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가을이 내 몸을 지나가고 있다. 월정사를 스쳐서 상원사로 오르는 길. 가을은 어느새 이 깊고 아늑한 골짜기까지 무더기, 무더기, 불을 놓았다. 소나무 전나무 진초록 가지 틈에서 곱게 익은 단풍빛이 타오르고 있다. 계곡 안의 바위와 돌멩이 위에까지 햇살이 들어차는 오후가 되면, 신열에 뜬 물소리를 함께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숲 속이 다, 환해졌다
죽어 가는 목숨들이
밝혀놓은 등불
멀어지는 소리들의 뒤통수
내 마음도 많이, 성글어졌다
빛이여 들어와
조금만 놀다 가시라
바람이여 잠시 살랑살랑
머물다 가시라.
―나태주(1945∼), 「단풍」
상원사 주차장을 뒤로하고 넓은 길로 들어섰다. 경사는 느슨하고, 아침 산 공기는 싱그럽다. 오늘 나는 느릿느릿 걸을 것이다. 등뼈와 팔다리에 갇혀있던 뻣뻣함을 풀며, 느릿느릿 걷는 맛. 단순한 리듬에 몸을 맡기고 반시간쯤 걸어온 뒤에야 문득 깨닫는다. 뒤따라오는 사람이 왜 아무도 없지? 나는 이 산을 몇 번 다녀갔지만 능선 종주만 했기에, 내가 들어선 길이 북대사로 통하는 길인 줄을 모른다. 줄지어 들어오던 자동차들, 그 많은 사람들,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 때 눈치 챘어야 하는데…. 상원사∼비로봉∼상왕봉∼상원사로 회귀하려던 계획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며 걷게 된 것이다. 상왕봉과 두로봉 사이 고갯마루까지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겠지. 올라오는 차가 있어 손을 들어보지만, 흙먼지와 자갈만 퉁기고 간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 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1967∼), 「이탈한 자가 문득」
오대산은 품이 크고 속이 깊으신 산이다. 이탈한 자를 위해 오솔길 하나를 열어두셨다. 어느 봉우리로 이어지는지는 몰라도, 이탈한 자를 어여삐 여겨 비워두신 듯한 길. 의심 않고 오르리라. 산그늘 속 소로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들어섰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이 희미한 길 끝에, 설령, 생각 없는 바위들과 죽은 나무들과 텅 빈 하늘만 있을지라도, 산은 나의 오랜 집이니, 걱정하지 않으리라. 어느 능선 어느 봉우리엔들 오늘 같이 맑은 날, 내 몸 하나 지나가고 앉힐 자리 없을 손가. 더 깊고 더 외진 덤불 속인들, 오늘 같이 구름 가볍고 하늘 높푸른 날, 낮 한때 넋 놓고 쪼일 햇살 없을 손가.
좁고 깊숙한 계곡을 더 깊이 더 멀리 밀어 내리며, 오른다. 산과 내가 살과 껍질처럼 밀착하는 길. 어느 때보다 귀가 밝아져, 내 숨소리까지 들리는 길. 궁시렁 궁시렁 낙엽과 함께 뒹구는 다람쥐들이 있고, 작은 몸을 아무리 빠르게 옮겨가도 내 시야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도롱뇽들이 있다. 긴 겨울을 준비하는 저 작은 동물들의 저 순한 눈빛과 저 바쁜 몸짓들에 햇살이여 좀 더 오래 머물라.
머리 위에는 단풍, 발 밑에는 낙엽, 공기 중에는 물소리와 까마귀소리가 있다. 까알-! 까알-! 목쉰 까마귀 소리! 나보다 먼저 산비탈을 넘어, 더 높고 더 넓은 하늘을 울리며 퍼지는 소리. 저 소리 날아가는 정점에 내가 오르려는 봉우리들이 있을 것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와 같이.
―김현승(1913∼1975), 「가을에는」
생각난다. 오대산의 가을을 보려고 달려오던 날들. 밤중에 서울을 떠나, 진고개에 내리면 새벽이었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하여 동대산 정상에 올라도 별빛만 총총하였다. 흰 바위 앞을 지나 두로봉에 올라도 미명이었다. 주문진 앞 바다를 가로등처럼 밝히고 있는 오징어잡이 배들. 그 휘황한 불빛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먼 배의 불빛들 사그러뜨리며 떠오르던 해. 나무들이 빽빽한 숲 속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툭 터진 공간에서 맞는 일출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빛은 부서지며 스며들었다. 부서진 햇살이 더 눈부시고 더 강렬했다. 태양! 그 둥근 모습을 온전하게 안아들이려고,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기도 했다. 두로봉 안부에서 만난 새벽 안개가 상왕봉까지 따라오는 날도 있었다. 내가 오르는 봉우리가 보이지 않아, 얼마나 답답했던가. 진고개∼동대산∼두로봉∼상왕봉∼비로봉∼호령봉∼동피골 코스를 하루에 다 걸으려고 마라톤 선수처럼 달리던 날들. 그런 날들의 그 바쁜 산행에 비하면 오늘 만난 이 길은 너무 큰 호사가 아닌가. 그런 날에 써둔 시가 머리카락 나부끼며 돌아온다.
지도와 랜턴, 나침반과 고도계
몽상의 골짜기
머리 들면 별빛
내 길은 어둠으로 왔으나 빛으로 간다
동대 두로 상왕 비로 호령
다섯 봉우리를,
깨물 수도 접어둘 수도 없는
내 다섯 손가락을,
한 걸음씩 걸어서 벗어나는 가을
내 길은 신발로 왔으니 신발로 간다
바위로도 구름으로도 오지 않았다
내 걸음으로 간다
하루를 질끈 동여매고 말굽 모양의 묏줄기
내 길은 땀으로 왔으니 땀으로 간다
높이에 헉헉대며
깊이에 비틀대며
단풍빛과 바람소리 아득히 잊어버렸다
내 길은 산으로 왔으니 산이 되어 간다
―졸시, 「가을 오대산」
그러나, 오늘은, 그런 날들의 결의, 그런 날들의 헛기침조차 없이 오르는 길이다. 난 언제나 벅찬 목표를 정하고, 전신을 던져 왔었다. 그 멀고 길고 높은 길을 한때나마 내 발아래 두기 위하여, 잠이나 밥 같은 건 멀찍이 밀어두어도 좋았다. 그러나, 오늘은 조용히 나 혼자, 내 안으로 깊은 길을 내며, 떨어지는 것들의 소리를 안아들인다.
가을은 떨림이다. 가을은 공기를 타고 퍼진다. 생명 있는 육체에 완성과 추락이란 깊은 흔적을 남기는 가을. 가을은 두 얼굴이다. 한 손엔 열매 한 손엔 낙엽을 들었다. 열매는 완성, 낙엽은 추락으로 비유되지만, 때가 다하여 떨어지기 직전의 잎새 역시 열매 아닌가. 농익어 붉은 단풍빛, 그것이야말로 다른 열매를 준비하지 못한 나무들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 물과 공기를 받아들이던, 미세한 구멍들을 모두 닫아걸고, 욕망 없이 떠있는 한 때. 오늘 내 머리 위엔 그런 잎새들로 가득하다.
실바람에도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잎새들. 낙엽은 떨어지면서 다른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뿌리를 덮으며 내려앉는다. 팔랑팔랑 내려앉아, 긴 숨을 토하는 낙엽들. 떨어진 뒤에야 안식을 얻게 되는 나뭇잎들의 일생이, 애잔하다. 바람 없이도, 저의 때를 알고 떨어져 내리는 잎새들. 뿌리 곁으로 돌아와 거름이 되는 잎새들. 저 나뭇잎들 새싹에서 낙엽까지의 길이, 내가 마시는 공기 중에 환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떨어진 뒤의 모습을 그윽히 바라보아 줄 누군가가 있다면, 저 아슬한 허공으로부터 저 깊은 땅 속까지의 길을, 나 또한 걱정하지 않으리라.
오대산 침묵은
소리없음이 아니다
나무, 잎, 풀, 흙, 바람, 봉우리, 쪽빛 하늘
이들의 청정한 본래의 소리들
꽉 차 있음이다
빈 틈 없어
다른 소리 끼어 들지 못함이다
겨울 흰눈이 온갖 소리 누르고
숙연히 고요 지키듯
싱싱하게 짙푸른 숲
일체의 다른 소리 허락지 않음이다
넋까지 시린 자유로움
가득함의 깊이
아, 마침내 솔개 한 마리
솟구쳤다 뚫고 내려오는 하늘
저쪽으로 구겨지는
역시 소리없는 깨어짐이여.
―유경환(1936∼), 「오대산」
30분쯤 더 걸어서 첫 능선에 도착했다. 깊은 구렁 건너엔 호령봉과 비로봉이 있다. 알고 보니 내가 오른 길은 상원사∼상왕봉을 잇는 지름길이다. 내가 앉아 숨 고르는 곳은 1,286m봉 서남능선 상이다. 1,286m봉 비탈을 올라 북대사로 이어지는 이 길은 자동차도로보다 더 오래 된 길임이 분명하다. 처음엔 가팔랐으나, 능선에 올라선 뒤부터는 시야도 툭 터지고 경사도 느슨하다. 상왕봉은 깊숙이 들어앉아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비로봉∼호령봉 능선은 손에 잡힐 듯 하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들 듯, 나는 오늘 새로운 길을 하나 발견하였다.
한 시간쯤 더 걸어 이정표 옆에 섰다. 등산로 바로 옆까지 자동차들이 주차해 있다. 상원사로부터 5km를 걸어온 지점. 여기서 상왕봉까지는 1.3km. 비로봉까지는 4km 남았다.
이제 내 길에서 고요는 사라져버렸다. 대신, 마주 오는 사람들 같이 오르는 사람들 사이에 "안녕하세요" "수고하세요" 주고받는 인사가 있다. 바쁜 사람을 위해 길옆으로 비켜 서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이런 것을 산정(山情)이라 이름 붙여준다. 상왕봉 돌탑에 돌 하나씩을 올려놓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가장 간절한 기도는 누군가를 위해 돌 하나를 치워두는 아름다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발견한다. 상왕봉에서는 어느 때보다 오래 쉬었다. 구룡령에서 두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오래 바라보았다. 대간 쪽 산자락에도 강릉 쪽 산자락에도 가을빛이 깊다. 초록 빨강 노랑이, 산등성이를 드러내며 다투는 불길이, 뜨겁게, 뜨겁게, 번져있다.
상왕봉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껍질만 남은 거목이 있다. 속이 텅 빈 나무가 무성한 잎을 달고 있는 모습. 그 당당한 늙음 앞에 두 손 모아 경의를 표한다. 뙤약볕도 바람도 폭설보다 깊었을 고독도, 저 나무를 눕히진 못하였다. 아낌없이 속을 비운 나무의 무언경(無言經)을 듣는 것 같다.
모래밭에 나갔던 개미가
발바닥을 데어 절름거리며
풀그늘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동해를 빠져 오대산에 올랐더니,
대궁이를 건들건들 저만치서
노란 원추리가 웃고 있었다.
쓰러진 주목나무 가랑이 사이로
저승 나비가 쌍쌍이 나명들명
손을 비비고 있었다.
다섯 송아리 봉실봉실
둘러다보면 호령, 비로, 상왕, 두로, 동대가
이승 설움 보듬어 올려 연꽃으로 뜨는데,
하마 저녁 공양인가
발아래 상원사 종소리가
깃으로 돌아가는 새떼 날개짓에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장호(1929∼1999), 「오대산」
비로봉은 장터 같다. 나무계단도 돌계단도 견디지 못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정상에 서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정상 표석에 기대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적멸보궁에 들러서 부처 없는 불탁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용안수 한 바가지 떠서 목을 축이고 중대사 스쳐간다. 동서남북과 중앙 다섯 곳에 정갈한 대(臺)를 닦고, 절 짓고 탑을 쌓고 기도하던 사람들, 불승(佛僧)이든 속인(俗人)이든 돌아가는 곳은 산. 돌아오는 곳도 산.
산은 가을. 누구든 돌아오기 좋은 때.
불자들은 석가모니불을 지팡이 삼아 기파른 비탈을 잘도 오르는데, 내 다리는 어쩌자고 나 하나도 무거워하며 무릎을 꺾으려 든다.
상원사 스님에게서 [淸凉禪院] 넉자를 받아들고, 수첩과 볼펜을 접는다. 산그늘 빠져나가며 다시 돌아본다. 이 산과 내가 오늘처럼 깊이 사귄 적 있었던가. 가을 산과 내가 오늘처럼 하나이던 적이 있었던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어온 길이, 크낙한 산그늘 속에 느릿느릿 이어져 있다. <<2000년 11월호, 월간 山>>
[오대산] 가을, 느림, 혼자임을 즐기며 걷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