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도전으로 큰 열매를 따기도 한다. 십 년 전의 덕유산 종주가 내겐 그런 것이었다. 남덕유 영각사 입구에서 북덕유 무주구천동 바깥 주차장까지 80리 가까운 산길. 잘 걷는 사람들에겐 별 것 아닐지 몰라도, 그때의 나에겐 정말 끔찍한 길이의 산길. 모르면 용감하다 했던가. '무모'가 아니라 '무지'가 저지른 성공(?)이었다. 얼마나 오래 걸었던지, 출발 때 보던 별이 도착한 지점의 하늘에 다시 떠있었다. 날씨마저 추웠다. 가을의 끝자락을 보러갔다가 꽁꽁 얼게 추운 겨울을 만났던 것이다. 거세고 축축한 바람 속에서 상고대가 두텁게 피어올랐다. 아름다움에 넋잃은 마음도 잠시, 갈수록 다리가 굳고 얼어붙었다. 헐벗은 가지들이 제 몸을 땅땅 후려치며, 삐걱삐걱 울고 있었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파른 등성이가 벽처럼 막아설 때마다, 탈출로 찾아서 후퇴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 계속 걷게 한 말은 "그 골짜기가 남은 길보다 더 길다니까요"였다. 그렇게 공갈(?)하며 끝까지 함께 걸어주던 산우들, 잊지 않고 있다. 그분들 아니었더라면 '무모'에 무릎꿇고 말았을 그 날. 늙다리 암사슴마냥 지치고 처량 맞던 그 날. 지옥과 천국을 두루 경험한 그 날. 그 길. 그 하루. 아직 내 안에 있다.
가을 깊은 하루는 도시의 미아가 되어
덕유산 오십 리 능선을 사슴처럼 걸어라
천만리 따라온 빗방울 창에 기대 잠들 때
새벽바람에 눈뜨는 푸른 별빛을 모아
갓 돋은 아침해 안개바다에 빠트려도
상고대 만발하여 마음 달래 주는 길
삿갓골재 넘어온 바람에 억새꽃 호호 날렸던가
무룡산 바위에 돋은 이끼의 흰 눈썹을 웃었던가
동엽령 갈림길에서 마음 흔들거렸던가
덕유평전 조릿대들만 빈둥빈둥 푸르던가
향적 바위 봉우리에 다섯 자 키를 더하니
안개 속에 접혔던 길 햇살 아래 펼쳐진다
오십 년 걸어온 길 하루에 걸어보았으니
구천동 맑은 물 따라 낮은 곳으로 흐른다
―졸시, 「가을 깊은 날 / ―덕유산에서」
다시, 덕유산 간다. 백두대간 총 길이 1,572km 중 28km를 보탤 만큼 주능선이 길고 뿌리깊은 산! 여기서 말하는 28km란 육십령에서 빼재까지의 도상거리. 육십령∼빼재, 이 두 고개 사이의 산을 한 덩어리 덕유산으로 보는 것은, 나의 소견이다. 이번에는 능선 종주를 하려는 게 아니라, 향적봉만 살짝 밟았다 내려올 것이다. 향적봉은 이 산의 주봉이지만, 백두대간에는 들지 않는다. 향적봉은 백두대간이 백암봉을 지날 때 분기하여, 북쪽으로 불쑥 불거져서 앉았다. 대군을 호령하는 장군처럼 대열에서 열외하여 두루 바라본다. 벼랑 위에 우뚝한 석단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서게 한다. 향적봉 머리에 서면 서남에서 동북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거대한 새처럼 날개를 편다. 양 날개에 바람을 싣고 펄럭펄럭 날아오르는 거대한 산맥 새. 그 살아 펄럭이는 긴 능선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어 몸을 빙빙 돌리면서 바라보노라면, 두 발마저 날개를 달고 허공으로 뜬다. 조릿대들 빈둥거리는 덕유평전을 지나, 고사목 아름다운 중봉을 지나, 원추리꽃 피워들고 향적봉으로 뻗어오는 지능선. 그것은 바로 그 거대한 산맥 새의 굵은 목덜미 같은 것, 더 나아갈 곳 없는 향적봉은 거대한 산맥 새의 부리 같은 것이다. 그 아슬한 날망 끝으로 또 한번 나를 밀어 올리러 간다.
내가 자연 ! 하고 처음 불렀을 때 먼 데서
무슨 둔한 소리가 들렸다 하늘 전체가 鍾이야
내가 자연 ! 하고 더 작게 불렀을 때
나무들이 팔을 벌리고 내려왔다 네가 山이야
내가 자연 ! 하고 마지막으로 불렀을 때
샘물이 흘러 발을 적셨다 나는 바싹 땅에
엎디어 남은 말들을, 조용히, 게워냈다
―이성복(1952∼), 「自然」부분.
하늘 전체가 종(鍾)인 곳으로 또 한번 나를 밀어 올리러 간다. 산! 그곳이야말로 나의 자연을 만나는 곳. 내 삶을 내가 지고 감당해온 시간들. 그것이야말로 나의 종. 모순의 종. 내가 쳐야할 종은 바로 나 자신. 나는 종치는 막대이며 늙은 종지기. 게다가 다리마저 전다. 내가 향하는 산정은 바람의 집. 하늘 전체가 종신(鐘身)이 되어 바람을 흔드는 곳. 거기 가서 둔탁한 울음 흘리며, 서있어 볼 것이다. 내 울음 투명한 냇물이 될 때까지 웅웅 울어볼 것이다. 밤이 되고 별이 뜨고 새벽이 오고 다시 해가 뜨겠지만, 나는 종이니, 종치는 막대이니, 산정까지 나를 밀어 올린 늙은 종지기이니, 나를 키우고 살게 하고 죽어가게 하는 모순을 치면서 웅웅 울어볼 것이다. 내가 나를 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삶이, 모순의 온상인 삶의 시간이, 내 안팎에서 텅 비어 사라질 때까지, 내가 나를 치면서 울어 볼 것이다. 나를 둘러싼 허공, 그것과 하나가 될 때까지, 웅웅 울면서 삶의 땀 씻어 볼 것이다.
그러나, 이 무슨 심술. 추운 산정에 홀로 올라 종처럼 울리라던 기대를 접고, 덕유산으로 간다. 지난 연말 어디를 바쁘게 가다가 미끄러져서 다쳤다. 말끔히 나을 때까진 산행은 금물이라는 의사의 명령이다. 이번만은 두 다리로 걸어 오르는 산과 코스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선택된 곳이 덕유산 향적봉이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면 향적봉 바로 아래까지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와보니 정말 그렇다.
덕유산 상상봉인 향적봉 턱밑까지
무주리조트 곤돌라를 타고 오릅니다.
철근 동아줄에 조롱조롱 매달린
조롱박 속에서
박씨처럼 기대앉은 배낭이
철커덕 철커덕
옆구리를 치면서 묻습니다.
이렇게 올라도 되는 겁니까? 산을?
―졸시, 「이렇게 올라도」
이렇게 올라도 산은 산이다. 스키를 타러온 사람들이 시루 안의 콩나물처럼 복작거리는 설원으로부터 20분 정도 곤돌라로 상승하니 향적봉 턱 밑에 내려준다. 깊은 숲이 밀려난 자리에 스키 슬로프가 생기고 곤돌라와 리프트가 쉴새없이 오르내린다. 슬로프로 변한 산기슭은 감출 수 없는 상처를 하얀 눈으로 가렸다. 산등성이 다듬어 만든 넓은 공터며 석성이며 건물들이 제법 오래된 티를 낸다. 이곳에 섰던 나무들 바위들 다 어디로 갔을까. 자연처럼 맥없는 존재가 또 어디 있을까. 스키를 신었거나 둘러멘 사람들 사이로 비틀비틀 걸어간다. 옆구리 툭툭 치던 배낭을 추슬러 업고 밟혀서 반들거리는 눈을 밟으며 간다. 고도 50여m만 높이면, 20분 정도만 걸어가면, 향적봉에 닿는다고 한다. 나무 울타리가 열어둔 틈으로 나서니 비로소 산길이다. 경사는 완만하고 둥치 큰 나무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이곳에서 사라진 숲과 나무들의 모습을 짐작케 된다. 많은 사람이 오르내린 듯 미끄럽지만, 숲과 길을 차단하는 울타리 붙들고 걸어, 이내 정상을 밟았다. 향적봉 고도는 해발 1,614m. 설악산 끝청보다 10m정도 높은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상을 밟았으니, 한없이 쑥스럽고 산께 미안하다.
무주리조트 곤돌라 덕분에 쉽게 오를 수 있게되면서부터 덕유산 정상 일대는 산악인보다 사진가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향적봉과 중봉 일대에도 나무가 성글어져서 민둥산 같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찾아 한꺼번에 산기슭을 헤매는 탓도 있겠지만, 카메라 앞을 가리거나 걸리적거리는 나뭇가지들을 아예 꺾어버리기 때문이라니,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향적봉에서 잠시 쉬는 사이에도 배낭 뒤나 옆구리에 카메라 다리를 묶어 맨 사람들이 그룹을 지어 올라왔다. 향적봉 산장은 오후 다섯시가 넘자 빈자리가 없을 정도다. 빽빽하게 끼어 앉아 밤을 새야 할 판이다. 아하, 1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 덕유산에서 실감한다.
이제는 하얀 눈일 수밖에 없다
슬픔과 아픔과
분노까지도
포근히 덮어 싸는
하얀 눈일 수밖에 없다
일시에 모든 죄를
사랑으로 용서하는
높은 뜻을 알아서가 아니라
겨울에는 눈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에서가 아니라
잎은 떨어지고
물은 흐르듯
그냥 그대로
이제는 그냥 하얀 눈일 수밖에 없다
윙윙거리는 살바람 소리에도
가만히 눈감는
하얀 눈바람일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김여정(1933∼), 「폭설1」
2001년 1월 6일. 해가 지기도 전에 산이 어둡는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찬란하리라 기대했던 별들은 구름 속으로 숨었다. 자정 무렵부턴 눈발까지 섞인다. 산장을 떠메고 갈 듯 거센 바람이 산기슭에 쌓인 눈까지 떠다 붙인다. 창문은 쉴새없이 덜컹거린다. 밤중에 문 밖으로 나섰다 눈보라에 떠밀려 도로 들어왔다. 아침이 되어도 눈보라는 그치지 않는다. 향적봉 쪽에서 내려오는 등산객 몇 사람이 눈과 바람에 떠밀려서 몸을 가누지 못한다. 산장에 빽빽하게 기대앉은 사람들 아무도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오전 열시 경. 우리 일행이 먼저 일어섰다. 나 또한 목출모까지 뒤집어쓰는 중무장을 하고 스패츠 두르고 스틱까지 짚고, 광풍 속으로 들어섰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바람 쪽으로 허리를 굽히고 난간을 붙들고 간신히 간신히 향적봉 능선으로 올라섰다. 이런 바람에는 곤돌라도 운행 못한다. 백련사 쪽은 바람이 더 많이 닿고 탈출로가 너무 길다. 곤돌라 계류장 쪽에서 스키슬로프를 타고 내려가려는 것이다. 어제 오를 땐 한없이 아늑하고 포근하던 길이, 밤사이 깊은 눈을 쌓아 길을 흔적 없이 지워 버렸다. 경험 많은 김대장이 깊은 눈을 헤치며 탐침하듯 길을 열어나간다. 맨살에 닿는 눈이 얼마나 아픈지. 실눈 속으로 파고드는 눈이 얼마나 따가운지. 이건 눈이 아니라 왕모래 산탄 세례를 받는 것 같다. 곤돌라 계류장도 텅 비었다. 레스토랑도 문을 굳게 닫았다. 굳게 걸린 문틈으로 파고 든 눈발들이 레스토랑 실내에 무수한 눈 산을 만들었다. 바람과 눈의 설치미술을 보는 것 같다.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포그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處女)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運命)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는 소리. ……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부룩이 도란그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山도 山도 靑山도 안기어 드는 소리. ……
―서정주(1916∼2000),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미당 선생의 시에 쓰인 것처럼 포근한 눈발이라면, 아무리 깊은들 무슨 걱정일까. 폭풍과 눈보라를 뚫고 평지로 내려갈 일이 꿈 밖처럼 아득해 보인다. 곤돌라 계류장에서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렸으나 바람도 눈도 수그러드는 기미가 없다. 우리는 일어섰다. 눈보라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걸어, 스키 슬로프로 이동했다. 수북한 눈 속에 발을 푹푹 빠트리며 새로운 눈을 따갑게 맞으며, 마을을 향해 내려간다. 바람을 정면으로 받는 곳에서는 더 따가운 눈보라…. 그러나 아무도 다치지 않고, 길고 긴 슬로프를 무사히 빠져 나왔다. 스키어들이 잠깐이면 내려올 비탈을 1시간 반 이상을 눈을 헤치며 걸었다. 산장에서 우리가 떠나는 걸보고 용기를 내어 따라온 사람들이 있었다.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너무나 허술한 차림으로 따라내려 왔다. 그분들 역시 우리처럼 탈출에 성공하였다. 차를 둔 곳까지 내려와 보니 평지 또한 설설 기는 설난(雪亂)을 겪고 있다.
밤이 와도, 그 다음 날 새벽이 와도 눈은 그치지 않았다. 20년만의 폭설이었다. 몇 시간 뒤에 몰아칠 눈보라도 내다보지 못하는 나. 그때 서둘러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이틀은 더 산 속에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전국이 꽁꽁 얼어붙는 눈사태를 뚫고, 서울로 입성한 것은 8일 오전 2시경. 목이 말라도 배가 고파도 소변이 마려워도 모두 참아야 했다. 무주에서 서울까지 열 두시간이 걸렸다. 설설 기는 차 속에서 내가 한 일이란, 유리창에 눈을 바싹 붙이고 내리는 눈발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기형도(1960∼1989), 「램프와 빵/―겨울 版畵·6」
뜰 안의 소나무가 쌓이는 눈을 스스로 털지 못해 가지가 부러지는 설난을 겪었다. 나 무사히 돌아온 대신이다. 곤돌라 타고 산정까지 올라간 벌이다. 이처럼 춥고 어려운 겨울. 눈 깊은 산 속에서 작은 짐승들은 얼마나 떨고 있을까. <<2001년 2월호, 월간 山>>
[덕유산] 곤돌라 타고 등산, 슬로프 타고 하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