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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두만강 르포/두만강변 삼각구도 속에서 백두산까지  

연해주~두만강 르포

두만강변 삼각구도 속에서 백두산까지


           
                                                                   글·사진 이  향  지

연해주에서 만난 한국, 그리고 고려인
러시아로 왔다. 중국 길림성 방천(防川) 이후의 두만강 하류지역을 보기 위해서다. 연해주 상공으로 들어서자, 나목들의 숲과 무수한 호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얼음이 얼어서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내려, 시계바늘을 한 시간 앞으로 돌렸다. 미래의 마중을 받은 것처럼 가슴이 뛴다. 극동대학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뜻밖에도 기숙사 안에는 우리 유학생들이 많다. 모두들 밝고 열심히 하고 있다.  
러시아에서의 첫 밤이 캄캄하던 날개를 접으며, 새로운 태양을 띄워 올렸다. 마음은 두만강으로만 달려가는데, 하루 더 기다리란다. 베르홀야크 학장을 따라 한국학대학 강의실 순례를 했다. 칠판에 적힌 우리말. 열심히 배우고 있는 러시아 학생들. 도서관 서가에 꽂힌 우리 책들. 제법 넓은 태권도장. 곳곳에서 만나는 태극기. 이념의 벽도 국경의 벽도 점점 허물어져 가고있다. 다만, 우리가 러시아를 파고드는 속도보다 러시아가 우리를 파고드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다.
두만강 하구를 보려면 하산으로 가야한다. 하산은 두만강변 군사지역이다. 허가 없이는 출입이 불가능하다. 하산행 허가를 받을 때까지, 시내 구경을 나섰다. 러시아는 여행자도 거주지 증명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박비탈리와 송빅토르가 안내를 맡았다. 극동대에서 한국문화사를 전공하고 있는 고려인 학생들이다. 손을 잡아보고 볼을 쓰다듬어 보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신한촌이다. 신한촌 '서울거리'. 항일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던 곳. 역사학자 장도빈 선생도 이곳에서 살았다.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했다. '서울거리' 지번이 적힌 문패를 단 집이 단 한 채 남아있다. 언덕 위에서 사진을 찍는데, 바닷바람이 떠밀어 쓰러질 것 같다.
이 바람찬 언덕에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내 동포들이 살았다. 1937년 호열자를 예방한다는 핑계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태워져 강제이주 당하고 말았다. 이 바람찬 언덕에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이 서있다. "재 러·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들에게 역사인식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 탑을 세운다"니, 콧날이 시큰해진다.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를 거쳐가며
셋째 날 아침, 드디어 허가를 받았다. 하산까지만 다녀오란다. 하산에서 두만강 하구까지는 16.5km밖에 되지 않는데, 40리 남짓한 그 길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산에는 러시아와 북한을 연결하는 단 하나의 국제철교 '우정의 다리'가 있다. 근접촬영도 안 된다. 이마저도 내 순수한 목적과 탐구심을 아름답게 받아들인 극동대학의 배려와 협조 덕분이다. 그럼 나는 무엇 하러 러시아까지 왔나. 하산과 인접한 곳이 방천(防川)인데, 나는 44일 전 그곳까지 다녀왔다. 러시아로 오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나머지 구간, 그것을 보러왔는데, 내 희망은 출발도 하기 전에 꺾이고 말았다.
나는 분단국 남쪽에서 분계강(分界江)을 보러온 사람. 제냐, 안드레이, 데니스, 3명의 러시아 학생이 나를 에워싸고 동행한다. 러시아의 젊은이들에 둘러싸인 나. 우정어린 보호와 감시를 동시에 받고 있구나. 바람은 차를 날릴 듯 거세고, 눈 내린 길은 얼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산까지는 300km 남짓. 왕복 600km의 길을 이런 속도로?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크라스키노 부근까지 배를 타고 갈 수도 있다는데, 그 길도 나를 외면했다. 창 밖의 설경은 아름답다. 말없는 자연은 국적과 국경을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수리스크와 하바롭스크 등지로 통한다는 대로를 벗어나자, 길은 서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우수리스크에는 '유즈노 우수리스크 성터'와 '우수리스크 절터' 등의 발해 유적이 남아있다.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연해주 700리 땅을 거저 얻은 것은 1860년의 일이다. 영국·프랑스·네델란드 같은 서방열강들이 영토확장에 혈안이 되어 동진정책을 쓰던 때. 제정러시아도 같은 정책을 쓰고 있었다.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시키던 해, 제정러시아는 영·불과 청나라 사이를 조정해 주(는척하)고 우수리강(烏蘇利江) 동안(東岸)을 뭉텅 얻었다. 이때, 우리의 녹둔도도 러시아 영토가 되고 말았다(현재 러시아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두만강 하구 하중도들이 모두 우리 쪽에 소속되도록 국경선이 표시되어 있다. 삼형제도로 이름이 바뀐 섬이 녹둔도인지, 귀환 여부가 궁금하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두만강 하구의 군사요충지를 잃었고, 러시아는 두만강 하류쪽 17km를 접경함으로써, 우리의 새로운 대안국으로 등장했다.
1860년은 철종 11년. 무능한 임금과 외척의 발호로 백성은 굶주리고 민란이 계속되던 때. 굶주림과 압제를 견디다 못한 변경민들이 자석에라도 끌린 듯 두만강을 건너서 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하던 때. 세계는 문명을 향해 빠른 속도로 개방을 하는데, 우물 속에서 자족하며 쇄국만 고집하던 작은 나라는, 신식무기와 야망으로 무장한 이웃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두만강 북안(北岸)의 간도(間島). 우리 선조들이 피땀으로 개간한 땅도 일제의 야망의 제물이 되어 '남만주철도부설권'과 교환되어 청국령(淸國領)으로 귀속되고 말았다. 1909년 청·일 사이에 맺은 '간도협약'의 결과물. 간도로 건너간 동포들은 중국국적의 조선족으로 남았고, 연해주로 건너간 동포들은 고려인(까레이스키)이 되어 지금도 떠돌고 있다. 한 많고 사연 많은 두만강변으로, 나는 가고 있다.    
가장 큰 다행은 눈이 그친 것이다. 국경지대로 통하는 길목에 검문소가 있다. 러시아의 검문은 철저하다. 본네트 뚜껑을 열고 엔진 넘버까지 확인한다. 두만강이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맑고 바람도 잔잔하다. 포시에트로 통하는 갈림길을 보내고, 크라스키노 쪽으로 달려간다.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는 돌아올 때 둘러볼 것이다. 포시에트에는 고려인들이 많이 살던 '연추'라는 마을터가 있다. 가는 길에 들렀으나 러시아인들은 모두 모른다고 했다. 크라스키노 해안에는 발해의 성터가 남아있다. 일본과 신라 등을 상대로 한 발해의 해상 교역도 크라스키노를 기항지로 삼았다.  
크라스키노에서 하산까지는 기차로 45km 정도. 러시아쪽 민간기업이 백두산관광을 추진중이다. 그 성사여부는 미지수지만, 속초에서 배를 타고 크라스키노로 와서 기차로 갈아타고 두만강을 건넌다는 것이다. 크라스키노에서 중국령을 거치지 않고 북한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은 하산과 선봉을 연결하는 '우정의 다리'뿐이다. 두만강에 걸쳐져있는 10여 개의 다리 중 가장 하류에 있는 마지막다리이자, 북한과 러시아 사이의 유일한 다리. '우정의 다리'를 건너서 북한 영내로 들어선 기차는 두만강변을 따라서 은덕∼새별(구 경원)∼온성∼종성∼회령∼무산 등을 거쳐가거나, 동해안을 따라서 나진∼청진 등을 거쳐가거나 간에, 기존 철로를 이용하여 함경북도와 량강도 구내를 지나가야 한다. 북한이 과연 백두산 하나로 인하여 그 넓은 구간 그 깊숙한 속내들을 개방할 것인가.

포시에트만과 두만강 사이의 충적지와 호수들  
포시에트만 안쪽의 해안선은 깊은 호를 그리며 육지를 파고들었다. 예베진노예 호수를 만날 때까지, 길은 바다를 왼쪽에 두고 이어진다. 거대한 물주머니 둘레를 돌고 있는 것 같다. 기차 선로도 가까웠다 멀어졌다하며 하산 쪽으로 같이 간다. 길은 넓지만 비포장이다. 포시에트만 입구는 몇 겹의 곶(串)들이 천연방파제를 만들고 있지만, 태평양의 바람은 차고 강하다. 니스키곶 옆을 지날 때는 자동차가 흔들릴 정도다.    
포시에트만에서 두만강변에 이르는 습지에는 수많은 호수가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있는 시전평(時錢坪), 납길평(納吉坪)이 바로 이 일대일 것이다. 조선조 말기, 굶주림에 시달리던 변경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와서 빈땅을 개간했다는데 이 평야가 바로 그 땅들이 아닐까. 처음엔 농사만 지어서 돌아가곤 했으나, 러시아의 요구로 정착하여 러시아국적을 취득해야 했다. 그렇게 일군 농토를 등지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강제로 태워졌던 것이니…. 호수 주변 습지에는 무수한 물길이 나있고 마른 풀들이 빽빽하게 우거졌다. 수면은 반쯤 얼었다. 나머지 땅은 나직한 구릉지대다. 구릉지대를 돌아설 때마다 바다가 활짝 열렸다 멀어지곤 한다.
대동여지도에는 여덟 개의 동그라미를 모아서 그려놓고 팔지(八池)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이 일대가 호수의 밀집지대임을 일찍이 증명한 셈이다. 러시아 지도에서 보는 하산·로도스·쁘찌취예·골루비노예·말로예·크루그로예 그리고 바다와 통하는 레베트나야·레베진노에·삐에르바야쁘라또까·프따라야쁘라또까 등이 바로 팔지(八池)에 속하던 호수들이 아닐까? '삐에르바야 쁘라또까'는 '첫 번째 호수', '프따라야 쁘라또까'는 '두 번째 호수'라니 말이다.
'쁘찌취예'라는 호수가 바다처럼 푸른 물을 담고 우리 앞에 나타나자, 길은 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새(鳥)'를 뜻하는 쁘찌취예는 팔지 중에서도 가장 크다. 바다와 갈대, 호수만 보이던 눈에 제법 높직한 산 하나가 들어찬다. 높이는 464m, 러시아 이름은 '빠바로뜨늬이' 직역하면 '회전산정'이다. 우리 식으로 부르면 두리봉이나 삼각봉. 회전산정 등마루 너머는 중국령이다.  
산은 더욱 낮아져서 언덕처럼 퍼지고, 언덕마저 멀찍이 물러나는 곳에서 황량한 평야가 길을 열었다. 강 건너편 산머리가 실루엣처럼 다가오다 낮은 언덕 뒤로 숨는다. 얼마쯤 더 가자 높직한 망대 같은 것이 보인다. 드디어 하산에 도착한 모양이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 세 나라의 변경이 첨예하게 만나는 곳. 경계의 눈길이 쉬지 않고 번득이는 곳. 깊숙한 국경지대 삼각구도 속으로 나는 자동차에 앉은 채 들어섰구나.

북·러·중 경계표석과 세 겹의 시간 속에서
하산호를 바라보며 두만강변까지 왔다. 한 가닥 좁은 길이 강둑을 따라 이어지는데, 녹슨 철조망이 가로막는다. 버드나무 잔가지들이 얼기설기 우거져서 강물을 가렸다. 둑 아래선 두만강이 흐르고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 대연지봉 동북쪽 2,261m봉에서 발원하여 537km(필자가 잰 도상거리 553.5km에서 우정의 다리 하류쪽 16.5km를 제외한 거리)를 흘러온 강물이다. 바로 내 발아래서 흐르는 강. 그 흐름조차 볼 수 없구나. 둑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가장자리에 삼각기둥 표석이 있다. '조선/러시아/중국'명이 한 면씩을 차지하고 있는 경계표석이다. '1999'라는 숫자가 선명하다. 놀라워라 이런 것을 보게될 줄이야. 개구멍처럼 뚫린 철조망 저쪽 물가에도 똑같은 것이 보인다. 삼국 경계의 진짜 배꼽점은 흐르는 강심(江心)에 있다.  
삼각기둥 모양의 표석이 상징하는 팽팽한 삼각구도. 조금만 건드려도 챙챙챙 소리가 날 것 같은 트라이앵글 속. 세 나라가 두만강과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우정을 지탱하고 있는 현장. 그 중심점 가까이에 내가 서있다. 그러나 이 삼각표석 배꼽점을 에워싼 시간들은 각각 다르다. 연해주 시간에 맞춰놓은 내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지만, 강 건너 우리 땅은 낮12시, 한 겹 철조망 너머의 중국 시간은 오전 11시다. 경계표석 하나를 배꼽점으로, 세 겹의 시간이 서로 다른 언어로 '현재/현재/현재'를 외치며 똑딱거리고 있다.
내 어깨는 갈수록 무거워진다. 자동차는 밋밋한 언덕배기를 오르고 있다. 철조망은 바짝 붙어서 우리 길을 따른다. 철조망 저쪽은 중국 땅 팡촨(防川)이다. 철조망과 철조망 사이에 거무튀튀한 비석 같은 것이 보인다. 저것은 '토자비(土字碑)', 아니 '투즈파이(土字牌)'의 뒷모습이다. 청나라 덕종 12년이던 1886년에 세웠다. 1860년 북경조약(청·로조약)을 맺어 연해주 700리 땅을 러시아에게 떼어준 지 26년 후의 일. 역사란 영광과 비참 중 어느 쪽도 편애하지 않고,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을 표적을 남겨 나중 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된다. 우리에게는 '투즈파이'라는 중국명보다 '토자비'로 알려져 있는 물건. 규방에서만 늙은 아낙처럼 겹겹의 철조망 속에서 물 때 앉은 모습이긴 하지만, 오늘 나는 저 표석으로 인해 내가 서있는 곳을 알았다.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서 차를 세웠다. '우정의 다리' 철골이 윗부분만 보인다. 아치형 철골 너머로 하얀 강이 보인다. 저 하얀 강 하류에는 푸른 바다가 가득 들어차 있을 것인데, 태양을 안고 보기 때문인지 눈만 부시다. 길옆 철조망 저쪽에 있는 높직한 망대는 중국 것이지만, 강 건너 마을과 산자락들은 우리 것이다. '우정의 다리'를 건너간 기차가 제일 먼저 닿는 곳. 두만강역 뒤편의 산은 두리봉(178m)이다. 백두대간 설령봉에서 분기한 장백정간, 그 끝머리에 솟아있는 산. 조는 듯 희미한 저 산줄기를 따라가면 장백정간이 바다 속으로 잠기는 서수라곳에 닿는다. 두리봉에서 서수라곳까지의 분수령은 불과 42km. 지금 서수라곳 파도엔 무슨 바람이 섞여 있을까?
하산을 떠난다. 하산에서 더 이상 내가 볼 것은 없다. 혹시나 하고 눈길을 달려왔지만, 혹시나 하고 검문소를 찾았지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늘 못 본 16.5km는 통일 후의 숙제로 남긴다. 하산까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감사해야하겠지. '우정의 다리'는 나를 위해 지어진 이름은 아닌 것이다.  
내 몸은 자동차에 실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고 있지만, 내 마음은 두만강 줄기를 거슬러 백두산으로 향한다. 백두산에서 '팡촨'까지, 아니 러시아의 하산 우정의 다리 앞에서 백두산까지, 1300리가 넘는 두만강 물길. 중국도 러시아처럼 닫혀 있었더라면 길고 긴 두만강을 어찌 다 볼 수 있었을까?

팡촨에서 백두산까지 두만강 물길을 거슬렀다  
팡촨(防川)의 강변길은 두근두근 아름다웠다. 중국은 팡촨 일대를 '防川風景區'로 지정하여 사람과 차량을 상대로 입장료도 받고, 하산과 나눈 언덕에 높직한 망대와 음식점 건물을 지어 하산 일대를 손바닥 안처럼 들여다본다. 하산과 팡촨, 선봉을 하나의 삼각표석 위에 포갤 수 있는 우정은 서로의 힘이 팽팽할 동안만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은덕군 원정리와 쵤허(圈河)를 잇는 원정다리를 건너다보며 엉성한 흙더미 위에 앉아 쉬기도 했다. 따판링(大盤嶺)을 넘을 때의 먼지와 아득하던 마음. 징신(敬信) 일대에서 만난 노천 탄광. 훈춘 외곽에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관문, 장령(長嶺)에서 만난 바람. 훈춘(琿春) 서쪽 씨워이즈(西威子) 강변에서 건너다본 새별군(구 경원). 강 안의 수많은 모래섬. 강 건너 온성을 보려고 양수이(凉水) 일대를 이틀씩이나 헤매던 일. 온성 외곽에 피라밋처럼 쌓여있는 석탄산을 건너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던 일. 우리 국토의 최북단인 풍서리의 모습.  두만강과 해란강이 만나는 뚜먼(圖們)의 두물머리에서 바라본 황혼. 이런 것들은 뚜먼(도문)까지의 두만강 하류를 거슬러 오르면서 만난 감격들이다.    
뚜먼(도문)에서 무산에 이르는 두만강 중류에서는 가슴 아픈 풍경을 많이 만났다. 남양과 강양 사이에서 번지던 산불. 남양∼강양∼중성∼삼봉리에 이르는 산비탈의 다락밭. 카이싼툰(開山屯)에서 룽징(龍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짱으로 지도에도 없는 길을 찾아낸 적도 있었다. 회령 건너편 싼합(三合) 들판에서는 국적을 바꾸면서도 간도(間島)를 지키고 살아온 조선족 농부들을 만났고, 무산 부근을 지날 때는 한 마을에서 배추를 캐는 날, 산 너머 산 너머 모든 마을이 같은 날 배추를 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무산에서 건너왔다는 탈북아들을 만났을 때였다. 또 하나의 안타까움은 뚜먼(도문)에서 무산에 이르는 두만강 중류가, 개산툰 제지공장과 무산일대의 탄광 폐수로 거품이 일고 뻘물처럼 흐려있던 점이다.
상류로 갈수록 강폭이 좁아져서 가슴이 더 두근거렸다. 나직한 집들과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강바닥 돌들에 부딪친 물결이 새하얀 포말을 날리며 흘러내리는 모습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두만강 물길 중, 흐르는 강심(江心)을 국경선으로 삼기 시작하는 석을수(石乙水)는 두 번을 보았다. 석을수 옆의 '조·중21(2)호 경계비. 백두산에 세워진 북·중 두 나라간의 마지막 경계비를 등지고, 원지에서 흘러내리는 홍토수(紅土水)도 보고, 장백산맥을 넘었었다. 1712년 청나라측이 세운 백두산 정계비 상의 내용 중, '동위토문(東爲土門)' 즉 "동쪽은 토문강으로 경계를 삼는다"는 바로 그 강줄기, 우도바이허(五道白河)를 만났을 때, 내 심장은 절정을 뛰고 있었다. 드디어 백두산, 얼어붙은 장백폭포 앞에 섰을 때, 나는 백두산과 우리를 향하여 물을 수 있었다. 이 드넓은 땅 이 넉넉한 물길로부터, 왜 외면 당해야 했었는가.
이제 나는 돌아가는 길 위에 있다. 압록강 끝에서 두만강 끝까지, 길고 긴 변경답사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사이, 여름은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다녀보면 안다. 돌아갈 수 있는 내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든든하고 큰 행복인가.
------------------------월간 <<산>>, 2000년 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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