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높고 깊어질수록 마을은 멀어지나니
제13구간 : 거차령∼평산덕산∼맹령∼함지령∼운령∼백두산
이 향 지
연을 올려본 적이 있다. 마을 뒷산을 넘어온 북서풍이 바다 쪽으로 불기 시작하는 음력설 무렵이면, 오빠는 얼레에 새 연을 묶어 들고 나를 데리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나는 오빠의 연 올려주는 조수였다. 오빠의 방패연 위쪽을 두 손으로 잡고 오빠가 그만! 할 때까지 뒷걸음을 쳤다, 올려! 하고 소리칠 때 연을 올려주는 일이었다. 내 전신이 오빠의 연이 되어 함께 날아가기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구부렸던 두 팔을 높이 쳐들면서 동시에 두 발끝으로는 땅을 박차고 구부렸던 허리를 쭉 펴고 솟구치면서 연을 밀어 올려야했다. 오빠의 방패연을 수평이 되게 들고! 너무 꽉 잡지도 말고! 너무 살짝 잡아서 떨어뜨리지도 말고! 오빠가 원하는 위치에까지 올려주고 싶어도, 나는 여덟 살이나 아홉 살 무렵이었고 오빠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았을 뿐이다.
내가 아무리 잘 올려 주고 싶어도 조수와 선수를 잘못 만난 오빠의 연은 비틀거리며 곤두박질을 칠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오빠는 얼레에 연줄을 감으며 다가와선 내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멕이고,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방패연을 내 손에 다시 잡혀주고, 복잡한 주문을 한번 더 외우고, 알았나? 다짐을 받고, 이번에는 자기가 뒷걸음질쳐선 올려! 하고 명령하곤 했다. 내가 올려준 연이 바람 있는 곳까지 단숨에 오르지 못하고 머리 위에서 맴맴 거릴 땐, 내 마음이 다 아슬아슬 곤두박히는 것 같았다. 아아, 내 키가 우리 집 마당 가운데서 빨래줄을 붙잡고 있는 바지랑대처럼 길었더라면! 나는 내 작은 키가 원망스러웠다. 어쩌다 오빠의 연이 제대로 바람을 타고 하늘까지 올라가, 언덕 아래 집들의 지붕 위를 지나고, 우리 집 지붕도 훨씬 지나고, 우리 동네 골목보다 더 먼 곳까지 날아가서 조그맣게 보일 땐, 내 몸이 하늘을 날기라도 하는 것처럼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내 어머니 올 설에도 시루떡을 찌셨을까? 쌀가루를 물에 개어 시루번을 붙이고, 팥고물 두둑이 둔 찰시루떡, 한쪽 귀퉁이라도 설세라 뜸 다 들 때까지 불 옆을 지키셨을까? 내 몸이 나 어릴 적 어머니보다 늙어, 명절이 되어도 찾아가지 못한다. 고향 가는 길이 막혀 오십 년 넘게 못 가는 이들은 오죽할까. 단발머리에 꿀밤을 먹으면서도 올려주던 오빠의 연. 그런 추억 그분들께는 없을 것인가.
북서풍이 분다. 이 바람 거슬러 저 언덕에 올라서도 고향바다는 멀겠지만, 저 언덕을 올라가자. 올해로 환갑동이가 되는 내 오빠가 연을 날릴 이도 없겠지만, 내 오빠의 연 올려 주러가던 어릴 적 설날처럼, 저 언덕을 올라가자. 산이 높고 깊어질수록 마을은 멀어지겠지만, 오빠의 연 올려주려고 우리 집 뒤편 언덕을 오르던 어릴 때처럼, 저 언덕을 올라가자.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우리 아이들 할아버지가 지으신 동요라도 부르며, 내 아버지와 시아버지 영전에 세배 드리자. 이별 많고 한 많은 이 산천에는 더 큰 세배를 드리자.
새벽바람이 지나가면서 뿌려놓은 하얀 눈을 밟고 간다. 거차령 나무들은 침묵에 싸여있다. 저 나무들도 누군가가 그리웠던 게다. 평라선 기차는 터널 속으로만 지나다니고, 기다리던 눈은 골판지 두께보다 얇게 내리곤 그쳤다. 마을에서 마을로 통하는 오솔길에도 발자국 하나 없다. 우리는 길을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우리가 남긴 발자국들이 길이 되어 따라온다. 끊을 수 없는 핏줄처럼, 질기고 질긴 끈처럼, 우리는 우리 발자국을 길게 매달고, 무수한 소나무와 참나무 사이를 지나간다. 평산덕산 정상에서는 정종 한잔 따룬다. 백두산까지 무사히 가게 해주십사 산신께 넙죽 세배를 드린다.
텃새들도 비우고 떠난 겨울 능선. 살아 있는 건 바람소리뿐. 아침과 저녁, 밤은 더 춥고 적막하기 이를 데 없겠지만, 오늘 가야할 길이 얼마인지, 얼마나 헤매고 어디서 잠을 자야 할지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모든 짐은 김종선 선생과 이상년씨가 지고, 지도 들고 길 찾는 일도 저분들이 하고, 나는 그저 내 비상용품이 든 작은 배낭이나 지고, 느릿느릿 뒤따르는 거다. 철옹성 부근에 도착할 때까진 탈출로가 오히려 멀어 열흘 정도는 쉬지 않고 걸어야 하는데, 하루 정도 몽환 속을 헤맨들 탓할 분들이 아니다. 모퉁이 하나 돌아서면 삭풍이 기다렸다 귀썀을 후려치고, 응달엔 얼음이 깔려 미끄럽지만, 등뒤에 있던 태양이 눈앞으로 돌아와서 환하게 웃을 때까지, 메마른 바람이 앗아간 추억에 질퍽거렸다.
목둔지산 기슭에서는 하룻밤을 묵는다. 덜덜 떨면서 저녁을 먹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집처럼 침낭 속에 웅크렸다. 동생과 나에게는 널이 있었다. 동생과 내가 무거운 널을 끌어다 뒤뜰에 옮겨놓고 널의 폭과 길이에 맞춰서 양쪽 끝에 구덩이를 팠다. 호미로 판 흙을 맨손으로 퍼 올려 구덩이와 구덩이 사이에 작은 산을 만들었다. 널의 중심이 그 산꼭대기에 걸려 비스듬히 일어서면 작업은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라는 만큼 널 구덩이는 깊어졌고 비스듬히 일어서는 널의 경사면은 더욱 가팔라졌다. 동생과 내가 널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차지하고, 번갈아 굴러가며 상대를 공중으로 띄워 올리는 놀이. 낄낄거리다 넘어지기도 하고 너무 높이 올랐다 싶을 땐 다리가 후들거려 지레 떨어지며 코방아를 찧기도 했다. 서로를 탓하며 울고 싸우기도 했지만, 이젠 우리 집 뒤뜰도 구덩이 팔 널도 싸울 동생도 곁에 없다. 이제는 없어진 그 뒤뜰. 그 널뛰던 공간이, 이 깊고 높은 산 적막을 헤치며 찾아와 잃어버린 시간을 되살려놓는다.
시간은 우리를 자라게 하고, 우리를 갈라놓았다. 연 날리는 솜씨가 슬슬 늘어가면서 오빠는 내게 다른 일을 시켰다. 사금파리를 줏어서 몽돌로 빻아, 모시 조각에 받쳐서 고운 유리가루를 얻는 일이었다. 나는 사금파리를 빻는 일보다 주로 모시조각을 잡아주는 일을 맡았다. 유리가루가 쓸 만큼 모이면 오빠는 깡통에 아교를 끓였다. 오빠는 헝겊에 유리가루를 담아 내게 들고 있게 했는데, 아교 끓인 물을 거쳐 나온 젖은 연실이 내가 들고 있는 유리가루를 잔뜩 묻히고, 오빠의 얼레에 다시 감겨 언덕으로 올라갔다. 오빠는 연싸움에 재미를 붙였던 것이다. 오빠의 방패연과 오빠 친구의 방패연이 공중에서 서로 끊어먹기를 할 때쯤 나의 조수역할도 끝났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길 위의 우리는 따뜻함에 머물거나 주저앉을 수도 없다. 밥 끓여 속을 뎁히고 물 끓여 보온병에 담고, 목둔지산을 내려간다. 태양은 또 다시 등뒤에서 그림자를 만든다. 무수한 나무그림자 사이에 내 그림자 섞인다. 내 그림자 내가 밟고 지나가는 사이 1,203m봉을 지났다. 나를 앞서던 그림자가 내 발 밑으로 들어갔다 내 오른쪽으로 돌아 나와 길게 자랄 때까지 보리건빵과 커피 한잔을 마셨을 뿐이다.
비탈길을 내려가니 길이 나왔다. 운니리와 태을리를 연결하는 맹령이다. 맹령! 1,032m! 웬만한 산보다 고도가 높다. 그 옛날 이 일대는 맹수들의 터전이었을 거다. 밤이면 눈에 쌍불을 켠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제 구역 순찰을 돌곤 했을 거다. 내 오빠에게는 새총도 있었다. Y자로 생긴 나뭇가지를 잘라 양쪽 가지 끝에 홈을 파서 아기 기저귀를 채울 때 쓰는 고무줄을 묶고, 고무줄 중심엔 가죽조각으로 총알방석을 만들어 대고, 감나무가지에 앉아 조잘거리는 참새를 향해 돌멩이 총알을 발사! 하곤 했지만, 오발탄이 되어 유리창을 깰 때가 더 많았다. 어떤 포수들이 그 무시무시한 호랑이들을 다 잡았을까? 함지령 비탈을 오르며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호랑이가 아니라, 산이 높고 깊어질수록 마을이 멀어진다는 사실.
함지령 기슭에서 추위와 시장끼를 달래고 피곤한 몸을 눕힌다. 오빠의 새총 알이 되었던 작은 돌맹이들, 나와 동생의 공기돌이 되었던 작은 돌맹이들, 지금은 어느 도시의 모래 알갱이 되어 흩어졌을까? 누군가 일부러 깨트리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우리보다 더 길게 이 땅을 지킬 것들이었다.
또 한번의 일출을 함지령 비탈에서 본다. 날씨가 계속 좋아 우리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이 되지만, 목마른 이 산 이 나무들을 무슨 말씀으로 위로할까? 사람의 말씀이 자연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삭풍에 흔들리는 어깨 위를 길을 내며 걷고, 밤마다 그 가슴 열고 추억과 잠을 기대고, 똥오줌을 누고 떠나는 사람의 말씀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눈구름 한 조각 불러줄 수 없는 나의 빈 위로가, 이 산 이 목마른 나무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운령 마루턱에선 느린 구름처럼, 또 하나의 운령에선 더 느린 구름처럼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보고 있었다. 내 오빠는 팽이치기도 잘했다. 팔뚝만한 나무를 깎아 뾰족한 꽁무니에는 납알을 박고, 둥글고 편편한 윗면에는 크레용으로 무지개를 그렸다. 막대기를 깎아 팽이채를 만들고, 팽이채 끝에는 헝겁 조각을 길게 묶어 옆구리를 팽팽 때리면 팽팽 눈이 돌게 돌아가던 팽이. 저 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가면 그 옛날 내 오빠만큼 어린 소년이 팽이를 돌리며 놀고 있을 것 같다.
강계산 분기점에선 오래 쉬며 석양에 빛나는 바위들을 바라본다. 자연이 내린 조각품들. 원동 골짜기에서 불어 올리는 계절풍을 꼿꼿이 견뎌내려면 이 산은 저처럼 강인한 암벽이라도 세워 수문장 삼아야 했을 것이다. 저 암봉 옆구리를 파고 강계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용흥강 줄기와 평라선 철로가 마을과 마을을 이으며 돌아나가는 것 보일 것인데, 우리는 해 지기 전에 백두산 기슭에 닿아야 한다.
저녁 빛은 왜 서쪽에서 오는가? 우리의 길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지. 농담을 주고받으며 백두산 향해 돌아선다. 태양은 내 그림자를 또 다시 뒤로 눕힌다. 또 다시 어둠이 내리고 초생달이 뜬다. 저 달은 밤마다 자라, 우리가 철옹성에 도착할 때쯤 정월대보름 달집 속에 있을 것이다.
[제13구간], 산이 높고 깊어질수록 마을은 멀어지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