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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유 소백산록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


         이황(退溪 李滉·1501∼1570)



 나는 젊어서부터 영주와 풍기 사이를 왕래하던 터라 소백산에 대해서는 머리를 들면 바라보이고 발을 던지면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빠서 오직 꿈 속에서만 생각하고 정신만 달려갔을 뿐인 지가 어언 40년이 되었다. 지난 해 겨울 나는 군수가 되어 풍기로 부임해서 백운동서원의 주인이 되었다. 내가 속으로 기뻐하며 옛 소원을 이제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겨울과 봄 이래로 관청의 일로 백운동에 가기는 했어도 산문을 엿보지 못하고 돌아온 지가 세 차례였다.
 4월 신유일. 오래 내리던 비가 개니 산빛은 새로 목욕한 듯하였다. 그제서야 나는 백운서원으로 가서 여러 서생들을 만나보고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드디어 산으로 들어가니 상사 민서경이 그 아들 응기와 함께 따라왔다. 죽계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가니, 동네가 그윽하고 깊으며 숲과 골짜기가 무성하고 아늑하였다. 간간이 돌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골짜기 사이에 울렸다.
 걸어서 안간교를 지나 초암에 도착하였다. 초암은 원적봉의 동쪽, 월명봉의 서쪽에 있으니 이들 두 봉우리에서 나온 가지 봉우리가 암자 앞을 서로 감싸고 있어 산문이 되었다. 암자의 서쪽에는 높이 솟은 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에는 맑은 물이 돌아 흘러 못이 되었으며, 바위는 평평하여 사람들이 앉을 만하였다.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고 아래로 잔잔히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빼어난 경치였다. 주경유[주세붕]은 이 곳을 백운대로 이름하였으나 이미 백운동과 백운암이 있으니 이 명칭을 혼동하지 않겠는가. 白자를 靑자로 고쳐 청운대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산인 종수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묘봉암에서 이곳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나서 서경과 함께 백운대 위에서 술을 몇 잔 마셨는데 서경은 학질을 앓아 돌아가려 했다. 나도 비록
몸이 허약하고 병들었어도 반드시 산에 올라 구경하고자 하였더니 여러 중들이 서로 의논하고 나서, "견여가 없으면 오를 수 없습니다. 옛날에 주태수[주세붕]께서도 이미 견여를 타고 가신 일이 있습니다." 하여, 나는 웃으며 이를 받아들였다. 얼마 뒤 견여가 마련되었다고 알려왔는데 구조가 간략하고 쓰기에 간편하였다.
 마침내 서경과 작별하고 말을 타고 길을 떠났는데, 응기와 종수 및 여러 중들이 앞에서 인도하기도 하고 뒤에서 수행하기도 하였다. 태봉의 서쪽에 이르러 한 시내를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말에서 낼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견여를 탔으니 이는 고대로 힘을 비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부터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모두 이 방법을 썼는데 실로 산을 유람하는 좋은 방법이며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 좋은 기구였다. 시 한 편을 지어서 본 바를 기록하였다.
 이 날 철암과 명경을 지나 석륜사에서 묵었는데 철암이 가장 깨끗하였다. 맑은 샘물이 철암의 뒤쪽 바위 밑에서 나와 암자의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흘렀는데 맛이 몹시 달고 시원하였으며 그 곳에서 보니 시야가 꽤 높고 넓게 트였다. 석륜사의 북쪽에 있는 바위가 매우 기이하게 생겼는데, 마치 큰 새가 머리를 들고 일어나려는 듯하여 옛날에 봉두암이라 이름하였다.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는 사다리를 놓은 뒤에야 오를 수 있었는데 주경유가 광풍대라 이름한 것이었다. 석륜사 안에는 돌을 깎아 만든 불상이 있었는데 승려들은 그것이 매우 영험이 있다고 말했으나 믿을 말이 못 되었다.
 다음날 계해일. 걸어서 중백운암에 올랐다. 그 이름을 잊어버린 어떤 중이 이 암자를 짓고는 그 안에서 좌선을 하여 선학의 이치를 크게 통달하고 어느 날 아침 이 곳을 떠나 오대산으로 들어가서 지금 이 곳에는 중이 없다고 하였다. 창문 앞에는 옛 우물이 그대로 있고 뜰 아래에는 푸른 풀이 쓸쓸히 자랄 뿐이었다. 중백운암 이후로는 길이 더욱 가팔라져서 곧바로 올라가니 공중에 매달린 것 같았다. 힘을 다해 부여잡고 오른 뒤에야 산꼭대기에 이를 수 있었다. 마침내 견여를 타고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으로 몇 리를 가니 석름봉이 나왔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초막을 지어놓고 그 앞에 시렁을 놓아 매를 잡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하는 일이 매우 고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봉우리 동쪽 몇 리쯤 되는 지점에 자개봉이 있으며 또 그 동쪽 몇 리쯤 되는 곳에 우뚝 솟아 하늘에 닿는 봉우리가 있으니 이는 바로 국망봉이었다. 하늘이 개고 날이 맑은 때에는 용문산과 수도인 한양까지도 바라볼 수가 있지만 이 날은 가득한 아지랑이와 짙은 안개로 모든 것이 아득히 잠겨 용문산도 바라볼 수 없었으며 오직 서남쪽의 구름 사이로 월악산이 은은히 비칠 뿐이었다.
 그 동쪽을 바라보니 뜬 구름과 푸른 산이 천만겹으로 쌓여 있는데, 어렴풋이 보이고 그 진면목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은 태백산, 청량산, 문수산, 봉황산이요, 그 남쪽 구름 사이로 가렸다 보였다 하며 아득히 보이는 것은 학가산, 팔공산 등 여러 산이며, 그 북쪽으로 모습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며 한 켠에 아득히 보이는 것은 오대산, 치악산 등 여러 산이었다. 바라보이는 물은 더욱 드물어 죽계의 하류인 구대천과 한강의 상류인 도담의 굽이뿐이었다.
 종수가 말하기를,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려면 모름지기 가을에 서리가 온 뒤거나 혹은 긴 장마가 막 갠 날이라야 아름답습니다. 주태수는 장마에 막혀 닷새 동안 머물러 있다가 날이 개자마자 곧장 올라갔으므로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나는 묵묵히 그 뜻을 이해하고 생각하기를 처음에 막혀 답답했던 자는 나중에 상쾌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번에 와서 하루도 막힘이 없었으니 어찌 만리의 상쾌함을 얻을 수 있으리. 그렇기는 해도 등산의 좋은 점이 반드시 시력을 다해 멀리 바라보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하였다.
 산 위는 기온이 매우 찼으며 매서운 바람이 불어대며 멈추지 않아서 나무들은 모두 동쪽으로 기울어서 자라나고 있었고, 가지와 줄기는 많이 굽어 있었으며, 왜소하고 모지라져 있었다. 숲의 나무들은 4월 그믐이 되어서야 비로소 잎이 나니 1년에 자라는 것이 몇 푼이나 몇 치에 지나지 않으나 굳세게 비바람에 시달려 모두 힘써 싸우는 모양을 하고 있어서 깊은 숲속 큰 골짝에서 자라는 나무와는 크게 달랐다. 있는 곳에 따라 기상이 변하고, 길러주는 데 따라 몸이 변하는 것은 식물과 사람이 어찌 다르겠는가.
 석름봉와 자개봉 그리고 국망봉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9리 사이에는 철쭉꽃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 때 막 한창 피어 흐드러져서 곱고 화려하여 마치 비단병풍 속을 지나가는 듯하고 축융의 잔치에서 취한 듯하니 참으로 좋았다. 봉우리 위에서 술 3잔을 들고 시 7장을 지으니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옷을 털고 일어나 다시 철쭉 숲을 따라 내려와서 중백운암에 이르렀다. 나는 종수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제월대에 올라가지 않은 것은 다리힘이 먼저 다해 버릴까 염려해서였다. 이제 산에 올라 구경을 다했는데도 다행히 아직 힘이 남아 있으니 어찌 제월대로 가서 구경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종수로 하여금 앞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 벼랑을 따라 발을 한 쪽으로 디디며 올라가보니, 이른바 상백운암이라는 것은 오래 전에 불타 없어져서 잡초만 무성하고 이끼가 뒤덮고 있었다. 제월대가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지형이 매우 위태롭고 높아 정신이 아찔하고 혼이 놀라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결국 내려왔다. 이날 밤은 석륜사에 다시 머물렀다.
 갑자일. 마음먹고 상가타암을 찾아 올라가 지팡이를 짚고 비탈길을 올라가 환희봉에 올랐다. 환희봉의 서쪽에 있는 여러 봉우리들은 숲과 골짜기가 몹시 아름다웠는데 모두 어제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수천 보를 걸어가 석성의 옛 터를 찾아냈는데 성 아래에는 남아 있는 주춧돌과 쓰지 않는 우물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약간 서쪽으로 석봉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만하였으나 소나무와 삼나무, 철쭉들이 뒤섞여 자라나 바위를 가리고 있어서 유람하는 사람들이 온 적이 없었다. 산중에 있는 사람들은 다만 그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산대암이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시야를 가리는 것들을 깨끗이 치우게 하고 바라보니 멀리로는 가리는 것 없이, 가까이로는 남김없이 산들의 빼어난 모습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주경유를 만나지 못해서 이름은 그대로 보잘 것이 없으니 이를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하대라 이름을 고치고, 그 성을 적성이라 하였다. 이는 '적성에 노을이 일어나매 이로 이름을 부른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자하대의 북쪽은 두 봉우리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그 빛이 몹시 희었으나 부르는 명칭이 없었다. 이에 내가 감히 그 동쪽 봉우리를 백학봉이라 하고 그 서쪽 봉우리를 백련봉이라하였다. 백설봉과 더불어 모두 '白'이라 칭하면서 '백'이 많은 것을 싫어하지 않는 이유는 실상을 들어서 소백산이라는 이름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또다시 깊은 내를 건너고 높은 산을 넘어 아래를 굽어보니 구름과 물, 바위와 골짜기가 더욱 빼어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상가타암이었다. 그 동쪽에는 동가타암이 있어쓴데, 종수가 말하기를, "희선장로가 처음에 이 암자에 머물렀으며, 뒤에 보조국사가 여기에서 좌선하여 수도하며 9년 동안 밖에 나가지 않았고 스스로 목우자라고 호를 붙였습니다. 그의 시집이 있어서 제가 일찍이 구하여 얻었으나 다른 사람이 빌려갔습니다." 하고 그의 시 몇 구를 외우는데, 모두 스스로 돌아보며 일깨움이 있었으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제대로 익혀 쓰지 못하고 이단에 빠진 것을 탄식하게 하였다.
 그 서북쪽의 금강대와 화엄대는 옛 이름을 그대로 두었으니 고승의 자취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그 동쪽의 석봉이 가장 빼어나고 기이하였는데, 이름을 연좌라 하였다. 이 또한 고승들 때문에 그렇게 지은 것이었다. 상가타암에서 시냇물을 따라 내려오니 고목과 푸른 등나무가 얼크러져 있어 하늘의 해가 보이지 않았으며 왕왕 수석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중가타암의 어귀에 이르렀으나 중가타암에는 중이 없어서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몇 걸음을 걸어가니 몇 층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바위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옛날에는 이 곳에 참대들이 무성하게 자라났으나 지금은 모두 말라죽고 아직 뿌리와 줄기는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죽암 폭포라 이름하니 산사의 중들이 말하기를, "이 바위에만 대나무가 자란 것이 아니라 수풀 아래 땅에도 가득히 빽빽했고 온 산이 다 그랬는데, 지난 신축년에 갑자기 일제히 열매를 맺더니 그 해에 모두 말라 죽어버렸습니다." 하니 이상한 일이다. 그 이치 또한 알 수가 없었다.
 작은 내를 지나 금당암과 하가타암에 이르렀다. 중가타암 위로부터 동쪽으로 들어가면 보제암 등이 있으며 하가타암의 옆에 진공암이 있었으나 거처하는 중들이 모두 병들었으므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가타암을 따라 내려와서 물을 건너 곧바로 관음굴에 올라 머물렀다.
 다음날 을축일. 산에서 내려왔다. 산 아래에는 반석들이 평평하게 널려 있고 맑은 물이 그 위에 쏟아져 콸콸 흘러가고 양쪽 가로는 목련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 옆에 지팡이를 짚고 물을 굽어보며 물장난을 하니 기분이 몹시 좋았다. 산인 종수가, "시냇물은 분명 옥띠 두른 나그네를 비웃으리니, 씻어내려 해도 홍진의 자취를 씻지 못하네." 라는 시구를 외고는, "이게 누구의 시던가요?" 하여 마침내 서로 마주보고 한 번 웃고는 시를 짓고 떠났다.
 시냇가를 따라 몇 리를 가니 구름과 숲, 벼랑과 골짜기가 모두 절경이었다. 길이 나뉘는 곳에 이르러 잠깐 쉰 다음 응기와 종수 등 여러 중들은 초암동으로 향했고, 나는 박달재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작은 박달재에 이르러는 견여를 버리고 걸어갔는데, 사람과 말이 그 아래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시내를 건너 깊은 골짜기를 지나 큰 박달재를 넘으니 여기는 바로 상원봉의 한 가지가 남쪽으로 내려온 산등성이의 조금 낮은 곳이었다. 상원사와의 거리는 겨우 몇 리에 불과했으나 나는 올라갈 힘이 없어서 그만 두고, 아래로 내려와 비로전 옛 터 밑에 이르렀다. 정오 무렵 시냇가 돌 위에서 쉬고 있는데, 얼마 뒤 허간공과 아들 준이 군으로부터 찾아왔다. 맑은 물과 우거진 나무가 좋아서 한동안 앉아 이야기하고, 앉았던 돌을 비류암이라 이름하였다. 이윽고 욱금동을 따라 나와서 군에 이르렀다.
 무릇 소백산은 천 개의 바위와 만 개의 골짜기가 만들어낸 경치가 아름다운데, 사찰이 있는 곳과 인적이 통하는 곳으로는 대체로 세 골짜기가 있다. 초암과 석륜사는 산 가운데 골짜기에 있고, 성혈사와 두타사 등은 동쪽 골짜기에 있으며, 상, 중 하의 세 가타암은 서쪽 골짜기에 있다.
 산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초암과 석륜사를 거쳐 국망봉으로 올라가는데, 이는 길이 편한 것을 택한 것으로 이윽고 힘이 지치고 흥이 무르익으면 마침내 돌아온다. 비록 주경유가 기이함을 좋아했다 해도 지나온 곳은 가운데 한 골짜기 뿐이었다. 그가 쓴 유산록에 기술한 것이 꽤 자세하나 그 실제는 모두 여러 산승들에게 물어서 안 것이요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름붙인 광풍대, 제월대, 백설봉, 백운대 등이 모두 가운데 한 골짜기에 있는 것이고, 동쪽과 서쪽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내가 늙고 병든 몸으로 한 번 가서 온 산의 경치를 다 본다는 것도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동쪽 골짜기는 남겨두어 뒷날의 유람을 기다리기로 하고 서쪽 골짜기만 찾았다. 무릇 서쪽 골짜기에서 만난 절경은 백학봉, 백련봉, 자하대, 연좌봉, 죽암폭포 같은 것들인데, 번번이 사양하지 않고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 본 것은 또한 주경유가 가운데 골짜기에서 만난 경치에 이름을 붙인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처음 주경유의 유산록을 백운서원의 유사인 김중문 집에서 보았는데 석륜사에 갔더니 이 유산록을 현판에 써서 벽에 걸어두고 있었다. 내가 그의 시문이 웅장하고 뛰어남을 즐겨 이르는 곳마다 펴보고 읊었더니 마치 그 사이에서 홍안백발의 노인과 서로 마주해서 말하며 시를 읊는 것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흥이 나서 취미를 얻은 것이 실로 많았으니 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참으로 기록이 없을 수 없으며, 기록이 있으면 산을 유람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내가 깨달은 것이 또 있다. 주경유 이전의 문사로 이 곳에 와서 유람한 사람은 산인들이 말하는 바로는 오직 호음 정선생(鄭士龍 : 1491~1570)과 태수 임제광 뿐이라 하는데 지금 그들이 쓴 것을 찾아보니 임태수의 것으로는 한 글자도 찾을 수 없고, 호음의 시로는 겨우 초암사에서 읊은 한 절구가 있을 뿐이다. 그 이외의 것들 또 찾아보니 석륜사의 중이 황금계(黃俊良 : 1517~1563. 퇴계의 문인)의 시를 가지고 있었고, 명경암의 벽에 황우수의 시가 있었으며 이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영남은 바로 사대부의 기북지방[중국에 있는 말의 명산지로 사대부가 많은 지역을 가리킨다]이라 영주와 풍기 사이에는 큰 학자와 큰 선비들이 서로 뒤이어 나와 눈부시게 빛났으니 이 곳에 와서 유람한 사람들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한둘이었겠으며 전할 만한 글들이 또한 어찌 이에서 그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죽계의 여러 안씨들은 이 산 아래에 태어나 이름을 중원에까지 떨쳤는데, 반드시 이 곳을 유람하고, 이 곳에서 즐겼으며, 여기에서 시를 읊고 노래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에는 벼랑에 새겨놓은 것이 없고 선비들은 입으로 외는 것이 없이 다 사라져서 찾을 수가 없다.
 대저 우리나라 풍속은 산림의 고상함을 좋아하지 않으며 저술해서 전하기 좋아해서 즐겨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그 명성을 드높이 세운 저 여러 안씨들과 큰 산과 이름난 지역이 이 산처럼 우뚝한 것들도 끝내 문헌으로 전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은데 다른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더구나 산과 언덕이 고요하고 쓸쓸하여 천 년동안 진짜 은사가 없었으니 진짜 은사가 없다면 진정으로 감상한 사람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처럼 문서를 관장하고 있다가 잠시 빠져나와 산문에 임시로 걷는 자들이 또 어찌 이 산의 경중을 알 수 있겠는가.
 우선 본 것을 차례로 엮고 지은 것을 기록하니 뒤에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 글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내가 주경유의 글에서 느낀 것과 같지 않겠는가. 가정 기유(1549) 오월일 서간병수는 기산의 군청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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