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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응] 동국명산기 중 금강산 부분  

"물과 돌이 내는 소리가 거문고 아쟁 소리처럼 영롱하다"

동국명산기의 기관동산수(記關東山水) 중 금강산 부분

성해응 지음/유승민 옮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는 한국의 명산승수(名山勝水)를 기록한 지리지로 경도(서울)·기내(경기도)·해서(황해도)·관북(함경도)·관서(평안도)·호중(충청도)·호남(전라도)·양남(경상도) 등으로 나누어 적었다. 성해응(成海應·1760-1839, 호는 昌山)이 짓고, 서유구가 교사한 것을 융희 3년(1909년) 경성외국어학교 한국교우회에서 간행하였다(서울대 규장각 소장).
 이 책의 기관동산수(記關東山水) 중 금강산 부문은 특히 다른 기록들보다 서술이 자세해 금강산에 관심을 가진 이는 누구나 일독을 권할 만하다. 과거의 이름과 현재의 이름을 비교할 수 있고, 사라진 절터나 유적들에 대해서도 추정할 수 있어 전문을 소개한다. 현재의 이름과 같지 않거나 비교할 만한 이름은 한자와 함께 밝혔다.

본문-------
금강산은 동해 가에 있다. 이 산의 이름에는 여섯 개가 있는데, 개골, 풍악, 열반, 지달, 금강, 중향이 그것이다, 개골이라고 하는 이름은 이 산의 돌이 흰 것을 들어 말한 것이며, 풍악이라는 이름은 이 산에서 나는 산물을 들어 말한 것이다. 열반, 지달, 금강, 중향은 모두 선가(禪家)의 용어들이다.
단발령은 내산(內山·내금강)의 문이다. 금강산의 전면을 이곳에서 볼 수 있는데, 깨끗하고 우뚝하면서 마치 옥설(玉雪)처럼 아름답다. 오래 전부터 전하기를, '신라왕자가 이곳에 올라 단발령을 바라보고 머리칼을 자르고 승려가 되었기 때문에 단발령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도 한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 생육신의 한 사람. 호는 秋江)은 "고려 태조가 여기에 올라 비로봉을 바라보며 절하고, 머리칼을 잘라 나뭇가지에 걸어 불가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보였기 때문에 이름을 단발령이라고 했다"고 그의 금강산기행에서 말하였다.
비로봉은 내외산의 대종이다. 높고 험하여 오르기 어렵지만 봉우리 꼭대기에서는 탁 트여 걸리는 것이 없다. 대개 그 형태는 둥글게 솟은 모양이고 그 색깔은 희기 때문에 바라보자면 마치 눈이 내리는 것 같다. 명나라 귀인 정동(鄭同)이 일찍이 사신으로 왔다가 풍악산에 들어갔었는데, 그가 돌아갈 때 연(燕)에 있는 홍광사(洪光寺)에 천 개의 불상을 새겨 비로봉을 본떴다.
장안사는 이 산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게 되는 절이다. 절 아래 계곡이 바로 만폭동의 하류다. 울퉁불퉁한 돌이 이빨을 드러내고, 치달리는 개울이 물보라를 일으킨다. 이 절은 넓고 아름다운데 대웅보전이라는 큰 글씨 넉 자는 이백헌(李白軒·조선조 문신 李景奭. 1595-1671)의 말에 의하면 의창군(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의 4남 珖)의 글씨라고 하며, 정수몽(鄭守夢·선조대의 문신 鄭曄·1563-1625)의 말로는 한석봉의 필치라고도 한다. 절 앞에는 큰 무지개다리가 개울을 걸쳐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산영루(山影樓)의 뒤에 이른다. 큰 물이 져서 그 다리와 산영루를 무너뜨렸다. 절 가운데 은입사철향로 세 개가 있는데 지정(至正·원 순제 때의 연호. 서기 1341-1367) 원년 순제(원의 마지막 황제)가 내어 시주한 것이다 라고 적혀 있다. 이 절의 왼쪽으로 수백 보를 가면 극락암이 있다.
배참(拜站)은 장안사의 진산이다. 산에 들어선 사람이 여기에 오르면 반드시 고개를 숙이게 되므로 배참이라고 한다. 원나라 지정 정해년(1407년)에 큰 종을 주조하여 전각을 짓고 거기에 매달았다.
백천동은 큰 무지개 다리를 거쳐서 계곡을 끼고 들어간다. 좌우에 있는 봉우리와 석벽들은 가파르게 서 있는데 높이가 백여 길이고, 순전히 돌로 되어 있다. 삼사 리를 가면 연못 하나를 만나고, 연못가에 너럭바위가 있는데 수천 명이 앉을 만하다. 옥경대라고 이름이 붙어있고, 연못 오른쪽에 큰 돌이 있는데 '玉鏡潭(옥경담)'이라고 새겨져 있다. 동쪽 봉우리가 더욱 아름다운데 명경대라고 이름 붙여졌다.
또 석성이 있는데 신라 왕자가 나라가 망한 뒤, 은거했던 곳이다. 중들이 잘못 일컬어 '지옥'이라고 하길래 내가(원문에는 나그네=遊人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 작자 본인을 가리키는 말인 듯) 고쳐서 '극락'이라고 했다. 금사굴을 거치면, 궁궐터가 있다. 또 6,7리를 가면 온탑동(溫塔洞)에 닿는다. 또 앞쪽에는 영원동이 있는데 물이 갈수록 맑고 산이 갈수록 깨끗해진다. 계곡 북쪽에는 옥초대(沃焦臺)와 배석대(拜石臺)가 있다.
다시 아래로 구불구불 오륙 리를 내려오다 꺾어져서 북쪽으로 가면 현불암(顯佛菴)이 있다. 이곳 왼쪽에는 칠성대가 있는데, 이 대에서 굽어보자면 높기가 까마득하다. 다시 암자 뒤로 몇 고개를 넘어 빙 둘러 북으로 가면 가파른 길이 나오는데 송라암에 이르게 된다. 맑고 시리도록 찬 우물이 있는데 이를 일컬어 감로수라고 한다.
표훈사는 만폭동 입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승려 능인과 신림, 표훈 등이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절 오른쪽 바위에 원나라 사람 양재(梁載)가 지은 '상주분량기(常住分糧記)'를 새겨 두었고, 고려 시중이었던 권한공(權漢功·?-1349. 고려조의 권신. 호는 一齋)이 쓴 비석이 있다. 또 원나라 영종과 그의 태후가 시주한 돈과 베를 기록한 글도 있다. 절의 제도(制度)가 장엄하면서 아름다운 것은 장안사와 대등하다.
만폭동은 표훈사를 거친다. 왼쪽으로 열 보 정도 가면 돌구멍이 뚫어 놓은 듯 있는데 이름은 금강문이다. 또한 큰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 '萬瀑洞(만폭동)'이라고 크게 새겨져 있다. 1리 정도 가면 넓은 바위가 나오는데 봉래 양사언이 쓴 '蓬萊楓嶽 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는 여덟 자의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위에는 마치 그릇 같은 바위가 있는데 '洗頭盆(세두분)'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 곁에는 학소대가 있는데, 예전에는 학이 살면서 새끼를 길렀다는데 지금은 없다.
또 앞으로 가면 청룡담, 백룡담이 있다. 또 위로 1리 정도 가면 흑룡담도 있다. 또 그 위에 길쭉하면서 얕은 연못은 비파담이며, 또 그 위에 깊고 넓으며 폭포를 이룬 것은 벽하담이다. 벽하담 앞에 흰 돌은 평평하고 무늬가 있어서, 마치 비단과 같아 채운석이라고 한다. 또 그 큰 돌이 마치 지붕처럼 덮고 있으며 폭포가 그 위로 떨어지는데 이를 응벽담, 분설담이라고 한다. 또 그 위에 백 보 정도 가면 진주담과 구담, 선암, 화룡담이 있고, 그 북쪽은 사자석이다. 또 그 북쪽은 대소(大小) 향로이며, 앞은 청학대, 남쪽의 것은 오현봉(五賢峯)이다.
뒤로 중향성을 바라보게 되는데, 모두 서리나 눈처럼 흰 돌이다. 돌이 희기로는 구담 만한 것이 없고, 깊고 넓기로는 화룡담 만한 것이 없으며 폭포로는 응벽담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주담은 그러한 승경을 두루 갖추었으며 명운담(鳴韻潭)은 그것의 하류다. 일명 울연(鬱淵)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신연강(新淵江)의 상류이다.
보덕굴은 응벽담 위에 있다. 돌 비탈이 매우 가파른데, 굴 가운데 한 칸 집을 얽어 두고 반은 바깥으로 내었다. 바깥으로 구리 기둥을 세워 좌우로 집을 떠받치고 있는데, 열아홉 마디이다. 여기에 쇠사슬을 매어 두었는데, 사람이 붙들고 올라가면 흔들려서, 내려다보게 되면 매우 두렵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조의 승려 보덕이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굴 가운데 작은 옥으로 만든 불상이 있는데 분설담이 그 아래로 돌아나간다.
중향성은 비로봉의 중간 가지다. 성은 모두 조각들을 담으로 둘렀다. 색이 희고 깨끗해서 사람들이 함부로 여기지 못한다. 해가 뜨면 번쩍거리는 빛이 나고 층암(層巖)의 봉우리들이 뾰죽뾰죽 중복하여 서있다. 그 아래에는 만회암(菴)이 있는데 맑고 그윽함이 매우 뛰어나다. 이곳을 거쳐 백운대로 오른다.
망고대(望高臺)는 송라암을 거쳐 동쪽 산으로 오른다. 이 위에는 측백나무가 가득하며, 고개 몇을 넘어 올려다보면 몇천 길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흰 돌이 우뚝 서 있다. 왕왕 쇠사슬을 내려 드리우는데 이것을 붙들고 올라가면 승상(僧床), 응암(鷹巖) 양봉의 사이로 나가게 된다. 10여 리를 가야 비로소 대에 이르게 된다. 상봉을 대라고 하는 것은 삼각으로 떨어져 섰지만 결국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지나온 봉우리들은 모두 언덕일 뿐일 정도로 이것만이 홀로 진성(眞性)을 보인다. 봉우리의 북쪽 후면에 비로봉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서쪽으로는 만경대·백운대·중향성이 있다.
향로봉은 하늘 가운데 쌍으로 서 있다. 뭇 봉우리가 깎은 듯 절벽을 이루며 구름 바깥에 나란히 서 있다. 마치 닦아 놓은 듯 깨끗하게 갈려 미끄럽다. 둘레가 몇 천 자는 된다.
마하연암(菴)의 마하연은 중국어로는 대승(大乘)을 말한다. 만천(萬川) 가에 있으며 산의 중앙에 있어서 가장 그윽하고 깊다. 앞에 있는 대에는 담무갈(曇無竭)의 석상이 있는데, 고려조의 중 나옹이 일찍이 여기에 살았는데, 참배하는 승려나 사람들이 함부로 발길을 닿게 하지 못했다. 석축이 대를 이루고 기이한 풀이 나 있으며 또 큰 나무가 있는데 계수나무라고 한다. 회양의 수령이었던 조(趙)가 그 나무를 베어 관의 재료로 삼았다고 한다. 동으로 반야암(般若菴)을 거쳐 조금 동북방으로 더 가면 거빈굴(巨彬窟)이 나온다. 철벽이 처마를 에워싸고, 맑은 물이 섬돌을 둘러 흐른다. 벼랑을 끼고 가면 불지암(佛知菴)에 이른다.
정양사는 표훈사의 뒤에 있으며 방광대(放光臺)의 아래에 있다. 벽에 승려의 그림이 있는데, 오도자(吳道子·당의 화가. 이름은 道玄. 道子는 자. 불화와 산수화에 매우 뛰어난 기량을 보여 畵聖이라 일컬어짐)의 그림이라고 한다. 천일대(天逸臺)는 이 절의 동남에 있는데 내산의 여러 봉우리를 전면으로 볼 수 있다. 조금 동쪽으로 가면 삼장암(三藏菴)인데 지세가 맑고 그윽하다. 북쪽에는 개심대(開心臺)가 있고 대 아래에는 천덕암(天德菴)이 있다. 헐성루는 바로 그 동쪽의 누각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천일대에서 보는 것과 같다. 정양사는 바로 금강의 정맥이요, 헐성루는 또한 정양사의 시원스러운 누각이며 또 팔각전은 매우 아름답다. 무학대(無學臺)는 불지암을 거쳐 동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서 닿는다. 대가 깎아지른 봉우리 정상에 있는데 그 대 아래 무학암(菴)이 있다. 무학암을 거쳐 동쪽으로 5-6리를 내려가면 원암(元菴)인데 그윽한 것이 내원통과 비슷하다. 앞뜰에는 푸른 바위가 마치 거북이 같고, 묘한 향기가 나는 나무가 꿈틀거리듯 서려 있다.
묘길상암은 만회암을 지나 4리를 가면 나온다. 이곳은 계곡 동쪽에 있는데, 물과 돌이 맑고 환하다. 남쪽에는 봉우리가 4개가 있고, 북쪽에 석벽이 하나 곧추 서 있는데 벽에 미륵불이 크게 새겨져 있다. 이 석벽을 미륵대라고 한다. 이곳을 지나 5리를 가면 폭포와 맑은 못이 나오는데, 못 가의 돌에 이허대(李許臺)라고 새겨져 있다. 아마 이명준(李命俊)이 강릉 부사였고, 허계(許啓)가 고성군수일 때 같이 이곳에 놀러와 그렇게 새겼던 것 같다.
수미봉(須彌峯)은 능호봉(熊虎峯·현 능허봉) 아래에 있는데, 그 형상이 고독하며 매우 날카로움을 자랑한다. 박산(博山)은 이곳으로부터 가면 닿을 수 있다. 영랑대(永郞臺)는 마치 생황이나 퉁소 소리를 듣는 것 같이 이내 기운이 절로 생겨나는데 매우 아득하다. 내산에서 이곳의 암자와 영원선암(靈源禪菴)이 가장 그윽하고 외져서 사람의 자취가 드물다. 암자에서 왼쪽으로 바라보면 청천(淸川)인데, 이곳에서 수미탑으로 갈 수 있다.
혈망봉(穴望峯)은 마하연의 남쪽에 있다. 마하연암의 앞쪽 기둥에서 바라보면 단지 입 같은 구멍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 바라보면 눈에 걸리는 것이 없다. 목련과 적목이 많은데, 적목은 겨울에도 푸른 측백이나 잣나무 일종이다.
개심대(開心臺)는 정양사 서북쪽에 있다. 이 대의 북쪽은 토산(土山)인데, 매우 높아 미륵봉과 동서로 상대하고 있으면서 서수정봉(西水精峯)이라고 부른다. 이 봉우리 뒤에는 수정암(水精菴)이 있는데 바로 비로봉 북쪽 물이 흘러드는 골짜기이다. 또 이 대의 뒤를 거치면 단발령에 이를 수 있다.
선암(船巖)은 수미대의 남쪽에 있는데, 그 아래에 석굴이 있고 승려들이 암자를 꾸미고 산다. 굴 아래에는 세 계단으로 된 수렴(水簾·폭포의 다른 이름. 물이 발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말)이 있다.
진불암(眞佛巖)은 능호봉의 아래에 있다. 동쪽에 부처가 서 있는 것 같은 돌이 있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이 곳은 세조의 원찰(세조는 단종과 계유정난의 희생자들의 원혼을 위한 사찰을 여러 곳에 두었는데 이곳이 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수미봉 오른쪽의 몇 개의 작은 돌봉우리부터 살펴보면 매우 가파르고, 교묘함이 뛰어나며, 암자 왼쪽의 산록에서 수미대의 반면을 바라보면 매우 기이하다. 그 아래에는 청량대(淸凉臺)가 있는데 매우 가파르다. 이곳을 거쳐 4, 5리 가다 계곡 둘을 건너 서쪽으로 돌아서면 능인암(能仁巖)이다. 능인암 남쪽에는 작은 대가 있으며 그 앞이 바로 내원통이다.
백탑동은 천등봉(天燈峯) 아래에 있다. 대개 석굴의 앞 돌의 형세가 층층으로 된 것이 탑을 엮은 것 같다. 백탑굴에서 구부러져 내려오면 지장봉이다. 그 아래에 영원암이 있다. 골짜기 가운데의 물이 백마봉(白馬峯)의 물과 합류하여 백천동이 된다. 증명탑(證明塔), 다보탑(多寶塔)이 다 이 골짜기에 있는데 이것들 또한 그냥 돌이지만 모양이 탑과 같다. 시냇물을 따라 3,4리 내려가면 옆에 어떤 탑이 있다. 형세가 절벽에 의지한 형상이고, 두 개의 금불상이 돌 사이에 서 있다.
백화암(白華菴)은 명운담(鳴韻潭) 가에 있다. 명운담의 왼쪽에는 푸른 벼랑이 수십 길 가파르게 서 있다. 이 연못 오른쪽 절벽에 사다리가 위태롭게 놓여있다. 또 개울을 건너 천여 걸음을 가면 백화암에 닿는다. 이 암자는 터가 넓고 탁 트여 있어서 또한 아름답다. 암자 앞에는 두 개의 큰 돌이 마주 서 있는데, 한쪽 면에 53불상이 그려져 있다.
백운대는 마하연 동쪽 5리쯤에 있다. 상백운 중백운 하백운이 있는데, 그 가운데 중백운대가 가장 기이하다. 만회암을 거쳐서 험한 곳에 이르러 쇠밧줄을 붙들고 언덕배기를 올라서면 매우 좁아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인데 발 앞뒤로가 내려다보면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절벽이다. 다시 몇 십 걸음 가야 중백운대에 이르는데, 금강산의 전면을 볼 수 있다. (여기서의 광경이) 곁에서 비껴 곁눈질해 가며 보는 정양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다시 곧바로 북쪽으로 5-6리를 가면 두솔암이 나온다. 또, 동쪽으로 2리쯤에 반야암(般若菴)이 있다.
수점(水岾)은 바로 외산이면서, 고성의 경계다. 이허대를 거쳐 계곡을 따라 이십 리를 올라가면 만나게 된다. 안문봉(雁門峯)의 가지이다. 남점(南岾)에는 상견성암(上見性菴)이 있고, 이 암자앞에 백길 높이의 석대가 있다. 동쪽으로 작은 고개 하나를 넘으면 하견성암(下見性菴)이 있다. 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유점사에 닿는다. 또, 이허대에서 4리쯤 동쪽으로 가면 대장암이 나온다. 그 골짜기에는 흰 돌이 마치 책들을 쌓아놓은 것처럼 있다. 호승(胡僧) 불공(不空)이 "이 돌 가운데 대장경이 있다"고 말했다 하는데, 그로 말미암아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골짜기 바윗돌들이 희어서 백천의 물이 맑고 훤하다.
은선대는 일명 은신대(隱身臺)라고도 한다. 내수점에서 동남쪽으로 20리쯤 간다. 또, 유점사로 가는 큰 길을 버리고 북쪽으로 꺾어져 5리쯤 험한 절벽길을 천여 보 가게 되면 그 위로 바위구멍이 있다. 동남쪽에서 시작하여 기어올라가면 정상은 조금 평탄하고 길이가 수십 보쯤 되는데 바로 은선대다.
형세가 매우 가팔라서 사람들이 떨려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한다. 동북쪽으로 가면 큰 석벽을 바라보게 되는데, 하나로 뭉친 것이 매우 장대하다. 십이폭포를 바라보면 긴 것은 수십 길도 되고 짧은 것은 열 길 정도 된다. 그 아래에는 큰 골짜기를 이루는데 그곳이 소문난 백천동이다. 그 석벽 위에는 다시 평평한데 해송이 울창하다. 바로 백전, 적멸 두 암자의 오래된 터다. 그 대의 동쪽은 또 넓게 트여서 걸리는 것이 없고, 푸른 바다가 하늘에 닿아있다.
유점사는 지세가 매우 넓다. 앞으로 큰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데, 옛부터 산영루(山映樓)가 그 위에 걸터 앉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작은 계곡이 누각 아래로 흐를 뿐인데 이곳에서 자석이 많이 나온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이 절은 바로 아홉 마리 용의 집이었으며 연못가에 늙은 느릅나무가 있었는데, 신라 때 53불이 바닷가에 떠오자, 고성 군수였던 노춘(盧椿)이 용들을 쫓아내고는 그 용추를 메워 버리고 이 절을 지어서 고성을 편안하게 했다고 한다.
우리 조선의 세조가 이 산 중에 행차했다가 중들에게 절을 조영하게 하여 마침내 거찰을 이루었다. 뒤에 화재를 입었는데, 승려 성준(聖俊)과 응상(應祥)이 고쳐 재건했는데 매우 넓고 아름다웠다. 그 법당의 편액의 '能仁寶殿(능인보전)'이라는 넉자의 큰 글씨는 명나라 급사중(給事中) 주조(周祚)가 쓴 글씨이다. 광해군의 아내 유씨(柳氏)가 백금(百金)을 이 절에 시주하면서 그것을 요구했었다고 한다.
법당 곁에는 오탁정(烏啄井)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여기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까마귀떼가 절의 동북쪽 모퉁이에 모여서 땅을 쪼아대더니 그곳에서 아주 신령한 샘이 솟아올라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절 동쪽에 법당을 지었는데, 대권안춘대상(大權安椿大像)이라고 이름 붙였다.
선담(船潭)은 유점사 서북쪽 3리에 있다. 계곡을 따라 연못과 폭포가 많은 승경이 선담까지 이어진다. 이 연못의 크기는 화룡담만 한데, 돌샘이 물통처럼 만들어져 있다. 물이 물통을 따라서 흘러 폭포가 된다. 또, 가파른 절벽을 따라 십여 보 위로 올라가면 쌍폭포를 만난다. 또 십 보쯤 서쪽으로 올라가면, 만경동(萬景洞)이라고 돌에 새겨져 있다. 여기를 통해 만경대에 이를 수 있는데, 만경대(萬景臺)는 바로 외산의 최고봉이다. 동쪽으로 푸른 바다를 굽어보고 있고 그 아래 남쪽골짜기에 상내원(上內院)이 있고. 동쪽에는 영은암(靈隱菴)이 있는데, 일명 자월암(紫月菴)이라고도 한다.
구정봉(九井峯)은 수점에서 대장암(大藏菴)을 거쳐 북쪽으로 올라간다. 봉우리 정상에 물이 언제나 가득 차 있는 우물 모양을 한 돌절구 아홉 개가 있어서 구정봉이라고 이름지었다. 웅장하면서 상쾌하고 가파르게 솟아 비로봉에 버금간다. 그 아래가 환희령이다.
불정대(佛頂臺)는 만경대의 남쪽에 있는데 절벽이 골짜기를 굽어보고 있다. 바위들이 불쑥 솟았다가 절벽 사이에 이르러 몇 보 넓어지는데, 외나무다리를 놓아 지나간다. 바위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데 아래로 굽어보면 까마득하며 긴 시내가 시끄럽게 그 바닥을 흘러간다. 동쪽으로 보면 바다 색이 맑고 밝다.
몇 리 내려가면 굴 하나를 만나는데, 풍혈(風穴)이라고 한다. 왼쪽에 학소대(鶴巢臺)가 있다. 또 아래로 1리 내려가면 오송대(五松臺)가 있다. 빙 둘러보면 푸른 석벽이 불정대(佛頂臺)보다도 낫다. 불정대에서 내려오면서 박달곶(朴撻串)이라고 통칭한다.
오송대는 박달곶을 넘어 고개를 거의 다 내려오면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올려다보면 돌 봉우리가 가파르고 험준한데 바로 송림암 뒤의 고개다. 그 길 곁에 돌이 희고 맑은 연못이 많이 있다. 조금 수백 보 정도 올라가면 송림암이 나오고 앞에 석굴이 있고, 왼쪽 굴이 작고 그 틈에서 물이 나오며, 오른쪽 굴은 보다 크고 그 안에 불상이 있다.
효양치(孝養峙)는 옛 기록을 볼 수 없다. 생각건대 남효온이 소인곶(小人串)이라고 말한 것이 이것일 것이다. 환희령의 남쪽 10리에 있다. 산등성이 동서가 모두 아득하고 깊은 골짜기이다. 서쪽에는 원통곶(圓通串)이 있는데, 원통에서부터 십이폭천(十二瀑川)을 거치며, 십이폭천 서쪽에 성불암(成佛菴), 불정암 등의 암자가 있다.
환희령에는 게방(憩房), 문수촌(文殊村), 니유암(泥遊巖), 구령(狗嶺), 노춘정(盧椿井), 장항(獐項) 등의 이름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불상이 종을 싣고 바다로 와서 고성 포구에 정박했는데, 군수 노춘이 진흙 위에 종 자국을 따라 고개를 넘어 계곡 입구로 들어갔다. 송림 가운데 느릅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종이 그 가지에 걸려 있었다.
신라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이하게 여기고 이곳에 행차하여 절을 세웠는데, 느릅나무를 심어 호(號)를 내걸었다. 노춘이 막 종을 따라 왔다가, 종이 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그곳의 이름을 게암(憩菴)이라고 한 것이다. 혹은 문수보살이 비구의 몸으로 혹은 비구니로 화신하여 가는 곳을 가리키므로 문수촌(文殊村), 니유암(泥遊菴)이라고도 한다. 혹은 개가 나타나기도 하고, 노루가 나타나 노춘을 인도했다고 하여 구령(狗嶺), 장령(獐嶺)이라고도 한다.
노춘이 갈증이 나서 땅을 매우 깊이 파 찾은 샘을 노춘정이라고 한다. 혹은 노춘이 피곤하여 잠시 쉬다가 종소리를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갔으므로 환희령이라고도 했다는데 모두 허황된 말이다. 민지(閔漬·1248-1326. 고려의 문신)의 기문에서 '폭포암에서 효양관을 거쳐 이어진 계곡을 따라가면 물과 돌이 매우 기이하다. 왼쪽이 채운봉, 오른쪽이 청학봉이다'라고 했다. 계곡 곁에 돌에는 '蓬萊島(봉래도)'라는 글씨 석 자가 새겨져 있는데, 양사언의 글씨다. 폭포가 있는데, 볼 만하다.
발연사(鉢淵寺)는 폭포암(瀑布菴)의 아래 계곡에 있다. 폭포가 암자의 위로 떨어져 내려 요석담(凹石潭)이 되는데, 두번째 연못이 가장 크고 둥글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것이다. 석골담(石滑潭)은 맑아서, 승려들이 여기에서 물놀이를 한다. 계수대(桂樹臺)는 바로 이 연못 뒤의 봉우리이며, 돌의 형세가 연이진 것이 매우 기이하다.
구룡연은 비로봉의 동쪽, 구정봉에서 나와 돌벽을 뚫고 연못이 된다. 근원에서 조금씩 조금씩 흘러 나와 구정봉에서 안문령(雁門嶺)을 거친다. 안문은 돌이 안탑(雁塔)과 같은데 높이가 백여 자다. 동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데, 천 길이나 되는 계수나무가 있어 바라보면 야윈 신선 같다.
개울이 어쩌다가 기어서 가고 또 어쩌다가는 폭포가 되어가며 삼십 리를 동쪽으로 가면 일곡연(一曲淵)이 된다. 넓이가 두 이랑쯤 되고 굽은 돌이 단지를 이루어서 그 물을 담고 있다. 돌이 갈린 것이 새까만 거울 같다. 동쪽으로 백 보를 가서 이곡연(二曲淵)이 된다. 연못은 높은 석벽에 걸려 호리병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연못가의 석벽은 스물넉 자쯤 된다. 또 동으로 백칠십 보를 가면 큰 골짜기가 나오는데 빽빽한 숲이 크다. 숲 가운데 푸른 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스무 길 정도 되며 삼곡연(三曲淵)이 된다. 그 넓이는 일곱 이랑 정도다.
또한 동으로 가면 사곡연(四曲淵)이 되는데 넓이는 사방 작은 배 정도이며 깊이는 죽간 예닐곱 자 정도 된다. 다시 그 아래로 가서 오곡연(五曲淵)이 되는데 넓이가 세 이랑 정도며 돌아 흐르는 것이 험하고 급해진다. 그것이 동쪽으로 가면 육곡연(六曲淵)이 되는데 넓이는 너댓 이랑 정도이며 바깥쪽은 둥글고 안쪽은 모가 졌다. 또 그 동쪽으로 3리 정도 가면 불룩 솟아 집처럼 생긴 것이 나오는데 이것이 회병(回屛)이다. 샘은 이 회병(回屛)의 위에서 흩어 내려 칠곡연(七曲淵)이 되는데, 이는 매우 작다. 또 동쪽으로 오백 보 가면 팔곡연(八曲淵)인데 얕아서 다섯 자도 되지 않아 노니는 물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다시 동쪽으로 40여 걸음 가면 구곡연(九曲淵)인데 넓이가 처음 못보다 두 배 정도 넓다.
용들은 제각각 하나의 연못마다 의지하고 있다는데, 산중에 사는 사람의 말로는 유점사에 있던 용이 이곳으로 옮겨와 산다고 한다. 그 아래가 또 쌍봉폭포(雙鳳瀑布)인데, 두번째 폭포가 동남으로 흘러 주연(舟淵)이 된다. 또 남으로 흘러 이연(里淵)이 되었다가 굽이쳐 북으로 흘러 전탄(箭灘)이 되는데, 고성군 남쪽에 이르러 남강이 되었다가 동쪽으로 흘러서는 고성포구를 거쳐 바다로 흘러든다.
옥류동은 바로 구룡연의 하류다. 발연사에서 서쪽으로 3리 쯤 가면 개울을 건너 계곡으로 들어가는데, 돌밭과 밀림을 헤치고 또 개울을 건너면 닿을 수 있다. 옥류동에서 깊이 들어가면 구기연(九岐淵), 감학연(坎壑淵)이 있다. 금장동(金藏洞), 만물초(萬物草), 중향폭(衆香瀑)은 모두 외산의 비경인데, 찾는 발길은 드물다.
신계동은 구룡연의 아래에 있다. 봉우리들이 아름다운데 응자암(鷹子巖)이 가장 기이하다. 물과 돌이 내는 소리가 거문고, 아쟁 소리처럼 영롱하다. 그 아래에 동석암(動石菴)이 있는데 양사언이 일찍이 여기에 집을 짓고 있었다는 터가 남아 있다. 이곳을 통해서 옥류동에 닿는다. 고을 수령 황근중(黃謹中)이 창건한 신계사가 예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불타고 없다. 혹자는 근방의 역리들이 놀러 온 사람들이 몰려들어 험한 곳으로 안내하게 되자 이것을 괴로이 여겨 불태웠다고도 한다. 초목이 우거져 길이 감춰진 바람에 다닐 수가 없다.
수고촌( 庫村)은 백천교 하류에 있다. 산이 사방을 둘러쌌고, 나무들이 울창하다. 금강산의 중들이 이곳에다 얻은 식량을 저장했다. 그래서 몇몇 중들이 지키고 있으며 방아를 가져다 놓고 찧기도 한다.
옹천(瓮遷)은 남쪽 벼랑에 있다. 이것 또한 외산의 줄기로 바다를 끼고 있다. 불룩 둥글게 솟아오른 바위다. 작은 길이 그 가운데를 질러있는데 말이 나란히 설 수 없을 정도로 좁다. 파도가 그 아래에서 용솟음치니 그것을 내려다 보자면 매우 무섭다. 세상에 전하기를 관군이 왜구를 이곳에서 격파하고 모조리 바다에 빠트렸다고 한다.
통천 동쪽 외산의 나머지 부분은 형세가 바다를 굽어보는 병풍같은 석벽이고 검은 빛이 겹치는데 푸르고 흰 것이 모두 굴이다. 금란굴이 그 가운데 가장 깊은 곳이다. 그 속은 아득하고 캄캄하며 겨우 작은 배가 들어갈 수 있는데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도 잔잔하다. 처음 들어가자마자 귀퉁이에 석 자 높이의 돌이 있는데 누런 색 무늬가 있으며 난간 같은데, 떠 있는 듯하다. 대 아래 돌은 옅은 푸른색으로 불도들은 관음보살의 진신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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