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 건
웃지요
―김상용(1902-1951), 「남으로 창을 내겠소」
산 속에 집이 있으면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꽃 속에서 일어나고 꽃 속에서 잠들 수 있는 봄이 돌아왔건만, 나는 도시에서 살고, 도심에서 피는 꽃들은 빛깔조차도 시들하다. 남으로 길을 내겠다. 나라는 인간은 너도나도 좋다고 몰려가는 때와 장소를 피해 다녔다. 그래서 못 본 단풍 못 본 꽃이 많다. 화왕산 진달래도 그중 하나다. 남으로 길을 내겠다. 농부들은 들로 나가 새 농사를 시작하는데 꽃 보러 간다니 눈치 보이긴 하지만, 날마다 달마다 가는 꽃구경 아니니 하루쯤 눈감아주시라. 남으로 길을 내겠다.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버스를 몰아남으로 간다. 고속도로는 어느새 흐르는 사람들의 강. 성미 급한 진달래들은 고속도로변까지 내려와 연붉은 옷자락을 펼쳐들었다. 남으로 길을 내겠다. 버스는 달리고, 휙휙 지나가는 꽃나무들. 달려오는 꽃나무들. 개나리 진달래 벚꽃 매화…. 달려갈수록 만개 하는 꽃나무들. 마음은 가볍고 눈은 즐거워 유리창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얼굴! 남으로 길을 내겠다. 움돋기 전 아카시아나무 그늘에, 간이 무대처럼 펼쳐진 진달래꽃밭. 달리는 차의 속도만큼 뒤로 달아난다. 달릴수록 고향이 가깝게 다가오지만, 고향에도 안가고, 바다에도 안가고, 화왕산 진달래꽃 활활 타는 꽃불 속으로 그늘을 태우러 간다.
꽃에게 간다
고운 것들 틈에서 하루 놀려고 간다
꽃도 아닌
꽃도 아닌
신발 한 켤레
온천에도 안가고 바다에도 안가고
화왕산 진달래꽃
활활 타는 꽃불에
그늘 태우러 간다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미나리전 한 점 먹고
―졸시, 「화왕산 진달래꽃」
창녕 시내로 들어서면서 화왕산 본다. 우뚝하면서도 가파르다. 저 가파른 등성이 향해 걸음걸음 놓을 일이 걱정이구나! 만개한 벚꽃 같이 화창한 날씨. 꽃잎처럼 내려선다. 정오 십오분 전. 햇볕의 마중이 전신을 감싼다. 눈부시다. 몸은 무거우나 마음은 가볍게, 산 쪽으로 걸어간다. 모든 것이 화창 화창 피어오르는 봄날. 더울 일 걱정하여 물통부터 챙겼더니 물통 무게만큼 배낭 무거워졌다.
포장도로를 등지고 좁다란 오솔길로 들어섰다. 몇 걸음 더 오르자 동산 만한 고분이 막아선다. 산 자의 지붕보다 우뚝하고 높직한 흙무덤이다. 골짜기 건너엔 십 여기의 흙무덤들 마을을 이루고 있다. 산 자들의 마을보다 볕 좋고 우뚝한 땅에, 몇 천년 전에 죽은 이들의 집이 붕긋붕긋 모여있다. 카메라 꺼내어 한 컷 담아 지고, 솔숲으로 들어간다. 걸음 빠른 사람들 어느새 등성이 너머로 사라지고, 나는 꼬마 산꾼 송사리와 새소리 통역하며 간다.
"저 새는 뭐라고 울어요?" "그렇지! 그렇지! 운다." "저 새는 뭐라고 울어요?" "쯔쯔쯔 운다" "저 새는 뭐라고 울어요? "그쪽으로! 그쪽으로! 운다!"
딱딱이 치며 밤길 돌던 순라군처럼 돌멩이 두 개를 딱딱 치며 뒤따라오는 송사리! 내가 송사리를 데리고 가는 게 아니라 송사리가 나를 몰고 올라가는 격이다. 송사리는 여덟 살. 나보다 잘 걷는 꾼인데, 오늘은 내 속도에 맞춰주며 느리게 걷는다. 나 빨리 걸으라고 돌멩이 딱딱 치며, 저 새가 뭐라고 우느냐고 묻는 능청이라니. 아하, 이거야말로 진짜 산정이구나. 꽃 없는 길에 꽃이로구나.
도성암 쪽에서 오르는 길에는 꽃이 드물다. 정상까지 올라가면 활활 불타는 꽃밭이 있을라나?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만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고 간다. 배바위봉 억새등을 건너다보며, 한차례 숨 몰아 쉴 때, 내 배낭은 정대장의 어깨로 옮겨가 있었다. 꽃 보러 가는 날조차, 사탕이며 카메라며 주렁주렁 담아지고 나선, 뉘의 몰골이여!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녈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로 아침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그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다
화려한 꽃들이 하나도 피기도 전에
찬바람 오고가는 산허리에 쓸쓸하게 피어 있는
봄의 선구자 연분홍의 진달래꽃을 보셨으리다.
진달래꽃은 봄의 선구자외다
그는 봄의 소식을 먼저 전하는 예언자이며
봄의 모양을 먼저 그리는 선구자외다
비바람에 속절없이 지는 그 엷은 꽃잎은
선구자의 불행한 수난이외다
……………(중략)……………
그러나 진달래꽃은 오라는 봄의 모양을 그 머리 속에 그리면서
찬바람 오고 가는 산허리에서 오히려 웃으며 말할 것이외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봄철을 먼저 아는 것이 정말 꽃이라' 고
―박팔양(1905∼1988), 「너무도 슬픈 사실/―봄의 선구자 진달래를 노래함」부분.
봄의 선구자 진달래? 진달래보다 먼저 피는 꽃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알기엔 산기슭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수종은 생강나무다. 낮은 들녘에서 산수유가 샛노란 눈망울을 터트릴 때, 깊은 산 속에선 생강나무가 샛노란 꽃눈을 뜨는 것이다. 쪽동백이라고도 부르는 생강나무는 꽃 한 송이만 따서 문질러도 생강냄새가 난다. 그 나무는 산 속에서 피기에, 가장 먼저 피면서도 선구자 소리를 못 들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시인조차도 자기가 아는 것만 말하게 된다. 산에 오면 얼마나 많은 선구자들이 조용히, 침묵으로 한 생을 살아내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은둔자들! 나는 이들을 은둔자라 부른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산 속으로 들어와 소리 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남기고 간다. 그러나, 오늘 이 산길에선 그 꽃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 꽃보다 훨씬 늦게 왔거나, 이 산이 그 꽃을 품지 않았거나, 내가 진달래꽃만 찾느라 놓친 탓일 것이다. 꽃이 있을 동안만 나는 그 나무를 알아보기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1922∼), 「꽃」
화왕산 진달래! 활활 타오르는 꽃불에, 겨우내 눌러두었던 그늘을 태우리라했지만, 오르는 길엔 꽃이 없었고, 산머리는 겨울 지난 억새들이 차지하고 있다. 사람과 바람에 지친 억새들의 몰골. 봄이 더 깊어지면 저 억새들도, 뿌리에서 밀고 올라오는 새싹들 위해 허리를 깊이 꺾을 것이다.
화왕산 정상, 날망 끝에서 잠시 둘러본다. 세상은 넓고 올라야 할 봉우리는 도처에 있다. 이 산 정상에 잠시 섰다고 이 산의 전부를 다 오른 것은 아니다. 내 몸이 절벽 위에 있다고 내 발아래 절벽을 샅샅이 아는 건 아니다. 표석 같은 한 순간을 놓아버리고, 목을 빼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찔하다. 그런데 무언가? 깊고 아득하고 거친 절벽 틈. 틈, 틈에 희미하게 번져 있는 붉은 기운! 그렇구나! 저것이야말로 화왕산 진달래꽃! 내가 보려고 달려온 바로 그 꽃들. 그러나 아직은 작고 작은 꽃봉오리 속. 겨우 내 감싸주던 단단한 껍질을 벗고, 이제 막 햇살 속으로 나서는 꽃봉오리들. 저 봉오리들이 한꺼번에 피어서, 이 정상까지 올라오려면 앞으로 열흘은 더 있어야 하리라 한다. 너무 일찍 온 것은 너무 늦게 온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때와 꽃의 때가 서로 안 맞은 것이다. 아쉬움 털며 억새덤불 향해 뛰어내려간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소월(김정식·1902∼1934), 「진달래꽃」
못 가는 산 노래나 흥얼거리며, 먼지를 날리며 뛰어내려간다. 막바지 황금빛을 다투는 억새 덤불 한 쪽에선 술 팔고 오뎅 끓이는 난전이 울긋불긋 성업 중이다. 산성 밖으로 통하는 길은, 술 팔고 지짐 부치는 난전 옆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거기서 송사리 가족을 만나,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미나리전 한 장 부치고, 봄날처럼 익어서 삼지(三池)를 돌아간다. 나지막한 울타리 안에 물 고인 땅이 있다. 이 높은 산등성이에 이처럼 넓은 습지가 있을 줄이야. 저 습지를 우물로 가꾸면 사람도 기거할 수 있을 것이다. 다급한 한 때를 모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창녕 조씨들의 득성지지(得姓之地)로 알려져 있다. 창녕 조씨들은 큰 표석을 세워두고 성지순례를 온다. 오늘도 그런 분들을 수 십 명 만난다.
또, 이곳 화왕산성(火旺山城)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과 의병 990명이 배화진을 치고 지켜낸 곳이기도 하다. 저 삼지(三池)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이 없으면 사람들은 오래 기거할 수가 없다. 그 많은 군사가 저 얕은 못물에 의지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느라 얼마나 목이 탔을꼬.
진달래! 이 산 진달래들은 그들의 넋이 아닐까. 진달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재기하는 민초들의 상징이다. 꺾이고 밟히면서도 되살아나서 새로운 꽃을 피운다. 이 산 진달래는 꽃 빛이 유난히 곱다. 꽃송이가 작고, 생김새가 옹골지다. 연보랏빛 속에 알 수 없는 푸른빛이 은은히 배어있다. 금강산 진달래. 지리산 능선의 진달래도 이와 비슷한데, 그 산들은 고도가 높다. 정상 표고 757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에서 그런 빛을 본다는 건, 과문한 탓인가. 내겐 경이로 다가온다.
한골에서 비를 보고 한골에서 바람을 보다 한골에 그늘 딴골에 양지 따로 따로 갈어 밟다 무지개 해ㅅ살에 빗걸린 골 山벌떼 두름박 지어 위잉 위잉 두르는 골 잡목수풀 누릇 붉읏 어우러진 속에 감초혀 낮잠 듭신 칙범 냄새 가장자리를 돌아 어마 어마 긔여 살어 나온 골 上峯(상봉)에 올라 별보다 깨끗한 돌을 드니 白樺(백화)가지 우에 하도 푸른 하눌…… 포르르 풀매…… 온산중 紅葉(홍엽)이 수런 수런 거린다 아래ㅅ절 불켜지 않은 장방에 들어 목침을 달쿠어 발바닥 꼬아리를 슴슴 지지며 그제사 범의 욕을 그놈 저놈 하고 이내 누었다 바로 머리 맡에 물소리 흘리며 어늬 한곬으로 빠져 나가다가 난데없는 철아닌 진달레 꽃사태를 만나 나는 萬身(만신)을 붉히고 서다.
―정지용(1902∼?), 「진달래」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화왕산성 성곽 위를 잠시 걷다가 관룡산 쪽으로 걸어간다. 성 밖에 섰던 나무들 푸른빛을 흔들며 다가온다. 그 틈에 드문드문 진달래꽃 섞여있다. 드라마 허준 촬영 때 쓰던 너와집이 있는 곳. 건너편 산비탈에 연보라 불길이 번지고 있다. 열흘 먼저 붉은 꽃들이 떠나는 길목을 지키고 섰다. 헛 왔는가. 헛 왔는가. 허퉁하던 마음에 봄볕 들어찬다. <<필자=시인>>
[화왕산], 열흘 먼저 붉은 꽃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