 수록한 시집 <<괄호 속의 귀뚜라미>>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 갈래의 뚜렷한 흐름들을 간직하고 잇다. 또한 이 세 흐름은 그간의 우리 시의 흐름에 맞닿아 있는 것들이다. 물론 이 흐름들이 상호 연관성 없는 독자적이고 격절된 흐름일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한 시인의 정신적 태도로서 드러나는 흐름들이란 그 근저에 공통의 기반을 지닐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공통의 기반으로서, 이 시집 가운데 두드러진 흐름들을 묶을 수 있는 말을 찾는다면 모더니즘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주의와 다른 자리에서 모더니즘이 어떤 의미를 띠는가 하는 것이 이 시대에 대한 질문이면서 이향지 시인의 시에 대한 물음이기도 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한 권은, 내 시의 그릇 고르기에 해당된다'(<독자를 위하여>)라는 시인의 목소리가 거듭 각별한 의미로 울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
<<괄호 속의 귀뚜라미>> (1992. 현대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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