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정확하다면, 나는 다섯 살 때 이 산을 넘었다. 산양면 신전리 산유골 할아버지 댁에서, 통영 읍내 서호동에 있는 우리 집까지, 미륵산 큰 재를 넘어왔던 것이다. 집안에 그 많은 어른들이 다섯 살짜리 아이 하나를 데려오지 못해서, 그 먼길을 걷게 하였던가. 아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느닷없이 어딘 가로 떠나길 좋아했다. 그때에도 누굴 따라 할아버지 댁으로 갔고, 또 그렇게 돌아오고 싶어했던 것이다. 할아버지 사촌 누이가 산유골에 살았는데, 그 왕고모가 '안(읍내)'에 간다기에, 나도 '안에 집'에 데려다 달라고 졸랐던 것이다. 산유골에서 야트막한 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산양면 사무소 앞이다. 거기서 야수골을 지나 큰재(미륵치)를 넘으면 봉수골로 내려서게 되는데, 자갈 깔린 신작로를 둘러 가는 것보다 산을 넘는 편이 훨씬 가깝다. 거리는 가까워도, 어린것을 데리고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을 넘는 일이었다. 드문드문 보이던 집들도 사라지고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다리 아파서 못 가겠다고, 차 타고 가자고 주저앉아 울었다. 그 슬프고 질긴 울음은 왕고모가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하고 "저기 여시(여우)온다"고 겁을 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시한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울며 자빠지며 산길을 올랐다. 드디어 큰재에 섰을 땐, 지나가던 사람들이 왕고모를 나무랄 정도로 지쳐있었다. 집에서도 난리가 났다. 이른 아침에 아이를 데리고 떠난 어른이, 저물어서야 대문을 들어섰던 것이다.
그때 그 무섭던 산을 이제는 캄캄한 새벽에 혼자 오른다. 어릴 때부터 떠돌기를 좋아하는 내 방랑벽을 눈감아 주시던 어머니. 올 봄에 구순 잔치를 치르셨는데, 아직도 '안에 집'을 지키고 계신다. 나는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고향엘 가면 새벽에 이 산을 오른다. 배낭에 빈 병 몇 개 챙겨 지고 올라가서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는 미래사 위쪽 샘물을 떠서 띠밭등 쪽으로 내려온다. 해 뜨기 전에 두어 시간을 들여서 주머니 둘레처럼 돌아 내려오는 산길에서, 나는 비로소 흐르지 않는 고향을 만난다.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다도해 풍광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동해처럼 광활하고 거친 힘이 아니라, 서해의 갯벌 앞에서 느낄 때 같은 막막함이 아니라, 수면 위에 떠있는 무수한 섬, 올망졸망한 섬들을 둘러싼 물안개로 인하여 더욱 느끼게 되는 부드러움이다. 다도해의 아침 공기는 지친 폐를 소생시킨다. 바다와 섬들은 그림처럼 내려다보이고, 내가 들이키는 산 공기에는 소금기가 얼마쯤 섞여 있어서, 내쉬는 숨을 최대한 길고 깊게 하여 허파주머니를 비운다. 비우고 다시 놓는 순간, 탄력을 회복한 허파 안으로 신선한 공기들이 들어찬다. 나는 그 변화를 눈을 감고 느낀다. 내가 삶이란 구름 속을 떠돌며 묻혀온 희로애락의 찌꺼기들을, 미륵산은 말없이 받아서 정화시켜주는 것이다. 그때 나는 비로소 고향에 와도 만날 수 없는 고향을 만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가 빈 그물만 끌어올리다 돌아온, 나의 패배를 말없이 어루만져 돌려보내 주는 산. 무척이나 더운 오늘 다시 찾아간다.
미륵산 3
자운영 꽃이 봉화처럼
봉수골 논배미들을 기어오르던 날
첫 소풍을 갔다
왕고모 따라 다섯 살 때
큰재를 넘었다
야수골 까꾸막에선 여시 나온다 소리
겁먹고 주저앉아 파도처럼 울었다
돌팍길에서 허둥거리던
그 조그만 발
나에겐 첫 등산이었다
산유골에서 학교 다니던 큰오빠에겐
날마다 넘어 다니던 통학로
어둑할 땐 칡범이 흙을 뿌렸다 한다
지금은 캄캄한 새벽에 혼자 올라도
무섭지 않은데
그땐 그렇게 잃을 것이 많았나보다
[통영 미륵산], 다도해에서 아침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