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이 온다. 허리를 지나 가슴 부근에 자리잡은 이 아픔은, 새벽의 기적소리가 깨우고 간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기대 살아온 땅이, 자신의 지병을 내 몸을 빌어 알리고 싶은가. 지도 위의 백두대간을 걷고 또 걸으며, 내 몸도 내가 사는 땅의 아픔을 닮아간다.
잠결에 들은 기적소리! 멀고 아련한 기적소리에도 깨어날 만큼 '길 위의 잠'은 얕았다. 길 위의 잠을 흔들어놓고 떠난 기차가 아무리 달려도 한정된 궤도를 벗어날 수 없듯이, 나 또한 백두산 정상에 설 때까지 백두대간의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새벽, 멀고 아련한 기적소리에도 잠이 깨어 한쪽 손으로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는 것은, 내가 태어나고 기대 살아온 땅의 가슴앓이를 쓸어내려 보려는 안타까움에 다름 아니다.
이럴 땐 일어나서 공기를 바꾸어야지. 텐트 밖으로 나서서 심호흡을 해본다. 백두대간 궤도 위의 심호흡이다. 레일과 레일 사이가 더 좁아져서도 더 넓어져서도 안 되는 평행선. 침목과 침목 위에 강철 선로를 잇대어 놓은 철길 위에서의 심호흡이 아니라, 흙과 바위와 나무와 잔돌과 풀포기들에 둘러싸인 능선 길. 백두대간 대자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새벽공기 속의 심호흡이다. 숨 한 번 들이쉬고 내 쉴 때마다 차고 신선한 공기와, 몸 안에 갇혔던 어둠이 서로 자리를 바꾼다. 환상과 실존이 서로 네가 나라고 으르렁거리던 아픔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내 눈길은 씻은 듯 영롱한 별빛을 더듬어 하늘 위로 오른다. 보라! 우리가 잠든 사이에 지상의 보석들은 모두 하늘로 올라가 반짝이고 있었다.
"언니! 저 별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까?" 수많은 보석 중 가장 가깝고 주홍빛을 띤 별 하나를 오래 올려다보고 있는데, 따스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소리 없이 다가와 팔짱을 끼며 묻는다. "그럼! 저 별에도 멀고 아련한 기적소리에도 잠을 깨어 텐트 밖으로 나온 여자 둘이 있을 걸!" "그 여자 둘이 고개를 젖혀 우리를 올려다보고?" "한없이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최성순! 어서 밥지어 먹고 빨리 떠나자 고도 할 껄!" 새벽 별빛에 이끌려 들어간 동화 속에서, 밥짓는 이야기로 되돌아왔을 때. 이상년씨와 김종선 선생도 잠을 털고 나왔다.
마상산 정상에서 동북쪽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삼방협곡의 명물인 삼방폭포가 있다. 풍류산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고음폭포와 함께 삼방협곡의 성가를 드높이는 경관들이다. 그러니까 나와 백두대간은, 풍류산, 아니 철령 부근을 통과할 때부터 삼방협곡의 둘레를 빙빙 돌고 있는 셈이다. 그 사이 여름은 가을이 되었고, 무성하던 잎새들은 단풍이 들어 낙엽이 되고 있다. 맨살에 닿는 바람이 차고, 산이 쓸쓸해지는 계절에,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나고 같이 걸어줄 동행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삼방협곡 중에서도 서쪽 분수령에 솟은 마상산과 동쪽 분수령에 솟은 청하산 사이의 구간이 가장 좁고 험준하다. 우리가 새로운 아침을 맞고있는 마상산 정상에서 경원선 철로가 지나가는 삼방협곡 바닥까지는 직선거리로 4km도 안되지만, 첩첩한 산자락들이 가리고 있어서 협곡을 스쳐 지나는 철길도 도로도 남대천 물줄기의 흐름도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름이 가을되고, 푸르던 잎이 단풍 들어 낙엽이 될 때까지 삼방협곡 둘레를 돌고 있는 내 귀에는 산모퉁이를 돌아오고 돌아나가는 기적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 철도가 처음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173년 전인 1825년. 영국의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놓았다는 화물철도다. 우리 나라 최초의 철도는 서울 영등포와 인천 사이에 1899년에 개통된 복선철도 경인선으로 총연장 31km. 고종33년이던 1896년에 미국인 모스(Morse,J.R.)에게 부설권을 주었으나,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의해 완공이 되고 경영권 또한 그들의 것이 되었다. 1905년 1월 1일에는 서울∼대전∼대구∼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이 개통되었는데, 총장 444.5km에 이르는 경부선 역시 일본자본회사인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작품이었다. 서울∼개성∼사리원∼평양∼신의주간을 연결하던 경의선은 총장 499km로, 개통시기는 경부선과 같은 해인 1905년(대한제국 광무9년)이었고, 이 역시 일본 자본에 의해 건설된 군사용이었다. 부산∼서울을 잇는 경부선과 연결되어, 우리 나라 관서지방을 관통하던 종관 철도 경의선은, 원산∼종성을 잇던 함경선과 함께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 침략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삼방협곡을 통과하는 경원선 역시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군사용 철도였다. 서울∼철원∼안변∼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개통되기까지는 사연도 많았다. 대한제국 정부는 외국자본의 철도부설을 막기 위하여, 1899년 6월 17일에 박기종을 비롯한 국내철도회사에 경원선 부설권을 허가해 주었으나, 원산가도를 따라 의정부∼양주 비우점에 이르는 약40km의 선로측량을 했을 뿐 자본이 모자라 손을 들어버렸다. 일본은 "경원선 철도 부설을 위해 기채(起債)할 경우 일본과 먼저 협의한다"는 의무조항을 악용하여 출자권리를 내세우고, 대한제국 정부의 제지 없이 철도부설노선답사를 마칠 수 있었고, 1910년 10월에 서울의 용산 쪽에서 기공식을, 그 이듬해 10월에는 원산 쪽에서 기공식을 가진 후 공사를 강행했다.
서울 용산에서 함경남도 원산(지금은 강원도에 속함)에 이르는 경원선의 총장 222.7km중 가장 늦게 개통된 구간은 삼방협곡 험준한 지형을 통과해야하는 26.1km의 고산∼세포 구간이었다. 좁고 길고 험준한 삼방협곡 물길을 따라가며 철로를 부설하는 것도 난공사였지만, '경술국치'로 일컬어지는 한일합방 직후여서 우리 민간인과 의병들의 습격이 잦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로 구성된 측량대가 헌병들의 비호 아래서도 우리 옷인 한복으로 위장을 하고서야 간신히 측량을 마쳤다 하니, 일본 군국주의의 군사철도부설을 반대하는 우리 선조들의 울분과 저항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1914년 8월14일 삼방협곡 고산∼세포 구간 공사의 완공으로, 경원선 전구간이 완전 개통되자,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함경남도 원산에서 함경북도 종성군 상삼봉 두만강변에 이르는 함경선까지 부설하기에 이르렀으니, 오호 통재! 일본 군국주의의 자본은 우리 국토를 종횡무진 누비는 철도 부설권을 쟁취한 것을 기화로 우리민족의 역사와 주권까지 손쉽게 쟁취하고 유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과, 36년이라는 기나긴 신고 끝에 조국은 해방을 보았으나, 국토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기적이 운다. 절벽 같은 산비탈 기어오르다 목이 쉬는 기적소리. 내 귓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이명을 만드는 기적소리. 내 발아래 낙엽들을 눈시울 빛으로 물들이는 기적소리.
기적소리에 잠이 깨고 기적소리에 해가 떴다. 또 한번 기적이 울 때 우리는 마상산을 출발했다. 1,163.4m봉을 오르고 있을 때는 새로운 기적소리를 들었다.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마음이 설레거나 가파른 오름 길을 만나 숨을 고르며 쉴 때 듣게 되는 기적소리는 내겐 그냥 기적소리가 아니다.
내가 기차를 처음 본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 부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는데, 그때만 해도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때여서, 요란한 기적소리와 굴뚝에서 뿜어내던 연기, 거대한 상자곽 같은 것들이 머리와 꼬리를 이어 붙이고 덜커덩거리며 빠져나가는 풍경 앞에서, 내 작은 몸은 경이와 절망으로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길고 거대한 물체가 굉음을 울리며 빠져나간 뒷자리에서, 유난히 반짝이던 선로 두 가닥! 내 몸은 두 발이 땅에 붙어 후들후들 떨고 있었지만, 내 눈길은 반짝이는 선로를 따라 미지의 세계로 가고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처음 구경한 기차는,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절망과, 언젠가는 나도 저 기차가 닿는 곳까지 가보리라는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기적이 운다. 옥종봉 오르며 듣는 기적소리에는 원산과 안변을 거쳐온 바다 냄새가 섞여있다. 원산∼안변∼철원∼서울 사이를 오가던 경원선은 원래 군사용 철도로 부설되었으나, 안변의 석왕사와 삼방협곡 일대의 명소들, 원산의 송도원 해수욕장, 금강산 등지의 탐방 길을 한층 쉽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나라 자연 경관을 최상의 관광상품으로 인식한 일본인들은 금강산으로 가는 새로운 철로들을 깔기 시작했으니, 그 중 하나가 경원선 철원역에서 분기하여 회양의 내금강역을 잇던 '금강산전철'이다. 1931년 '금강산전철' 개통 이전에 금강산을 찾은 사람들은 경원선을 타고 고산역까지 온 다음, 자동차로 바꿔 타고 철령을 넘어 구절양장같은 회양의 산간도로를 따라 말휘령을 넘어 내금강으로 들어서야 했던 것이다. 경원선 개통 이전의 금강산 구경은 그야말로 문명이전의 길이었다.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타거나, 짚신에 괴나리봇짐차림으로 걷고 또 걸어서, 철원∼금화∼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으로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원선 철도가 생기기 전의 금강산 가는 길은, 보통 사람들이 꿈도 못 꿀만큼 멀고도 아득한 먼 여로였던 것이다.
경원선을 분기점 삼아, 금강산으로 연결되던 또 하나의 철로는 안변∼양양을 잇던 총장 192.6km의 동해북부선이다. 금강산 전철보다 조금 이른 1929년부터 1937년에 걸쳐 차례로 개통된 동해북부선은 금강산 관광의 눈길을 내금강에서 외금강 쪽으로 돌리게 했다. 안변∼흡곡∼통천∼장전∼고성을 지나 설악산이 있는 양양까지 동해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연결되던 동해북부선의 부설은, 금강산과 설악산을 하나의 관광권으로 묶어보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일본의 패망으로 큰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저변에는 남보다 한 걸음 앞서서 투자처를 발견하는 혜안들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경원선을 타고 안변역에 도착하면, 동해북부선을 갈아타고 흡곡∼장전∼고성으로 내려와 금강산을 구경하고, 외금강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설악산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 된 지금은 경원선도, 경의선도, 경원선 철원역에서 내금강역을 잇던 금강산전철도, 백두대간이나 한북정맥처럼 허리가 잘리고, 원산에서 강릉까지 동해안의 절경을 끼고 오르내릴 수 있었던 동해북부선은 선로마저 철거되었다.
기적이 운다. 연대봉 정상에서 점심을 먹으며 듣는 기적소리에는 불빛과 연기로 변방의 다급함을 알리던 병사들의 땀 냄새가 베어있다. 동쪽을 바라보면 고산에서 철령으로 오르는 산간도로가 꿈틀거린다. 풍류산이 가리고 있어서 철령 마루턱은 보이지 않지만, 장수봉에서 청하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모습은 만리장성보다 장엄하다. 저 장엄한 산줄기 아래 아늑하고 기름진 땅이 있으니, 곧 안변 땅이다. 지금은 남쪽 지역을 따로 떼어 고산군이라 부르고 있지만, 동·서·남에서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백두대간 안자락에 자리잡은 안변 땅은, 기름지고도 아늑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흔적들(용성리고분 등)이 남아있다.
기적이 운다. 분수령에서부터 우리와 나란히 북류를 계속하고 있는 남대천 줄기는 풍류산 발치를 돌아 든 뒤에도 평야로 바로 흘러들지 않고 백두대간 그늘을 굽이굽이 돌아내리는 게 보인다. 연대봉 동북쪽에서 반짝이고있는 호수는 안변저수지인데, 남대천 본류는 안변저수지로도 흘러들지 않고 백두대간 그늘을 따라 동해 쪽으로 꿈틀거리며 간다. 안변저수지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남대천의 지류인 내평강의 일부로, 조금 전 우리가 지나온 옥종봉에서 저두봉에 이르는 백두대간 동북쪽 물길들이다.
우리가 점심을 먹고 있는 연대봉에서부터는, 남대천 줄기를 끼고 북진을 계속하던 백두대간도 서쪽으로 꺾어 돌게 되므로, 나는 내가 지나온 산줄기들이 더 멀어지기 전에 눈과 마음에 좀 더 자세히 담아두려고 장수봉∼연대봉∼풍류산∼청하산으로 이어지는 건너편 산줄기에만 눈을 맞추고 있었다.
'성(城·안변읍성을 뜻함)을 한바퀴 도니 높다란 누각이 있어 / 술 구하고 시를 지어 강이 몇인가 묻노라 / 고목은 다정하여 황조(黃鳥·꾀꼬리) 깃들이고 / 대강(大江·남강을 뜻함)은 시름없이 흘러 백구가 날도다 / 영웅이 사라지니 공중의 기운 흩어지고 / 나그네는 누각에 올라 세월을 근심하도다 / 관동을 아직 못다 구경한 아쉬움 있어 / 기러기 좇아좇아 장주로 가야겠네 //' ―김삿갓의 시, <안변 표연정>
설운령에 내려서니 오후 3시다. 2∼3시간만 더 걸으면 추애산 정상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이상년씨와 김종선선생은 샘물을 찾아 남쪽 비탈로 내려가고 최성순씨와 나는 모처럼 다리를 뻗고 앉아 건포도를 나눠먹는다. 설운령 남쪽에는 임진강 지류들이 실핏줄처럼 얽혀있다. 임진강 물줄기를 품고 있는 골짜기들로 인하여 이른 아침에는 물안개가 자욱했으나, 그 물안개들 모두 구름이 되어 하늘로 오른 뒤에는, 한 생(生)의 줄기 끝에서 붉게 앓는 잎새들로 술렁거리는 산자락들만 눈 아래 남았다. 바람이 불 때 마다 그 잎새들 중 몇몇이 떨어져내려 어깨와 무릎에 앉는다. 이 작고 얇고 가벼운 잎새들에 의지하여 이 산의 활엽수들은 한 여름을 살았다. 이 잎새들이 걸러주는 햇빛과 공기를 마시며 줄기가 좀 더 굵어졌으리. 문전에 도착한 겨울 앞에서, 자신이 매달려 있던 나무들이 좀더 홀가분한 몸으로 겨울을 건너게 해주려고 이 잎새들은 스스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리. 무릎에 얹히는 잎사귀 하나에서도, 내 눈에는 긴 겨울 앞에 두고 서있는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설운령 서쪽의 된 비탈을 오르느라 내 숨은 턱에 닿았다. 그러나 그 짧은 고통의 끝에서 마시는 능선의 바람은 꿀처럼 달다. 그 바람 속에 바다 냄새가 섞여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닷가에서 자랐다. 안변 앞바다를 거쳐온 해풍에서 나는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고향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내게 고향의 냄새를 전해주고 백두대간을 넘어간 바람 한줄기. 돌아보며 돌아보며 추애산에 올랐다. 오늘의 태양은 불타는 노을 대신, 찬란한 별빛 대신, 쌀쌀한 바람과 회색빛 구름을 남기고 갔다.
바람에 텐트가 흔들린다. 추애산은 '조선범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산이다. 조선범은 표범의 일종이라는데, 털빛과 무늬가 곱고 성정이 용맹하면서도 조심스럽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멸종되어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까지 북상했다는데, 지금 우리들의 텐트를 흔들고 있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추애산을 지키는 조선범일지도 모른다. 눈 속에 남은 조선범의 발자국을 따라 첩첩산중을 헤매는 동물애호가들에 비하면 백두대간을 따라 걷는 우리들의 고생은 한결 가벼운 것이리.
희역령에서 응산령 사이에는 암봉이 많아서 경치는 좋아도 산행 속도는 한없이 지체된다. 그러나 끌어주고 당겨주고 우회하기도 하면서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저두봉 정상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1,305m봉 기슭에 다시 텐트를 쳤다. 대지엔 다시 어둠이 내리고, 하늘엔 별빛이 드물다. 바다쪽에서 불어온 바람과 내륙쪽 바람이 우리를 둘러싸고 회오리를 만든다. 가지고 온 옷들을 모두 껴입고 덜덜덜 떨면서 저녁을 먹었다. 뱃속이 뜨뜻해지니 잠이 올 차례. 추애산 조선범이야 따라와서 텐트를 흔들거나 말거나 모두 잠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산 위에는 저녁이 빨리 오지만 아침도 빨리 온다. 또 다시 기적이 운다. 철로가 멀어 기적소리가 들릴 리 없는데, 내 귀는 또다시 기적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그러나, 오늘 새벽 내가 들은 기적소리는 우리 텐트 옆 소나무 가지가 바람을 흔들며 내는 소리였다. 아니다. 고산역에서 석왕사 역으로 가는 길에 취덕산 골짜기를 타고 올라온 바람이 낸 소린지도 모른다. 그 바람의 갈피에 진짜 기적소리가 섞여있었는지도 모른다. 삼방협곡을 돌아 나오면서 내 귓속에는 자명종처럼 아침을 알려주는 기적소리가 박혀있다. 밤사이 비가 내려 공기는 축축하고 또 그만큼 춥다. 어둠도 쉽사리 걷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젖은 짐을 나누어지고 철로 위의 기차처럼 아침을 향해 걸어간다.
저두봉 정상까지 가서 아침을 끓여먹자 했다. 그러나, 산세가 험하고 굴곡이 심해서 바람 잔잔한 안부에 자리를 잡았다. 밥 익기를 기다리며 둘러앉아 보니, 학미현을 떠날 때는 깔끔하던 옷차림들이 하나같이 꼬질꼬질하다. 거울을 바라보듯 서로를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는 것으로 위로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일주일에 가까운 강행군에도 눈빛들은 반짝인다. 밤마다 별을 보며 걸어왔기에, 우리 모두 두 눈 속에 별을 지니게 되었구나.
저두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치는 지능선이 행정구역 개편 후의 안변과 고산의 경계선이다. 굳이 능선을 헤치고 가지 않아도 저두봉 정상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북쪽으로 300m 정도만 내려가면, 안변과 고산을 연결하는 고갯마루(1,032m)가 나온다. 그 고개에서 다시 동쪽으로 1km쯤 올라서면 취덕산(1,274m) 정상이다. 취덕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가지를 치는 능선이 석왕사를 껴안고 있는 설봉산 줄기다. 설봉산은 석왕산이라고도, 검봉산이라고도 불렀으나, 지금은 설봉산으로 굳어진 모양이다. 석왕사계곡 역시 삼방협곡처럼 아름답고, 석왕사 아래는 광명약수라 부르는 석왕사약수가 있다.
회양과 통천과 안변, 3개군의 경계인 깃대봉으로부터 석왕사가 지척에 있는 저두봉까지, 도상거리 80여km를 걸어왔구나. '무너진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온 꿈'을 꾸고 이성계는 일국의 왕이 되었는데, 나는 245mm짜리 등산화에 두 발을 싣고 걸음걸음 걸어온 길이 더 뿌듯하고 기쁘다.
저두봉 정상을 내려서서 십자로 안부를 지나 광암산을 향해 가는데, 살아서 꿈틀거리는 악어 등을 밟고 가는 것 같다. 봉우리 하나씩을 넘어서고, 모퉁이 하나씩을 돌아들 때마다, 빛과 바람이 교차하고, 바람의 맛깔이 다르다. 좌법동(左法洞) 우안변(右安邊)의 경계를 따라 천령에 도착하니 하루해도 한 해의 가을도 함께 저물려고 한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과 서쪽으로 흐르는 강물 사이에서, 줄기차고도 우뚝한 백두대간을 걸으며, 우리가 가장 슬프게 느낀 것은 타는 목마름이었다.
아아, 나는 내일 새벽 또 다시 기적소리에 깨어나서, 한쪽 손으로 아픈 가슴을 쓸어 내려야 하리라.
[제9구간], 동해로 흐르는 강물과 서해로 흐르는 강물 사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