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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 르포 -데스밸리(Death Valley)  

미국 서부 르포 -데스밸리Death Valley

데스밸리

Death Valley
는 라이프밸리
Life Valley
였다
타이터스캐년∼스카티스캐슬∼유비히비분화구∼퍼니스크릭∼배드워터 일주기


글·사진 이 향 지 시인 www.poemgate.com


 사막이다. 펄펄 끓는 찜통 속처럼 더운 곳이다. 죽음의 신들이 허기진 골짜기를 열어놓고 새로운 희생물을 기다리는 곳. 서부 개척 시대 마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십 여명씩 목숨을 잃기도 했다고. 그래서 '죽음의 골짜기(Death Valley)'라 부르게 되었다고. 요즘도 준비가 허술한 사람들이 종종 조난을 당하는 곳이라고. 그러나, 생명을 위협하는 악조건들은 오히려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황량하고 황량하나 독특한 아름다움. 그곳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 그것들을 만나려고 나는 일어섰다.
 때는 겨울. 나는 지난 해 말부터 딸이 있는 미시간주에 머물고 있었다. 우연히, 참으로 우연히, 데스밸리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때.

 

데스밸리 어떤 곳인가


 미국 영토에서 가장 높은 산은 매킨리(6,194m)다. 그러나 매킨리는 본토와는 동떨어진 알래스카에 있다. 미 본토에서 가장 높은 산은 휘트니(4,418m)다. 미 서부의 병풍 구실을 하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의 최고점이기도 하다. 미 본토에서 가장 거대한 산군은 캐나다령에 머리를 두고 있는 로키산맥이다. 미 중동부의 젖줄인 미시시피강과, 미 서남부의 젖줄인 콜로라도강의 수원을 가르는 산맥이기도하다. 시에라네바다산맥과 로키산맥 사이엔 수많은 협곡(Canyon)과 골짜기(Valley)들, 분화구(Crater)들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아마 이 두 산맥과 그 둘레의 땅이 한꺼번에 솟구치며 갈라질 때 생긴 흔적들일 것이다. 이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골짜기는 물론 그랜드캐년(Grand Canyon)이다. 그랜드캐년이 해발 1,600m를 넘는 고원을 가르며 생긴 협곡이라면, 데스밸리(Death Valley)는 사방팔방에 산을 두르고 깊숙이 가라앉은 분지와도 같다.
 데스밸리 일대는 모두 사막이다. 그러나, 타클라마칸이나 나미브사막처럼 고운 모래가 쌓인 곳이 아니라 일종의 황무지다. 데스밸리 북쪽에 유레카듄스(Eureka Dunes)라는 고운 모래지대가 있고, 데스밸리 중심부에도 그 비슷한 곳이 있지만, 그 고운 모래들은 광활한 대륙 속의 소수 민족처럼 아주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데스밸리의 총면적은 약 7,800㎢이고, 이중 해수면(海水面) 이하의 면적만도 1,425㎢에 달한다.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에 걸쳐 있으나,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주에 속한다. 나무도 풀도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수많은 사막식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삶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한때 금맥을 찾는 사람들로 골드러시를 이루기도 했다. 1933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데스밸리가 사람을 끄는 이유는 주변의 산들이, 나무 한 그루 없는 산들이, 헐벗음 그대로인 산들이, 꿈틀꿈틀 이어지는 산의 나신들이, 다양한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색깔과 형상이 똑 같은 것 없이 저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산과 산 사이에 무수한 협곡(Canyon)들을 숨기고 있어서, 그 협곡마다 지닌 아름다움이 새로운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새로운 전설들을 낳고있다. 또 하나는 미국령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 데스밸리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골짜기에서 가장 낮은 부분은 해수면보다 86m나 내려간 지점에 있는데, 그곳 사람들이 풀(Pool)이라 부르는 바닥엔 새하얀 소금밭이 펼쳐져 있다. 내리는 비보다 증발하는 수량이 훨씬 많아서 호수도 되지 못하고, 천혜의 염전처럼 두터운 소금 층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두터운 소금밭을 보고 이 골짜기 일대가 원래 바다였노라 한다. 소금 호수가 말라서 이렇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제 이곳은 바다 밑이 아니라 그냥 골짜기다. 산맥과 산맥이 서로 높이 일어서겠다고 당기는 틈바구니에서 생겨난 구조곡인 것이다.
 데스밸리를 둘러싼 두 산군은 네바다주와 캘리포니아주의 경계를 이루는 아말고사산맥(Amargosa Range)과 데스밸리 최고봉 텔레스코프봉(Telescope Peak·3,368m)이 속한 페너민트 산맥(Panamint Range)이다. 이 두 산맥에 갇힌 공기는 겨울에도 여름처럼 후꾼거린다.  데스밸리 일대의 년 평균 강수량은 1.9인치(48mm)밖에 되지 않는데, 여름 기온은 여늬 사막보다 훨씬 높아, 어느 해는 영상 57℃를 넘긴 기록도 있다. 따라서 데스밸리 여행은 미국의 겨울인 11월에서 이듬해 4월 사이가 가장 좋은 시기다.
 
 

데스밸리로 가는 길


 라스베가스(Las Vegas)는 그랜드캐년과 데스밸리 관광의 전초기지다. 딸과 함께 왔다. 2002년 2월 1일. 3박4일 여정 중, 하루는 그랜드캐년에, 하루는 데스밸리에 바치기로 했다. 짧지만, 짧은 대로 깊이 보는 방법이 있다. 100불을 더 주는 조건으로 둘만의 투어에 나선 것이다. 차가 좋아야하고 운전을 잘해야하고 지형에 밝은 가이드와 동행하라는 기본조건은 갖추어진 셈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1시간30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하루의 절반. 그동안, 데스밸리의 어떤 부분을 얼마나 볼 수 있을지는 가봐야 안다. 그러나 핵심 코스는 모두 계약에 넣었다.  
 라스베가스에서 데스밸리까지는 150마일 정도. 곧장 가면 두 시간 남짓 걸린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를 보고 어디로 나오는 가에 따라 여행의 질이 달라진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95번 프리웨이를 타고 아말고사사막(Amargosa Desert)을 가로지른다. 캘리포니아주의 모하비사막(Mojave Desert)과 다를 것 없는 풍경이다. 향기 없는 향나무군락 틈에 조수아트리가 드문드문 서있을 뿐이다. 그러나 저 나무들에겐 이 메마른 사막이 바로 옥토인 것을.
 1시간 넘게 달려서 비에티(Beatty)란 마을에 닿았다. 데스밸리를 북쪽에서부터 보려면 꼭 거쳐 가야하는 길목 마을이다. 모자라는 물품을 사고 차에 기름을 넣었다. 물과 기름은 데스밸리 여행에서 가장 넉넉히 준비해야할 필수품이다. 데스밸리 안에도 주유소가 있지만, 강도라고 부를 만큼 많이 받는다.
 비에티에서 4마일쯤 온 곳에 고스트타운 라이올라이트(Rhyolite)가 있다. 금광이 있던 곳이다. 1900년대 초 만해도 금을 찾아 몰려든 사람들이 만 명 이상 거주했으나, 지금은 무너진 벽과 마른 잡초만이 유령처럼 서있다. 고스트타운(Ghost Town)! 얼마나 잘 지어진 별명인가. 빈 병을 모아서 지은 보틀하우스가 안내소를 겸하고 있다. 금 캐는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더 깊은 곳에 있는 금맥까지 채굴할 수 있으면 또 한번 붐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한다.
 데스밸리 일대는 라이올라이트 같은 고스트타운이 도처에 있다. 우리가 향하고 있는 타이터스캐년 상단부에도 납 광산을 닫은 고스트타운 레드필드가 있다. 이처럼 광산이 산재하는 것은 데스밸리의 산들이 다양한 광물질을 품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스밸리 하이킹에 나선 사람들은 폐광에서 나온 광물질이나 방사능, 이산화탄소 등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라이올라이트를 등지고 374번 도로로 나섰다. 포장도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넘어 가면 머드캐년(Mud Canyon)을 거쳐 데스밸리 중심부에 곧장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374번 도로를 버리고 아말고사 사막을 횡단하는 비포장도로를 들어섰다. 타이터스캐년(Titus Canyon)과 데스밸리 북쪽에 위치한 인간과 자연의 기념물들을 보기 위해서다. 이 길은 일방통행이므로, 데스밸리 쪽에서 넘어오기는 불가능하다.

 

아말고사 산맥을 넘으며


 길이 휜다. 다시 휜다.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사막이 파고들며 길을 흔든다. 울툴불퉁한 길바닥에선 자갈이 튄다. 길 아래 지형은 점점 요철이 심해진다. 널뛰듯 그네 타듯 달려가는 길. 먼지를 풀풀 날리지만, 먼지는 우리 뒤를 따라올 뿐이다. 먼지의 면사포를 길게 흩날리며 갈짓자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
 아말고사 사막은 해발 1,000m나 되는 고원지대다. 해수면으로부터 1,000m나 높은 곳에 펼쳐진 사막지대다. 북한산 꼭대기보다 170m나 들어올려진 광야에서 무엇을 보겠다고 달려가는가. 고개를 떨군 사이 멀리 있던 산들이 바로 앞에 와있다. 저 산을 넘는가, 아니다 길이 산을 돌아간다. 길이 산을 돌아서 산줄기에 갇힌다. 그런데, 둘레의 산들이 모두 다 동산처럼 낮다. 해발 1,300m도 넘는 산들이 동산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머리의 바위들은 고산의 험상궂음과 품격을 지니고있다.
 넓데데한 큰산이 가로막는다. 한라산보다 높은 팔머산(Mount Palmer·2,045m)이다. 저 능선을 넘으면 데스밸리로 들어간다. 바퀴하나만 빠져도 하염없이 구를 것 같은 낭떠러지. 올려다보아도 내려다보아도 눈이 핑핑 도는 길을 오르느라, 튼튼하고 힘센 차도 그렁그렁 소리를 낸다. 반시간 이상을 그렇게 달려올라 능선에 섰다. 우리를 가로막던 팔머산 주봉은 오른 쪽에 있다. 한라산 정상보다 높은 곳에 섰는데, 고원지대라 그런가 고도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산머리 하나에서도 갖가지 빛이 난다. 칠면조 같다. 내 발아래 흙빛이 색소를 머금은 듯 붉다. 사진을 찍으려고 언덕 위로 올라가니 가시만 남은 인디고부시(Indigo Bush)들이 바짓가랑이를 당긴다. 아아, 이곳은 이 풀들의 땅인 것이다.
 아말고사산맥의 정점을 내려선 길은 또다시 꿈틀거린다. 납 광산이 있던 레드필드(Leadfield)역시 사람도 집도 없는 고스트타운이다. 사람이 파헤치고 어질러놓은 자리는 사람이 아예 살지 않았던 곳보다 어둡고 찜찜한 기운을 풍긴다. 이 황량하고 깊은 산 속에서 납의 무지개를 잡으러했던 사람들. 그 실패하고 떠나간 주민 중의 한 사람처럼 어깨가 처져서 차를 탄다. 이제는 자연만 보자. 자연 그대로의 데스밸리. 데스밸리 속의 라이프밸리만 보고 가야겠다.  
 
 

타이터스 캐년을 통과하며


 구절양장이란 바로 이런 곳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거대한 돌문으로 들어선 차가 막힌 듯 열리는 협곡 사이로 꼬불꼬불 내려간다. 한 덩어리의 물처럼, 물줄기에 떠밀린 물 덩어리처럼, 물을 떠밀고 가는 물 덩어리처럼, 꼬불꼬불 출렁출렁. 사막을 가로지르던 속도도 버리고, 사람과 길의 전설을 옮겨주던 농담도 버리고,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보는 기사 짐(Jim)의 옆얼굴을 잠깐 보니, 이 무겁고 큰 차가 거대한 물방울 같은 착각에 빠진다. 둥글고 둥근 물방울 속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던 하늘이 돌아오고, 캄캄하게 사라졌다간, 어느 틈에 부웅 떠서 높직한 이마 위에 푸른 가슴을 얹어놓는다. 돌아들면 오른 쪽 벽이, 돌아들면 왼쪽 벽이, 다가들었다 물러섰다 하며 온갖 무늬의 암벽들을 펼쳐놓는다.
 언제였을까? 이 메마른 골짜기를 가득히 채우며 좁은 골짜기 옆 암벽들을 허물듯이 큰 물이 흘러내린 때는? 휩쓸려 내려오는 큰 물에 아랫도리가 휘청 파인 바위 앞에 차를 세웠다. 얼마나 큰 물이 얼마나 끈질기게 지나갔기에 이처럼 물때가 앉고 많은 자갈이 깔렸을까?
 이 일대가 연 강수량 48mm밖에 안된다는 것은 낭설 아닐까? 단시간에 불어난 큰 물이 바위에 부딪쳐서 튕겨져 나올 때, 물에 실려온 흙과 자갈들이 건너편에 둑처럼 높이 쌓였다. 자연의 조화는 인간이 짐작할 수 없는 일이다. 그처럼 큰 물에 휩쓸리면 사람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좁은 계곡에서, 빛과 그늘이 무작위로 교차하는 협곡 안에서, 먼지를 풀풀 날리며 차를 타고 가다니. 내처 걷고 싶은 유혹이 전신을 휘감는다.
 이렇게 모퉁이마다 다른 그림이 펼쳐지는 타이터스캐년(Titus Canyon). 그 길이는 4마일 (6.5km)정도. 타이터스(Titus)란 사람이 처음 발견했다하여 발견자의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 타이터스는 광산 기술자였는데, 그는 이 골짜기에서 사라져버렸다 한다. 처남과 동료 한사람, 세 사람이 팀을 이루어 이 골짜기로 들어왔었는데, 같이 갔던 동료는 빈사상태에 빠진 채 2주 뒤 구출되었지만, 그와 처남은 행방이 묘연하단다. 타이터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골짜기에서 사라짐으로써, 데스밸리에 전설 하나를 추가한 셈이다.
  데스밸리는 남북으로 긴 골짜긴데, 그 동쪽 방호벽 구실을 하는 아마르고사 산맥에는 이름 붙은 캐년이 10여 개, 반대쪽 벽면을 이룬 페너민트산맥에도 16개의 캐년이 있다. 이밖에도 50여개의 하이킹 코스가 개척되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여행자는 두드러진 특징만을 가슴과 눈에 담아갈 뿐이다.
  빛과 그늘이 교차하는 협곡 밖으로 나서니, 햇살이 쏟아진다. 어렵게 산맥을 넘어온 길이 또 다시 황무지로 들어선 것이다.

 

스카티의 성(Scotty`s castle)

 
 해발 914m의 고원에 정성을 다해 지은 작은 성이 있다. 집이라기엔 규모가 크고 성(城)이라기엔 빈약하다. 이 황량한 사막에 이만한 집을 지은이는 정신병자가 아니면 사기꾼일 것이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서 천장과 문틀, 계단과 난간을 장식한 재목들과 그것을 다룬 솜씨, 집안 구석구석에 놓인 가재도구며 그 위치와 구조 품격 등을 살펴보니 집주인이 얼마나 이곳을 사랑하였는가 알 수 있다. 빛나지는 않으나 무한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집이다.
 스카티(Scotty)란 사람은 사막을 너무 좋아하였는데, 이 일대에 금이 나온다는 말로 여러 사람을 속이고 다녔다. 그 중엔 시카고에 사는 신흥부자도 있었는데, 그 부자는 스카티에게 속는 줄 알면서도 그의 재치와 사막을 좋아하게 되어 거금을 들여서 이 집을 짓게 했다. 그 부자의 이름은 존슨이었는데, 자신의 이름을 걸면 도둑들이 몰려올까 봐, 사기꾼 스카티의 이름을 따서 '스카티의 성'이라 불렀다. 존슨은 이 집에 머무는 동안 지병인 천식이 나아 20년을 더 살았다한다. 존슨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고, 이 집은 대부분 스카티에게 맡겨졌다. 이 성 위에는 큰 샘이 있어서 야자나무도 옮겨 심고 전기도 켜고 거목도 자라게 했다. 데스밸리는 자신을 너무 사랑한 스카티에게 물 있는 곳을 알려주었던 것이 아닐까? 이 성 위에는 그의 무덤이 있는데, 그는 죽어서도 그의 이름을 빌려준 이 성과 함께 데스밸리를 지키며 사는 셈이다.

 

유비히비 분화구(Ubehebe Crater)


 데스밸리 일대가 1,000m 가까운 고원이 된 데는 화산재도 다량의 일조를 하였을 것이다. 유비히비 분화구는 이 일대에 남아있는 12개의 분화구 중 가장 큰 것이다. 깊이 152m, 너비는 0.8km나 된다. 스카티스캐슬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니 언덕길이 나온다. 언덕 정점에 내려서니 세찬 바람이 분다. 아늑하기만한 분지 안에서 갑자기 바람 부는 날등으로 내몰린 셈이다. 그러나, 발아래 펼쳐진 거대한 구덩이를 보고는 바람 부는 것도 잊었다. 백두산 천지, 한라산 백록담, 제주도 산굼부리 등, 여러 종류의 분화구를 보았지만, 여기처럼 삭막한 곳은 처음 보았다. 주황빛 속살과 속땅을 태워서 하늘 가운데로 밀어 올린 불의 결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흙벽. 마치 몇 시간 전에 불길을 토한 곳처럼 모든 자국들이 선명하다. 물기 없이 푸석거리는 화산재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가볍다. 금방이라도 다시 터질 것 같은 형상으로 이 구덩이는 얼마나 오래 버텨온 것일까. 이대로 얼마나 더 버틸 것인가. 언제 다시 나머지 불을 쏟아낼 것인가. 내려 가보고 싶다. 저 마른 구덩이 안에서 유독 흰빛을 토하는 바위덩이까지.
 내려간다. 검고 동글동글한 화산재를 밟으며. 발목이 술술 빠진다. 뒤쪽 발을 떼기 무섭게 앞쪽 발이 술술 미끄러져 내려간다. 내려간다. 그러나 3분의 2쯤 내려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내려가기는 쉬워도 도로 올라가려면 시간이 몇 배나 더 걸릴 것이다. 우리는 이제 겨우 데스밸리의 북쪽 끝에 있다.
 차를 돌려 오던 길을 되짚어간다. 타이터스 캐년 입구를 지나 머드 캐년 쪽으로 내려가는데, 코요테가 한 마리를 우리를 보고 있다. 저 녀석은 아까 우리가 지나갈 때 보던 놈 같은데 또다시 나와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누군가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규정을 어기고 무엇인가를 던져준 게 아닐까. 한번이 아니고 여러 번. 인간의 양식에 맛 들린 코요테는 힘들게 사냥할 생각을 버리고 이처럼 지나가는 자동차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좋은 곳에서 배 고파요 배 고파요 하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리라.

 

190번 도로와 퍼니스크릭


 쭉 뻗은 포장도로! 그러나 복병처럼 솟아올랐다 풀썩 꺼지기를 되풀이한다. 작은 라스베가스라 불리는 래플린(Laughlin) 인근에도 이런 도로가 있었는데, 보름 전 다녀간 서부 여행 때 안내를 맡았던 교민 가이드는 청룡열차길이라 불렀다. 솟아오른 길을 깎아내고 꺼진 곳을 메워서 편편하게 만들지 않고 생긴 그대로 포장을 한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조심 없이 달리다간 전복하기 십상이니 천천히 가라. 이 길은 말없는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머드캐년 갈림길을 지나 190번 도로를 탄다. 스카티스캐슬에서부터 점점 고도를 낮추며 가는 중이다. 190번 도로는 데스밸리정크션(Death Vally Junction)이라는 마을 입구에서 127번 프리웨이를 만남으로써 끝나는 길인데, 이 도로 양쪽에 펼쳐지는 풍경들이 특히 아름다웠다. 우리처럼 북쪽으로 먼저 접근하지 않고 남쪽으로 들어올 경우 블랙마운틴(Black Mountain)의 아침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량하다는 말. 그밖에는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도로를 달리면서도 내 눈은 반짝인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산들의 나신. 사람 같기도, 짐승 같기도 한 모양들. 가식을 버린 얼굴이 더 아름답듯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산들이 더 아름답다. 정수리에 흰눈을 이고 서 있는 산은 멀리 있다. 발등 아래를 하얗게 드러낸 산은 가까이 있다. 오랫동안 버선 속에 감추어두었던 발을 햇볕 아래 꺼내놓은 것처럼, 징그럽게 요염한 산의 발치. 나무나 풀이 저 발등을 덮고 있었더라면 어찌 저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을까.  
 퍼니스크릭(Furnace Creek)에 닿은 것은 오후 4시경. 예전에 쓰던 마차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다. 오래 전부터 데스밸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해온 곳이다. 식당 여관 선물가게 주유소 등,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곳이다. 입구엔 거대한 팜트리가 서있는데, 그 나무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산 모양이 특히 아름답다. 바야흐로 블랙마운틴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근의 여관(Furnace Creek Inn)에 숙소를 잡아놓고 2∼3일 머물며 본다면 더욱 좋으련만, 해 지기 전에 배드워터에 닿아야 한다.  

 

배드워터에 비치는 산 그림자


 방죽인가 싶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아니다. 그 너머에는 또 다른 평원이 펼쳐져 있다. 고도를 낮추며 이어지는 길. 우리는 어느새 해수면(Sea Lavel) 아래로 들어서고 있다. 계곡은 패너민트산군 아래로 바짝 붙어서 이어지는데, 하얗게 반짝이는 것은 물결이 아니라 소금밭이다. 먼 소금밭이 내 발 아래로 들어올 때까지 차는 달려간다. 자갈 투성이 땅과 마른 잡초와 젖은 소금이 빚어내는 묘한 그림들을 보면서.
 우리가 달리는 만큼 그림도 움직인다. 새로운 그림이 다가온다. 길은 수없이 청룡열차를 타고 그때마다 내 몸은 앞뒤로 흔들린다.
 해야 지지 말아라! 해야 지지 말아라! 내 기도는 오직 한 가지 뿐이었으나, 배드워터로 내려오는 길은 예상 보다 멀다. 해는 어느새 데스밸리 최고봉 텔레스코프봉(Telescope Peak) 머리를 활활 태우고 있다. 오후 5시. 밝고도 붉은 후광을 두른 텔레스코프! 배드워터(Bad Water)에 드리우는 푸른 산 그림자. 사진을 찍기에는 부족한 빛이지만, 땅거미 갸웃한 시간에 만난 배드워터가 더 신비스럽다. 너무 밝을 때보다 활활 타는 산 그림자를 담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을 더하기 때문이다.
 소금밭으로 들어서서 몇 걸음 걸어본다. 드넓은 소금밭 여기저기에 물이 고여있다. 온 종일 달려와서 처음 만나는 물이다. 이 맑은 물에 무슨 독이 들었다는 걸까? 목마른 말(馬)도 먹지 않는다는 '나쁜 물(Bad Water)'. 깊이가 한 뼘도 안될 것 같은 배드워트(Bad Water)에 그림자를 눕혀본다. 내 침대(Bed)가 되기에는 너무 얕은 물이다.
 지는 해가 정면으로 비추고 있는 봉우리는 단테스뷰(Dantes View)다. 저곳에 서면 이 골짜기 안이 골고루 내려다보인다. 저 언덕 위까지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지만, 소금밭에 선 발길이 얼른 떨어지지 않는다. 해발 마이너스 86m나 되는 골짜기 안에서 젖은 소금을 밟으며 서성거린다. 86m 위쪽 벽면에 기대놓은 'Sea Level' 표지판. 그 작은 얼굴 위에 눈길 포개다 돌아선다.
 데스밸리에는 70여개의 하이킹 코스가 개척되어 있다. 아말고사 산맥과 패너민트 산맥이 수많은 캐년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곳을 둘러보려면 몇 년은 머물러야하리라. 아쉬운 마음 위로 해가 진다.  
 나는 살 수 없지만, 데스밸리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뱀, 코요테, 뿔도마뱀, 향기 없는 향나무, 인디고부시, 바위틈의 선인장…. 이곳이 너무 좋아서 스스로 묻힌 사람들…. 그들을 되살리는 전설들…. 이곳은 결국 그들의 라이프밸리. 나에겐 데스밸리(Death Valley)지만, 그들에겐 라이프밸리(Life Valley)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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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山》2002년 3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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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내용 중, 배드워터의 깊이 해발 마이너스 86m는 데스밸리 국립공원 자료에 따른 것입니다. 배드워터 안 팻말에는 85m로 나타나 있습니다. 자료를 만든 뒤, 소금 층이 1m 더 두터워 진 것인지, 환산을 잘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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