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는 힘든 만큼 기쁨이 남는 산행이다. 이틀이나 사흘쯤, 사는 일을 저만치 밀어두고, 직립하고 전진하고 상승하려는 본능의 명령에 따라, 길이 다할 때까지 걸어본다. 첩첩한 산릉의 파도에 갇혀 오르락내리락 파도타기를 하는 동안, 내 안의 자연을 거리낌 없이 풀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오랜 희망은 6년 전 여름에야 첫 열매를 맛볼 수 있었다. 기온은 높고 비는 내리고 안개는 두텁고 목마름과 허기에 시달렸지만,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육신은 비명을 질렀지만, 먼 정상을 향해 정직한 전진을 계속하는 동안, 적나라한 나를 만날 수 있었고 진정한 기쁨을 느꼈다. 궂은비 뒤에 돋아나는 저녁 하늘을 보았다. 울음빛과 웃음빛이 뒤섞인 노을. 굵고 가깝고 푸른 별들, 무수한 별들. 다음날 아침의 해돋이. 골짜기를 덮고 있는 희고 눈부신 구름. 햇살과 빗방울을 털며 굽이치는 백 리 능선 길, 사람이 꽃이 되는 길을 보았다. 그때의 고통과 환희를 되새기며 다시 배낭을 꾸린다.
내가 당신을 향해
"기러기!"
하고 부르면
그 작고 가벼운 것 되어
날아와 주겠습니까
내가 먼 당신을 향해
"강물!"
하고 부르면
그 길고 맑은 것 되어
달려와 주겠습니까
당신은 무거우니 내가 찾아가려고
내게로 온 계절을 잊고
딱딱한 뼈를 버리고
당신은 그리움 모르니 내가
달려가려고
그리우면 그리운 쪽에서
그 작고 가벼운 것 되어
그 길고 맑은 것 되어
―졸시, 「지리산/ ―배낭을 꾸리며」
이번 길은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과 함께 천왕봉 쪽에서부터 걷기로 한다. 산청 땅으로 들어서니 천리 길을 따라오던 소나기가 멎는다. 2천년 5월 20일의 태양이 중산리 공중에 뜨고, 어디서부턴가 아카시아 향기까지 따라와 마음을 둥둥 구름 위로 띄운다. 두 발까지 둥둥 떠서 버스에서 내리다 천왕봉과 (쿵 소리나게) 이마받이 한다. 내 눈길과 (쿵 소리나게) 이마받이하고 연둣빛 옷자락을 드러내는 산. 아름답다! 천둥과 소나기를 두려워않고 밤새워 빗길을 달려온 보람 있구나!
중산교를 건너간다. 중산교 난간에 기대서서 올려다보는 천왕봉은 관(冠) 같이 생겼다. 옛날 양반님네들 저 봉우리 쳐다보고 저 모양을 본떠서 관을 만들어 썼던 게 아닐까? 인간의 손과 머리로 만들어지는 세공품들은 모두 자연으로부터 재료를 얻고 그 모습을 흉내낸 것 많기에 말이다.
포장도로를 등지고 수풀 속 소로로 접어들었다. 중산리∼법계사∼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9km정도 되는데, 20리도 넘는 길이 내겐 하늘에 매달아놓은 줄사다리 같다. 산 오름이란 평지로부터 역류하는 몸짓인데, 오래 걷지 않던 몸이 짐짝 같다. 돌계단에서는 앉아 쉬고 통나무계단에서는 서서 쉬고, 진달래꽃무더기 보일 때마다 눈맞추며 쉬고, 만주고로쇠 잎새 틈으로 들어차는 하늘빛 들이키며 쉬고, 츠르츠츠 츠르르르 새소리 따라하며 쉬고, 바람 시원한 바위라도 만나면 산아래 길과 마을과 산자락 둘러보며 더 오래 쉬고….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길어, 천왕봉에 올라서니 낮 12시가 넘었다.
천왕봉(1,915.4m)! 이 산머리가 적막할 때도 있을까. '天王峰' 표석 둘레의 팔도 사투리. 이 높은 곳까지? 이 많은 사람들이? 저리도 허술한 차림으로? 올라왔구나? 이제 이 산정은 특별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정상은 한 걸음씩 걸어 오른 자의 것이니, 자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랑을 베푸니, 목청껏 떠들거나 멍하니 앉았거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사방이 휑한 바위 끝에서 오줌을 누거나, 오늘처럼 좋은 날씨는 드물디 드문 축복이니…. 그러나 산이여, 저 들뜬 사람들 무사히 내려갈 때까지라도 비를 참아다오. 바람이여 바위여 돌이여 지팡이들이여 악악 소리들이여 깡통이여 술병이여 오렌지껍질 오이껍질 참외껍질들이여…. 저마다 한 송이씩의 꽃을 가슴에 품고 이 꽃머리에 오른 사람들. 사람을 가려서 들인다면 이 산이 어찌 우리의 산이겠는가. 이 땅이 어찌 자유의 땅이겠는가. 아아, 그러나 이 무슨 꼴불견인가.
꽃구름이 스러지자
수직의 높이가 무너진다.
발아래 온통
넘실거리는 떡잎의 바다 위로
파도꼭지처럼 나우리치는
나의 행색.
어느 날 설비(雪庇)를 밟고 떨어지듯
아슬한 발자리만 골라 찾아나서는 길목에
사다리가 흔들리듯
내가 흔들리는 날.
구름이 달려와서 자일을 던져줄까
그때쯤
별은 더더욱 아득하리라.
―章湖(1929∼1999), 「무너지는 높이」
천왕봉! 함양 땅 칠선골과 백무동 쪽에서 불어 올리는 바람에는 구름발이 진하게 섞였다. 빠르게 흐르는 바람 속에서 머리카락 휘날리며, 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해 본다. 내일까지 걸어야할 백리 길이 구름 속에 있다. 비로소 내가 서있는 곳의 높이와 거리가 느껴진다. 이제 나는 겨우 백여리 능선의 출발점에 선 것이다. 그러나 내 느낌에 절반은 온 것 같다. 이제까지의 길이 내겐 제일 힘든 구간이기 때문이다. 천왕봉∼연하봉∼촛대봉∼영신봉∼덕평봉∼벽소령까지가 오늘 걸어야 할 길이다. 먼저간 사람들은 세석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것이다. 내가 세석에 도착할 즈음 그들은 벽소령에 도착해 있겠지. 그동안의 느림을 보충하려면 쉬지 않고 걸어야 한다.
천왕봉을 내려서서 통천문을 끼어 나간다. 칠선골로 내려가는 공터도 등지고, 제석봉으로 올라섰다. 그런데 어쩐지 허퉁하다. 제석봉(1,806m)의 명물이던 고사목들이 베어지고 없다. 땅에 붙은 구상나무 묘목들이 노릇노릇 몸살을 앓고 있는 틈에, 띄엄띄엄 그루터기만 남았다. 저 어린것들 곁에 그 죽은 나무들이라도 그대로 서있는 편이 한층 조화로웠을 것을. 죽은 나무들이 모여 서서 만들어내던 특별한 풍광을 빼앗아버렸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안개 속에서 설화가 피는 날이면 산 나무 이상으로 아름답던 그 숱한 나목들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껏 이 산을 지켜온 '아름다움'의 신은 그때 깊이 잠들어 있었거나 먼 여행이라도 떠났던 것이리라.
장터목은 안개와 바람과 사람으로 술렁거리고, 연하봉을 넘어서니 도로 화창해졌다. 사방에 길이 뚫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탓인지, 산 안의 공기는 예전 같지 않아도, 오늘 이 길에는 진달래꽃이 지천이다. 내 발바닥이 활활 타오르는 꽃불 속에라도 있는 듯. 세석평전 진달래꽃밭 사이로 걸어내려 간다. 세석산장이 들어서기 전, 텐트 치고 야영하던 사람들은 진달래 꽃 때 맞춰 한번쯤 와볼 일이다. 산비탈을 덮은 풀꽃들과 촛대봉(1,703.7m)과 영신봉(1,651.9m) 기슭의 진달래꽃을 느릿느릿 걸으며 바라볼 일이다. 세석평전의 명물은 철쭉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 눈엔 진달래군락이 더 아름답다. 지리산 진달래는 여늬 진달래와 달리 꽃송이가 잘고 빛깔이 신비롭다. 금강산의 진달래빛도 이와 비슷했다. 백두산의 좀참꽃은 이보다 꽃송이가 잘고 붉은 빛이 진하다. 한라산의 털진달래도 더없이 곱다. 그러나 오늘 이 화창한 햇빛 속에서 역광으로 비춰보는 진달래꽃빛은 말로나 글로는 다 그릴 수 없다.
지리산엔 이런 나무들이 어깨동무하고 살지요.
노각나무시닥나무만주고로쇠당단풍나무사스레나무물갬나무고로쇠나무피나무전나무나래회나무미역줄나무쇠물푸레철쭉음나무진달래주목야광나무마가목까치박달구상나무산딸나무귀룽나무부게꽃나무뽕잎피나무….
나는 그들 곁에서 살며, 날며, 두 귀로 하늘을 만지는 까투리지요.
지리산고원엔 이런 풀꽃들이 향기를 나누며 살지요.
호오리새터리풀강활처녀치마동의나물참별꽃개별꽃비비추산오이풀구절초칼잎용담투구꽃미역취참취단풍취곰취떡취어수리모시대얼레지….
나는 그들 틈에서 놀며, 달리며, 햇살 나르는 다람쥐지요.
지리산능선엔 이런 봉우리와 고개들이 한 줄기에 매달려 살지요.
하봉중봉천왕봉제석봉연하봉삼신봉촛대봉영신봉칠선봉덕평봉형제봉삼각봉명선봉토끼봉삼도봉반야봉노고단종석대….치밭목장터목세석평전벽소령화개재삼거리임걸령돼지평전노고단고개성삼재….
오늘 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둥근 달이지요.
지리산엔 이런 골짜기들이 폭포를 걸어놓고 살지요.
천은사계곡화엄사계곡덕운내피아골목통골연동골범왕골빗점골대성골거림골도장골청냇골칼바위계곡순두류계곡내원골장단골조개골신밭골얼음골국골칠선골한신지곡평전막골광대골와운골뱀사골심원계곡….
오늘 나는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보는 바람소리지요.
지리산엔 이런 능선들이 곁가지를 치며 살지요.
왕등릉치밭목릉구곡산릉곡점릉남부릉고운릉덕평릉토끼봉릉불무장릉왕시루봉릉월영봉릉차일봉릉간미봉릉만복대릉심마니릉삼정산릉오공산릉창암산릉초암릉벽송릉….
오늘 나는 그것들을 골고루 껴안고 비추고 싶은 아침 햇살이지요.
높거나 낮거나 길거나 짧거나 움푹 꺼졌거나 높이 드러났거나 아름답거나 덜 아름답거나 환하거나 어둡거나 여리거나 강하거나…,
가리지 않고, 탓하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하늘 아래서, 하나의 지리산을 이루었지요.
―졸시, 「지리산/―벽소령에서」
벽소령산장에 도착하니 밤 8시가 넘었다. 랜턴을 켜지 않아도 좋을 만큼 산이 밝았지만, 나처럼 늦게까지 걷는 사람은 없었다. 덕평봉 선비샘 주변의 야영장도 말끔히 치워져서 오히려 쓸쓸했다. 벽소령 산장의 불빛이 보일 즈음 내 무릎과 등짝은 석고를 붙인 듯 뻣뻣했다. 지리산종주를 아흔 번 이상 시도해서 72번째 완주한 김유영씨가 내 짐을 나누어지고 끝까지 같이 걸어주었다. 박정덕이라는 경상도 사나이는 내 작은 배낭을 벽소령산장까지 날라다 주었다. 나보다 배낭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소주 한잔 따라주며 고마움을 갚고 싶었는데,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좋은 동행들 만나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부끄럽다.
밤 1시에 일어나 달을 본다. 벽소령 달은 지리산 10경 중에 드는 풍광이지만, 산장의 외등이 달빛을 삭이고 있어서 그 맛은 덜하다. 그러나 하동 땅 대성리 쪽 빗점골을 내려다보고 서서 음미하는 달빛에는 그윽하고도 깊은 이야기가 스며있다. 달 아래 혼자 서서 비로소 고요를 맛본다. 아득하고 먼 곳에서 나를 찾아온 달빛. 보름을 지나 한쪽이 이지러진 모습이 내겐 더 정답다. 달을 향해 두 손을 모아본다. 원시인처럼 빌어본다. 이 길을 끝까지 걷게 해달라고….
21일, 해뜰 무렵 다시 길을 떠난다. 형제봉 자락은 시작부터 바윗길이다. 형제봉을 넘어 삼각고지를 통과한다. 삼각봉(1,462m)에서 북쪽으로 가지를 치는 삼정산능선이 경상남도 함양과 전라북도 남원의 경계가 되는 산줄기다. 백두대간 북쪽은 남원 땅으로 바뀌었지만 대간 남쪽은 아직도 하동 땅이다. 삼도봉에서 불무장등∼통꼭봉으로 가지를 치는 불무장릉은 구례와 하동의 경계가 된다. 또 이 능선들은 섬진강과 낙동강의 물줄기를 가르는 분수령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삼각고지에서 가장 나를 사로잡는 것은 강물이야기다. 삼각봉에서 전라도 남원 땅으로 흘러내리는 와운골 물도, 뱀사골 물과 심원계곡 물도 경상도 땅 남강으로 흘러들었다 낙동강이 된다. 반면 영신봉∼덕평봉∼형제봉∼명선봉 남록의 대성골이나 의신계곡은 경상도 땅에서 전라도 땅으로 흘러들어 섬진강이 된다.
지도를 보라 이 산은 물의 태극을 그린다
전라도 남원 땅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빙글 돌아
경상도 남강으로 가고
경상도 하동 땅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빙글 돌아
전라도 섬진강으로 간다
빙글 돈다
빙글 돌아도 아주 돌지는 않고 산맥을 끼고
태극의 반쪽만큼만 돌아 보이고
남해바다, 그 커다란 만다라 속에서 만나
둥글게 출렁인다
내 몸은 그 만다라 기슭에서
싹트고 둥글어진 물방울에서 나왔다
지도를 보라 지리산 꼭지점마다에서
쪼끄매! 쪼끄매! 우는 새는
그냥 새가 아니다
지리산 머리에 흐르는 안개는
그냥 안개가 아니다
―졸시, 「지리산/―삼각고지에서」
이처럼 지리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워낙 덩치가 커서, 3개도 5개 시·군 16개면 62개리를 두레방석처럼 깔고 앉았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만 80리 가깝고, 동쪽과 서쪽의 날개길까지 합하면 110리가 넘는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 더 무수한 이야기 더 아픈 이야기…. 열 번이나 스무 번쯤 다녀갔다고 해서 이산의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뽐낼 것인가. 이 능선을 이쪽과 저쪽에서 한번씩 걸어보았다 한들 주마간산일 뿐이다.
남은 길은 내 몸이 걷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가 걷는다. 명선봉(1,586.3m)을 넘어서자 또 하나의 목표물이 깊은 골짜기 건너편에서 손짓하고 있다. 둥그스럼한 윤곽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것은 반야봉(1,733.5m)이다. 토끼봉(1,533.7m)에서 화개재로 내려서는 길은 왜 이리 긴지. 삼도봉(1,490m)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은 또 왜 이렇게 긴지. 임걸령 뙤약볕은 왜 이렇게 뜨거운지. 돼지평전엔 왜 바람조차 없는지. 노고단 고개에 다시 설 때까지 뙤약볕과 허기가 고통을 준다. 마지막 목표물인 노고단이 눈앞으로 왔을 때, 왕시루봉으로 뻗어 가는 능선을 보았다. 몇 년 전 지겹도록 저 능선을 넘어왔지. 이 산은 모퉁이마다 내게 추억을 깨우친다. 그때는 죽을 만큼 고생스러웠지만, 고생스러웠던 길일수록 더 진한 추억으로 남았다. 오늘 내가 걷는 길도 그럴 것이다.
노고단(1,507m) 고개에 서니 잿불 같다. 그러나 성삼재까지는 내려가는 포장도로가 길게 남아있고, 남은 길은 더 뜨거운 뙤약볕 속이지만, 다 왔다는 안도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나의 걸음 나의 속도로 이틀동안 걸어온 길 돌아본다. 빤히 바라보이는 천왕봉이 왜 그렇게 멀었던가. 아득하면서도 뿌듯하다. 나는 아직 살아있고 걸을 수 있다. 이 느낌 이 맛을 다시 거머쥐려고 나는 걸었으리라. 내 생(生)의 갈피에 이 뜨거움을 한번 더 새겨 넣으려고!
<<2000년 7월호, 월간 山>>
[지리산종주] 나의 속도 나의 걸음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