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4 : [태백 매봉산] 배추밭에 밀려서 벼랑 끝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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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매봉산] 배추밭에 밀려서 벼랑 끝에 서다

이향지의 山行詩行 / 태백 매봉산
배추밭에 밀려서 벼랑 끝에 서다

매봉산은 많다. 한국땅이름큰사전에 올라있는 매봉산만해도 178개나 된다. 매봉 210여 개, 매봉재 470여 곳, 매봉과 같은 의미의 응봉이나 응봉산까지 합하면, 앞산이나 뒷산처럼 흔한 산 이름이 매봉산인 것이다. 그 매봉산이 태백에도 있다. 남한강 최상류인 골지천. 골지천 지류 중에서도 가장 멀고 가장 동쪽에 위치한 가래밭골(일명 천의봉골)물이 바로 이 매봉산 북릉에서 흘러내린다. 매봉산은 해발 1,303.1m. 지척에 있고, 한강 발원산인 금대봉보다 조금 낮지만, 이 산은 남한강·낙동강·오십천 세 물줄기가 갈리는 중요한 지점에 솟아있다.
이제는 정상 턱밑까지 배추밭으로 변해, 산 하나만 보고 오르기에는 매력 없는 산이 되고 말았지만, 태백산∼함백산∼금대봉을 거쳐온 백두대간이 덕항산∼두타산 쪽으로 휘어지는 길목에 있고, 낙동정맥이 가지를 치는 산이며, 남한강·낙동강·삼척 오십천 세 강줄기가 갈리는 수원(水源)이기 때문에, 그 위치로 인해 기억되고 중요시되는 산이다.
그 산을 오르러 간다. 매봉산 하나만 하기에는 너무 짧은 것 같아 싸리재에서 피재까지 백두대간 한 토막을 끊어 타기로 하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날, 오후 4시 20분. 정선과 태백 경계인 싸리재에서 출발한다.

펀쵸 자락이 후줄근해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불바라기재를 지나간다. 날씨가 맑았더라면 매봉산이 삼각뿔처럼 보일 곳이나, 안개까지 짙어서 50m 밖이 어둠이다. 까만 어둠보다 하얀 어둠이 더 답답하다는 걸 알게 하는 길이다. 싸리재 마루턱에선 은하수 속 별 떨기 같은 싸리꽃 한 무더기 반겨주더니, 불바라기재 수풀 틈엔 동자꽃이 띄엄띄엄 피어있어 마음 밝혀 준다. '불바라기'란 말 그대로 '불을 바라보기'일 것. '불바라기재'에는 '불을 바라보는 고갯마루'란 뜻이 들어있겠다. 이 펀펀하고 누긋한 산마루가 바라볼 수 있는 '불'이란 매봉산 정상일 것이다. 아침마다 동해의 수면을 박차고 솟는 태양일 것이다. 그러나 이 펀펀하고 누긋한 잿마루는 스스로 걸어가서 그 '불'을 만날 수 없다.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에서 발끝에 매달고 오는 흙 냄새나 서로 나누며 회포를 풀어 왔으리. 천년만년 바라보면서 만날 수 없는 산. 오늘은 내가 빗속을 걸어 맺어주리라.

금대봉에서 비단봉에 이르는 길은, 나무와 나무 사이, 비와 비 사이에 좁다란 오솔길을 열어두고 있다. 오늘 내가 걷는 구간은 남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불바라기재 정점에 있는 금대봉(1,418.1m)은 한강 발원봉이다. 싸리재를 경계로 남쪽에 솟은 은대봉(1,442.3m)은 낙동강 발원봉이다. 금대봉 북릉에서 시작하는 창죽천 물과 매봉산 북릉에서 시작한 가래밭골 물이 창죽동 입구에서 만나 정선의 아우라지 쪽으로 흘러간다. 금대봉 북릉에서 시작한 창죽천 물이 남한강의 원류이자, 한강의 최 원류인 골지천(骨只川)인 것이다. 반면, 은대봉 동북릉에서 시작한 용수골 물은, 매봉산 피재 쪽에서 흘러온 물과 황지천을 이루어 낙동강의 원류가 된다.
금대봉 머리에는 '양강발원봉'이란 푯말이 서있지만, 용수골 지류 중에서도 은대봉 쪽 물길이 더 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그 푯말은 벌써 몇 년째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이 일년에 수만은 될 터인데, 모두 금대봉이 '양강발원봉'이거니 고개 끄떡이고 가지 않겠는가. 금대봉 동쪽 기슭 물도 낙동강의 원류에 속하기는 하지만, 은대봉 쪽 수원이 분명 더 길다. 금대봉이 양강발원봉이란 푯말을 세운 것은 잘못한 일이다.
가도, 가도, 비는 그치지 않고, 숲길은 갈수록 어두워지는데, 같이 온 두 남자는 따라오는 기척이 없다. 비 오는 날 저물 무렵 혼자 걷는 산길. 나뭇잎에 맺혔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더 굵은 소리를 낸다. 내 눈과 귀는 산짐승의 그것처럼 오히려 밝아간다.

쑤아밭령 부근에서 꿩 한 마리를 날렸다. 조금 더 걸어오다 세 마리를 더 날렸다. 말없이 걸어도 산 꿩들은 놀라서 푸드덕거리며 날아간다. 어둑한 숲 속에서 다급하게 날아오르는 산 꿩의 날갯짓.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둥지 속에 갓 태어난 어린 새끼나 부화중인 알은 없었을까. 비탈길 돌아가며 공연히 미안해진다. 몇 번을 돌아보아도 둥지로 되돌아가는 기미가 없다. 나 하나 지나가는데도 이 큰산이 온통 푸덕거린다.
쑤아밭이란 무얼까. 화전동 일대는 예전엔 논이었다 한다. 화전동의 화전도 '火田'이 아니라 '禾田'이라 쓰는데, '쑤아밭'이란 바로 '쌀밭'이라는 뜻이란다. 그렇다면 싸리재의 싸리는 '쑤아'와 어원을 같이 하는 말일 것이다. 태백시는 삼척시와 연혁을 같이한다. 1981년 장성읍과 황지읍을 합쳐 태백시로 승격될 때까지 이 산을 비롯한 태백 일대는 모두 삼척에 속했다.
비단봉은 이 일대 토박이들이 밝혀낸 이름이라는데, 비단봉도 매봉산도 원래는 따로 이름이 없이, 창죽산(倉竹山) 또는 창옥봉(蒼玉峯)이라 부르던 산에 소속된 봉우리들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문수산∼태백산∼대박산(大朴山)∼금대봉(金臺峯)∼창죽산(倉竹山)∼울둔치(鬱屯峙)로 이어지는 고지도가 이 주장을 도와준다.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는 지금의 함백산 자리에 '蒼玉峯이란 지명이, 지금의 금대봉 자리에 '大朴山(대박산)'이라 올라있고 지금의 피재 자리엔 '楡峴(유현)'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창옥봉'과 '대박산' 자리가 뒤바뀐 것이다. '창죽산'이나 '창옥봉'이 지금의 금대봉 일대를 가리키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고지도와 현대지도를 비교해보면 매봉산 부근 피재 일대는 '울둔치'나 '유현'이라고도 불렀던 모양이나, 두 고개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매봉산은 천의봉이라도 부르는데, 비단봉도 천의봉도 그리 오래된 이름은 아니다.
꿩 세 마리 날아오른 뒤로는 적막하리만큼 고요해진 산. 아늑하고 깊은 희열에 젖어 걸었다. 제법 길고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 험상궂은 바위가 가로막는 곳까지 왔다. 펀쵸 자락 말아들고 암봉 위로 올라서니, 비와 바람, 구름이 뒤범벅이 되어 펄럭이며 온다. 비단봉 남벽을 장식하는 이 바위 끝에 서면 태백산∼함백산∼금대봉을 돌아오는 백두대간과 태백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했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윙윙 소리내며 지나가는 바람과 차가운 연기처럼 풀린 구름자락뿐. 펀쵸 자락 펄럭거릴 때마다 물방울이 튀어 오른다.

매봉산을 오른다. 엊저녁 비단봉에서 내려왔을 땐 해가 지고 굵은 비가 계속 내렸다. 태백으로 돌아가서 자고, 다시 오르는 길이다. 매봉산은 속칭 속알머리만 남은 머리통처럼 정상 부근에만 숲이 조금 남았지만, 산 안의 나무들은 제법 늙은 티를 낸다. 이 산이 배추밭으로 변하기 전에는 이처럼 오래된 숲이 이 산을 에워싸고 있었을 것이다. 밋밋한 오르막길, 200∼300m나 걸었을까. 우람한 철골이 떠받들고 있는 안테나가 나타났다. 매봉산 정상은 아주 좁다. 배추밭 쪽에서 볼 땐 둥그스럼한 언덕이더니, 남쪽과 서쪽은 가파른 벼랑을 이루었다. 배추밭에 밀려서 벼랑 끝에 선 산! 가파른 만큼 동∼남∼서쪽은 거침없이 틔어있다. 비 온 뒤라, 청옥산∼태백산∼함백산∼금대봉∼비단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태백시가도 한눈에 들어오고, 은대봉 그늘 추전역과 은대봉을 관통하는 정암터널 입구가 컴컴한 것까지 보인다. 어제 우리가 올랐던 싸리재. 싸리재에서 화전동으로 내려오는 길. 모든 것이 다 보인다. 봉화 땅 청옥산. 조록바위도 보인다. 1,303.1m! 비로소 이 산의 높이가 느껴진다.

매봉산! 이 산의 높이처럼 높직한 슬픔이 느껴진다. 한 걸음 더 내 디디면 아득할 추락이 있을 뿐인 곳. 이 산은 지금 그러한 날 끝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산은 그 짧은 길 끝에 기쁨 한 자락을 묻어두어 내 허전함을 위로한다. 김건우(35) 이승학(30) 두 진짜를 만났기 때문이다. 7월 20일에 진부령에서 출발했다는 백두대간 종주 팀. 대원은 단 둘. 무 지원으로 이어 타기. 지리산까지는 40∼45일을 잡고 있다. 갈전곡봉에선 좀 헤맸지만 그 외엔 아주 잘 가고 있다. "내 나라 내 국토를 내가 직접 밟아보고 싶어서!(김건우)" "호연지기를 기르고 싶어서!(이승학)" 백두대간 종주를 택했다. 지리산에서 진부령으로 치오르는 길은 이미 완주했고, 이번에는 역코스로 재도전이다. 커다란 배낭을 무거운 기색도 없이 지고, 비탈길을 가볍게 걸어 오르는 이들이 나는 부럽다. 무념무상(無念無想)! 그들의 얼굴에서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빛! 얽매이지 않는 용기!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며 즐겁게 걷는 두 사람. 나는 그들의 성공을 믿는다. 통일이 되면 북한 쪽에 남아있는 나머지 백두대간 구간도 오늘처럼 걸어서 이어주기를!

매봉산 정상을 뒤로하고 배추밭 사잇길로 들어섰다. 매봉산 배추밭은 43만평 정도. 전국을 통 털어 가장 고지대에 위치하며 규모 또한 가장 크다. 비탈진 밭과 밭 사이엔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과 수로가 잘 정돈되어 있다. 독을 품은 듯 싱싱하고 진한 초록빛 겉잎들. 노르스름 알이 꽉 찬 최상품 배추들. 나는 이렇게 많은 배추들이 한곳에 모여서 자라고 있는 장관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내려다봐도 올려다봐도 건너다봐도 배추밭. 능선을 넘어 다른 능선으로 가는 배추밭. 초원. 이곳에 와서야 나는 내 시야가 얼마나 좁은가를 알게 된다. 산 하나를 통째로 삼키고 능선을 넘어, 금새라도 나머지 숲을 베어 넘길 것 같은 기세. 속알머리처럼 조금 남은 저 정상의 숲은 과연 언제까지 숲일 수 있을까.
<<2000년 9월호, 월간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