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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구간],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제6구간 법배령∼박달령∼연대봉∼철령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이  향  지

 어느 날 밤 이성계가 꿈을 꾸었다. "무리 지은 닭이 만 집에서 일제히 울어대고, 다듬이 소리가 천 집에서 동시에 나고, 몸은 무너진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오고, 꽃잎은 휘날리고, 거울은 떨어지더라." 하도 이상하여 무학대사에게 해몽을 부탁했더니, 사양하다가 대답하기를 "길몽이요. 만 집 닭이 고귀위(高貴位·'꼬끼요' 우는 닭 울음소리) 하였으니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요, 천 집에서 다듬이 소리가 일제히 났으니 만 백성 천 벼슬들이 임금 된 경사를 알리는 풍악소리요, 몸이 서까래 셋을 졌으니 '임금 王'자요, 꽃잎이 날렸으니 필경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울이 떨어졌으니 깨어지면서 반드시 큰 소리가 날 것이라, 이는 임금이 될 꿈이니 간직하고, 여기 설봉산에 절을 짓고 기원하면 소원 성취하리다." 그래서 지은 절이 안변의 석왕사(釋王寺)라. '석왕사연기설화'에 전한다.
 '입파옥부삼연(入破屋負三椽·무너진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셋을 지다. 즉, 임금 王자)'을 꿈꾼 8년 후, 이성계는 꿈꾸던 왕이 되었다. 그가 왕좌에 앉았던 기간은 불과 6년 2개월. 그가 세운 왕국도 505년(1392-1897)만에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다시 101년이 흘렀다. 그 101년 중 처음 절반은 이민족의 탄압에, 나중 절반은 하룻길도 안 되는 근거리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못 만나고 있는 한스러운 세월이다. 나중의 절반은 얼마를 더 이어질지 모르는 상태에 있다. 한 많은 민족 한 많은 세월이로되, 산은 말없이 서 있고 물은 제 갈 길로만 간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되, 안변의 경계로 들어서면서 석왕사와 이성계를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변과 통천과 회양의 경계에 있는 깃대봉에서 석왕사가 있는 설봉산까지는 직선거리로는 32km남짓, 백두대간을 따라가면 도상거리 80km가 넘는다. 백두대간이 추가령열곡을 빙빙 둘러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깃대봉 동북쪽에서 바다를 가리고 있는 큰산은 황룡산(1,267.7m)이다. 깃대봉에서 황룡산쪽으로 뻗어가는 지맥은 태백산맥에 들어간다. 일제는 깃대봉 이남의 백두대간과 연결하여 부산의 다대포까지 이어놓고 태백산맥이라 불렀고, 그 영향은 아직도 건재하다. 태백산 부근의  지형도를 보면 낙동정맥에도 태백산맥, 백두대간에도 태백산맥이다. 일제가 규정한 산맥개념이 우리 고유의 산경개념에 비해 혼란스럽고, 우리 지형에는 덜 합리적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이보다 더한 것은 추가령열곡을 경계로 한반도의 산줄기를 남쪽과 북쪽으로 완전히 끊어진 것으로 간주하여 양분시켜놓은 점이다. 백두대간은 결코 끊어진 산맥이 아니다. 해방과 더불어 이 땅의 사람들은 성과 이름을 되찾았으나 이 땅의 산줄기들은 분단의 고통 과 창씨개명의 잔재 속에 방치되어 있다. 물은 옛 물이 아니로되, 산은 옛 산 그대로이다. 걷고 또 걸어서라도 이어주고 되찾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물가에 집을 짓는다. 우리는 산마루에 집을 지었다. 안변과 통천과 회양의 경계가 한 군데로 머리를 모으는 깃대봉에서 몸 하나로 집이 되어 노숙을 했다. 모처럼 푸른 하늘, 총총한 별들을 지붕 삼아 비박을 한 것이다. 늦여름 햇살이 데워놓은 바위는 알맞게 따뜻했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텐트를 칠 필요가 없었다. 침낭 한 겹으로도 자족한 밤이었다. 드높은 천정에는 별들이 무늬처럼 박혀있었다. 휘영청 둥근 달은 세상에서 가장 밝은 등불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기막히게 좋은 날 우리가 왔노. 새소리에 잠을 깨니 6일 아침이다.
 엊저녁에 남긴 밥을 폭폭 끓여서 먹고 박달령을 향해 출발한다. 약간 쌀쌀하기에 오히려 상큼한 공기. 찌르찟찟, 쯔비쯔비, 명랑한 새소리. 물안개들은 아직 낮은 골짜기에 머문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이 얼마인지, 얼마나 험하고 어려울 것인지, 얼마나 헤매야 하고, 지칠 것인지, 우리는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이번 구간은 이은경씨와 유남숙씨가 동행을 한다. 나와는 독도 공부를 같이 한 여성 산악인들이다. 성실하고 순발력이 뛰어난 듬직한 동행들이다. 우리가 백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남존여비 시대의 표본이라 할 만한 이성계의 왕국이 아직도 건재하였더라면, 여자 셋이 야영을 해가며 백두대간을 걷는 일이 가능했겠는가? 그러나, 그의 왕국이 건재하던 시기에 확립된 산경표는 존경하고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이번 구간의 첫 관문인 법배령으로부터 마지막 관문인 철령까지는 장장 100리 길. 무려 17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세로 넘는 게 아니라 가로 건너야 한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가려져 잇는 소로들. 그 마루턱을 찾아서 산과 산을 이으며 가야하는 것이다.
 오늘의 목표는 박달령까지 가는 것이다. 어제 오후에 장문동∼법배령∼깃대봉 구간을 미리 걸어두었기 때문에 헤매지만 않는다면 가능할 것 같다.    
 깃대봉에서 도납령까지는 유남숙씨가 선두에 섰다. 1,004m봉까지는 평지 같고, 그 이후부터는 고도가 뚝뚝 떨어지는 능선길이다. 능선은 내려갈 때, 가속이 붙는 만큼 엉뚱한 쪽으로 빠질 확률이 높다. 그러나 유남숙씨는 잘도 찾아 내려간다. 장문동에서 법배령으로 오를 때는 주머니 속같이 답답하던 계곡이 소맷등 같은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서 보니, 뛰어내리면 부드럽게 받아줄 것 같은 초록빛 구덩이를 이루고 있다. 우리 발아래 능선을 비스듬히 끌고  장문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도납강의 원류다. 도납강은 북한강의 지류 중 최북단에 위치한 강이고, 깃대봉은 도납강 줄기 최북단에 위치한 봉우리다. 우리는 북한강 물줄기 중 최북단에 위치한 산봉우리에서 하룻밤을 지낸 것이다. 그것도 환상적이라 할만한 비박으로….  
 깃대봉 출발한지 1시간 10분만에 도납령에 내려섰다. 능선이 뚜렷하고 갈림길의 유혹이  없어서 고생을 하지 않고 내려온 것이다. 이런 속도로 가면 박달령 아니라 철령까지도 하루에 가겠다. '머리를 조아려 만난다'는 뜻의 돈합령(頓合嶺)이 '길을 받아들인다'는 뜻의 도납령(道納嶺)으로 바꿔놓은 것 역시 일제 강점기의 작품이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도납령 어디에도 새로운 길을 받아들인 흔적은 없다.
 도납령 마루에 서도 회양쪽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705m봉이 옆구리를 불쑥 내밀어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옆구리를 돌아나가면 얼마 가지 않아서 강물이 있고 마을이 있다. 도납령 좁은 통로만 막으면 회양 땅은 빗장을 걸어 잠근 뜰 안처럼 요새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회양으로 들어가는 동남쪽은 꽉 막힌 협곡처럼 보인다. 반면, 안변 관내인 동북쪽은 경사가 급한 산비탈이어서 시야가 훤히 트였다. 동쪽 지형은 가파르고 서쪽은 평탄한 경동지괴의 영향은 이곳까지도 이어진다. 도납령 동북쪽 가파른 비탈에 갈짓자를 그리며 내려가는 소로가 안변 땅 천내리로 이어지는 길인데, 직선거리 1.5km에 고도 300m 정도만 낮추면, 다음부터는 경사가 느슨한 계곡을 따라 안변의 중심지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도납령부터는 이은경씨가 앞장을 선다. 굴곡이 심한 구간이어서 지도와 현장을 대조하면서 한 봉우리씩 넘어간다. 옥수수 밭을 지나서 채가동 뒷산을 타고 간다. 능선의 오른쪽(북쪽)은 안변, 왼쪽(남쪽)은 회양이다. 안변 쪽은 나무가 많고 비탈이 급하지만, 회양 쪽은 고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구릉들이 꿈틀거린다. 남쪽 비탈은 대부분 밭으로 변해버려서 밭둑을 돌아가느라 자주 방향을 잃게 된다.
 이은경씨는 원칙론자다. 아무리 낮은 봉우리도 우리를 불러모아서 다음 봉우리를 확인하고 진행을 한다. 정맥이나 대간 답사에서 이 방법보다 더 확실한 비결은 없다. 느리게 가는 것이 오히려 빠른 것이다. 덕분에 밭 많은 채가동 뒷산도 크게 헤매지 않고 통과했다. 천내리와 채가동을 연결하는 고개는 해발 800m인데, 대동여지도에 평개령(平介嶺)으로 나와 있는 고개일 가능성이 높다. 이 고개는 마루턱이 널찍한 평지를 이루고 있는 점도 그렇고, 또 하나의 고갯길 즉, 뒷골산 서쪽 비탈을 질러 유화동으로 내려가는 고개가 이 고개와 불과 1km 거리를 두고 상형문자인 한자의 '介'와 같은 모양을 이룬 점도 그렇다. 어쩌면 뒷골산 자체가 평개령이고, 뒷 골산 좌우에 있는 길의 모습을 '介'자를 빌어 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지와 평지 사이에 끼어있는 고개' 평개령.은 이 부근인 것이 확실하다.  
 뒷골산 정상에 서니, 오전 10시 15분. 도납령 출발 2시간 만이다. 삼각점을 확인하고 떡갈나무 그늘에 둘러앉았다. 이러다간 정말 철령까지 하루에 가고 말겠다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사과와 건빵을 나눠먹는다. 모처럼 쉬면서 둘러보는 산하. 너무나 낯익어서 사과와 건빵마저 목이 메이는 산하여. 우리 앞에는 강원도 깊숙한 내륙의 산 빛. 때묻지 않은 자연의 공기가 따라와 있다. 우리를 에워싸고 고무시킨다.
 천내리와 유화동을 잇는 소로까지만 내가 선두를 서고, 두 사람을 추켜서 다시 앞장을 세웠다. 고도는 높지 않지만 살아서 꿈틀거리는 능선을 지나간다. 해는 중천에 올라 뜨거운 빛살을 내려보낸다. 사흘 후면 백로. 하늘은 가을빛을 담고 있지만, 한낮의 기온은 장거리를 걷기에는 아직 뜨겁다.
 뒤골 마루턱에 올라서니 산비탈이 온통 옥수수밭이다. 다락밭 비탈에 줄맞춰 서있는 옥수수나무들. 시든 수염을 바람에 맡기고 잎사귀를 흔든다. 더한 것은 830m봉 부근. 능선 마루까지 온통 밭이어서 밭 가운데로 질러간다. 남자 여자, 노인 젊은이,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서 옥수수를 따고 있다. 우리는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준다. 바람이 바람을 마주 지나가듯이 우리는 너희를 지나갈 수는 없다.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우리 민족에겐 집 떠난 사람을 후하게 대접하는 인심이 있었다. 내 또래의 아낙네가 가다가 먹으라고 옥수수를 한아름 안겨준다. 우리는 너무 많다고 코펠에 한번 삶을 만큼만 얻어서 배낭에 넣었다. 배낭은 조금 더 무거워 졌지만 마음은 모처럼 드높은 구름을 만지고 있다.
 자작동 뒷산에서는 점심을 먹었고, 비탈을 내려가 소로를 하나 더 건넜다. 이 고개가 법소령인지 지금의 박달령이 법소령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안변의 천내리1구와 회양의 자작동을 연결하는 고개다. 안변과 회양이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오고가던 고갯길들을 가로 지를 때마다 우리 선조들의 고달펐던 행보를 보는 것 같아 애잔하고 답답하다. 산과 산을 넘지 않으면 먼 이웃을 만날 수 없는 삶을 살았더란 말인가.  
 박달령 바로 옆에는 769m되는 삼각점이 있어서 우리가 잘못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다. 박달령은 안변쪽 판기리와 회양쪽 판기리를 연결하는데, 대동여지도의 판기령이 이 고개였는지, 장수봉 안부(7851m)였는지, 983.2m봉 안부(891m)였는지는 아리송하다. 아무튼 이 둘 중 하나가 판기령이거나 셋 다 판기령이었을 거다.  
 박달령 도착하니, 오후 4시다. 시간도 남았고 내일 날씨를 알 수 없으니 좀 더 걸어두자고 장수봉까지 올라왔다. 느릿느릿 올라왔다. 장수봉 직전 안부(785m)에서 조금 내려가니 물이 있었다. 모처럼 물을 만나 땀도 씻고 밥도 끓이고 옥수수도 삶았다. 해가 서산을 넘어간 뒤에도 그 남은 빛이 한 시간 정도는 가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히 먹고 쉬고 다시 출발한 것이다. 장수봉은 안변과 회양의 망대와 같은 곳이다. 온전하지는 않아도 산성이 남아있다. 눈 아래는 안변도호부의 옛 땅이 있다. 등뒤에는 회양도독부의 옛 땅이 있다. 높고도 외진 산성에서 수자리 서던 병사들처럼 우리는 서 있다. 어제 보던 달이 다시 머리 위에 뜨고, 내일 걸어야 할 길이 휴식을 권고하지만 8시간 이상을 걸어온 피로도 잊고, 200년이나 300년전 이 산성에서 수자리 살던 병사들을 생각하니, 너 하나 나 하나 별을 세며, 달빛에 취할 기분이 아니다.  
우리는 장수봉 정상을 비워두고 내려가기로 했다. 내일 갈 길을 한 걸음이라도 더 줄여놓자고 연대봉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10분쯤 내려와서 텐트를 치고 다리를 뻗고 누웠다.  
7일 아침, 오늘은 좀 더 일찍 출발한다. 반시간쯤 가다보면 해가 뜨겠지. 여명 속의 연대봉은 검은 지붕처럼 보인다. 연대봉에서 내륙쪽 장수봉(1052.3m)으로 뻗어가는 산줄기가 우리가 서있는 대간보다 높기 때문이다. 연대봉은 빤히 건너다 보이는데 백두대간은 주전자 주둥이 같은 983.2m봉을 돌아 내려가야 한다. 983.2m봉 동남릉으로 올랐다가 남릉을 타고 내려와야 하는 것인데, 두 능선 사이의 거리가 200m도 안 된다. 헛 짚고 다른 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983.2m봉에서 속사령 쪽으로 가지를 치는 능선이 고산군과 안변군의 경계인데, 눈딱 감고 건너뛰기로 한다. 891m고갯마루에서 신양동으로 길을 따라 내려간다. 신양동 합수목에서 장보령으로 올라서는 소로를 타려는 것이다. 걸음도 아끼고 시간도 벌고 식수도 보충했다. 합수목 남쪽 계류가 깨끗해서, 세수하고 물먹고 물병들을 채우고, 물 본 김에 아침까지 먹었다. 장보령에 올라서니 오전 8시. 그 사이 해는 떠서 세상이 밝아졌다.
 장보령은 고산군 상일온리와 회양을 잇는 고개로, 조선총독부가 만든 지도에는 고치령(姑峙嶺)으로 나와 있다. 장보령에서 연대봉까지는 곧게 뻗은 능선을 따라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왔다. 안변 지역에는 연대봉이 여러 개 있는데, 한자는 달라도 모두 연대(煙臺) 즉 봉수대(峰燧臺)가 있던 '煙臺峰'들이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임금이 게시는 서울까지 변고를 알리던 수단이었다. 안변은 해변으로 침입하는 왜구와 북쪽에서 내려오는 여진족들에 시달리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반면 회양은 백두대간에 걸린 고갯마루만 굳게 사수하면 되는 천연요새다. 고려말의 학자 이곡은 회양을 이렇게 노래했다. '북쪽에 재가 겹친 관문은 쇠자물쇠 든든하고, 남쪽 강물 한 줄기는 푸른 비단이 출렁인다.'  
 연대봉 줄기를 타며 회양과 안변의 내실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철령 봉수대 터에서는  이끼 앉은 성곽 틈으로 스미는 늦여름 햇살을 본다. 칼과 창과 화살로 전쟁을 하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먼 곳까지 흘러와 있는가.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얼마를 더 걸어가야, 이 능선길 현실 속에서 걸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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