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눈 속에서 온다했으니, 무릎 위까지 눈 쌓였다는 지리산 왕시루봉으로 봄 마중 가자.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봄을 맞으면, 오는 봄이 그만큼 깊고 따스하지 않겠는가.
새벽 으스름 가르며 출발한 기차. 대전 지나 전주 지나 진안 땅으로 들어서니 울룩불룩한 산들이 사방에서 에워싼다. 저 산은 바위가 좋고, 저 산은 귀가 쫑긋하고, 저 산은 등성이가 몹시 휘었군…. 차창 밖 산 구경에 넋빠진 사이에, 철로는 들을 건너 섬진강 옆으로 왔다. '압록'이란 곳을 지날 때보니, 강물이 오리머리처럼 푸른빛이다. 오리머리처럼 푸르러 압록이라 불렀다는 압록강 보다 더 맑고 푸르다. 실바람에 간지럼타는 물결 굽어보며, 찬탄하는 사이 구례 역에 닿았다.
구례라 섬진강 푸르른 물결 위에
늙은 사공은 비끼어 서서
올해도 또 한 해 새하얀 귀밑머리 쓰다듬다
먼 산 이마엔 서릿발같은 눈
강 건너 갈대밭에선 놀란 장끼
남빛 하늘을 차고 오르는 소리
젊은 날 잔물결 가르고 소금배 들어오다
올해도 스쳐가나니
마을의 찬술 한 잔
귀밝이 찬술 한 잔
칼바람 높새바람 뜨거이 넘던
두고 온 고향 하늘 우러르다
새 빛 새 햇살
찰랑 찰랑 모래톱에 부서져
맑은 눈 새로 뜨는 남녘 강에서
―이시영(1949∼), 「남녘 강에서」
구산리 골목길은 그대로구나. 무늬처럼 돌 박힌 담장도 그대로구나. 구만교 아래로 흐르는 냇물도 그대로구나. 9년 전 이맘때도 이 길 지나갔었다. 토지국교 앞 지나 냇물을 건너 낡은 집 옆을 지나 산길로 들어섰었다. 3월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왕시루봉엔 백설기를 쌓은 듯 눈이 깊었다. 느진목재로 내려설 땐 무척 미끄러웠다. 문바우등 오를 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고, 질등 오를 무렵부터 혼자가 되었다. 피아골로 내려가는 길도 놓쳤다. 걸어도걸어도 길은 줄지 않고, 몸도 얼고 소리도 얼었다. 노고단산장에 도착했을 땐 밤이었고, 나는 한 덩이 눈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걸어서, '내 짐을 내가 지고 눈보라 속을 걸어서 / 겨울과 눈보라를 하직했다(졸시, <지리산 하룻길>)' 고통스러웠기에, 내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그 날의 눈과 바람과 추위와 절망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고통스러웠기에, 고통 뒤의 환희를 알게 되었다. 고통과 환희는 동전의 표면과 이면처럼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플 일 없으면 아픔을 만들며, 걸어볼 일이다.
솔가리 섞인 돌 틈에서 춘란 촉이 눈 틀 때
지리산 왕시루봉을 걸어 오릅니다.
오르는 길은 오솔길
산 너머 넘어가도 긴 오솔길.
어디서 보아야 시루 같습니까
대답 없는 사람을 멀리 앞세우고
두툼한 솔가리 밟으며 오릅니다.
왜송 숲 다음은 홍송 숲
홍송 숲 다음은 잣솔 숲
솔숲에 일렁이는 바람 소리 사귀며
오솔길 한 가닥 앞세우고 오릅니다.
잣송 숲 너머엔 억새 밭
억새 밭 옆구리엔 잡목 숲
아플 일 없으니 아픔을 만들며, 저 산정까지
금빛 강이 내려다보이는 억새 언덕까지
잣나무 터널을 뚫고 오릅니다.
오르면 오를수록 눈이 두터워
멧새소리도 동네 어귀에서만 빙빙 도는 때
나 살던 곳, 돌아갈 길, 아득히 잊고
오솔길 한 가닥 끌고 오릅니다.
오르는 길은 힘들고 숨이 차지만
나는 내일 이 길로 갈색 나비를 날리며
내려올 겁니다, 겨울을 부려놓고
봄 한 짐 지고, 갈색 나비를 날리며,
―졸시, 「왕시루봉 오르며」
커다란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왕시루봉. 구례 토박이 발음으론 왕시리봉이다. 어디서 바라보면 시루 모양일까. 기차에서 내려 구례읍내로 들어서는데, 밋밋하게 솟구치는 등성이 하나가 하늘까지 이어져 있었다. 저 수그릴 줄 모르는 등성이 따라 하늘 속까지 걸어가면 거기 커다란 시루가 놓여 있는가. 보고 또 보아도, 구례 읍내 쪽에선 시루 모양은 보이지 않았다. 시루? 산 한 덩어리가 한 점 시루로 보이는 지점? 한 마리 새가 되어 공중에 떠보면 알 수 있을 것인가. 왕시루봉 머리를 아무리 더터도 시루 모양 바위는 없었다. 다음날 나는 혼자 내려오며 왕시루의 내력을 짐작하게 되었다. 산 중턱 오솔길에서 비켜 앉은 암봉. 그 위에 앉아보면 이 산이 그렇게 보인다. 그 보다도 이 바위가 바로 엎어놓은 시루 모양이다. 한국지명총람 구례 편에 '시리봉[왕시리봉];토지면 내서리와 문수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1213m. 시리바우가 있음'이라 나와 있는데, 이 바위를 이르는 말이 아닐까. 망바위라고 부른다는 이 바위. 노고단과 왕시루봉과 섬진강과 강 건너 백운산이 너무 잘 보인다. 빙글빙글 돌면서 구경을 하면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나 아직은 오솔길. 오늘의 오름 길 속. 잣솔 숲을 빠져나와 조금 더 걸으니 키 작은 억새들이 덮고 있는 초원이다. 임소혁씨는 이 곳을 사운드오브뮤직이라 부른다.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의 무대처럼 넓고 전망이 좋기 때문이란다. 사운드오브뮤직에만 올라서면 정상은 바로 눈앞에 있다. 노랗게 일렁이는 억새 잔등 너머에 둥그스럼한 자태를 드러내는 산머리. 이제 저 시루바닥을 향해 남은 힘을 쏟아야 할 때.
물들은 스스로 흘러 모여
제 깊이를 만들어 힘을 키우고
얼음으로 강물을 감추어
농부들을 편히 건네주며
참을 길 없는 뜨거운 속마음만 흘려
강 스스로 강이게 하였다가
녹을 철엔 차례로 녹아 넘치며
물길을 열어
섬진강 좁은 물목들을 지나며
힘껏 부서지고 마음껏 외쳐
부시시 잠깨는 지리산 이마를 때려
퍼뜩 진달래를 피워놓고
막을 길 없는 물살로
시퍼렇게 굽이쳐 흐르는구나.
부서진 것들은 금빛 모래로
구례 강변에 쌓아 빛나게 하고
거친 숨결 달래가며
물 깊이 다시 굳세게 만나
하동 포구 억센 억새들을 흔들어
억세게 키우는구나.
―김용택(1948∼), 「섬진강6」부분.
정상을 향해 오르던 길이 산허리 더듬으며 가지를 치는 곳까지 왔다. 임소혁씨의 A텐트로 들어가는 길이다. 바람이 많이 닿는 곳인가, 나무들은 어느새 키가 작아지고 땅달막하게 품을 넓혔다. 검은 빛이 도는 흙 위엔 얼음이 얼어 미끄럽지만, 저 먼 아래, 문득문득 돌아보게 하는 눈부심이 있다. 무언가?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보니 섬진강이다. 아, 금빛 섬진강! 겨울 한 철, 해질 무렵이면 금빛으로 변한다는 강줄기. 그 금빛 섬진강을, 그 짧은 금빛의 때를, 운 좋게도 만나고 있다. 물도리동 같은 충적지와 구례 읍내 사이를 돌아나가는 둥그스럼한 물줄기가, 금빛으로 변하는 순간에 이 등성이에 올라선 것이다. 꽃피는 봄도 아니고, 비 풍족히 내려 물목이 부푸는 여름도 아니고, 들녘에 풍년가 흐르는 가을도 아니고, 들은 비고 사람들은 아랫목에 주저앉아 게을러지는 때, 문밖의 강과 먼 산을 잊어버리는 때. 저 강은 겨울 석양마다 지는 해를 비껴 띄우고 빛깔을 바꾸어 보는 것이다. 사계절 중 가장 절망이 깊을 때, 하루 중 가장 마음이 초조로울 때, 저 강은 모든 흐름을 끊고 한 순간이나마 금빛 의상을 둘러보는 것이다. 섬진강. 금빛 강. 이 산 언덕에 붙박이로 살지도 않으면서 나는 그것을 본다. 모닥불을 쬐는 듯, 몸에 마음에 봄이 온다. 섬진강! 저 강물과 지리산 자락이 키운 사람들. 멀리 멀리 떠나가서도 잊지 못하고 고향을 노래하는 까닭을 알겠다.
고요도 씻길대로 씻긴 새벽녘
우리 고향 섬진강이 지리산 마루턱을 향해 기어오르다
겨우 그 허리를 한번 껴안고는
크나큰 숨결로 쏟아져 내리듯이
숨가쁘게 나는 산에서 내려왔다
기차를 타고
모르는 산천에도 깊이 잠들며
풀 돋은 등을 구부려 물을 마시고
털투성이 다리를 뻗고
사람들과 함께 사는 별을 보았다
어디에 가도 깨끗한 이마를 드는 지리산
더 멀리 떠나 있어도
흰 살결로 산의 가슴을 파고드는 강줄기
나는 그 산의 옆구리로 불거져 나온 아들
너는 그 강의 찬 물결에 태어난
은어 같은 딸
가파른 계곡을 가르며 나는 등짐을 하고
너는 풀밭에 뜬 달을 따 마당에 걸자
어디에 가도 우리 등뒤로 큰산이 숨쉬고
어디에 가 살아도 우리 마음 속으로 넉넉한 강이 흐르듯
밤 들판 지나 새벽 들까지
새벽 들을 지나 콩밭의 이슬이 마를 때까지
빈 들에 엎드려 살다
이제는 푸르른 들과 함께 누운
가난하지만 착한 이웃들을 불러모아
모닥불을 일구자
―이시영(1949∼), 「山 노래」
밤이 되고, 달이 떴다. 설원의 나목들 푸른 달빛 입고 봄을 향해 걸어가는 소리. 바람 속에서 꿈을 꾼다. 달빛 두른 지붕 아래서, 번데기 속 애벌레처럼 깊은 꿈을 꾼다. 어둠이 걷히고, 해가 뜬다. 뜨는 해를 보려고 동쪽 능선을 찾아간다. 석임 눈을 밟으며 오르는 산기슭. 아삭아삭 밟히는 소리. 무엇인가를 밟지 않고는 목적지까지 갈 수 없다니. 사는 일이란 모순덩어리. 일출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렀지만, 해는 구름 속에서 꾸물거린다.
하동과 구례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섬진강 하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 앉는다. 햇빛이 알맞으면 은빛 강을 볼 수 있을 곳. 자동카메라가 얼어서 사진이 찍히지 않을 만큼 추운데, 강 있는 쪽 지표면엔 아지랑이 두텁다. 산머리엔 눈이 깊어도, 강 쪽엔 이미 봄이 온 것이다. 태양도, 강줄기도 아지랑이 너머로 보다, 툭툭 털고 일어나 정상으로 향한다.
아침 산은 고요하고 아늑하구나. 응달엔 눈, 녹았다 얼었다 한 길엔 미끄러운 얼음. 새소리도 들이지 않는 산. 눈 위를 뛰어간 작은 짐승 발자국.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운 풍경들.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보이는 지점까지 고요를 만끽하며 걸었다. 능선이 뚝 끊어지는 지점에 서니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능선이 한 눈에 보인다. 촛대봉에 가려져, 연하봉, 제석봉, 천왕봉, 중봉, 하봉이, 세 개 네 개의 뿔처럼 겹쳐 보인다. 저 뿔처럼 한꺼번에 몰려있는 봉우리들 너머에까지 내 발자국이 이어져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 넘은 산길. 참으로 길고 대단하구나. 몸이 마음이 또 한번 봄을 만난다.
함께 할 때는 뙤약볕과 자갈뿐이더니
먼 변방에서
깊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건너다보니
참으로 훤칠하고 우뚝하십니다
단숨에 날아갈 수 없으니
鐘처럼 울게 됩니다
―졸시, 「지리산, ―왕시루봉에서」
오르던 길로 내려간다. 봄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어제 오후는 쌀쌀한 바람이더니, 오늘 아침나절은 아주 포근하다. 아무도 없는 숲 길. 새소리 돌아와 있다. 작은 새가 돌아온 숲에 햇살 가득하다. 누렇게 시든 덤불 틈에 무엇인가 움직이는 게 있다. 무얼까? 움직임을 멈추고 보니, 날개가 아주 작은 갈색나비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올해의 첫 나비들 춤을 춘다. 작은 날개 너울거릴 때마다 햇살에 물결이 인다.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운 나비들의 춤. 몸이 마음이 한꺼번에 봄을 만난다.
산 아래까지 마중 온 차를 돌려 섬진강 물길을 따라간다. 갈사리대교가 보이는 배알도 앞까지 왔다. 내려갈 때는 하동 쪽 강변로를 달리고, 망덕 끝머리에서 구례 역까지는 광양과 구례 쪽 길을 탄다. 눈부신 햇살 아래 이는 물결 간지럽다. 이제 곧 매화 필 것이고, 이 강변은 꽃 잔치로 떠들썩할 것이다. 강줄기 한참 거슬러 오르다 왕시루봉 다시 본다. 아침에 앉았던 봉우리에 흰눈 남아있다. 구례 시장에 들러 팥시루떡 한쪽 사들고 또 다시 기차를 탄다. 산이 멀어진 뒤에야 먹을 일과 돌아갈 곳 생각한다. 섬진강, 푸른 강줄기는 아직 내 옆에 있다. <<2001년 3월호, 월간 山>>
[왕시루봉] 금빛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