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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시와 그림, 사진이 함께하는 산행 에세이

산아, 산아


저자의 말




산으로 간다. 직립하고 전진하고 상승하려는 본능의 명령에 따라, 서고 걷고 오른다. 산은 시간의 집이다. 거기 가면 다 있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 등지고 떠나온 풍경들. 꽃과 열매를 주던 나무들. 피와 살 같은 나무들. 꼼짝 않고 풍우를 견디는 바위들의 모습. 흙 밖으로 굽은 등이 드러난 나무뿌리들. 그루터기만 남은 교목들. 썩어 가는 나무둥치. 그것들 위에 내리는 눈 비 돌멩이 낙엽…. 그것들 위에 초록 옷을 입혀주는 이끼들의 속삭임.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오래 전의 사랑을 되살려주는 자연의 요소들이다. 그것들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면서도 늘 새롭다. 나는 거기서, 내 안에 종잇장처럼 압착되어있던 말과 느낌들을 되살려낸다. 나는 거기서 잊었던 숨을 쉬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왔다.

 걷는 동안 육체는 땀을 만난다. 정신은 공기의 목욕을 한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전신을 실어야하는 곳이 산길이다. 오른 만큼 내려와야 한다. 산행은 이처럼 정직한 걸음이다. 산엣 것들은 아무 것에도 기대지 않고 제 힘껏 서있다. 최선을 다해 살고, 순순히 소멸을 받아들인다. 나는 걸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그 조건과 한계를 극복해왔다.

산은 늘 거기 있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거절하지도 반가워하지도 붙잡지도 않는다. 밟으면 밟히고, 무너뜨리면 무너져준다. 나는 산의 우매에 깊이 빠졌다. 우매보다 큰 품이 어디 있으랴. 다 내어주고 결국은 다시 안아들인다. 나는 거기서 내가 온 곳과 가야할 곳을 알게되었다. 산은 대지의 가장 오랜 모습이다. 산은 가장 늦게 변한다. 나는 산의 딸이다. 나의 태를 받아준 어머니. 표면은 거칠지만 가슴은 한없이 깊고 따스한 대지. 해와 길이 다할 때까지 그 표면을 걸어서, 나는 나에게로 돌아와 있다.

여기 실린 글들은 1991년에서 1999년 사이에 씌어진 것이다. 그림과 함께 실린 것들은 모두 월간 <山>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지도는 필자가 독자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다녀온 길을 점선으로 표시하여 방향과 행로를 짐작하게 했다. 대부분 우리나라 명산들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으므로, 갈피 갈피에 두려움과 두근거림이 그대로 배어있다. 이 점이 가장 내 마음에 든다. 산을 걸으면서 산줄기와 강줄기의 흐름을 함께 살핀 것은, 선대의 고루함을 따르려는 게 아니라, 변하지 않는 줄기들을 가늠해보고 싶었다. 애는 썼으나 지나쳤거나 모자란 점이 있을 것이다. 지적해주시면 절하고 수정하겠다.    

섬세하면서도 개성 있는 그림으로 부족한 글을 빛내준 서시환 화백, 귀한 사진을 흔쾌히 협조해 주신 지리산 사진작가 임소혁 선생, 우리 야생화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계신 김유성 선생, 산처럼 듬직하고 변함 없는 山情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97년만의 가뭄, 37년만의 장대비, 유달리 덥고 어려운 여름, 어머니 무릎에 이 아름답고 묵직한 책을 놓아드릴 수 있게 해주신 도서출판 창해에 감사드린다.  
                 
                              2001년 여름
                                    이 향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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