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이름에선 물이 뚝! 뚝! 떨어진다. 삼복 중에 만지는 물소리! 귓바퀴만 담가도 더위가 가신다. '다시 최고봉에 오르고 싶다 / 별(井)을 지나 별(參)을 만지면 가슴 시원하리/(서거정, "수락산"부분. 원문에는 '井을 지나 參을 만지면..'으로 되어있다. 井도 參도 24수(宿)에 속하는 별 이름이다.)'. 그러나, 이 산은 능선에선 물 한 모금 구할 수 없는 바위산이다. 이 산 안에는 '水落'이라 내세울 만큼 큰 폭포도 없다. 이 산은 제 뿌리 흔들리는 일 있을 때마다 머릿돌을 떨구어 제 높이를 줄여왔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즉위 년 팔월 스무 엿새 계묘일 일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경기 양주(楊州)의 수락산(水落山)에서 큰돌이 무너져 내렸는데, 높이가 23척이요 넓이가 28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인조 18년 실록에도 '평안도 자산·성천 등지에 지진이 있었다. 경기 양주의 수락산이 무너졌다.'한다. 그렇다면, 수락산은 '水落山'이 아니라 '首落山'이라야 맞지 않은가. 그러나, 그때의 이 산은 지엄하신 왕국의 산이었다. 왕국에서 '머리'란 지존이신 왕을 상징한다. 세종 즉위 년은 1419년. 지금으로부터 581년 전이다. 해안을 자주 괴롭히는 왜구를 항복시키기 위해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하여, 우리 임금의 위엄이 바다 밖까지 떨치던 해다. 그 해에 굴렀다는 그 큰 바위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수락산! 이름은, 산머리에서 떨어진 큰돌을 물방울에 비길 만큼 허풍을 떨었지만, 이 산 이름을 '水落'이라 붙인 선인들의 여유에는 무릎을 치게 된다. 이 산은 불꽃같은 바위들로 뼈대를 이루어 '양'이 성한 산이다. '水落'이란 이름은 물이 적은 이 산에 '음'덕을 끼쳐 음양의 조화를 꾀한 흔적이다. '머리 떨어진 산'보다야 '물 떨어지는 산'이 백 배 운치 있다. 비! 그것은 산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이기도 하니까.
새소리도 알밤처럼 영글어
떨어지는 계곡
이슬은 하이얗게 모시옷을 갈아입고
웃는 얼굴로 풀잎마다 앉았다.
마음 속에 걸어둔 새파란 폭포소리
오늘은 몇 자나 자라났을까
산허리 감고 도는 몇 송어리 구름떼
하도 아립다워 무릎을 친다
빈 산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들으며
알몸의 바위에 기대서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허기진 나도 배가 부르다.
―정의홍(1944∼1996), 「산행가」
삼복 앞둔 여름 날, 새벽잠 떨치고 수락산 간다. 도봉산 능선에 앉아 바라본 적은 많지만 오르기는 처음이다. 한강을 건너, 동부간선도로를 따라 오르는 사이 먼동이 튼다. 당고개역 지나서 덕릉고개 올라서니, 어둠이 걷힌다. 덕릉은 이 고개 아래 흥국사 위쪽에 있는 덕흥대원군의 무덤이다. 덕릉고개는 원래 당고개였다. 미륵당이 있었기에 당고개라 불렀다. 덕릉고개를 경계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와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이 나뉜다. 이 경계는 불암산과 수락산 주능선을 동서로 가르며 북진하다가 수락산 정상 부근, 서울·의정부·남양주의 세 접점에서 다시 동서로 나뉜다. 수락산은 양주의 산이었으나, 도시의 팽창으로 세 도시가 나누어 관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덕릉의 주인인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아들 이초(李山召·1530∼1559)다. 중종의 뒤를 이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이초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균(鈞)이 1567년 즉위하여 선조가 되었고, 이초는 아들 덕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에 추대되었다. 덕릉 아래 있는 흥국사는 원래 수락사였다. 덕흥대원군의 '흥'자를 따서 흥국사로 이름을 바꾸고 중흥기를 맞았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서거정은 수락산 그늘에 별채를 둘이나 갖고 있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수락산에 관련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그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며, '동문선'과 '동국통감' 등을 편찬했고,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을 쓰기도 한, 대 문장가다. 수락산의 정기가 그의 문재를 더욱 북돋웠던 게 아닐까. 동국여지승람 양주 편에서 보게 되는 그의 시편들은, 그 무렵의 수락산을 짐작케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수락산 속 수락사에
물 마르고 돌 나와, 이 해 저문다.
황학이 나는 옆에 하늘이 낮고
검은 구름 끄는데 빗발이 난다.
거년에 중 찾아 여기 왔더니
구렁에 눈 쌓였고 달이 밝았다.
금년에도 중 찾아 여기에 오니
바윗가에 봄꽃이 피었다 진다.
거년에도 금년에도 내왕하던 길,
산천은 역력하게 예와 같아라.
이끼 낀 길 미끄러워 청려장 짚고
샘물이 흐르는데 바람이 분다.
식후에 듣는 종소리 예전 대로다.
벽 위에 시기(詩記)있는데 먼지 덮였다.
홍수(紅袖) 고금(古今) 이라는 것,
어찌 구래공(寇萊公) 뿐일까.
왕공(王公)의 호기(豪氣) 적음을 내 한번 웃노라.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얻은 벽사롱(碧沙籠)!
―서거정(1420∼1488), 「水落寺」부분.
제아무리 수려해도 가까운 곳에 더 높고 더 빼어난 산이 있으면, 그늘에 묻히게 마련이다. 수락산도, 북한산과 도봉산에 가려 그 성가가 낮아진 산에 속한다. 개발도 상대적으로 작은 산을 밀어붙이는 쪽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수락산도 호랑이가 살만큼 깊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9년 3월13일 일기에, '사복시(司僕寺)에서 아뢰기를,“녹양 목장(綠楊牧場)의 말 4필이 범에게 물렸습니다.”하니, 임금이 녹양에 거둥하여, …오봉(五峯)·수락산(水落山)을 합해 몰이해서 범을 잡고, 날이 저물어서 환궁하였다.'했고, 같은 해 8월24일에도 '임금이 호랑이가 녹양목장의 말을 물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동교(東郊)에 거둥하여 좌상·우상으로 나누어 군사들로 하여금 오봉산(지금의 도봉산)·수락산 두 산에 몰이하게 하였다.'했다. 그래도 호환이 그치지 않자 왕실에 딸린 녹양목장을 아차산 서쪽 살곶이(지금의 뚝섬 부근)로 옮겼는데, 호랑이는 거기까지 따라가서 말을 헤쳤다. 임금은 삼각·도봉·수락·불암에 신당을 지어 산신의 도움을 빌라했다. 수락산과 도봉산 부근에 회룡사, 용현동처럼 '龍'자 들어가는 지명이 많은 것은 '용'이 '호'랑이를 물리쳐주기를 바랐던 염원의 소산이리라.
수락산은 연산군의 사냥터가 되기도 했다. 연산군은 수락산뿐만 아니라, 세조가 살곶이로 옮긴 목장까지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사냥터를 넓혔다. 이제 수락산은 그 모든 횡포와 꼴불견들을 넘어 21세기의 도심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갈대가 우거져서 노원(蘆原)이라 불렀다던 벌판엔 고층 아파트가 빽빽하다. 남양주 청학동에서 오르는 옥류동계곡은 내원암과 금류·은류·옥류 세 폭포가 있어, 가장 길고 수려한 골짜기로 알려져 있지만, 술냄새 고기냄새 진동하는 유원지로 변해버렸다. 이끼가 미끄럽고 눈이 쌓이고 꽃이 피고 달이 밝았다는 산. 어쩌다 지나가는 탓인가 그런 아름다움 보이지 않는다.
덕릉고개엔 동물이동로라는 것이 있다.
그 공중다리가 불암산과 이어주는 능선으로
나는 나의 동물을 이동시키기로 했다.
동물이동로 입구에는 철조망이 입을 벌리고 있어
나는 그 큰 틈으로 나의 동물을 밀어 넣었다.
무모 또는 용기라 부르는 동물이다.
반칙에 대한 반칙이 필요할 때 앞장세우곤 했다.
나는 나의 동물이 열어주는 능선 길 따라
수락산정 찾아간다. 조금 가니 청설모가 한 마리
신갈나무 가지에 매달려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동물차단로에서 만난 첫 번째 동물
더 높은 가지로 훌쩍 날아가 버리지 않게,
나의 동물이 먼저 날개소리 줄인다.
철조망 끝 철망문 철사고리 풀고 나와 다시 걸어두고
나의 동물 비로소 큰 숨을 쉰다.
고압선이 하늘을 죽죽 긋고있는 철탑 쪽으로 이동한다.
아침 붉새가 눈시울처럼 걸린 소나무 능선
나는 나의 동물과 나란히 벼랑 끝에 앉아
불암산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 본다.
철조망이 차단하고 있는 동물이동로!
―졸시, 「동물이동로」
수락산은 능선이 짧다. 불암산과 나뉘는 덕릉고개에서 의정부시 용현동까지 이어지는 주능선 길이래야 10km정도. 동서로 가지치는 날개길은 어느 쪽으로 내려가도 10리 안팍에서 끝난다. 동쪽에는 왕숙천 지류인 용암천이요 서쪽에는 중랑천이다. 동쪽은 43번 국도요, 서쪽은 동부간선도로, 불암산과 나뉘는 안부는 덕릉고개 길이다. 그 길들은 이 산의 발등을 긋고 이 산을 꽃병속의 꽃처럼 가두어버렸다. 이 산은 이제 꽃병 속의 꽃처럼 흔들리고 있다. 어느 능선에 앉으나 와글와글 들끓는 자동차소음 속이다. 길 건너 도봉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기가 흐리다. 뒷걸음 칠 공간도 없이 소음과 매연에 떠밀리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산 능선에 앉아보면 세상 물결이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흐르는가 보인다.
수락산 능선을 걸어보니 아기자기하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바위를 돌아 바위를 넘어 정상 찾아가는 길. 몇 번인가 헛돌았다. 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엉뚱한 바위로 올라서기 몇 번이었나. 발자국 희미한 바위를 타고 올랐다가 새로운 경치를 만나기도 한다. 도솔봉에서 바라보는 주봉의 모습도 그 중 하나다. 도솔봉은 족도리봉이라 불렀던 모양인데, 이산의 주봉을 향로봉이라 부르는 것처럼 불교 풍으로 변하고 있다. 인간들이 내세우는 명분이나 이름은 한갓 허울에 불과하다. 산은 제 이름 모른다. 알려고도 않는다. 잘 못 오른 봉우리에서 오래 이 산 둘러보다, 뻔한 이치 깨우친다. 본다. 예쁘다. 아기자기하다. 생각보다 아찔한 깊이가 있다.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
산 위에까지 왔다.
아직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버려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이
함석지붕에만 비치고,
굼벙이걸음을 하던 기차가
정거장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하고
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가 궁금하면서
좀 더 높은 데도 올라가고 싶다.
―윤동주(1917∼1945), 「山上」
수락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본다. 우리 사는 세상 모습 얼마나 달라졌는가. 초가지붕 함석지붕이 슬라브지붕으로, 단층집들이 고층아파트로, 풀밭이나 갈밭을 배암처럼 기던 오솔길들이 아스팔트 대로로, 손수레와 자전거와 지게꾼들이 다니던 길이 자동차 물결로, 검은 연기를 뿜던 기차가 말쑥한 전동차로, 자기부상열차로, 삼베와 모시옷이 질기고 다림질하지 않아도 되는 폴리에스텔로, 바뀌었다. 바뀌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발전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둑돌처럼 버려져 있다. 그러나 걸어서 산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바둑돌처럼 작은 통속에 유폐시키지 않는다. 정상엔 아직 기대고 설만한 큰 바위가 있다. 정상에 서보면 내려가는 길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산 속엔 맑은 물과 공기가 있다. 산비탈엔 아직 경사진 땅에서도 곧게 서있는 나무들이 있다. 가장 바뀌지 않는 곳, 가장 더디게 변하는 곳도 산이다. 자일과 철책과 무수한 계단과 수많은 사람들을 붙잡고 만나고 헤어지면서 내려가는데,
지난 해 문득 노래를 멈춘 그 나무가
이렇게 다시 서느롭게 울기를 시작한다
돌아오라 기억의 골목길에서 나의 졸무래기들이여
비 맞고도 차라리 시시덕거리던
슬플 줄 모르는 그 즐거운 얼굴들을 하고
―유치환(1908∼1967), 「매미」
수락산은 은자들의 산이었다. 김시습은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등지고 내원암에 은거했고, 숙종 조의 실학파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은 노량진에 있던 노강서원(鷺江書院)을 수락산 그늘로 옮기고, 궤산정( 山亭)을 지어 은거했다. 김시습을 추모하여 청풍정(淸風亭)을 짓기도 했다. 조선조 말 흥선대원군이 전국 600여 서원을 철폐하고 불태울 때도 노강서원은 건드리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수락산 그늘에서 천렵을 하며 세월을 낚던 사람이다. 노강서원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장터거리처럼 변한 석림사 입구에, 세상사에 눈감은 은자처럼 문을 굳게 닫아걸고.
정상에서 석림사골로 내려온 며칠 뒤, 자동차길을 따라 산 둘레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수락산! 이 산 하나가 안아주고 살게 하는 생명이 무릇 기하인가. 골짜기마다 들어찬 음식점들, 거기 매달린 식구들은 또 얼마인가. 물이 흐르는 암반마다 물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여드는 사람들. 사계절 오르내리는 등산인구. 수락산은 결코 작은 산이 아니다. 우리는 산에 기대어 살아왔고, 살아가지만, 산에게 돌려주는 사랑은 너무 작은 것 같다.
<<2000년 8월호, 월간 山>>
[수락산] '별(井)을 지나 별(參)을 만지면 가슴 시원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