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많아 물한리! 물이 맑아 물한리! 영동군 상촌면 물한계곡 끼고 민주지산 가는 길. 구불구불한 길이 길기도 하다. 내일이면 경칩인데, 동면하던 개구리가 겨울을 깨고 뛰쳐나온다는 경칩이 내일인데, 눈보라가 창을 가려 가까운 산조차 희미하다. 종잡을 수 없는 강풍에 난,분,분,난,분,분, 흩날리는 춘설(春雪)! 기온마저 뚝 떨어져, 노면이 빙판이다. 산모롱이 돌 때마다, 버스는 설설기며 속도를 더 늦춘다. 이런 날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티브이나 볼 것이지. 꽃샘추위도 눈보라도 아랑곳 않는 사람들. 바로 나 같은 사람들. 한 걸음씩 걸어서 겨울을 벗어나려는 사람들. 한 걸음씩 걸어서 봄을 보려는 사람들. 땀을 아는 사람들. 오르는 길의 고통과 내려가는 길의 허방까지 깊이 아는 사람들. 고통 속에 내장된 환희를 알고 있는 사람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스패츠를 두른다. 배낭에 덮개를 씌운다. 스틱을 챙겨 든다. 눈보라 속으로 내려선다.
봄이 봄다워지기까지
언제고 한번은 이렇게
몸살을 하는가부다
이 나이에 내가 무슨
꽃을 피울까마는
어드메서 남몰래 꽃이 피고 있기에
내 몸이 이렇게 아픈 것이냐
― 정희성(1945∼), 「꽃샘」
아무리 껴입고 살을 감추어도, 틈 있는 곳 용케 알고 파고드는 눈발! 귀 쌈을 후려치는 눈보라 맞으며 물한교 건너간다. 발등까지 덮는 눈! 미끄러운 발 밑! 바람이 정면으로 달려드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눈보라는, 왕모래 산탄 세례보다 더 따갑다. 시절은 봄! 날씨는 겨울! 민주지산 능선들도 눈보라 뒤로 숨었다. 삼도봉 쪽 하늘은 더욱 뿌옇다. 안 보이는 산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또 한 번 다리를 건너간다. 산그늘 속으로 들어간다. 황룡사 입구에서 쇠줄 말뚝을 돌아간다. 물 좋은 곳에는 절이 있고, 그늘 좋은 곳에는 길이 있구나. 좁은 길 따라가면 절로 들 것이오, 넓은 길을 따라가면 높은 봉우리에 오른다. 걸음 빠른 이들은 민주지산 정상을 밟고 삼도봉까지 능선 종주를 한 뒤, 미니미골을 거쳐서 물한리로 되돌아 올 것이다. 우리는 미니미골로 올라 삼도봉에 선 뒤 석기봉까지 갔다가 내려오려고 한다. 산악회 버스는 다섯 시간 후에 출발하겠다한다. 이렇게 눈보라치는 날, 다섯시간 안에 내 걸음으로 그 먼 길을 돌아올 수 있을까.
'영동 상촌 물한리에서는 민두루한 산
무주 설천 대불리에서는 째보산
이 산줄기에 내린 물은 한 갈래 금강을 이룬다'
김장호는 한국명산기에서 밝히고 있다
둘레가 함께 졸고 있다는 뜻의 眠周之山은 국립지리원 표기
옥에 버금가는 돌만 두루 깔렸다는 뜻의 岷周之山은 중앙지도사 표기
주인은 잠들었다는 뜻의 眠主之山은 영동군 회보의 주장,
안내산행 대장은 4.19의 4월에 찾는 민주주의산이라 토를 다는군.
민주산? 주민산? 민주주의산?
갈짓자(之)로 더터 보는 민주지산 내력
고문헌들에는 충청 전라 경상의 三道峰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산 민주대다거나, 산 민수룻하다거나
주머니 둘레처럼 돌아서 내려오는 산길
떠나는 곳이 돌아올 곳이므로
물한리 조팝나무꽃들의 마중이 바랜 구름떼 같으다
― 졸시, 「민주지산」부분.
물한계곡 물소리! 새하얀 갈기 나부끼며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푸르디푸른 용 한 마리! 쇠 그물 둘러친 울타리 너머에 있다. 그 푸른 물줄기, 힘찬 용트림 끌고 삼도봉 간다. 쇠 그물 울타리 친 길을 따라 길게 걸어간다. 눈보라 속에서도 계곡 물은 넘치게 불어 콸콸 소리내며 흐르고 있다. 내 두 발은 두터운 얼음 위를 걷고 있어도, 얼음 아래 흙 속에선 뜨뜻한 봄기운이 깨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 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 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 이성부(1942∼), 「봄」부분.
짙은 숲이 옆으로 다가오면서 물소리 잠깐 멀어진다. 물소리 더욱 멀어지는 곳에, 갈림길이 있다. 민주지산으로 가는 사람들은 오른 쪽 길로 올라가고, 삼도봉 가는 우리는 느슨한 길로 직진한다. 잎갈나무 나목들 빈 가지를 서로 얽고 빽빽하게 하늘을 가리며 솟아있다. 이 숲길에 연둣빛 바람 설렁거릴 때쯤, 봄은 또 다시 날개를 활짝 펴리라. 그때쯤은 새 소리 가장 크고 아름다우리라. 그때쯤은 나무도 사람도 목마름이 가장 깊을 때. 꽃 피우고 잎 피우느라 나무마다 몸살을 앓을 때. 땅에서 돋은 풋것들 빛과 바람 찾아 힘껏 나풀거릴 때. 그 여린 초록빛 너머로 무더기, 무더기, 진달래꽃 피어나고, 양지 바른 밭두렁에선 조팝나무꽃 줄지어 피리라. 산기슭 여기저기 개복숭아꽃 만발하고, 벌떼들 바쁘게 잉잉거리리라. 바로 그럴 때 만났던 산. 한 달쯤 먼저 오니, 이처럼 눈이 깊고 바람이 차다.
또, 그대를 오릅니다
또, 그대를 오릅니다
왕사 세사 따라오며 툴툴거려도
또, 다시, 그대를 오릅니다
그대는 또 다시 봄입니다
가을을 두시고도 봄입니다
겨울을 두시고도 봄입니다
바위 그늘에 숨어 핀 꽃, 딱 한 송이
아무에게나 안 보여주는, 꽃 한 송이만
눈 질끈 따 담고 내려갑니다
눈 질끈 돌아보지 않고 내려갑니다
눈 질끈 따 담고 내려온 산 한 송이
내 마음 봄 산을 오릅니다
왕사 세사 따라오며 툴툴거려도
또 다시 봄 산을 오릅니다
― 졸시, 「봄 산」
한동안 멀어졌던 물소리가 앞을 가로막는다. 속새골 하단인가. 제법 넓다. 물이 불어 징검돌들이 대부분 물 속에 잠겨있다. 물 밖으로 드러난 부분들도 두터운 눈을 쓰고 미끄럽게 얼었다. 돌과 돌 사이의 거리가 멀다. 단번에 뛸 수가 없다. 우리보다 먼저 이 물을 건넜던 사람들이, 다음 계류를 건너지 못하겠다며 되돌아온다. 우리는 돌아설 수가 없다. 속새골 다음은 무지막골. 먼저 건넌 계곡보다 수량이 많고 물목이 더 깊다. 강근식씨가 돌 하나를 들어다 물 속에 내려놓는다. 징검돌 하나 더 놓은 덕분에 빠지지 않고 건넜다. 이런 날, 찬 물 속에 징검돌 하나를 들어다 놓는 사람. 마음에 드는 산사진 한 장 얻기 위해, 몇 날 며칠을 한 자리에서 기다리는 사람. 섬광처럼 찾아오는 빛의 한 때, 그 짧은 한 때를 사로잡아 보여주는 그의 사진들을 나는 참 좋아한다. 물목 깊은 계류에 징검돌 놓아주며, 어렵게 포착해 온 것들….
나는 사랑에 빠졌다 나의 사랑은 그 溪流(계류)가 허공을 향해 아득히 분사하는 물보라였다 그 속에서 내 生(생)은 자꾸 평평하고 곧은 길들로부터 멀리 멀리 벗어나고 있었다.
― 이경림(1947∼), 「溪流 1」
생활이 의무라면, 바위처럼 한 자리에서 버텨주기를 바라는 의무 같은 것이라면, 예술은 날개! 산행 또한 그런 것. 답답하고 무거운 족쇄로부터 탈피해보려는 날개! 잠깐의 날개! 내가 쓰는 시도 강근식씨가 찍는 사진도, 언젠지 알 수 없는 빛의 한 때, 아득한 허공을 향해 분사하는 물보라 같은 것. 그 찰나의 투명, 그 빛남의 한 때를 사로잡아보려고, 평평하고 곧은 길들로부터 멀리멀리 벗어나, 어렵게 건너고 힘들게 오르고 있다.
무지막골 다음은 온조암골. 온조암골 다음은 미니미골. 우렁우렁 물소리 토하는 미니미골 폭포! 물한계곡을 거슬러 올라온 푸른 용이, 가장 힘차게 용트림 하는 곳이다. 산허리 돌아가는 길은 좁고 눈 위엔 발자국 하나 없다. 한 걸음만 헛딛어도 폭포까지 굴러 내리리라. 폭포소리 밀어 내리며 벅찬 산길을 올라간다. 이런 날일수록 더 희고 빛날 산봉우리! 그것을 향해, 그것을 만나려고, 그 머리 위에 한 때나마 두 발을 두어보려고 걸어 오른다.
물소리 그치니 바람소리 달려온다. 갈수록 커지는 바람소리. 갈수록 얼어드는 몸. 갈수록 느려지는 발걸음. 쌩쌩 소리내며 달려드는 바람 속을 간다. 추워서 눈물나고, 흐르는 눈물마저 금새 얼어붙는다. 대간 능선 올라서기 직전에 듣는 바람소리는, 수 백대의 덤프 트럭이 아슬한 절벽 위에서 한꺼번에 쏟아 붓는 자갈소리 같다. 얼마나 오래 참고 억눌러두었던 말이기에, 저리도 큰 소리로 울부짖는가. 내 작은 몸을 단숨에 날려보낼 듯 매몰찬 바람. 바람에 흔들리며, 바람을 사귀며, 맑아지는 정신을 만난다. 얼음처럼 얼어드는 정신을.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장 더러운 진창과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정결한 나무들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이
모두 다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함께 있지 않아서 일부러 찾
아가야 한다 그것들 사이에 찾아야 할 길이 있고 시간
이 있다
― 이성복(1952∼), 「山」
해인리로 통하는 날등에 올라섰다. 드디어, 드디어, 억새 잔등에 올라섰다. 덕유산을 거쳐온 백두대간이 삼도봉 머리를 밟고 황학산을 향해 꿈틀꿈틀 허리를 트는 곳. 그러나, 오늘 길은 장난이 아니다. 산 아래서 만나던 봄물 소리는 차디찬 바람에 실려 지구 밖으로 달아났다. 이제 내 주위엔 겨울뿐이다. 지독한 눈보라. 더 갈 수 없다. 더 이상 못 가겠다 손사레치면서도 꾸역꾸역 오르는 나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삼도봉 쪽으로 방향을 돌려 봉우리 하나 올라서는데, 한 생을 한꺼번에 살아내는 듯 힘이 든다. 바람은 더욱 불고 눈은 더욱 날리고, 시린 손은 스틱마저 자주 놓치다. 장갑은 오래 전에 뻣뻣한 얼음이 되었다. 눈 깊은 산비탈, 차디찬 허구렁 속. 오르면 미끄러지고, 다시 미끄러진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비탈인지 구별이 안 되는 길. 돌아보면 금새 지나온 발자국마저 사라지고 없다. 그 깊은 허우적거림 끝에, 드디어 심장이 멎는다. 심장이 멎는 듯 고통이 온다. 키 작은 소나무 몇 그루 바람을 가려주는 곳까지, 일생처럼 기어와서 배낭에 기대 누웠다. 지고 온 배낭. 내 몸에 실린 무게만큼 눈이 움푹 파인다. 찬 눈이 이렇게 따스할 줄이야. 눈 속에서 죽으면 고통을 모르리라. 처음엔 춥지만 갈수록 따스한 졸음이 솜이불처럼 감싸안고 저 높은 곳으로 데려가리라.
가느다란 갈비뼈가 가만히 만져지는 한 마리 참새의 여읜 가슴과 같다 햇볕이 오히려 춥다 마지막 술 한 사발이 조금씩 조금씩 슬프게 엎질러지고 있다
―정진규(1939∼), 「봄이 올 무렵」
못 가겠다 못 가겠다 손사레 치면서도, 다시 걷는다. 강근식씨가 건네주는 더운 물 마시고, 단전호흡으로 체온을 회복했다. 삼도봉 머리에 떠있는 오석 여의주가 보이는 봉우리까지 왔다. 짧은 비탈을 내려갔다 한 차례만 더 올라서면 삼도봉인데, 그곳까지 갔다 되돌아올 힘과 시간이, 지금의 내게는 없다. 그리고 나는 삼도봉을 좋아하지 않는다.
三道 화합의 상징탑 요란한 三道峰 꼴 다 전할 수 없네
三道의 車들이 三道峰까지 신작로를 끌고 와 빵빵거릴가봐
허공도 누르게 우람한 오석 여의주는
제 길만 보느라 등 댄 돌龍들의 뒷머리를 누르는 형상
세 마리 돌龍들은 또 다른 여의주를 제 각각 입안에 물었으니
산아래 돌들이 산머리를 깎아 돌난간 안 돌 거북 등허리만 무겁혔다
― 졸시, 「민주지산」부분.
나는 여기서 돌아설 것이다. 석기봉 아래 삼두마애불을 한 번 더 보리라 했지만, 힘과 시간이 다하였다. 석기봉이 저렇게 우람하였던가? 내 인생도 이러하리라. 꼭 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을 구렁 하나 사이에 두고 건너다보면서, 펼쳐졌던 페이지를 덮어야 하리라. 그러나, 산은 내가 그리도 싫어하는 삼도봉은, 내가 그 깊은 절망을 만나기 전에, 머리 위의 구름 한 자락을 높이 들어올려, 거대한 산맥 새를 날아오르게 한다. 얇은 베일이 걸러주는 햇살 속에서 거대한 산줄기는 새하얀 날개 퍼득이는 새가 되어 내 발 밑으로 온다. 내 몸은 이 거대한 산맥새의 날개 위에 있다.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지상의 바람소리와 눈보라로부터 멀리! <<2001년 4월호, 월간 山>>
[삼도봉(三道峰)] 미니미골에서 봄물을 건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