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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이향지의 北·中·러 변경 답사기(3)  

[월간중앙] 2000년 1월호
압록∼두만, 北·中·러 변경답사기  

두만강 1천 3백 리에 아리랑을 띄우고



이 향 지

********************************前文
두만강은 아름답다!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굴곡이 심하고 강폭이 넓은 하류엔 수많은 沙丘, 협곡과 평야가 번갈아 나타나는 중류엔 빼어난 암벽들과 높직한 '덕(德)땅'들, 상류는 백두용암지대 高原의 밀림 속을 콸콸 소리내며 흘러내린다. 상류의 물빛은 너무나 푸르러 검은 빛이 돈다. 두만강은 살아있다! 두만강 물소리에서는 새하얀 포말이 날린다! 길은 대부분 강물에 바짝 붙어서 이어지고 있었다. 두만 강변엔 이쪽에도 저쪽에도 우리 동족들이 살고 있다. 내가 도시에서 사느라 까맣게 잊어버린 우리네 삶의 옛 모습. 내가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돌아보지 못한 우리네 역사의 그늘들. 두만 강변에서는 그것들을 더 가깝게 만났다.
豆滿江은 세 차례에 걸쳐 답사하였다. 鴨綠江과 연계하여 '白頭山∼茂山'에 이르는 두만강 상류지역을 一見한 것이 그 첫 번째였고, 2차 답사 때는 '북·중·러' 3국 경계가 되는 '防川'에서 백두산까지 중국 쪽에서 답사 가능한 두만강 물길 전 구간을 거슬러 올랐다. 물길이든 산길이든 거슬러 오르면서 보는 것이 더 자세한 利点도 있지만, 그 끝을 먼저 보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는 旅程이 내 앞에 있었다. 결과, 백두산을 한번 더 볼 수 있었다. 3차 답사는 러시아 쪽에서 이루어졌다. 沿海州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防川'과 인접한 국경 마을 '핫산'을 찾아갔던 일이다. '핫산'과 '두만강역'을 연결하는 국경철교 앞에서, 더 이상의 진입을 거부당한 채 돌아서야 했다. 두만강 하구 쪽 16.5km구간을 통일 후의 숙제로 남겨둔 점이 못내 아쉽다. 적막하리만큼 눈부신 평화 속에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國境! 내가 거쳐온 邊境이란 대부분 그런 곳이었다. 그 긴 길, 그 애간장 타는 물목들을, 나 혼자 어떻게 헤쳐 왔을 것인가.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 드리며, 부족한 글을 맺는다.

****************************************本文
松花江과 豆滿江을 가르는 分水嶺을 넘으며
백두산에서 내려와서 얼도바이허(二道白河)에서 자고, 다시 백두산으로 들어왔다. 늦여름 태양은 아침부터 공기를 달구어 내 몸의 물기를 앗아간다. 밀림 속으로 곧게 뻗은 길 한 가닥. 앞서가거나 마주 오는 차가 많아서 먼지가 앞을 가린다. 그런 길을 20분쯤 달려서 '長白山'으로 통하는 큰길을 등졌다. '長白山' 갈림길에서 허룽(和龍)까지는 277km. 먼지는 사라지고 숲 속 길은 조용한데, 햇볕은 점점 뜨거워진다. 우리가 굳이 이 길로 들어선 이유는 두만강을 보고 떠나려는 것이다. 목마름이 슬슬 도질 무렵 때맞춰 계곡을 만났다. 물을 본 일행들이 엎드려서 목을 축이고, 빈 물병들을 채웠다. 백두산 물은 안 마신다고 버티던 나도 마셨다.
우리가 마신 물은 쑹허장(松花江)의 지류인 '싼도바이허(三道白河)'다. 두만강과 쑹허장 수계를 가르는 장백산맥은 밋밋한 언덕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나가면서도 그것이 산맥인 줄 모른다. 나는 47일 뒤 이 길을 되짚어오면서 그것을 확인했다. 장군봉 쪽에서 흘러오는 '우도바이허(五道白河)'도 확인했다. '우도바이허'는 백두산 장군봉 쪽에서 흘러오는 물줄기다. 쑹허장 지류 중 가장 동쪽에 있는 것으로, 압록강의 반대편 산기슭에서 시작된다. 1712년 청나라의 주장대로 세운 백두산 정계비는 이 '우도바이허'와 압록강 물줄기를 가르는 분수령 상에 세워졌던 것이다. 정계비에 표시된 '東爲土門' 즉, "동쪽은 토문강으로 경계로 삼는다"는 위치와 내용대로라면 이 물줄기가 토문강이다. 그러나 우리 영토는 이 물줄기로부터 동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장백산맥, 지금 중국이 영액령(英額嶺)이라 고쳐부르고 있는, 펑퍼짐한 산줄기를 넘어 두만강 본류까지 축소되었다.
'분수령에 경계를 정한 뒤로 우리나라는 '토문'의 원류를 능히 끝까지 찾아서 본래의 땅을 회복한 일은 없었다. 청나라의 세력이 바야흐로 강해져서 토문 남쪽의 '성진(城鎭)'은 예전처럼 철수하지 않았다. 다만 상류 남쪽의 언덕에 혹 청나라의 숨어있는 백성이 있으면 매양 데리고 돌아가더니 함풍(咸豊) 말년에 아라사 사람들이 토문의 하류를 엿보면서 그 남쪽 바다를 낀, 한가하고 넓은 땅을 개간하였다. 우리나라 백성이 흉년으로 인하여 들어가 살았다. 이로 인해서 변방의 금령(禁令)이 점점 해이해지고, 남쪽 언덕을 점령하는 청나라 백성들도 점점 많아져서 객(客)이 도리어 주인이 되어 '수자리 사는 백성(戌民)'이 들어가 개간하는 것을 금하니, 정계(定界)의 공법(公法)이 어디 있는가 했다.(이범윤 "북여요선")'
이범윤의 글 중, 토문의 하류는 두만강하류, '咸豊 말년'이란 청나라 10대 임금인 문종 10년(1860), 청나라가 러시아에게 두만강 하류뿐만 아니라 '우쑤리강 동안을 뭉텅 떼어준(烏蘇里江 東岸 割與)' 일을 말한다. 함풍은 청나라 문종(文宗)대의 연호이고, 문종은 1861년에 죽었다. 1860년은 우리의 철종 11년에 해당된다. 1860년은 청나라가 영·불의 침입을 받고 북경까지 함락 당한 다급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의 녹둔도(鹿屯島)도 함께 러시아로 넘어간다. 러시아는 소원이던 부동항을 확보하고, 우리와도 국경을 접하게 된다. 동북쪽 해안 땅과 큰 바다를 잃어버린 청나라는 상대적으로 약세에 있던 우리 쪽으로 눈을 돌리고, 동북쪽 변경의 간도(間島, 또는 墾島)를 확보하려고 우리 백성들을 내몰고 국경을 다시 분명히 하자고 제안해 왔다.
청나라는 정계비 상의 '土門'과 '豆滿'이 같은 말이라고 고집하였고, 우리는 안변부사 이중하(李重河·1864-1917)를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 정하여 두만강의 원류를 모두 답사하여 '토문'과 '두만'이 서로 다른 강이라고 강변하였다.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음력10월의 깊은 눈 속에서 청나라 측의 방해를 받으며 정계비가 있는 곳까지 목숨을 걸고 두만강 줄기를 따라 오른 일은 대대로 귀감을 삼을 일이다(이중하의 "백두산일기" 참조). 그렇게 확인한 정계비의 위치와 내용, 우리 백성들이 이미 개간해서 살고 있는 점 등을 들어 항변했으나, 양쪽의 의견이 팽팽하여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우리의 국력은 더욱 쇠잔해져서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고, 우리 선조들이 피땀 흘려 개간한 간도는 1909년(융희3년) 9월8일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따내기 위해 일제가 청나라와 맺은 '간도협약'에 의해 청나라의 영토로 규정되고 말았다.  

豆滿江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어디로 흘러가는가?
백두산 화산재 비탈을 푹푹 파며 지그재그로 내려오느라 불붙은 듯 목이 탈 때, 내 목마름 달래주던 들쭉열매들을 기억한다. 나는 그렇게 따기 어려웠는데, 저 여자들은 어떻게 저렇게 많이 땄을까? 우리 동포는 아니고 만족(滿族)들이다. 긴 머리를 땋아서 늘어뜨렸다. 차림은 꾀죄죄해도 젊고 예쁘다. 수줍음 속에 숨은 아름다움이 있다. 커다란 들통 속에 담긴 들쭉열매. 팔려고 딴 것이라면 팔아주자. 그런데 한 보시기만큼도 5위안, 한 대접만큼 되는 것도 5위안을 받겠다한다. 같이 와서 땄으니 똑같은 액수의 돈을 벌어가겠다는 것이다. 산열매 따는 아낙네들 사이에도, 이웃 간의 우정은 저렇게 유지되는 것이구나. 손을 흔들어주고 헤어지는 마음이 흐뭇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우울 속으로 빠져들었다. 백두산의 어디에 저런 열매가 있는지를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 여자들. 저들은 저렇게 백두산을 차지했다.  
장백산맥을 넘어 조금 더 와서 들쭉열매 따러온 여자들을 만났고, 조금 더 와서 원지(圓池)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했다. 우리가 달려온 길도 좁지만 원지로 들어가는 길목은 더 좁고 나뭇가지들이 불쑥불쑥 내밀었다. 원지는 두만강 수계 중 가장 상류에 위치한 천연호수다. 그러나 원지가 두만강의 발원지(池)는 아니다. 늪지 식물들이 호수주변을 빽빽이 메웠다. 촘촘하게 심어진 잎갈나무숲은 멀찍이 둘러서서 둥그스럼한 병풍을 만들었다. 고요하고도 아늑하다. 그러나 '天女浴躬池(텐뉘위궁스)'라 쓰인 넓적한 표석은 늪지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킨다. 우리 발음으로 읽으면 '천녀욕궁지'. 오녀봉의 경우처럼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는다. 갈 길이 바쁘지 않더라도 이내 돌아서게 만든다.  
얼마쯤 달렸을까? 숲 속 길옆에 압록강변에서 무수히 보던 것과 같은 경고판이 서있다. 마약·밀수 등을 금한다? 이 깊은 산속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경고판에서 머지 않은 숲속에 21(2)호 경계비가 있다. '압록강↔송화강' 분수령 상에서 본 것처럼 '中國 21(2)'와 '조선 21(2)'라는 글자가 양면에 새겨져 있다. 21(2)호 경계비에서 숲길을 따라 100m쯤 내려가면 작은 아이도 건널 수 있을 만큼 가느다란 물줄기가 있다. 그러나 물은 깊다. 돌아드는 지점은 웅덩이 같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 부근이 바로 안심수와 석을수가 합류하는 지점일 것이다. 안심수와 석을수가 합류하는 지점으로부터 두만강 강심(江心)을 국경선으로 삼았고, 21(2)호 경계비가 백두산에 세운 조·중 경계비중 가장 마지막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은 천지(天池)로부터 직선거리로 31km 떨어져 있다. 우리가 천지 남릉에서 본 4호 경계비로부터 무려 18개의 경계비를 세우면서 내려온 지점이다. 백두산에 세워진 마지막 경계비, 21호 경계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웅덩이 같은 강물 저쪽에 21(1)호 경계비가 있다. 북한쪽이므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조금 높은 곳으로 후퇴해서 보면 보인다.
지금 우리 앞의 석을수(石乙水)는 비록 국경선을 겸했지만, 두만강의 원류는 아니다. 우리 앞의 '안심수+석을수' 합수지점으로부터 조금 더 내려가면 원지에서 흘러온 홍토수(紅土水)를 합류하고, 거기서 한참을 더 흘러간 뒤에야 두만강 원류인 신무수와 합류하게 된다. 숲이 가로막고 국경이 분명치 않아 저 물길을 따라 내려가 볼 수 없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안심수와 석을수 합수지점을 본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두만강의 원류를 흔히 석을수(石乙水)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두만강은 백두산 천지 둘레의 장군봉에서 발원하지 않고, 장군봉에서 백두대간 분수령을 따라 동남쪽으로 5.5km쯤 내려온 대연지봉(2,359.5m), 대연지봉에서도 동북쪽으로 1.3km 떨어져 있는 2,261m봉, 2,261m봉 산비탈 중에서도 동남쪽 비탈에서 발원한다. 대연지봉에서 2,261m봉 쪽으로 가지를 치는 산줄기가 바로 쑹허장과 두만강 수계를 가름하는 장백산맥이다.
두만강의 원류인 신무수 역시 상류는 건천으로 시작한다. 2,261m봉으로부터 17km를 내려오면 백두산 아래 첫 동네 신무성이 있고, 신무성으로부터 8km정도를 더 흘러와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석을수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 지점은 장백산맥상의 1,476m봉에서 발원한 석을수가 안심수와 홍토수(紅土水)를 차례로 받아들이며 16km를 흘러온 지점이고, 2,261m봉에서 발원한 신무수는 석을수보다 9km가 더 긴 25km를 흘러온 지점이다. 그러므로 석을수를 두만강의 원류라고 주장하는 이론들은 수정되어야 한다.
두만강 원류인 신무수와 석을수는 다같이 장백산맥에서 발원하지만, 석을수가 발원하는 1,476m봉은 장백산맥 분기점인 대연지봉으로부터 18.8km나 떨어져 있다. 대연지봉 주봉과 그 동북봉인 2,261m봉 사이가 1.3km인 점에 비하면, 무려 15배나 멀리 뻗어간 지점에서 발원하는 셈이다. 두만강은 이처럼 이름 없는 봉우리에서 발원한다. 남한강(南漢江)이 오대산 아닌 금대봉에서 발원하듯, 북한강(北漢江)이 금강산 아닌 옥밭봉에서 발원하듯, 그리고도 두 물줄기가 합하여 수많은 사람을 살게 하고 울게 하였듯, 이름 없는 봉우리에서 첫 걸음을 시작한 두만강도 그치지 않고 흐르고 흐르며 우리 민족을 살게 하고, 또 울게 하였다.
대연지봉(2,359.5m) 동북쪽 2,261m봉에서 발원한 두만강은 우리나라 쪽에서는 소홍단수·서두수·연면수·성천수·보을천·회령천·새복천·소운북천·성천·아오지천 등을 합류하고, 중국 쪽에서는 홍기하·해란강·밀강·훈춘강 등을 합류하여, 함경북도 선봉군 서수라곳과 러시아 연해주 핫산 남쪽 충적지 사이로 빠져나가 동해가 된다. 두만강의 총 길이는 521km로 알려져 있지만, 필자가 재어본 도상거리는 553.5km에 달했다. 나는 이 물길보다 몇 배나 먼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다.

白頭山 물을 다 쏟아낸 뒤에야 다시 일어서서
21(2)호 경계비를 등진 뒤로는 지루한 숲길이 계속되었다. 나는 내내 눈을 감고 달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눈이 번쩍 뜨이는 물소리! 열린 차창으로 훅훅 끼쳐드는 싱그러운 물 냄새! 물빛은 너무 푸르러 검은 빛이 돈다. 강바닥엔 돌이 많은지 비늘을 번쩍이며 꿈틀거리는 강물은 거대한 청색뱀 같다.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두 줄기가 합류하는 지점이다. 오른쪽의 좁은 물길은 석을수 같고 왼쪽 물은 신무수 같지만 확인 할 길은 없다. 길 왼편에는 답답할 정도로 높은 산이 다가와 있다. 저 산은 아마 장산령(長山嶺)일거다. 거대한 청색뱀 같은 강줄기는 꿈틀꿈틀 흘러서 이내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조금 내려가니 막대기 바리게이트가 막는다. 중국공안당국 광평분소 앞이다. 여권을 확인하고, 두만강 가로 나가는 것을 허락 받았다. 강폭은 20m도 안될 것 같은데, 나무로 부교를 만들어두었다. 건너편에도 똑같은 구조물이 만들어져 있다. 한쪽에서 보면 다리 같지만 중간이 끊어져 있다. 끊어진 틈 사이로 막혔던 강물이 더 세차게 흘러내린다. 판자 한 장만 걸쳐도 두 부교는 하나의 다리로 이어지게 생겼다. 강 저쪽에는 북한 초소가 있다. 숲이 짙어서 보이지 않지만 몇 명의 군인들이 우리를 건너다보다 들어갔다. 우리 일행들은 말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초소 앞을 통과한 뒤로는 햇볕이 더욱 뜨거워졌다. 열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열기가 내 육신을 잠의 수렁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를 삼키는 거대한 늪. 나는 그 속에서 끝없이 끓어오르며 목이 말랐다. 백두산 그늘을 벗어나서 광핑(廣坪)∼충선(崇善)∼더화(德化)를 거쳐 허룽(和龍)에 도착할 때까지 잠깐 잠깐 눈을 뜨고 강 건너 산천을 건너다보았을 뿐, 묶인 사람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망령을 깨우고, 꼭꼭 숨겨두었던 백두산의 신비를 벗기고, 마시지 말아야 할 물을 마신 죄 값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돌아온 나는 압록강과 송화강 물을 다 쏟아낸 뒤에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날 그렇게 두만강을 등지던 날로부터 44일 후 나는 또 다시 두만강변으로 왔다. 이번에는 나 혼자 바다를 건넜다. 이곳은 북국(北國). 여름으로부터 갑자기 겨울로 굴러 떨어졌다. 백두산에는 하얀 눈이 덮였다한다. 도문시 월청향 마패촌에 여장을 풀고 봥촨(防川)을 다녀온 뒤 백두산까지 이틀을 거슬러 올랐다. 꺾어지고 휘도는 물굽이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눈 도장을 찍으며 왔다. 강 건너 마을들이 너무 가까워, 잠시도 눈을 돌릴 수 없던 길이었다. 막대기 바리게이트 부근에서 끊어진 필름을 다시 이었다. 기세 좋게 흐르는 강은 여전히 성긴 숲 저쪽에 있다. 내 몸은 백두산으로 가지만 내 기억은 길고 지루한 백두산 그늘을 벗어나서 먼 하구로 간다.    

보호자 없이 강을 건너온 脫北兒들을 만났다
백두산 그늘을 벗어나서 맨 처음 만나는 마을이 광핑이다. 광핑에서 다둥툰(大洞屯)까지는 산굽이를 멀리 돌아 넘어야 한다. 광핀 강변에서 길이 끊기기 때문이다. 광핑 강변에는 말쑥한 타일 건물이 서있다. 북한과 중국간의 국경 관문이자, 양국 간에 범법자를 송환하는 장소로도 이용된다고 한다. 탈북자들도 체포되면 광핑을 통해서 송환된다고 한다.  
노과(蘆果노과)에서 덕화(德化)로 통하는 언덕길에서 함경북도 무산(茂山)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다시 강변으로 내려와서 숭선(崇善)으로 거슬러 오르고 있을 때, 강 건너 마을이 너무 가까워 가슴이 마냥 두근거릴 때, 세 소년이 웅크린 채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두만강을 건너온 탈북아(脫北兒)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내가 탄 자동차는 급정거를 하고 아이들이 있는 곳까지 뒷걸음을 쳤다. 나는 차에서 내리지 말 것을 명령받았다. 강 건너 도로가 너무 가깝고 이쪽 길에도 저쪽 길에서도 변방을 감시하는 순찰차들이 계속 지나다니는 와중이었다.
무산에서 두만강을 따라 올라와서, 숭선으로 건너왔다는 세 아이. 제일 큰 아이는 15세, 다음 아이는 13세, 작은 아이는 12세라 했다. 중국 돈을 달라고 했다. 허룽(和龍)까지 나갈 버스 값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들에게 사과 한 알씩밖에 주지 못했다. 그 어린것들이 그 꾀죄죄한 모습으로 자동차로 달려도 힘들고 어려운 길을 아무 지닌 것도 없이 걷는 것을 보고도 사과 한 알씩밖에 주지 못했다. 돈을 주어도 허룽 가는 버스를 탈 수 없을 뿐더러, 그 아이들은 곧 잡힐 것이고, 몸수색을 당해서 중국 돈이 나오면, 그 돈의 출처가 밝혀지면, 자동차 몇 대 달리지 않는 변경도로, 국경선을 따라서 달리고 있는 우리 처지까지 난감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의 절박함보다, 내가 가야할 길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배고프고 돈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내가 건네준 사과 세 알. 그것은 내가 살아있는 날까지 그 아이들이 생각날 때마다 사과하고 갚아야 할 무거운 짐으로 남았다.

회령에서 무산까지 거슬러 오르던 이야기
함경북도 회령시를 건너다보려면 용정시(龍井市) 삼합진(三合鎭) 들길로 들어오면 된다. 그러나 삼합쪽 들판이 낮고, 회령 시가지도 고도가 낮은데, 회령과 삼합 사이에는 회령천이 두만강에 합류하는 넓은 모래톱이 가로막는다. 삼합쪽 둔치도 낮고 넓다. 농로에 서서 보려면 방풍림이 가로막는다. 그러나 건너편 산꼭대기에 단정하게 세워진 구호판을 보고, 너무 멀어서 내용은 읽을 수 없어도 저곳이 바로  회령이구나, 저 아래 더 많은 지붕들이 있겠구나 느낄 수는 있다.
회령(會寧) 건너편 싼합(三合)에서 무산(茂山) 건너편 덕화(德和)에 이르는 길에서도 싼합(三合)∼조동(朝東) 구간은 우회해야 한다. 싼합 일대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들판에서도 조선족, 가게에 가도 조선족, 길을 가다가 길을 물을 때도 중국말이 필요 없었다. 삼합에서 조동으로 넘어오는 길에 나는 한 여인을 태워 주었다. 작은 꾸러미를 들고 하염없이 걷고 있는 여자. 삼합진 청소5대에 사는 전금자(58)씨였다. 그녀의 집으로 따라가서 잠깐 앉아 있는데, 이웃집 정고분(74) 할머니가 왔다. 이 마을 전체가 조선족이라고, 길이 바빠 수인사만 주고받고 헤어졌지만, 거기서 나는 내가 어릴 때보던 농촌 풍경을 보았다.
새로운 땅을 찾아서 간도로 건너온 사람들. 국적은 바뀌어도 농토를 떠날 수 없어 이국 땅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은 사람들. 나는 그 거친 손을 마주잡고 잠깐 끌어안았을 뿐, 끌어안고 볼을 잠깐 부벼 보았을 뿐, 우리만 고국에 남아서 살고 있어서 미안하다는 말은 차마 못했다.  
산비탈을 넘어온 길이 갑자기 과수원으로 들어서면 유선이 가까워 졌다는 증거다. 과수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언덕 끝으로 나오면 강 건너 비탈에 깔끔한 마을이 나타난다. 회령시 유선동,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유선 노동자구'다. 유선을 왼쪽에 두고 우회전 한 길은 샤마라이촌(下馬來村) 앞을 지나오게 되는데, 거기도 조선족이 많이 산다. 샤마라이촌 부근의 산 모양이 참 아름답다. 샤마라이촌에서 조금 더 부유(富裕)라는 곳인데, 거기서 건너다보는 산모양은 더 아름답다. 두만강의 절경이 슬슬 시작되는 것이다. 부유를 지나 조금 더 달려와서 물목이 한번 휘돌 때, 닭볏처럼 생긴 산꼭대기를 보였다. 가까이 올수록 무등산 입석대나 해금강 총석정 같은 총석들이 성곽처럼 벌려 섰다. 더 가까이 와보니 산성인 모양이다. 더 가까이 와서 보니 너무 높아서 아득히 우러러 보인다. 돌아와서 조사해보니 회령시 성북동 소재 운두산성(雲頭山城)이다. 고구려 때 쌓은 석성으로, 둘레가 6km. 고구려 성의 배치, 국토방위체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여진족들이 거주할 때는 오국성(五國城)이라 불렀기에, 오국성이라 표기한 지도들도 있다. 천혜의 경관을 이용해서 외침을 막던 전방 보루이자, 유사시의 피난처. 일사천리로 달리는 길에서 그것을 알아보고 사진까지 찍었으니, 이 길 내내 보이지 않는 행운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 분명하다.  
바이진(白金)에 도착할 무렵 땅거미가 지고, 발전소 뜰을 지날 때는 깜깜해졌다. 발전소를 지나 허룽으로 넘어 나오는 산길에서는 자전거를 끌고 반대편에서 올라 오고있는 동포를 만났다. 허룽의 불빛이 보이는 언덕을 내려올 때, 나는 큰 나무에 헝겊조각들이 너덜거리는 당산나무를 보았다. 지금도 우리네 시골 마을 입구의 지킴이 나무 같은 것이 거기도 있었던 것이다. 내 발아래 땅을 왜 우리가 잃었다고 하는 지를 실감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허룽에서 자고 어둠 속에서 지나간 길을 밝은 햇빛 속에서 돌아 나왔다. 어젯밤 두만강을 등졌던 용화까지 되돌아 나와서 다시 두만강변을 달려왔다. 용화∼상화∼대동∼용연∼추전∼덕화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두만강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때로는 멀고 때로는 물길에 바짝 붙어서, 지금은 비록 건너갈 수 없어도 우리 땅과 우리 민족이 건재함을 나는 느꼈다. 그리고 무산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섰을 때, 다닥다닥 붙어있는 지붕빛은 검고 굴뚝들은 높지만 노천 광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빛은 비록 검지만, 이토록 가까이에서 무산을 다시 바라볼 줄이야! 이 언덕에서 지난 여름 끊어졌던 필름이 다시 이어졌다.  
회령과 마주보는 삼합에서 개산툰(開山屯)까지는 지도 상에는 길이 없다. 그러나 개산툰 강변에서 조금 우회하면 다시 강변 길로 나오게 된다. 나는 엉성한 교통지도는 믿지 않는다. 길이 막히면 돌아설 각오를 하고 강변까지 나가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도에도 없는 길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길을 달려 삼합까지 왔다. 이 길이 있는 줄 모르고 용정까지 우회했더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개산툰에서 삼합에 이르는 강변길에서는 삼봉리와 학포리 일대를 건너다 볼 수 있다. 개산툰 강변에는 북한의 삼봉리와 연결되는 다리가 있다. 도문시 건너편 남양동에서 남양∼강양∼중성∼삼봉리로 이어지는 강건너 산비탈은 대부분 다락밭으로 변해버려서 안타깝다. 중성 일대의 경관이 좋아서 바라보는 마음은 기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 저 산비탈들이 다시 푸르러 지고, 어린 아이들이 강을 건너오지 않아도 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춥고 메마른 北國의 기후 속에서, 내 동포들은
도문시(圖們市) 월청향(月晴鄕) 마패촌(馬牌村)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온성군 강양동 쪽 산봉우리를 마주 볼 수 있는 곳이다. 마패촌은 발해 시기의 24개돌이 있던 마을이다. 지금 그 돌들은 15개만 남았는데, 훼손을 막기 위해서 뽑아서 마을회관에 보관중이라 한다. 마패촌에서 도문시까지는 20분쯤 걸린다. 지금은 도문쪽이 더 번화하지만, 발해 때만해도 마패가 더 중요한 길목이었던 것 같다. 마패의 공기는 아늑하다. 길떠난 사람이 따뜻하게 묵어갈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이틀 동안 머무는 곳은 동포 신영철씨 집. 윗목과 아랫목만 구별되어 있을 뿐 부뚜막과 방바닥이 붙어있는 '원룸'에서 그 가족들과 내 일행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나란히 누워서 잤다. 남편은 깊게 파인 아궁이 앞으로 내려가서 불을 지피고, 아내는 무쇠솥에 음식을 만든다. 가장 큰 솥에는 세숫물을 데우고 작은 솥에는 밥이나 국을 끓인다. 아이는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손님들은 밥짓는 주인 옆에 앉아 사과를 깎는다. 칸막이가 없으니 비밀도 없다. 비밀이 없으니 돌아누울 이유도 없다. 춥고 메마른 북국의 기후 속에서 내 동포들은 이렇게 핏줄을 지키고 살아남았다.
마패촌에서 중국 영토의 동북쪽 변경의 끝자락, 퐝촨을 찾아간다. 성공여부는 미지수다. 모두들 일어나서 새벽밥을 먹었다. 마패에서 도문까지는 길이 넓다. 온성군 강양동이 가까울 때의 강변은 아주 아름답다. 강양동을 등지고 한참 내려가니 길 맞은 편에 말쑥한 빌딩들이 나타난다. 얼마쯤 더 달리자 시내로 들어왔다. 시내를 가로질러 해란강을 건넜다. 해란강에 걸쳐진 다리는 '뚜먼빠이에쵸(圖們八 橋)'. 뚜먼빠이에쵸를 건너서 훈춘으로 가는 길목에서는 두만강과 해란강의 합수머리를 쉽게 볼 수 있다. 해뜰 무렵의 강물 빛도 아름답지만, 해란강과 두만강 두물머리는 노을이 더 아름답다. 두 강줄기를 아우르며 붉어지는 강물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동서로 이어지는 길에서 노을을 안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뚜먼(圖們)∼양수이(凉水)∼밀강(密江)∼영안(英安)∼훈춘(琿春)으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몇가지 볼거리가 있다. 양수이 부근 길 오른쪽(남쪽)에는 '굴륭산유지'라는 표석이 있다. 한글과 한문으로 쓴 안내문에는, 이 일대가 약 2천년 전 옥저로부터 발해∼요∼금에 이르는 거주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옥저와 발해 사이의 고구려는 빠져 있다. 아무튼, 굴륭산(窟隆山)은 저 멀리 두만강이 휘돌아나가는 강변에 있다. 모습이 특이해서 금방 눈에 띈다. 굴륭산 유지가 있는 길에서 강변으로 내려가면, 우리 국토의 북쪽 땅끝인 풍서동(豊西洞)을 볼 수 있다. 북위 43도 0분 36초. 한반도의 가장 북쪽 끝자락이, 굴륭산 부근에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살만한 곳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오래 전 사람들의 삶터는 새로운 도로와 철길에 밀려 두 덩어리의 표석으로만 남았다.
양수이 부근에서 둑방길로 들어서면 함경북도 온성(穩城)을 건너다 볼 수 있다. 첫날은 실패하고 다음날 아침 다시 와서 그 길을 찾았다. 옥수수대궁만 쓸쓸한 밭둑 사이로 좁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지나오니 저 멀리 온성 시가지가 건너다 보인다. '양수이'와 온성을 연결하던 다리는 폭격을 맞은 것인지 중간 중간 끊어졌다. 온성 시가지 외곽에는 피라밋처럼 쌓아올린 석탄더미가 산을 이룬 것도 보인다. 양수이와 온성 사이의 강변은 낮고 물줄기도 좁고 버드나무 같은 것들이 잔뜩 뒤덮고 있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서는 온성 모퉁이에 세운 횃불모양의 상징탑도 보인다. 모든 것이 보인다. 너무 멀어서 사람들의 모습만 보이지 않을 뿐.
온성 앞을 흘러온 두만강물은 이 산자락을 휘돌아 밀강(密江) 쪽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강줄기는 길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 뒤로 숨어버린다. 밀강(密江)에서 봥촨 부근 쵤허(圈河권하)까지는 일부러 길을 벗어나서 찾아 내려가지 않으면 두만강을 만날 수 없다. 훈춘 시내에서 서남쪽 씨워이즈 강변으로 나가면 경원(慶源)을 건너다 볼 수 있는데, 만족들이 주로 사는 우쟈즈(五家子)∼싼쟈즈(三家子)∼싸타즈(沙 子)∼씨워이즈(西 子) 마을을 지나 두만강변으로 나가는 길은 안내자 없이는 찾기 어렵다. 씨워이즈 강변은 드넓은 초원이다. 강폭은 넓고 강물은 잔잔하다. 강물 속에는 수많은 모랫등이 드러나 있다. 강물 저쪽은 함경북도 경원군, 이제는 새별이라 고쳐 부른다. 중국지도는 '新星'이라 고쳐 놓았다.
내가 씨워이즈 강변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 너무 멀고 햇빛을 마주하고 바라보아서 그런가, 새별 쪽은 때아닌 아지랑이 속에 있다. 도강을 금지하는 한글 경고판은 글씨가 말갛게 지워진 채 하얀 가슴팍만 드러내고 있다. 이 강변에는 만족(滿族)들이 주로 거주한다. 저곳에 있었을 한글 글씨는 어느 손안으로 날아갔을까? 걸어서 건너기는 어려워 보여도, 말을 타면 쉽게 건널 수 있었을 것 같다. 내 발 앞의 얕은 물목을 건너 얼마나 많은 마적들이 건너갔을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했을 것인가. 그러나 이곳 역시 지금은 눈부신 평화, 쌀쌀한 바람 속으로 차를 몰고 나온 데이트 족만 보인다.
훈춘은 우리 발음으로는 혼춘, 조선조에는 후춘(後春)이었다. 고구려 때는 책성(柵城)이 있었다. 훈춘의 공기는 나쁘다. 훈춘 일대는 석탄이 흔한 곳. 화력발전소 굴뚝에서는 흰 연기 검은 연기가 뭉글뭉글 솟아올라 기세 좋게 하늘을 덮는다. 훈춘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장링(長嶺)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관문이다. 퐝촨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곳을 둘러보았다. 훈춘에서 장링으로 통하는 길은 넓은 포장도로다. 중국의 관광객들도 장링 관문을 통과하여 러시아로 들어간다. 허락을 받아 입장료를 지불하고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러시아의 국기가 펄럭이는 경계선까지 들어가 보았다. 산등성이라기엔 너무나 펑퍼짐한 땅. 그러나 이 펑퍼짐한 분수령의 마루금을 경계로 아무르강과 두만강 물줄기가 갈라진다. 아무르강은 중국명으로는 흑룡강,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송화강이 목단강과 합류하여 러시아의 동해안 하바로브스키까지 흘러가서 바다가 된다. 장령의 바람은 드세다. 장령에서 두만강 쪽으로 흘러가는 강 이름은 훈춘강, 대동여지도에는 '後春江'이라 표시되어 있다. 내 발길 닫는 곳마다 두만강은 살아있다.
훈춘을 등지고 징신을 지나 따판링(大盤嶺)을 넘어왔다. 따판링 산길은 꽤 높고 구불구불하다. 징신(敬信)과 쵤허(圈河) 사이의 따판링 구비에는 두 개의 터널을 만들고 있다. 마무리 단계에 있으므로, 따판링을 넘지 않고도 퐝촨으로 갈 수 있는 길이 곧 열릴 것 같다. 그러나 먼지를 마시며 산등성에서 익어 가는 어린 떡갈나무 단풍빛을 보며, 지나가는 이런 길이 오히려 좋다. 퐝촨은 일반인의 출입이 어려운 군사지역이다. 징신에서 퐝촨에 이르는 길이 일반에게 열린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변방부대 순찰차가 수시로 지나다닌다. 나는 차안에 여행가방조차 싣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불심검문을 받더라도 투명한 행장으로 대처하려는 것이다.

원정촌이 건너다 보이는 강변 흙더미 위에서 사진을 찍으며 쉰다. 따판링을 넘어와서 내가 본 것 중 가장 깊고 넓은 두만강을 만났기 때문이다. 쵤허(圈河)와 함경북도 선봉군 원정촌을 잇는 '원정다리' 부근은 강변의 모래밭이 눈부시게 희다. 저쪽 강변엔 쪽배를 타고 노를 젓는 사람이 보인다. 고기를 잡는가. 그물을 던졌는가. 배는 저쪽 강변에서만 왔다갔다할 뿐 강 복판까지는 나오지 않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강폭이 넓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저 배는 나룻배가 아니라, 강물 속에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어부의 것이다.
원정촌 남쪽 산은 패연봉(284.8m), 북쪽 산은 서봉봉이다. 패연봉과 서봉봉 사이 안부를 넘어가면 아오지천 합수목이 있다. 아오지(阿吾地)란 여진족 말로 '불붙는 검은 돌'이란 뜻이다. '불붙는 검은 돌'이란 말 그대로 석탄. 오늘 아침 훈춘에서 퐝촨으로 오는 길옆에도 노천탄광이 몇 군데 있었다. 소규모이긴 하지만 대지의 표면까지 솟아오른 화석층들이 경이롭기만 했다. 아오지는 지금 어떤가? 거기에도 내가 본 것 같은 노천탄광이 있는가? 땅속 몇백m까지 내려가야 석탄을 만나는 캄캄한 탄광지댄가? 어떤 사람들이 그곳에서 석탄을 캐고 있는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아오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오지리'는 이제 학송리로 이름이 바뀌었다한다. 아오지가 속한 은덕군은 본래 경흥군이었다.
경흥(慶興)땅은 이성계의 선조 목조가 전주∼삼척을 거쳐 옮겨 살던 땅이다. '목조는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를 지나서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 이르러 거주하였다. …원나라에서 <목조를 위해> 알동 천호소(斡東千戶所)를 세우고 금패(金牌)를 내려 주어 남경등처(南京等處)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알동(斡東)은 남경(南京) 동남쪽 90여 리(里)에 있으니, 지금의 경흥부(慶興府) 동쪽 30리에 떨어져 있다. 알동의 서북쪽 1백 20여 리에 두문성(豆門城)이 있고, 또 그 서쪽 1백 20여 리에 알동 사오리(斡東沙吾里)가 있으니, 사오리(沙吾里)는 여진(女眞) 말로서 참(站)이다. 참(站)이 관동 알동의 관내(管內)에 있는 까닭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경흥뿐만 아니라 함경도 일대는 발해 멸망 후 여진족들이 주로 거주했다. 고구려 땅을 수복하려던 고려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땅은 물론, 함경도 땅마저 다 회복 못한 채 멸망했다. 이성계가 조선 태조로 등극한 후에야 저 땅은 우리 것이 되었다. 이성계의 선조들이 함경도 일대에서 여진족들과도 친교를 맺으며 영향력을 행사해온 공덕이 쌓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선조들이 머물던 땅을 지키려는 조선왕들의 의지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강물은 흐른다. 모래땅과 모래땅 사이로 길을 내며, 강변 흙더미 위에 나를 앉혀둔 채 무심하게 흘러가기만 한다. 나는 일어서서 강물 따라 내려간다. 원정다리를 등진 후로는 두만강과 내가 나란히 흐르게 되었다. 길 오른쪽에선 두만강이, 길 왼쪽에선 러시아와 국경을 가르는 나직한 철책이 가까웠다 멀어졌다한다.
퐝촨은 러시아와 북한 사이를 송곳날처럼 가르며 파고든 중국 영토다. 호수 중간을 가로지르는 도로(道路)만 중국령인 곳도 있다. 중국은 이 도로 하나로 러시아와 북한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며 틈을 파고들었다. 반면 러시아는 하구쪽 17km를 차지함으로써 중국이 두만강 북쪽을 독점하는 것을 막았다. 그 17km로 인하여 중국령은 동해로부터 후퇴하였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두 강대국의 절묘한 영토 분할,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이익을 도모하는 절묘하고도 팽팽한 군사력과 외교의 묘수, 그 현장을 보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지금 이곳엔 눈부신 평화가 존재하지만, 서로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동안만 우정은 유지될 것이다.

중국 영토의 동북쪽 끝자락 '투즈파이' 앞에서
내가 서있는 곳은 '퐝촨(防川).' 드넓은 중국 영토의 동북쪽 끝이다. 도문(圖們)에서부터 아침을 깨우며 달려온 차가 철책에 막혀 멈춰 섰다.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둑 위에는 중국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土字牌'가 서있다. 빗돌의 높이는 1m정도, 넓이는 30∼40cm 정도 되어 보인다. '투즈파이'의 마지막 글자는 '碑'가 아니라 '牌'다. 비석이 아니라 표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깃 사람들은 '투즈파이(土字牌)'라 부르지 않고, '투즈베이(土字碑)'라 부른다. 철문 안에 있어서 만져볼 수는 없지만 그 빛깔과 모습으로 세운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투즈파이'를 둘러싼 철망 너머는 러시아 땅이다. 청나라 초에 20여명의 일꾼들이 저 비석을 지고 바다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날씨는 덥고 돌은 무거워서 아무데나 세워놓고 도망을 쳐버리는 바람에 중국 영토가 동해안까지 뻗지 못했다고, 조선족 동포들까지 애석해한다. '투즈파이'가 서있는 곳에서 바다까지는 17km 남짓. 바다 쪽 17km는 러시아가 차지했다. 20명의 장정들이 40리 남은 길이 멀고 무겁다고 지엄한 임금의 명령을 저버리고 바닷가에 세워야 할 표석을 저곳에 세웠을까만, '북·중·러' 3국 경계의 깊숙한 속내까지 자국 국민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오히려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중국의 자신감과 저력에는 절로 고개가 끄떡여진다.
다 열어놓고 보여줄 것은 보여준다! 그리고 수익을 올린다! 우리는 이 길로 들어오면서 어른 한 사람 당 20위안씩, 자동차는 10위안의 입장료를 지불했다. 그러나, '투즈파이' 앞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망대 같은 건물이 있어서 그 위에 올라 가보려 했다. 그러나 초병의 놀란 목소리가 먼저 뛰어왔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바리게이트를 열어둔 길이 아무나 환영하는 줄 알고, 변방부대 안뜰까지 차를 몰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투즈파이' 옆의 망대가 중국 공안 당국의 최 전방 초소인 줄도 모르고 올라가서 바다를 보자고 했다. 무지(無知)란 때론 뜻밖의 소득을 올리기도 한다. 내 행색이 경계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주제가 못된 점도 도왔겠지만, 여자 남자 어른 아이로 구성된 동포들이 든든한 울타리였다. 초병은 먼 출구까지 따라와서 우리를 내몰고 바리게이트를 단단히 쳤다. 내 카메라 속의 '투즈파이'는 무사하다. 나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정자가 있는 언덕 위로 올라왔다. 아침에 도문을 떠날 때만해도 퐝촨까지 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행운의 도움으로, 나는 이 닫힌 곳에서 '투즈파이'까지 만났다.  
방천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두만강. 지척에 있어도 함부로 건널 수 없는 국경선에는 아련한 물안개 같은 것이 감돌고 있다. 강 건너 마을은 함경북도 선봉군의 외곽지대인 '두만율리'다. 두만강역 뒤편의 두리봉(178m) 능선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에 감싸여 있다. 강 건너 선봉군 일대는 분단 전까지는 경흥군에 속했다. 지금은 '나진·선봉'을 연계하는 자유무역지대로 발돋움 중이다. 국경철교와 연결되는 두만강역 일대도 그 전진 기지에 속할 것이다. 러시아의 '포시에트'와 중국의 '훈춘', 북한의 '나진·선봉'을 연결하는 팽팽한 삼각구도를 흔히 '트라이앵글'이라 부른다. 러시아·중국 경계에서 내가 본 '투즈파이'는 바로 그 중심점 쯤에 위치할 것이다. '투즈파이'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조·러·중' 3국 경계 표석이 있기 때문이다. '투즈파이'는 러시아와 북한의 틈을 송곳날처럼 파고 든 바로 그 날끝 자리에 서있는 셈이다.  
정자가 있는 언덕 너머는 러시아 땅 '핫산'이다. 고구려와 발해 때는 끝간데 없이 펼쳐진 저 구릉, 저 호수들마저 우리네 것이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벌판에도 가을은 와서 풀잎마다 누렇게 단풍이 들었다. 내 몸은 녹슨 철조망 앞에 발이 붙은 듯 서있다. 하산과 두만강 역을 연결하는 국경철교는 하염없는 햇빛 속에 앙상한 철골을 드러내고 있다.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기차라도 지나갔으면! 개 짓는 소리나 닭 우는 소리라도 건너왔으면! 무심한 강물은 거울처럼 반들거리며 바다를 향해 구불거린다. 내 희망의 트라이앵글은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꺾으며 끊임없이 쟁쟁 울어댄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머물 곳을 찾지 못한 내 시선은 반들거리는 강줄기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서 바다 앞에서 무수한 모래섬을 만난다.

 강물에 떠내려온 모래들이 사는 땅, 녹둔도를 생각하며
 '투즈파이'가 서있는 곳에서 17km 정도 하류로 내려가면 녹둔도(鹿屯島)가 있다. "녹둔도는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 간에 체결된 북경조약에 의해 러시아에 귀속되었다. 이 섬의 북쪽 일부(200m)가 우리 땅과 붙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우리 수군들이 보루를 쌓고 야인들의 동태를 감시했고, 이충무공도 녹둔도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녹둔도는 우리 영토였다. 녹둔도와 붙어있는 조산리에는 1586(선조 19년)년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과 싸워서 대승을 거둔 승전비까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녹둔도에는 '큰 섬'이라는 뜻이 담겼다지만, 내 생각에 녹둔도란 '강물에 떠내려온 모래(沙)들이 머무는(屯) 섬' 즉, 모래들의 주둔지, 강 하구의 충적지를 뜻한다고 본다. '모랫섬' 즉 '沙+섬'이 '사슴'으로 둔갑을 하고, '沙島'가 '鹿島'로 점잖게 변한 예로 보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제작 근세지도를 보면 '핫산' 동남쪽 충적지에 '鹿島'라는 지명이 크게 얹혀 있는데, 그곳은 섬이 아니라 늪지와 석호를 끼고 있는 충적지다. '녹둔도'란 강 하구의 한 개 섬만을 일컫는 이름이 아니라, 핫산 일대의 충적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었던 것 같다.  
들은 바에 의하면 압록강 안의 하중도(河中島)들은 모두 우리 것이고, 두만강 안의 하중도들은 모두 중국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두만강 하구의 하중도들도 대안국인 러시아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1976∼79년 사이에 북한과 러시아가 공동 제작하였다는 현대지도에는 두만강 하구의 큰 섬에 '녹둔도' 대신 '삼형제도'란 이름이 붙었고, 강심에 표시하는 국경선도 러시아 쪽으로 옮겨져 있다. 지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녹둔도가 우리 쪽으로 되돌아와서 삼형제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거나, 우리 학자들이 녹둔도의 존재를 축소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도 두만강 하구 하중도에 '鹿屯島'가 표시되어 있다. 녹둔도 안의 ◎표시로 보아 성곽까지 있던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녹둔도가 속했던 '造山里'는 글자 그대로 산을 만든 동네다. 두만강 하구는 우리에게 없는 산을 만들어서라도 지켜야할 중요한 물목이었던 것이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해는 1861년. 청나라가 러시아에게 녹둔도를 넘겨주었다는 그 다음 해다. 대동여지도에는 녹둔도뿐만 아니라 핫산 부근의 산 이름 호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다. 우리와 상관없는 땅이었다면 김정호가 그런 무리를 했을 리 없다.
녹둔도가 우리에게서 떠난 1860년은 청나라 문종 10년, 영국과 프랑스가 북경을 함락하고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우던 해다. 그 해 청나라는 러시아에게 '녹둔도'가 아니라 '우쑤리강 동안(烏蘇里江 東岸 割與)'을 뭉텅 떼어 주었다. 그 조약(북경조약이 아니라 천진조약) 체결 1년 전인 1859년, 이미 러시아인들이 우쑤리강 남안(南岸)으로 이주 해왔고, 두 나라 사이에 경계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기도 했지만, 그 큰 땅을 떼어 줄만큼 큰 도움을 받았던 게 아닐까? 러시아는 이웃나라가 약하고 불행한 틈을 타서, 태평양까지 뻗었던 청나라 영토를 축소시키고 우리와도 국경을 접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청나라가 러시아에게 '우쑤리강 동안을 떼어줄 때' 우리가 잃은 '녹둔도'란 두만강 하구의 작은 하중도 하나에 그친 것이 아니라, 두만강 하구에서 핫산∼프디재지프에 이르는 충적지 전부를 딸려준 것이 아닐까?
동해까지 뻗쳐있던 영토를 줄인지 26년 후인 1886년 4월, 청나라는 조금 전 내가 본 그 자리에 '투즈파이'를 세운다. '투즈파이'에 새겨진 '光緖'란 연호가 청나라 12대 임금 덕종 때의 것이고, '광서 12년'은 서기 1886년이므로, '투즈파이'는 청나라 초기에 세운 것이 아니라 청나라 말기에 세운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가 공동 제작한 지도의 내용이 틀리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큰 땅을 잃고 작은 섬 하나를 돌려 받은 셈이다.
강물에 떠내려온 모래들이 사는 땅.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눈시울이 뜨겁다. 바람은 찬데 눈시울은 왜 뜨거워지나. 내가 서있는 언덕 뒤편에는 '투즈파이' 쪽보다 더 높직한 망대가 있다. 망대에서 감시하는 초병의 쌍안경이 우리에게서 떠날 줄을 모른다. 이 변경에서 나는 경계의 대상이 되는 이방인이다. 나는 이 변방을 벗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되기로 했다. 그 망대와 높이가 비슷한 음식점 옥상에서 나는 좀 더 먼 풍경을 바라보고, 퐝촨을 떠난다.  

러시아의 핫산, 국경철교 앞에서 돌아서며
퐝촨을 떠난지 39일만에 다시 두만강변으로 왔다. 러시아의 연해주 핫산. 중국 지린성 퐝촨과 인접한 국경마을 강변까지 달려온 것이다. 포시에트만의 바람은 차고, 크라스노예는 얼음이 얼고 있었다.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 핫산, 블라디보스톡 등지에 살던 카레이스키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뒤 조국 가까운 해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제 내린 눈이 쌓여 길은 미끄러웠고, 바람은 바닷 속으로 밀어 넣을 듯 세차게 불었다. 보내는 사람들은 걱정했다. 그러나 나는 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핫산까지는 300km. 같이 온 사람들은 4명이지만 국적 같은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다.
녹슨 철조망과 푸나무들이 우리 쪽 풍경을 가로막는 강변. 조·러·중 3국 경계를 표시하는 삼각기둥 표석만 보았다. 퐝촨 망대에서 건너다보던 '우정의 다리' 앞까지는 왔지만, 다리 아래 강물은 보이지 않는다. 나와 동행한 대학생들은 백계 러시아인. 극동대학 한국학대학 재학생들이다. '우정의 다리' 근접촬영도, 더 이상 하류로의 전진도 허락 받지 못했지만, 극동대학 한국학대학의 배려가 없었더라면 핫산까지 오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돌아서는 마음은 허전하다. 민간인의 순수한 의도조차 외면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해서 시계바늘을 한 시간 앞으로 돌릴 때, 나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날아온 사람처럼 가슴이 설레었었다. 눈이 내리고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 극동대학 기숙사에서 햇반을 데워먹으며 희미하게나마 품어보던 희망. 그것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러시아는 여행객조차 거주지 증명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기다려라!" 이것은 러시아로부터 들을 수 있는 가장 흔한 말이다. 떳떳하게 허가를 받아 볼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그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의 꿈이었다. 나는 오로지 순수한 희망 하나로 여기까지 달려왔었다. 이름 없는 산꼭대기, 단 한 방울에서 시작한 두만강 물은 어떤 곳에서 바다로 들어가는가, 그것이 보고 싶었다. 압록강 하구에서 두만강 하구까지 한줄기로 이어보고 싶었던 길. 마지막 관문에서 길이 막혀 돌아서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이 바람 찬 국경에서 더 이상 내가 부를 노래는 없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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