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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이향지의 北·中 변경답사기(2)  

[9912 월간중앙]
압록∼두만, 北·中 변경답사기

압록강 2천리를 거슬러 백두산에 올랐다



이 향 지

고구려의 옛 왕도 지안(集安)에서 나를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무덤들.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도 '古墓群(고묘군)'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조상숭배와 장의문화의 뿌리를 짐작케 하는 현장들이지만, 머지 않아 산 자들의 양식을 구하기 위한 농경지로 변하고 말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건 흙을 다져 만들었건, 비바람에 무너지고 도굴꾼들에 훼손당한 처참한 모습들이다. 옥수수밭이 사방에서 옆구리를 잠식해 들어가고, 쑥대·개망초·명아주·강아지풀 같은 잡초들이 키대로 일어서서 기어오르는 중이다. 무덤 속의 왕들은 알고 있을까? 영생하는 왕도, 영원한 왕국도 없다는 것을?
'산성하떼무덤'을 보고 돌아와 나는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밤이 가면 아침이 오는 법. 뜬눈으로 맞는 새벽 공기 속엔 알싸한 삶의 향기가 배어 있다. 날이 밝자 맨 처음 한 일도 무덤 방문이다. 여명 속의 지안(集安), 오퀘이분(五 墳) 5호묘와 4호묘를 찾아 문을 두드렸으나, 너무 일찍 왔기 때문에 무덤 안까지는 들어갈 수가 없다. 어제는 너무 늦게 도착하였고, 오늘은 너무 일찍 떠나는 탓이다. 5호묘 마당 안에서 무덤 둘레를 돌며 무성한 잡초만 잠깐 우러렀다. 고구려 미술의 백미로 꼽히는 백호·주작·현무·청룡 등…. 고구려 사람들의 정신과 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벽화들은, 굳게 닫힌 철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아쉽지만 당연한 일. 스쳐 가는 바람에도 쉽게 열릴 문이라면 그토록 긴 세월, 본연의 빛깔을 유지하며 남았을 것인가.

滿浦에서 中江까지, 雲峰湖를 우회하며  
내가 한 마리 물고기였다면, 백두산 기슭에서 지느러미가 돋아 드넓은 바다를 찾아 떠났던 물고기라면, 뱃속에 가득한 알을 낳으러 마지막 귀향 길에 오른 물고기였다면, 지안(集安)∼퉁화(通化)∼바이싼(白山)∼린장(臨江)으로 돌아가는 우회도로를 타지 않고, 압록강 줄기를 곧장 거슬러 오르고 있을 것이다. 수풍댐과 운봉댐의 옹벽이 아무리 두텁고 높아도, 수문 틈으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아무리 거세더라도, 내 뱃속의 알들을 내 고향의 수초 속에 낳고 죽겠다는 지고지순의 목표를 향해, 목숨을 건 유영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길에는 수많은 제약이 따른다. 물이 막으면 돌아가야 하고, 국적이 다르면 돌아서야 한다.
지안을 등지고 퉁화로 가면서도 내 마음은 고개 돌려 압록강변으로 향한다. 지안 시내에서 운봉댐 아래 청석진(靑石鎭)까지는 45km정도. 운봉댐 아래서 길이 막혀 같은 길로 되돌아 나와야 하므로, 왕복 90km. 비포장도로에서 한나절을 축내며 길 끝까지 다녀오고 싶어도 운봉댐 일대는 외국인 출입금지 구역이다. 그 강변 길을 등지고, 운봉호를 우회함으로써, 만포시와 자성군의 강변 마을들과 중강군 하류의 마을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흘러가는 강물을 막아 인공호수를 만들면, 상수원으로도 쓰고,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기르고, 전기도 생산하고, 호반 마을을 연결하는 뱃길로도 쓰고, 호수 주변의 경치를 파는 관광상품으로도 이용된다. 수풍호나 운봉호 같은 다목적댐들은 물을 소중한 자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이후, 인간이 자연을 지배해온 가장 보편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침 햇살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압록강 중류의 경관들을 미지의 세계로 남겨둔 채, 린장까지 우회해야하는 마음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고구려의 채석장, 五女峰을 스쳐가며
지안을 등지고 퉁화(通化)로 통하는 '303공로'로 접어들었다. 얼마쯤 달리자 봉우리가 아름다운 바위산 하나가 앞에 나타났다. 사진으로만 보던 칠보산을 닮았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우리 일행들은 이구동성으로 가리키며 보았다. 길은 점점 더 그 산쪽으로 가까이 다가갔고, 드디어 그 산밑을 돌아나가게 되었을 때, 길 오른쪽에서 널찍한 공터를 발견했다. '우니벙(五女峰)유원지' 안내판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산 이름은 '우니', 이 공터는 주차장이다. "오녀봉?" 어제 아침 우리가 보지 않고 지나쳐온 '우니싼청(五女山城)'이 바로 여기에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곳은 '환런(桓仁)'이 아니라 '지안(集安)', '졸본성'이 아니라 '국내성' 영역이다. 그러나 이곳 역시 고구려의 땅. 졸본성과 국내성은 불과 200∼30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웃에 있다. 주차장 정면에는 매표소가 있고, 매표소 너머에는 짙은 숲이 있다. 방문객은 우리뿐. 아침 숲을 흔드는 계곡물 소리가 청아하다. 주차장 측면에는 하늘로 통하는 듯한 돌계단이 곧추 서있고, 돌계단과 우리 사이에는 자물쇠를 채워둔 낮은 철책이 있다. 언제 무엇을 위해 쌓은 것인지 돌계단의 연륜은 꽤 깊어 보인다. 우리 발길을 가로막는 낮은 철책을 넘어 저 돌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면, 우리가 이리로 달려오면서 보았던 그 아름다운 산정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름으로 짐작컨대 오녀봉에도 졸본성처럼 산정에 호수나 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산의 본래 이름은 '오녀봉'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오녀산'과 '오녀봉'의 '五'라는 숫자와 '女'라는 글자에 담겨있을 수수께끼를 풀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우리나라에는 '옥녀봉(玉女峰)'이란 산이 많은데, 사람의 접근이 어렵고 모습이 빼어난 암봉(岩峰)에 흔히 붙인다. 중국과 우리의 정서가 달라서일까? '오녀봉'은 '옥녀봉'과는 느낌이 다르다. 환런과 지안에 왜 똑같은 이름의 산이 있는가. 고구려연구회 서길수 교수께 자문을 구하여, 오녀봉 아래엔 고구려 시대의 채석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오녀'라는 산 이름에서 내 직감이 제기하는 깊은 굴곡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가볍게 생각해 버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고구려문화유적답사"에도 '집안에서 통화로 가는 도로가에는 몇 가지 중요한 유적들이 있는데, 첫 번째로 꼽으라면 당연히 채석장 유적이다. …1981년 채석공들이 상록수교 동북쪽에서 산돌을 파내다가 큰 돌 몇 개에 구멍이 나란히 뚫린 유적을 발견했다. …전문가들이 자세히 검토해본 결과 여기서 나온 화강암의 석질이 고구려 때 세운 장수왕릉과 통구떼무덤의 석실에 쓴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1400∼1500년전 고구려 때 이곳에서 산을 깎고 돌을 캐내 국내성과 궁실 그리고 무덤들을 축조하는 데 쓰인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했을 뿐 '오녀봉'이란 산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이 일대는 고구려 700여년 중 가장 오랫동안 왕이 머물던 곳이다. 고구려(37-668) 멸망 후에는 당나라의 유린을 받았지만, 그 29년 후인 699년에는 고구려를 이은 발해가 이 지역을 회복하여 227년 동안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를 두었던 곳이다. 926년 발해의 멸망 후에는 거란의 말발굽이 지나갔고, 1616년 청나라(후금)의 건국과 함께 200여년 동안은 봉금 지역으로 묶여 사람이 살지 않는 빈땅으로 남아있었다. 그 200여년은 고구려와 발해의 뿌리를 먼곳으로 옮기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 봉금령 해제 이후 사람을 다시 이주시켜 살게 한지도 120여년이 흘렀다. 120여년 중 전반기 50여년은 청나라가. 그 이후 13년은 일제의 허수아비 만주국(1932-1945)이 거쳐갔고, 일제의 패망 후 이념을 달리하는 중국과 우리 사이엔 반세기에 가까운 단절이 있었다. 이 일대가 우리의 발길을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채 안 된다. 그러나, 되짚어보면 이 일대는 고구려와 발해 시기, 1천년 가까운 세월을 우리 민족이 머물던 땅이다. 당도, 요도, 청도, 일제의 허수아비 부의의 만주국도, 우리만큼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고구려의 졸본성이 '오녀산성'으로 바뀐 것이, 국내성 영역 안에 또 하나의 '오녀산'이 존재하는 것이, '五女'라는 이름이 '흉노(匈奴)·갈( )·선비(鮮卑)·저( )·강(羌)'을 지칭하는 오호(五胡)를 연상시키는 데도, 충천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허드레 계집의 치마폭으로 추락시킨 듯한 개명(改名)에도, 장수왕릉을 장군총으로 비하시킨 것과 같은 중화사상이 개입되지 않았다고 무엇으로 반증할 수 있을까?

고구려의 咽喉, 퉁화를 거쳐가며
퉁화(通化)에 도착하니 아침이다. 지안에서 퉁화까지는 '303공로'를 따라 약100km왔다. 머뭇거리지 않고 달려온 탓에, '퉁화런'들의 출근 행렬에 섞이게 되었다. 환런에서의 아침을 상기하며 식사할 곳을 찾았지만, 거리는 복잡하고 시장은 더럽고 음식점들은 불결하다. 북적대는 도심을 피해 바이싼으로 통하는 좁은 길로 접어든 뒤에야, 작은 식당에서 죽과 만두로 아침을 때울 수 있었다. 고구려 건국 신화 속의 비류수, 즉 훈장(渾江) 상류에 위치한 강변 도시, 퉁화·바이싼·장위안 일대에서는 석탄이 많이 생산된다. 그래서 그런지 하늘을 뚫고 일어선 공장 굴뚝들이 희고, 붉고, 검은 연기들을 거침없이 내뿜어 하늘빛이 흐리다. 잠깐 거쳐서 지나갈 뿐인데도, 목구멍이 답답해진다.
퉁화는 고구려의 인후와도 같은 곳이었다. '通化'라는 이름 그대로 퉁화의 길들은 사통오달(四通五達)이다. 서남쪽 길은 환런∼관뗀∼단둥을 거쳐 압록강 끝으로 통하고, 서쪽 길은 푸쑨(撫順)∼선양(瀋陽)을 거쳐 요하의 끝으로 통하고, 동북쪽 길은 바이싼∼(敦化)∼옌지(延吉)∼훈춘(琿春)을 거쳐 두만강 끝으로 통하고, 북쪽 길은 창춘(長春)∼눙안(農安)∼푸위(扶餘)와, 지린(吉林)∼하얼빈(哈爾 ) 등지를 거쳐 송화강 끝으로 통하고, 남쪽 길은 지안∼만포를 거쳐, 평안도 땅으로 들어선 뒤 설한령∼황초령을 넘어 함경도 함흥과 동해안까지 통한다. 그러므로 퉁화를 잃으면 목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란이 발해를 쉽게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도 퉁화의 북쪽에 있던 부여성을 먼저 함락시켰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이제 이 북적거리는 도시 어디에서 발해를 찾고 고구려를 만날까. 외곽으로 나가 고구려 산성을 찾은들 이끼 앉아 무너져 가는 성곽과, 밭두렁에 깨어져 뒹구는 기왓장들뿐-.  
퉁화에서 바이싼(白山)까지는 '201공로'를 따라 69km를 왔다. 바이싼 톨게이트에서 린장까지는 93km다. 수런(石人)이라는 곳에서 장위안(江源)으로 통하는 201공로를 등지고, 린장으로 통하는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퉁화에서 수런까지는 환런에서 만났던 훈장(渾江) 줄기, 그 상류를 느긋하게 거슬러 오르는 길이다. ○○(八 )라는 석탄마을을 거쳐서, 해발 1천m 정도 되는 라오링(老嶺)을 넘었다. 라오링을 거쳐 린장으로 내려오는 꼬부랑길 옆에는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있어서, 다른 나라에 왔다는 기분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라오링은 훈장과 얄루장 수계의 분수령이 된다. 라오링을 넘은 후로는 우리 옆을 스쳐 가는 작은 또랑의 물들까지도 압록강으로 흘러든다. 라싼천(老三村)이라는 곳에서는 주유소를 찾아 자동차에 기름을 넣었다. 길옆의 지붕들이 조금 낯설고 주유소를 '가유참(加油站)'이라 부르는 것밖에는 들판도 산의 모습도 우리 나라와 다른 것이 없다. 고구려에 이어 이 지방을 지배하던 발해는 상경용원부를 중심으로 5경 15부 62주를 두었고, 가장 작은 부락 단위를 '촌(村)'이라 일컬었다. 우리가 기름을 넣은 '老三村'도 발해시절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강변 길을 따르는 동안은 분단의 비극이 뚜껑 닫힌 항아리 속의 메아리처럼 가슴에 들끓고, 내륙으로 우회하는 길에서는 고구려와 발해의 망령들이 눈앞에 무수한 환상을 만든다.
 '고구려가 망하매 나당병(羅唐兵)의 유린으로 수다한 군민(軍民)이 희생되었다. 더욱 당병은 고구려인을 참혹하게 학살하였고, 또 고구려인을 많이 포로로 하여 약 백만의 인구를 잡아갔고 그 후에 고구려인이 독립군을 일으켜 당병과 다년(多年) 전쟁에 막대한 인구가 손해되었다. 발해가 건국되어 인민(人民)의 안도를 보았으나, 고구려시대의 인구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발해의 인구는)대개 고구려인구의 2분지 1, 곧 1천2백만 이내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는 말갈인 전부를 속민으로 하였는데, 말갈인의 인구가 대개 500∼600만 되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발해인은 만주와 연해주 남부에 많이 거주하고 반도의 함경남북도와 평안북도에는 말갈인이 많이 거주하였다. (장도빈 저, "대한역사")' 발해는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이 세운 나라였고, 대조영은 말갈족이었으나, 그 당시에는 모두가 한 민족으로 살았고 그 숫자조차 반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강성하던 때는 말갈족은 물론 거란족까지도 대부분 고구려 국민이었다.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신라는 한반도 중북부까지 세력을 넓혔고, 발해는 신라의 이북지역, 한반도 내의 평안도 일부와 함경도, 만주와 연해주까지 이르는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여 명실공히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영토가 넓은 남북국(南北國) 시대를 열었었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 유민 중 고려에 귀화하지 않은 말갈족들은 여진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려와 조선시대엔 우리와 오히려 대척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근세에 우리의 근심이 되던 청나라도 바로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지나가는 길목마다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 모습들은 우리와 너무나 흡사하다. 지금은 비록 국적을 달리할지라도, 고구려와 발해시대엔 한솥밥을 먹던 종족들이 아니겠는가.

雲峰湖 상류에서, 점심을 지어먹으며
린장 시내로 들어서니 오전 11시 15분. 지안을 떠난 지 4시간 45분만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지방으로 알려져 있고, 중강진(中江鎭)이란 이름이 더 익숙한 중강읍은 린장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간 강변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걸음도 린장 시내에서 멈칫거리지 않고 따릿즈(大栗子)로 통하는 강변 길로 곧장 접어들었다. 집과 집 사이로 난 좁은 통로를 지나자, 길은 고도를 높이며 언덕을 치오른다. 어떤 곳은 흙탕물이 고여 질척거리고 나머지는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 그러나 그런 오르막길을 치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시선은 기댈 곳 없는 낭떠러지를 붙들고, 자동차는 길옆에다 다급하게 바퀴를 세웠다. 언덕아래는 압록강이 돌아나가고, 압록강 건너편에는 강변을 따라 길쭉한 마을이 펼쳐져 있다. 중국의 집들과는 지붕부터 다르다.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중강진이다. 눈 아래 강물은 흐름을 멈춘 듯 잔잔하고, 정오의 태양은 빛나는 햇살들을 한꺼번에 털어서 강물 위에 반짝이는 물비늘을 입혀놓는다.
중강(中江) 읍내의 학교들은 점심시간이다. 경쾌하고 힘찬 멜로디가 압록강을 건너온다. 운동장의 아이들은 공차기를 하고, 강변에는 빨래하는 사람들과 다슬기나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점점점 흩어져 있다. 마을 둘레의 무논에서는 벼가 익어 가고, 옥수수 밭들은 평지를 비켜 산비탈을 오른다. 오덕산(892.2m)은 수호신처럼 긴 팔을 벌려 하장동∼고비동∼연동∼창평∼중강∼자작동∼내동에 이르는 강변마을들을 껴안고 있다. 중강천 합수머리 부근에는 어디서 어디로 가던 길인지 세 척의 뗏목이 쉬고 있다. 우리는 천천히 바퀴를 굴려가며 그 모든 풍경을 보았다. 우리가 지나가는 중국 쪽 강변은 높고, 우리 나라 쪽 강변은 낮기 때문에, 모든 풍경들이 손바닥 안의 손금처럼 들여다보인다. 우리가 느린 속도로 차를 몰며 지나가는 언덕길 아래는 린장에서 따릿쯔로 통하는 기찻길이 있다. 우리는 그 기찻길과 자동차길이 평지에서 만나는 곳까지 내려와서, 몇 갠가의 마을을 더 지난 후에 철로를 건넜다. 따릿쯔 조금 못 미친 강변에서 작은 음식점 마당을 통과하여 강변으로 나왔다. 우리를 내륙으로 돌아오게 한 운봉호 상류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곳이다. 강변음식점에서 물을 얻고 계란과 마늘과 파를 사고, 서울에서부터 들고 간 압력솥에 밥을 앉히고 쌀 씻은 뜬 물에 북어국을 끓였다. 강폭이 200m도 안될 것 같은 호수 저쪽에는 다 썩은 초가 지붕을 이고 있는 움막이 하나 있는 데 자세히 보니 양수기를 관리하는 초소인가보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할 수 없는 사람 하나가 그 움막앞 강 언덕에 앉아서 푸성귀를 다듬고 있다. 저 사람을 소리쳐 불러서 따끈따끈한 쌀밥과 국과 김치를 나누어 먹고 싶지만, 희망으로만 남았다. 양수기 초소 뒤편에는 계단식 들판이 있고, 계단식 들판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자동차 길이 나있고, 그 길에는 이따금 트럭이 지나다니고,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이 길을 고치고 있다. 저 양수기는 건너편 강변의 계단식 논에 물을 대는 것인가 보다. 머리 위에 있던 태양이 호수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 때까지 우리는 거기 있었다. 둑 아래 압록강은 흐름을 멈추고 건너편 산 그림자를 담고-.  

오후 3時의 臨江橋, 그 절반의 渡江
린장 시내로 들어와서 변방검사소로 갔다. 중강읍 건너편 언덕길을 되돌아오면서 연동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렵게 허락을 받아 다리 중간까지 걸어보았다. 다리 중간이 바로 두 나라의 국경선이다. 북한 쪽 난간에는 한강인도교처럼 철제 아치가 세워져 있고, 중국 쪽은 나직하게 시멘트 난간만 세웠다. 중국 공안원 한 명이 우리와 동행을 해 주었고, 아치가 있는 쪽 선 너머로는 넘어가지 못하게 했다. 통나무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북한 쪽에서 건너오고, 되돌아가는 트럭에는 곡식자루 같은 것들이 실려 있었다. 다리 중간지점에서 사진만 찍고 되돌아섰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절반의 도강에 불과했지만, 신의주나 만포 앞강에서 보트를 탔을 때와는 또 다른 흥분을 느꼈다. 그러나, 남과 북이 같은 다리에서 얼굴을 대하고 스쳐지나가면서도 대화를 나누지도 미소를 주고받지도 못했으니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까? 직감적으로 서로를 알아보면서도 그들의 차는 바람처럼 우리를 스쳐서 다리를 건너가 버렸고, 우리 또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나 짧은 순간에 우리는 그렇게 엇갈려버렸다. 분단된 조국의 변경, 그 산하와 동포들의 모습을 보려고 나는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거기까지 갔다. 바로 눈앞에 보고싶어하던 산천이 있고, 그곳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차가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데도, 그렇게 엇갈려버렸다. 50년 이상을 그렇게 지내왔는데, 남과 북이 얼굴을 마주하고도 말문을 닫고 넘어야 할 산맥이 또 몇 만리나 더 남아있다는 것일까? 창바이(長白)를 향해 달리는 강변 길. 내 마음은 돌을 얹은 듯 무겁고, 압록강만 반짝이며 흐르고 있다.
3도구(三道 )를 건너서 높직하고도 긴 산을 하나 넘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자갈길을 내려와서 만족들의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한족 기사 벙위는 자동차 수리점을 찾아 타이어에 바람을 채우고, 우리는 그 집 부인이 따라주는 차를 마시며 시골 할머니가 가지고 온 느타리버섯을 샀다. 느타리버섯 한 바가지에 2위안만 달라니? 나는 그 할머니에게 미안해서 더 주고 싶었지만 이곳 시세가 그렇다는 걸 어쩔 수 없다. 돼지고기와 고사리도 20위안에 샀다. 물이 깨끗한 강변을 만나면 저녁을 지어먹으며 야영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경계가 되는 압록강변에서의 야영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곳에서부터 길은 압록강에 바짝 붙어서 이어지고 있었다. 습지에서 잘 자라는 풀들이 키를 세워 일어선 강변 저쪽에도, 물이 굽어 도는 곳마다 북한의 마을들이 보였다. 흐르는 강물이 흙과 모래를 실어와서 평지를 만들어둔 곳마다 논밭이 있고 마을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강폭은 좁아지고 건너편 마을들도 가까웠다 멀어졌다 하며 우리를 돌려세웠다. 물 흐름이 느슨하고 강폭이 좁은 곳에는 어김없이 '도강·낚시·수영·밀수' 등을 금지하는 한글 팻말이 서있다.  
답답하고 울적해지는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바위에 구멍을 뚫어만든 세 겹의 굴을 지나게 되었다. 경치가 아름다워서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마유'라는 이름의 굴이다. 압록강은 길옆까지 바짝 붙어서 흐르고, 강폭은 100m도 안될 것 같다. 강 건너편에는 5∼6가구의 집들이 모여있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부흥'이라는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차를 세웠던 터널. 그 앞 강물 건너편 산은 향내봉(1365.3m)일 것이다. 우리 발아래 강물은  상구비와 하구비를 돌아 내려오느라, 흐름도 느려지고 물빛도 어둑하지만, 강바닥에 큰돌이 박혀있는 곳에서는 하얀 물보라가 일었다. 넓이뛰기를 잘 하는 사람이라면 단숨에 건너뛸 수 있을 것 같은 강물 저쪽엔 드넓은 자갈밭이 펼쳐져 있고 자갈밭 뒤쪽의 집들은 빈곳 같은 적막만을 보여주고 있다. 산그늘을 담고 어두워지는 강변을 등지고 조금 더 달리니 6도구(六道 )라는 곳이다.
린장에서 백두산까지,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중국 쪽 지류들에는 1도구에서 24도구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우체국도 있고, 자전거포도 있고 자동차수리점도 있는 이곳은 린장시(臨江市) 육도구진(六道 鎭)이다. 우리쪽 강변에 만포진, 중강진 등 무수한 진지들이 있었듯이 중국쪽 강변에도 무수한 진지들이 있었던 것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국토를 지키려 고생을 했을 것인가. 그러나 오늘 이 국경지대에는 적적한 평화만이 깃들어 있다.
이제 겨우 6도구를 왔으니, 백두산 그늘에 도착하려면 18도구를 더 가야하는 것이다. 6도구 시가지를 지나자 길은 또 다시 산을 향해 고도를 높이는데, 해는 어느새 서산머리에 걸려 그림자가 점점 길어진다. 눈앞을 가로막는 산을 보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산아래 마을에 차를 세우고 민박할 집을 찾았다. 기왕이면 조선족 집을 찾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가 차를 세운 바로 옆집이 동포 김용택씨 집이었다. 6대째 200여년을 이 마을에서 살아왔는데 남한 사람을 처음 본다며 반가워한다. 올해 63세 된 김씨는 캄캄해진 다음에야 돌아왔다. 작은 아들집에 구들을 놓는 날이어서, 구들공사를 같이한 마을 사람들이 7-8명이나 같이 왔다. 부엌바닥에 둥근 상을 놓고, 나무의자들을 깔고 앉아서 저녁을 먹는다. 30촉 알전구 아래서 떠들썩한 식사가 계속 될 동안, 우리 일행들은 한국소주와 담배를 권하고 그들은 그들의 술과 담배를 권하며 친구가 되어갔다.
나는 처마 밑에 나무의자를 하나 들고 나가서 별 구경을 했다. 하늘의 별은 우리 땅에서 보던 그대로인데, 오늘 밤 우리가 머물 곳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나직한 나무 울타리를 두른 마당 안에는 닭장, 돼지우리, 옥수수 창고가 있고, 울타리너머엔 텃밭이 있다. 현관문을 열면 부엌이 있고, 부엌 양쪽에는 방이 있는데, 출입문 쪽 방바닥은 높고 안쪽 방바닥은 높직하다. 높직한 쪽에만 온돌을 놓아서 그쪽만 따뜻하다. 부엌도 아궁이가 있는 쪽이 훨씬 깊이 패여서 아궁이에 불을 넣으면 불길이 일어서서 구들 아래를 지나가게 되어있다. 평면으로 이어지는 우리 구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무쇠솥과, 부뚜막의 모습은 우리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김용택씨는 천안이 고향이라는데 4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이곳으로 이주해 살았다 한다. 아들과 며느리 세대까지는 우리말을 알지만, 어린 손자들은 우리말을 전혀 쓰지 않고 중국말만 알아듣는다. 집의 구조도 온돌도 한족들의 풍습을 따르고 있고, 솥뚜껑 크기대로 늘여서 부친 옥수수 전병도 우리 음식은 아니다. 두 세대가 더 지난 후에는 김씨의 손자들은 한족으로 동화되어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김씨의 부인이 나와 동갑내기여서 그집 큰손자를 데리고 높직한 온돌에 나란히 누워서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았고, 아침에 그 집을 떠날 때는 김씨 가족 3대의 전송을 받았다.

압록강물 속에서 뗏목 매는 사람들
'다양수이천(大陽水村)'을 등지고 산을 하나 넘었다. 이따금 화물차가 지나다닐 뿐인 비포장도로지만, 이 길(201공로)은 린장에서 창바이(長白)를 지나 백두산으로 통하는 가장 큰길이다. 길은 다시 평지로 내려와 '長白界' 팻말이 서있는 다리를 지났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 다리 아래 강물이 '린장-창바이' 경계가 되는 7도구 하천인가 보다. 이제부터는 길림성 중에서도 연변 조선족 자치주 관내로 들어왔기 때문에, 길옆의 표석도, 작은 밥집의 간판에도 한글이 위쪽에 표시되어 있어서 반가움이 더한다. 때로는 강물 옆을 스치고 때로는 고원지대를 지나가는 길. 해발 1천m 가까운 고원지대에서 쭉쭉 뻗은 가로수들의 나무터널 속을 달릴 때의 기분은 정말 괜찮다. 8도구∼신개구∼로보갑 등의 한글표석을 지나, 백두산 서쪽의 독립봉인 망천학(2,051m)을 잠깐 보았다. 조금 더 오니 소들이 풀을 뜯는 언덕이 있고, 야생화들이 무더기무더기 피어 있는데, 햇살은 밝고 공기는 상쾌하다. 저 멀리 남쪽 산자락들엔 새털 같은 구름 자락이 가볍게 걸려 있어서 아름답기 그지없다. 저 구름 자락 살포시 얹힌 산자락들과 우리가 지나는 고원 사이에는 깊디깊은 협곡이 있다. 우리를 이 높은 고원지대로 돌려세운 압록강은 그 협곡 사이로 돌아 흐르고 있을 것이다.
'팔도반'이라는 표석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니 '13도구' 마을이다. 마을보다 높직한 길옆 제재소에서는 기계톱 소리가 요란하다. 통나무들이 순식간에 판자쪽으로 변하고 톱날 끝에선 뽀얀 톱밥들이 날아오른다. 제재소 지붕 너머엔 빛나는 강줄기가 펼쳐져 있는데, 뗏목 같은 것이 보인다. 우리는 다급하게 차를 돌려 비탈길을 내려갔다. 마을길을 통과하여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뗏목 매는 사람들이 보이는 강변까지 나갔다. 강 건너편은 량강도 김정숙군이다. 그 예전엔 신갈파진이라 부르던 진지가 있었고, 분단 전까지 만해도 함경남도 삼수군에 속하던 신파군이다. 김정숙은 고 김일성 주석의 전처 이름. 신파군에서 김정숙군으로 바뀐 것은 1981년이다.
신갈파진 앞 강물 속에선 20여명의 떼꾼들이 뗏목을 고쳐 매는 중이다. 어떤 사람은 장대를 들었고, 어떤 사람은 맨손으로 나무둥치를 들어올린다. 따그락 떠그럭 나무둥치 부딪는 소리가 날 때마다 뗏목 주위의 강물이 출렁거린다. "놀아! 놀아! 이거부터 제끼고 합시다!"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하자 "그러지!" "그러자고!" 따로 노는 나무둥치를 옆으로 옮긴다.  다른 쪽에선 구령을 맞춰가며 뗏목 자리를 잡는다. 저 뗏목을 저렇게 고쳐 매어서 하류로 흘려보내면 어제 우리가 보았던 중강진 앞강이나, 운봉호 하류까지도 떠내려보낼 모양이다. 갈치주둥이처럼 삐죽한 쪽이 앞쪽이다. 후미로 갈수록 부채살처럼 펼쳐서 한꺼번에 많은 원목을 수송하게 만든다. 뗏목을 몰고 조종하는 사람들은 '떼꾼'이라 불렀다. 뗏목 한번 무사히 나르고 받는 몫돈은 '떼돈'이라 했다. '떼돈'을 번 '떼꾼'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는 '떼돈'을 노리는 주막거리가 있기 마련이어서, 거기 붙잡혀 며칠을 취생몽사 비틀거리다보면 또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또 다시 뗏목을 몰고 내려오는, 가난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뗏목에 묶인 원목들은 강물 속에 반쯤 잠겨 흘러가는 사이에 자연히 물을 먹고 뒤척이며 햇볕과 바람을 쏘이고, 육지로 옮겨지는 사이에 자연히 건조되어 뒤틀림 없는 목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운봉댐과 수풍댐이 생기기 전에는 백두산 밀림에서 벌목한 원목들을 저처럼 뗏목을 만들어 신의주 앞까지 몰고 갈 수 있었다. 신의주와 단둥 일대에 제재소가 성업을 이루었던 것도 압록강 물길 덕분이었지만, 대형 댐이 생긴 후로는 우리가 '린장'다리에서 마주친 목재트럭처럼 구간구간 나누어서 수송을 하는 모양이다. 따라서 '떼꾼'들의 '떼돈'벌이도 옛날 이야기로나 남았다. 아무튼 신파 앞강에서 뗏목을 매는 사람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불과 20∼30m. 장대로 나무를 밀어내고 당기고 하는 사람들 어깨너머에는 도시 풍의 건물들이 말끔하게 지어져 있다. 뗏목 매는 강물 하류 쪽엔 장진강 합수머리가 있는데, 장진강 강구포를 가로지르는 다리 모습도 잡힐 듯 가깝다. 어디서 만나거나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우리가 사진을 찍으면서 계속 구경을 하니까, 한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말없이 그들 곁을 떠난다. 중국 사람 행세를 하거나, 조선족 동포 행세를 하지도 않았다. 잠시나마 바라보면서 그들의 삶을 느꼈고, 그들도 우리가 다녀감을 알았을 것이다. 한쪽 하늘에선 인공위성이 날아다니고, 한쪽 강물 속에는 아직도 뗏목 매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일행들은 갈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벙어리가 되어간다.

두지리 충적평야에서 익어 가는 벼이삭을 보며
13도구를 등진 후로는 강이 한결 가까워져서, '민탕리∼소농리∼두지리∼대리∼보파리' 등의 북한 마을들을 바로 눈앞에서 건너다보며 달린다. 그중에서도 14도구 부근에 있는 두지리 풍경은 너무나 오래 우리의 발길을 붙들었다. 두지리는 강물이 ∪자 모양으로 돌아나가는 강변 마을이다. 앙상한 산비탈의 옥수수밭만 보면서 오던 눈에, 벼이삭이 익어 가는 드넓은 들판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서 쉽게 발길이 돌려지지 않았다.
얼마쯤 가자 김화라는 마을 복판으로 길이 나있다. 얼마쯤 더 가자 또 하나의 마을이 있고, 그 마을마저 지나자, 길은 또다시 압록강을 멀리 등지고 깊은 산으로 올라간다. 그 산길은 50분쯤 달리자 다시 고도를 낮추었고, 눈 아래 드넓은 평야가 나타났다. 우리 발아래 들판은 창바이(長白) 조선족자치현이고 강 건너편은 량강도 혜산시다. 혜산시는 함경도 일대가 대부분 그랬듯이 본래는 고구려 땅이었고, 발해 때는 솔빈부에 속했고, 고려 때는 발해 유민들이랄 수 있는 여진족(고구려 발해 때는 말갈이라 부르던 민족)이 거주했고, 조선시대엔 혜산자구(惠山子口) 또는 혜산진이라 부르던 진지가 있었다. 1942년까지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속했으나, 1954년 량강도가 신설되면서 혜산시로 승격되었다.
창바이 시내를 가로질러 곧장 강변으로 내려왔다(린장-창바이, 235km). 중국 쪽 강변에는 둑을 만들어서 높직한데, 우리 나라 쪽 강변은 자연 그대로다. 저쪽에도 이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있다. 강물 안까지 들어가서 목욕을 하거나 고기를 잡는 사람도 많고, 강변에 쭈그리고 앉아 빨래를 하는 사람도 많다. 중국 쪽 고수부지엔 채소도 심어놓았다. 날씨는 더운데 저쪽 강변엔 총을 맨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건너다니는지 총 끝에는 칼도 한 자루 묶여 있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불법 도강을 하고 밀수까지 성행한다고 한다. 늦여름 땡볕 아래서 군복을 입고 보초를 서는 군인의 모습이 안쓰럽다. 혜산 시내 중심부에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구릿빛을 띤 조형물이 높직하게 세워져 있어서 어느 방향에서나 보인다. 압록강은 그 모든 사람과 풍경의 그림자를 안고 느릿느릿 흐른다.  
창바이 강변은 우리가 지금까지 거쳐온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과 여러 풍경을 한꺼번에 가깝게 보는 곳이다. 갯버들 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한 남자가 우리를 건너오라고 손짓을 한다. 물론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손짓이겠지만, 우리는 둑 아래로 내려가 강 건너편의 초대를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다. 통일되면 갈게! 나는 말없이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 만감이 교차하는 강변을 등졌다.
외곽지대의 풍경은 시내 복판보다는 조금 쓸쓸하다. 언제 세운 건물들인지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것들도 있다. 마을 뒤편 산에는 한결같이 나무가 없고 모두 밭으로 경작하고 있다. 북한은 식량증산을 위해 산비탈에 밭을 많이 개간하였는데, 흔히 '다락밭'이라 부른다. 다락처럼 높은 밭에서 옥수수 감자 귀리 호프 같은 작물을 재배한다. 산간지대에서는 들쭉나무나 돌배 같은 산과일들을 재배하여 단물(쥬스)이나 술을 만들어 특산물로 팔기도 한다.
창바이 시내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탑산(塔山·869m)으로 올라갔다. 탑산은 '일람봉(一覽峰)'이라고도 한다. 탑산 앞의 들판은 탑전(塔甸)이라 부른다. 탑산에는 이름 그대로 탑이 하나 서있다. 탑산의 탑은 발해시대의 유물 중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재로 벽돌로 쌓은 5층탑이다. 장방형·규형·다각형 등으로 탑의 구조에 맞게 벽돌을 구워서 정교하게 맞춰서 쌓았다. 발해 말기의 무덤탑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 탑의 이름은 '영광탑(靈光塔)'이지만, 발해 때부터 전해져오는 이름이 아니라, 청나라 말기 탑산 아래 탑전을 조사하러 왔던 관리(장백현 제1대지부 장봉대)가 이 탑을 발견하고, "한나라 때의 영광전이 오랜 풍파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서있는 것과 같다"하여 '영광탑'이라 붙였다 한다. 1천년 이상을 이 언덕을 지켜온 영광탑 앞에 서면, 압록강 건너 혜산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구려와 발해 때는 강 저쪽도 이쪽도 모두 우리의 영토였다. 이처럼 햇볕 좋고 바람 잔잔하고 경치 좋은 언덕에 뼈를 묻은 발해 사람은, 발해까지 멸망한 후 1천여 년에 걸쳐 우리 민족이 거쳐온 이합집산과 흥망성쇠의 광경을 한 눈에 지켜보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 그 비탄의 흔적은 어디에서 찾을까?  

三水甲山을 건너다보며, 22도구까지
탑산을 등지고 내려와서 24도구로 향한다. 송두리∼연두리∼위연포∼오시천 합수목∼왕가평∼화전리∼신작거리∼천수리를 건너다보며 쉬지 않고 차를 몰아간다. 옛 신갈파진 뗏목 매는 강변에서부터 백두산 턱밑까지는 강 건너편 산간지대는 모두 '삼수갑산'이라 불리던 땅이다. 지금은 백두산 일대가 모두 량강도로 바뀌었지만, 내가 태어나던 때만 해도 강 건너 저쪽은 함경남도 갑산군에 속하던 지역이다. 이제 삼수·갑산은 각기 다른 군으로 독립했고, 일개 진지에 불과하던 혜산과 보천은 시와 군으로 승격했다. "삼수갑산은 못 가더라도" 길이 허락하는 데까지 압록강 줄기를 거슬러 오르며, 분단된 조국의 변경을 건너다보는 행운을 가슴 아프게 누리고 있다.
길 건너편 강변에는 혜산시를 거쳐온 단선철도가 길게 이어지고, 철길 보다 높은 곳에는 한 가닥 비포장도로가 산허리를 오르내리며 돌아나가는 게 보인다. 저 철길을 따라가면 보천군과 삼지연군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삼지연(三池淵)은 백두대간의 동쪽에 있는 세 개의 천연호수를 묶어서 부르는 이름인데, 지금은 지역 이름을 겸하게 되었다. 분단 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두대간 분수령 동쪽의 무산군과 길주군 일부지역이 함경북도에서 량강도로 편입되고, 보천군·운흥군·백암군 등의 새로운 군들이 태어났다. 따라서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지역이 모두 량강도 삼지연군에 속하게 되었고, 량강도(兩江道)란 이름도 압록·두만 두 강의 상류에 위치한 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두음법칙을 적용하면 '량강도'가 아니라 '양강도'라 해야겠지만 북한은 고유명사에도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본고도 현지 지명을 따랐다. 그 예전 백두산 등반로도, 저 길을 따라 허항령(虛項嶺)을 넘어 무산 땅으로 들어선 뒤 장군봉으로 오르는 코스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저 길을 따라 백두산으로 갈 수는 없으니, 국경선을 겸한 압록강 줄기에 바짝 붙어서, 남릉으로 오르는 코스를 택하게 된 것이다.
가림천 합수목 부근에 오자 산의 모습이 달라진다. 가림천은 보천군의 중심 지역을 흘러서 구비구비 돌아 내려온 압록강의 지류이다. 가림천 합수목 부근은 사소구비라 부르는데, 사소구비 부근의 마을 뒷산이 하도 아름다워서 한참을 고개 돌려 바라보았다. 가림천 합수목에서 22km를 거슬러 올라가면 포태천 합수목이 있다. 포태천 합수목에서 11.5km를 더 거슬러 오르면 이명수 합수목. 이명수 합수목에서 18km를 더 거슬러 오르면 쇠백수 합수목이다. 쇠백수 합수목 이후의 압록강 원류는 물줄기도 가늘어지고, 더 높은 곳에서는 물줄기가 끊기기도 하면서 32km를 더 거슬러 올라가서, 백두산 장군봉 머리에 이르게 된다.
압록강 길이는 흔히 790km로 알려져 있다. 그 수치는 일제 때 항공촬영에 의한 것이다. 북한이 발표한 압록강 길이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803km. 백두산 장군봉에서 서한만까지, 필자가 재어본 도상거리는 그보다 훨씬 긴 811.7km다. 우리가 버리지 못하고 있는 고정관념 중 가장 모순된 것은 '강의 발원지'에 관한 것이다. "뿌리 깊은 샘은 가물에 아니 그칠 새, 내(川)를 이뤄 바다에 가나니…" 용비어천가도 이렇게 시작되지만, 강은 산 중턱의 샘물이나 강물이 항상 흐르는 골짜기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강은 산꼭대기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시작한다. 물줄기를 나누는 마루금 중에서도 그 강의 하구로부터 가장 멀고 가장 높은 산봉우리의 사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그 강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나뭇잎을 적시고 때로는 흙에 스미고 때로는 바위 밑을 돌아 흐르고 때로는 나무뿌리를 파고들어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물의 속성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물이 항상 흐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산꼭대기로부터 흘러내리는 빗물이 강의 시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강은 분수령 상의 가장 높은 산, 그 정상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압록강의 강원(江源)도 압록강 하구로부터 가장 멀고 높은 산인 백두산 장군봉. 장군봉 중에서도 백두산 화구벽 마루금과 백두대간 분수령이 만나는 산정을 꼭지점으로 하는 서남쪽 사면(斜面)이 된다. 따라서 압록강 발원지가 '사기문폭포'라던가 '삼형제폭포'라던가, '이명수폭포'라던가 하는 견해는, 틀린 것이다. 압록강 물줄기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사기문폭포'도 해발 2천m 수목한계선 근처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이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백두산 천지 북쪽의 달문(達門)을 뚫고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장백폭포는 송화강의 원류일 뿐, 압록강이나 두만강과는 상관이 없는 물줄기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산이지만, 그 산정의 물은 우리 쪽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쑹화장(松花江)의 지류인 이도백하(二道白河)로 흘러드는 것이다. 쑹화장은 '무단장(牧丹江)'과 합류하여 '아무르강(黑龍江)'이 되어 러시아 북동쪽 바다로 빠져나간다.  
내 마음은 압록강 물줄기를 따라 백두산정으로 오르고 있지만, 몸은 24도구로 향하는 길 안에 있다. 19도구∼20도구 표석을 지나쳐서 조금 더 가자 막대로 된 바리게이트가 길을 막는다. 검문소다. 신분을 확인하고 목적을 묻고 짐을 둘러보고 통과시켜주었다. 차는 또 다시 상류를 향해 바퀴를 굴려간다. 갈수록 길은 울퉁불퉁하고 마음은 두근거린다. 21도구 표석을 지나친 뒤의 압록강은 개울처럼 변해버렸고, 그마저도 가지 많은 나무와 수풀에 싸여 보이지 않는다. 시야에서 민가가 사라진지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22도구에서 우리는 돌아서기로 했다. 경계도 분명치 않은 국경지대를 위험을 무릅쓰면서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제 나는 압록강을 다 보았다. 불과 몇 걸음 저쪽에 우리 땅이 있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기쁨이나 감동보다는 갈수록 가슴만 무거워지는 이 길목을 보고 돌아서려고, 장산 포구에서 22도구까지 4박5일을 달려왔구나! (창바이-22도구, 왕복 50km.)    

북·중 국경선을 따라 백두산에 오르다
조선시대 역관 중에서도 수관(首官)으로 꼽히는 김지남(金指南)의 '북정록(北征綠)'을 펼치면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임진년(1712년) 2월 24일 정축, "…강희 50년 8월 초4일 태학사 온달 등이 올린 장계에 따르면, 금년에 목극등 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봉황성에서 장백산까지 우리 변경을 조사하려 한다. 그러나 길이 멀고 물이 커서 바로 그곳에 이르지 못하니, 내년 봄 얼음이 녹을 때 차사관으로 하여금 목극등 등과 함께 의주 강가에서 조그만 배를 만들어 물을 따라 올라가려 한다. 그리고 만약 배가 전진할 수 없게 되면 육로를 따라 토문강에 가서 우리 지방을 조사 할 것이다." 그 이틀 후인 2월 26일 만윤(灣尹·의주부윤)의 장계 편에 또 연락이 온다. "황제의 특사인 오라총관 목극등이 강희 51년 2월 15일에 북경에서 출발하여 의주에서 강물을 따라 올라가 장백산 남쪽을 거쳐 바로 토문강(土門江)에 이를 것이다. …이 때문에 먼저 패문(牌文)을 보내 알리니 바라건대 조선 국경 지방 관원은 그대 나라의 예에 비추어 준행하라."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접반사·차비관·군관 등을 뽑아서, 압록강 길목(후주 구갈파보)까지 보낸다. 두 나라의 국경을 가름하는 일을 수행해야할 수석 관리의 직함이 접반사(接伴使)라는 것도 그렇지만, 목극등 일행 50명에게 줄 선물까지 접반사·문위사·함경감사가 각각 따로 준비하였다. 3중으로 준비된 선물의 품목들도 그 당시 민초들은 듣도보도 못했을 붉은 명주·녹색명주·흰 명주·표범가죽·한지·먹·족제비가죽·담뱃대 등 다량이었다. 청나라 강희 51년은 서기1712년, 우리의 숙종38년이다. 북한산 둘레에 산성을 쌓고 행궁을 짓던 그 이듬해다. 여름이 가까운 때라, 몽고천막·담배·삼각 부채·둥근 부채 등속까지 갖추어 들고, 그들이 묵고 지나가는 길목마다 관헌이며 백성들이 동원되어 혹은 배를 내고 혹은 길을 닦고 안내를 하느라 전전긍긍하였다.
그때까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두 나라의 경계로 한다는 문서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지형을 확인하고 경계비를 세우지는 않았던 것이다. 두만강은 그 시원이 분명하지 않은데, 조선 조정은 그때까지 현장답사도 하지 않고 있다가, 목극등이 고집하는 지점에 경계비를 세우고, 정계비 상에 나타난 '土門'이란 단어 때문에 오랫동안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이다.
'목극등은 몸이 민첩하기가 마치 원숭이 같아서 다른 사람들이 능히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곰 한 마리가 산모퉁이에서 튀어 나왔는데, 목극등이 큰 소리를 지르며 팔을 걷어붙이고 쫓아가자 곰이 놀라 산등성이를 넘어 달아나 숨어버렸다.(홍세태, "白頭山記")' 청나라 황제의 명을 받은 목극등은 이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뿐만아니라 청 황제에게 바칠 지도까지 그렸다. 목극등이 그린 지도에는 '백두산' 정상부의 모습과 과 정계비의 위치가 소상히 나타나 있지만, 압록강이 천지에서 흘러나온 양 표시하는 우를 범했다. 이를 보면 목극등의 관심도 분수령이 뚜렷한 '송화강↔압록강' 경계보다, 두만강 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접반사 박권은 늙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산에 오르지도 않았으니….      
 평사 김선(金璿)이 썼다는 경성원사대(鏡城元師臺) 비각기(碑閣記)에는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경계를 정할 때에 순안사 이하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고, 오직 토교(土校) 몇 사람만으로 일을 보게 했으니, 이 어찌 사람을 죽여 성(城)에 가득하고 사람을 죽여 들에 가득하게 한 뒤에 잃은 것이리오? 앉아서 잃었어도 그 잃는 바를 아지 못하니, 족히 나라 땅을 줄인 것만으로 의논할 일이 아니다. 강개(慷慨)하고 한심하고 애석해서 자못 노한 머리털이 장차 관(冠)을 뚫을 것이로다.'했다(정약용 저, 아방강역고 참고). 숙종은 목극등이 그린 백두산도(白頭山圖)를 보고 "그전에 경계를 두고 다투던 근심이 이로부터 모두 사라졌네(向時爭界慮 從此盡消磨)"라 했다지만, 그 일은 또 다른 근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던 해로부터 287년이 흐른 뒤인 1999년 9월 2일, 우리도 백두산을 오른다. 우연히도 우리는 목극등이 백두산으로 오던 길로 왔다. 백두산은 중국과 우리가 공유하는 산이로되,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화구벽 바깥은 대부분 중국 땅이다. 압록강원은 그 뿌리가 넓게 퍼지지 못했고, 두만강은 대연지봉 동남쪽 봉우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화구벽 남쪽 '압록강↔송화강' 분수령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남∼서∼북∼북동쪽으로 휘도는 산기슭이 거의 다 중국 영역이다.
중국 쪽에서 오를 수 있는 백두산 등반로는 남, 서, 북 세 곳에 마련되어 있다. '장백산보호국'을 거쳐서 천문봉(天文峰)으로 오르는 북쪽 코스는, 장백폭포와 온천이 가까이 있어서 가장 각광받는 코스다. 서쪽은 '송강하보호참(松江河保護站)'을 거쳐서 청석봉(靑石峰)으로 오르는 코스로, 이곳 또한 찾는 이들이 많으나 천문봉 코스처럼 길을 포장하지는 않았다. '횡산보호참(橫山保護站)'을 통과하여 국경선을 따라 오르는 남쪽 코스는 다녀간 사람이 얼마 되지 않고, 입장도 까다롭다. 우리는 남쪽 코스로 오를 것이다. 22도구에서 돌아 내려온 우리는 '횡산보호참'으로 왔다. 입산허가서를 받기 위해서다. 횡산보호참에서 저녁을 지어먹고 마루방에서 잔다. (창바이-횡산보호참, 41km.)

이런 아침, 이런 곳에서 울지 않는다면
백두산으로 들어간다. 1999년 9월 2일. 새벽 2시에 일어났고, 3시 20분에 출발했다. 길은 얼마 달리지 않아 밀림 속을 지나가고 있다. 길은 좁고 비포장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터가 어둠을 밀어낼 때마다, 쭉쭉 뻗은 나무들이 뒤척이며 깨어났다 멀어져 가곤 한다. 동서남북은 구별할 수 없지만, 밀림 사이로 보는 하늘은 맑고 별은 빛난다. 오늘 우리가 이 길을 지나가고 나면 남쪽 산문(山門)이 닫힐 것이라 한다. 다리 공사를 위해서 폐쇄한다고 한다. 우리는 운 좋게도 이 산문 안으로 들어선 마지막 손님이다. '횡산보호참'에서 42km를 달려와서 강상제1초소를 만났다. '강상제1초소'의 바리게이트도 무사히 통과했다. 백두산은 우리의 입산을 허락하였다. 얼마나 가슴을 조이며 여기까지 왔는가. 우리는 이 길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백두산 화구벽 능선을 따라 청석봉까지 종주를 한 후, 송강하 쪽으로 하산하려는 것이다. 백두산이 남쪽 산문을 열어주었듯이, 최초로 시도하는 분수령-청석봉 능선종주도 성공하기를 빈다.
길은 언제부턴가 숲을 벗어났고, 길 오른쪽에는 계곡이 하나 다가와 있다. 어두워서 분간할 수는 없지만, 물소리가 가깝다. 우리 옆을 바짝 붙어서 흐르는 이 계곡이 압록강의 서쪽 지류이자, 곧 국경선이다. 길은 어느새 수목한계선을 벗어나 민둥산을 기어오르고, 동쪽 산머리가 희부염하게 밝아 오는 게 보인다. 조금 더 오르니 '2호경계비' 앞이다. 화강석으로 깎아 세운 표석 한 면엔 '中國2'라는 글씨가, 그 반대쪽 면에는 '조선2'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금 더 오르니 '3호경계비' 앞이다. 3호경계비는 길옆에 있지 않고 등성이 위에 있어서 눈 도장만 찍고 지나간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저 봉우리는 제비봉(2572m)일 것이다. 그 사이 산은 좀 더 밝아졌다. 눈 아래 산기슭에는 갈구리가 지나간 것처럼 깊게 파인 물자국들이 깊은 협곡 쪽으로 모여드는 게 보인다. 강은 저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계절 강이지만, 저 물자국들을 강의 시작이 아니라고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흔들리는 사이에 그 골짜기마저 사라지고, 조금 후에는 주차장 같은 공터에 도착했다. 공터 왼쪽에는 '4호경계비'가 있다. 이제는 차를 버리고 걸어야한다. 몇 걸음 되지 않지만, 우리가 도착한 주차장이 북한 영역이기 때문에 경계비가 있는 서쪽으로 걸음을 재촉해야한다. 내 심장과 허파가 한꺼번에 쿵딱거리는 것은, 해발 2600m 능선으로 갑자기 올라선 고도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4호경계비'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서서 천지(天池)를 내려다본다. 우리가 서있는 오른쪽에는 백두산 주봉인 장군봉(將軍峰·2750m)이 있다. 잡힐 듯 가깝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늘여서 뻗어도 내 손은 장군봉 머리에 닿을 수가 없다. 이 한가지 아쉬움만 접으면 백두산의 모든 것이 내 눈 안에 있다. 때마침 해뜨는 시간이어서, 순간순간 변하는 산빛과 물빛, 백두산이 연출하는 신비로운 광경들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감사합니다! 백두산 산신님! 이런 아침, 이런 곳에서 울지 않는다면 눈물은 무엇을 위해 생긴 것이겠습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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