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북한산을 알게 된 것은 서른 서너 해 전. 이 산그늘 속 수유리로 시집을 오면서부터였다.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인수봉∼만경대∼동장대로 이어지는 능선이 가깝게 보이는 곳이었다. 더운 날 바람이 불어오는 곳도 이 산 쪽이었고, 고향 그리운 날 바라보는 곳도 이 산 쪽이었다. 실제로 오른 것은 열 두어 해 전. 한강을 건너 이사를 오고도 한참 뒤였다. 내겐 박채금(62)이란 대학 선배가 있는데, 그분이 이 산을 좋아했다. 보통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미치게 좋아했다. 그분에게 이 산은 산중의 산이다. 그분은 자신의 믿음을 여러 사람에게 전염시켰는데, 나도 그중 하나다. 그분의 주선으로 동문회 등산모임이 만들어졌고, 선후배 10여명이 평창동에 모여서 대성문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못 걷는 축이었는데, 얼마가지 않아 모두 탈락해버리고 나 혼자 그분 곁에 남게 되었다. 그분은 나마저 산을 떠날까봐 그랬는지, 잔발란 등산화를 사다 신기고, 몽벨 바지를 사 입히고, 티벳 여자들이 손으로 짠 허리띠를 사다 매어주고, 색깔과 무늬 고운 손수건 보이면 사다가 목에 둘러주고, 특이한 모자가 보일 때마다 자기 하나 나 하나 사들고 와서 내 머리에 씌워놓고 "됐다!"하며 흐뭇해했다. 그분은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사이즈를 나 자신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서, 그분이 사다주는 물건은 내게 잘도 맞았다. 도봉산 오봉과 포대능선도 그분과 함께 넘었고, 설악산 공룡능선도 그분과 처음 넘었다. 둘이서 한 덩어리가 되니 못 오를 코스가 없었다. 인수봉만 못 올랐을 뿐, 북한산의 능선과 골짝 골짝을 잘도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그분과의 마네킹 밀월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낯선 길에서 고생과 고독을 견디며 모험하기를 더 좋아하는 나와, 익숙한 길에서 도란도란 정을 나누며 걷고 싶어하는 그분. 이미 예고된 이별이었다. 내가 안내산악회 버스를 타고 동대문 주차장을 출발하던 날, 이른 아침인데도 그곳까지 나와 전송해 주었다. 이제 그분은 나를 배신자라 부른다. 같이 다니자고 좋은 신발 사 신겨놨더니, 먼 산으로 도망가버린 배신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문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가네
― 서정주(1916∼), 「冬天」
쨍! 소리가 나도록 추운 날, 이른 아침! 혼자 북한산 오른다. 출근길 자동차행렬 피하려고 새벽부터 서둘렀더니, 텅 빈 산에 도착했다. 연화사 입구로 들어서서 비봉 능선에 오를 동안 단 세 사람 만났다. 어느새 다녀서 내려오는 분들. 잠깐 스치며 인사를 나누었을 뿐, 산은 고요로 충만하다. 아하, 북한산에도 이런 때가 있다. 휴일 같으면 사람으로 들썩거릴 산이 말없는 것들이 주인 되는 이런 순간도 있다. 간밤 자정 무렵 눈이 펑펑 내렸다. 눈이 많이 내린 날 이 산을 오르면, 수령 깊은 소나무들 뚝뚝 뿌지직 생가지 부러뜨리는 소리에 가슴이 저리곤 했다. 내일도 그런 흰 산을 보겠구나 기대했는데, 새벽이 되자 하늘은 푸른 물감을 푼 듯 청청해졌다. 동짓달 새벽, 청천에 별 몇 알 박혀서 반짝이고 있었다. 불꽃같던 별빛마저 숨어버린 아침. 드물디드문 고요 속. 돌 길 한 가닥 앞세우고 산을 오른다.
잎새 떨군 나무들 앙상한 가지로 하늘 저으며 걸어간다. 버려라, 버리지 않고 어찌 겨울을 견디랴. 죽지 않고 어찌 새 봄을 보랴. 산비탈 나목들의 무언경(無言經)을 들으며 오르는 산길. 중턱쯤 올랐을 때 해가 솟는다. 앙상한 나무들 슬픔 어루만지듯 붉은 해가 솟는다. 태양과 나 사이의 소나무 가지에 불이 붙는다. 내 눈길 속에서 소나무 한 그루 활활 태워먹고 높이 오르는 해. 말갛게 바래어 하늘 가운데 자리 잡을 때까지, 돌아보다 간다.
바람이 분다
구름이 지나가며 비를 내린다
바람이 지나가며 낙엽이 쌓인다
새들이 날아간다
또 눈이 쌓인다
집들은 길을 향해 돌아서 있다
길 위에 올려놓은 발등이 춥다
―졸시, 「산」
비봉(碑峰) 능선에 올라서니, 바람이 반긴다. 싸늘한 바람이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옷 한 겹 더 껴입고 문수봉 쪽으로 걸어간다. 바위의 표면엔 성에가 두텁게 덮여있다. 햇빛에 살짝 녹아 반사광처럼 빛나는 성에. 눈이 쌓였을 때보다 더 미끄럽다. 비봉 정상을 포기한다. 진흥왕순수비 유지(遺祉)가 오늘은 더 작고 추워 보인다. 총알 자국 숭숭한 가짜비석, 모나고 앙상한 가슴팍이나마 껴안아주고 가는 일. 오늘은 그것마저 그만두어야겠다.
비봉 능선은 나무가 적고 그늘이 없다. 겨울엔 좋지만, 여름 한낮이나 오후에 해를 안고 이 능선을 걸으면 금새 빨갛게 익어버린다. 그래도 나는 이 능선을 가장 좋아한다. 비봉쪽에서 문수봉을 바라고 걸어 가다보면 북한산의 진면목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수봉 턱밑에 이를 때까지 직진하는 눈앞엔, 오직 산이 있을 뿐이다. 넓은 가슴 활짝 열고 오너라 오너라 부르는 산이 있을 뿐이다. 원효능선∼백운대∼노적봉∼인수봉∼만경봉∼문수봉∼보현봉∼사자능선은 멀리서, 나월봉∼나한봉∼문수봉 능선은 바로 앞에서, 수려한 자태를 아낌없이 펼쳐 보여준다. 일부러 머물러 서서 돌아보지 않으면 잡다한 세상 풍경, 눈 안으로 뛰어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능선을 가장 좋아한다.
비봉 능선은 오랫동안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이 능선이 통제에서 풀리던 날부터 나는 주로 이 능선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여럿이 걸어도 혼자 걷는 것 같은 산길. 이 능선을 찾는 이들은 대체로 조용하다. 혼자 오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오늘도 혼자 온 분들을 서넛 만났다. 모두 4∼50대 남자들이다. 평일 아침 출근 시간에 산으로 출근한 분들. 시대의 그늘을 대하는 것 같아, 내 마음에 물결이 인다. 비봉을 스쳐서 작은 비탈을 앞에 두었을 때,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가 산을 흔든다. 엄마! 소리가 너무 크고 가까워 걸음을 멈추고 섰는데, 내가 오르려는 길 소나무 모퉁이를 돌아 내려오는 사람. 건장한 오십대 남자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엄마!를 소리쳐 부르다가, 그쪽이 더 놀란 눈치다. 은밀한 순간을 보아버린 내가 더 미안하다. 아들에게 어머니는 한없이 포근한 존재. 현실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면, 건장한 가장이 평일 아침 산에 올라 엄마를 소리쳐 불렀을까. 그러나, 그는 이내 평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바위가 미끄럽습니다"하며 뛰어내려갔다. 쑥스러움을 기지로 털어 버리고 나를 스쳐간 남자. 아아, 우리 모두 힘든 겨울을 이 산에 의지해 넘기고 있구나.
어버이를 여의고 나는
내게 지붕이 없어졌다고 느꼈다.
분가를 하고서는 더구나
내가 외톨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며 돌아보며
됨됨이를 탓하면서
골목마다 책갈피마다
아, 신열로 달아오르던 나날,
문득 머리 위에 덮여오는
지붕.
눈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동짓달 산그늘을
시나브로 흔들리는 우듬지의 바람으로
녹슨 숲을 헤치고 손톱 밑을 헤집고,
하냥 기어오른 마루턱
어쩌자고 벼랑가에 잠드는
나를 만났다.
도시 어디를 헤매다가 이제 오느냐고
그제사 눈을 비비는 나를 끌어안고
소리치는 산이 있었다.
北漢山.
― 章湖(1929∼1999), 「北漢山」
몇 시간 째 걷고 있으나 마음은 바위. 걷는 마음 앉는 마음 우는 마음도 바위. 눕는 마음 쉬는 마음 그리운 마음도 바위. 누군가 달려와 주기를 바라는 바위, 누군가 어루만져주기를 바라는 바위. 이 시대의 우리는 모두 바위가 아닐까.
오늘 따라 내 앞의 바위들은 모두 높고 가팔라, 잠깐 멈춰 서서 눈만 맞추다 가야한다. 바위는 바위를 껴안을 수 없다. 작은 바위는 큰 바위를 껴안을 수 없다. 바위는 아무리 커도 다른 바위를 껴안지 못한다. 그렇게 느끼며 비봉을 스쳐왔고, 그렇게 느끼며 사모바위를 스쳐간다. 사모바위! 작은 바람에도 떨어질 것 같은 아슬한 머릿돌 이고, 비와 눈에도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제 자리 지키고 있다. 누구를 얼마나 오래 골똘히 사모하면, 모습마저 사람을 닮게 되는가. 저처럼 그윽하게 고개 숙인 사랑을 보여주게 되는가.
고인돌처럼 생긴 암봉을 끼어나가며, 내 마음엔 비로소 작은 틈이 생긴다. 작은 틈이 큰 틈 되어 바람 설렁거릴 때까지, 바위를 붙들고 바위를 넘어 바위를 내려간다. 햇살 좋고 바람 좋은 날이었더라면 참외 하나 깎아먹으며 한없이 앉았어도 좋을 곳. 모자 벗어 얼굴에 씌우고 누웠으면 더 좋을 곳. 고인돌 암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쉼터. 그러나 오늘은 이 암봉마저 두터운 성에 속에서 추운 꿈에 잠겨있다.
늪을 물어, 물어다 날라야 하리
― 네 흙은 덜 썩었다
아니, 너무 썩었다
바다를 물어, 괭이갈매기를 쫓아야 하리
부른다고 찾는다고 피는 연꽃 아니다
午時에도 戌時에도 피는 연꽃 아니다
문수봉에 해뜰 적에
한 시 방향을 보아라
삼천 배에 터럭만큼씩만 웃는 연꽃바위 보아라
― 졸시, 「북한산 돌 연꽃」
비봉에서 문수봉 쪽으로! 다가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바위가 한 덩이 있다. 연화봉 가장자리에 왕관에서 떨어진 곡옥(曲玉)처럼 올라앉은 바위다. 이 바위는 분명 문수봉의 일부이지만, 이 연꽃바위 때문에 스님들은 이 쪽을 따로 떼어 연화봉이라 부른다. 무수한 사람들이 이 바위 아래를 지나가지만 이 바위의 존재를 아는 이는 드물다. 사람들이 주로 오르는 때는 해가 이 바위의 머리 위에 높이 떠올랐을 때나, 뒤쪽을 비추는 오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바위에는 마악 피는 연꽃 모양의 무늬가 있다. 해가 높이 떴을 때는 바로 아래 있어도 이 무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바위는 해가 뜨는 순간에 보아야 선명하게 보인다. 갖 돋은 해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질 때, 그 붉은 빛을 함빡 머금었을 때 보아야, 바위 속의 연꽃이, 아니, 이 바위 전체가, 한 송이 연꽃으로 향기를 토하며 피어오른다. 박채금 선배는 이 바위를 미리 알고 있었다. 어느 봄 새벽, 구기동에서 올라 해 뜨기를 기다렸다. 문수봉에 기대앉아 한참을 기다리자 해가 뜨는데, 보현봉 머리를 활활 태우며 해가 솟는데, 바로 그 순간, 이 바위가 발그레 물들면서 한 송이 연꽃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활짝 피는 것이 아니라, 바야흐로 향기를 토하기 시작하는 연꽃봉오리의 모습. 그때에야말로 꽃이 가장 아름다운 때. 그런 봉오리의 모습으로 내 눈앞에 수줍게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나 너무 황홀하여 숨을 쉴 수 없었다. 두 손은 절로 모여 합장하였고, 나는 연꽃교의 신도처럼 그 꽃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지만, 자연이 베푸는 경이 앞에선 절로 그 신도가 된다. 나는 이제 어디에 있으나, 이 바위가 보인다. 오늘도 비봉 능선에 올라서는 순간부터, 이 바위에 눈맞추며 걸어왔다.
이 땅의 모든 산은 전쟁터였으니, 얼마나 많은 왕이
이 산을 차지하지 못해 잠을 설치고
얼마나 많은 군사가 피 흘리며 죽어갔을까?
아무리 지혜롭고 힘센 왕이라도 이 산보다는 짧았고
아무리 강한 군사를 가진 나라도 이 산보다는 짧았다.
마한이,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 고려와 조선이 지나가고
정수리에 쇠말뚝을 박는 식민지의 치욕도 지나갔다.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전쟁의 계절도 지나가고
얼음 얼고 안개 짙은 오늘 아침엔 우리가 지나간다.
순수비를 남긴 진흥왕도 북한산성을 남긴 숙종대왕도
구구한 공덕비를 남긴 당대의 관리들도 죽어서 하늘로
가지 않고 땅에 뼈를 묻었다. 오늘 우리가 지나가고 나면
새로운 내일이 새로운 사람들을 이 산으로 부르리라.
그러나 언제나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이 산과 바위와
나무와 풀뿌리들뿐. 철따라 꽃 피우고 잎을 떨구며
오는 자를 오게 두고 가는 자를 가게 두는
이 산뿐이리라. 부아악! 삼각산! 북한산!
스스로 지어서 제 이름을 말한 적 없는….
―졸시, 「북한산」
문수봉에서 청수동 암문으로 오르는 길은 내 발자국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길이다. 이제 나는 굳이 성문 안으로 들려고 애쓰지 않는다. 성문 밖의 길에서 더 많은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삼천리골도 그중의 하나다. 삼천사(三千寺) 점심 예불소리가 골짜기를 울릴 때까지, 적막을 즐기며 걸었다. 청설모 한 마리 만난 것이 전부! 아무도 없었다. 날씨와 때를 잘 맞춰 오르면 북한산에서도 이처럼 적막을 즐길 수 있다.
서울은 북한산이 있어서 행복한 도시다. 서울 사람들은 북한산이 있어서 행복한 사람들이다. 휴일이면 산이 들썩거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그래도 이 행복의 장소를 아는 이는, 서울 인구의 몇 퍼센트에 불과하다. 기댈 곳 없는 이들에게 지붕이 되어주고 어버이 그리운 사람들 마음껏 어머니를 부르며 걸을 수 있는 산. 좀 더, 좀 더, 아껴야겠다. <<2001년 1월호, 월간山>>
[북한산] 사모바위 스쳐가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