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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이향지의 北·中 변경 답사기(1)  

[월간중앙 1999.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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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人 이향지의 北·中 변경 답사기(1)




거대한 타임캡슐 만주 벌판을 달리며


                                                 

압록강과 두만강은 우리 국토의 최북단이다. 두 강의 강심이 바로 국경선이다. 두 강의 건너편에는 중국과 러시아가 있다. 두 강은 마주보는 나라끼리 공유하는 강이다. 두 강의 물줄기는 모두 백두산 기슭에서 시작된다. 압록강 하구에서 그 강의 시원인 백두산정까지, 두만강 물줄기를 따라 그 강의 하구까지, 서해에서 동해까지, 우리 땅 우리 길로 걸어서 닿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반대쪽 강변을 따라 오르내리며 우리 쪽을 건너다보는 것도 또 다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 한 걸음 물러서서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가 강성하던 때만해도 두 강은 우리 강역의 변경이 아닌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압록강 중류에 있는 강변도시 집안과 압록강의 중국 쪽 지류인 혼강 유역 환인(졸본) 등지에는 고구려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고구려 문화 말살 정책을 쓰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개국 초기에 청조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만주지역에 봉금(封禁) 정책을 써서 이민족의 접근을 막았지만, 아름답고 방대한 고구려 유적들을 다 없애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씁쓸한 오류들을 낳게 했으니, 동국여지승람에서 424년 동안이나 고구려 도읍지였던 집안(集安)을 금나라 도읍지 '황성평(皇城坪)'으로, 고구려 장수왕릉(장군총)을 금나라 '황제묘(皇帝墓)'로 기록해서 남긴 것이라던가, 조선시대에 제작된 관방지도(與地圖帖 '江界地圖') 등에서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을 '오국성(五國城)'으로 기록한 예들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스스로 캐어서 고증하지 않고 남의 기록들에만 의지한 결과물들이거나, 대국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 흔적들이다. 그것을 모르고 어느 학자는 '集安(집안)'이란 이름은 고구려와는 연관이 없으니,  '황성(皇城)'이라 고쳐 부르면 어떻겠는가 피력하고 있다.    
정보화 시대로 접어든 오늘날에는 세계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지도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분단은 새로운 오류들을 파생시키고 있다. 고구려의 정복로를 답사하고 온 기자가, 그 고무적인 답사기를 발표하면서 중강진 자리에 백두산을 그린 지도를 함께 싣는 정도의 실정이다. 중강진 자리에 백두산을 그려놓았다고 백두산이 중강진 자리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못 그려진 지도 한 장이 또 다른 오류를 파생시킬 것은 자명하다.
남북분단이 우리 민족의 희망을 도외시하고 자행된 것처럼,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국토로 하는, 오늘날의 우리 영역 또한 조선시대에 외세의 강압으로 확정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도 있었다. 숙종38년(1712)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청나라와 우리 사이의 국경을 확정짓는 자리에 청나라 대표 목극등은 앞장서서 산을 오르는데 우리측 대표 박권은 늙고 아프다는 핑계로 군졸과 통역관만 딸려보냈다. 결과, 우리의 강역은 우리측 대표가 막중한 임무를 방기함으로써 더 축소되었다. 그후 일본 제국주의의 간섭을 이기지 못하고 간도마저 잃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해방을 맞았으나, 기쁨은 잠시, 두 강 이남의 국토마저 분단되어 있다.
국토는 민족의 몸이다. 육체가 정신의 집인 것과 같다. 필자는 지난 해 초여름부터 백두산을 향해 걷고 있었다. '북한 쪽 백두대간'을 연결종주하며, 그 도상(圖上) 답사기를 '山'에 실어왔다. 물론 실제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지도 위에서는 못 갈 길이란 없다. 분단 국가 분단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하여, 지도 위에서나마 지리산과 백두산을 이어놓고 싶었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발로 걷는 것보다 더 힘들게, 삼재령∼온정령∼철령을 넘고 황초령∼부전령∼후치령을 넘어 개마고원 모서리를 통과했다. 허항령과 백두산이 가까워질수록 나의 목마름은 더해갔다. 상상 속에서 걸어보는 땅덩어리가 아니라 내 발, 내 눈, 내 숨결로 직접 만나보고픈 산·들·강·마을. 그 목마름을 어느 정도 해소 시켜준 것이 압록강∼두만강 연결 답사다.
산줄기와 강줄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산줄기를 알면 물줄기가 보이고 물줄기를 알면 산줄기가 보인다. 우리 산줄기는 백두산을 정점으로 백두대간이란 줄기 하나에 나무뿌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1대간 1정간 13정맥이 백두산 하나에 매달려 있다. 산줄기와 산줄기가 만드는 골짜기로 흐르는 것이 강물이다. 산은 물을 가르지만 물은 산을 돌아와서 다시 합친다.
현재는 과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미래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지금은 비록 나뉘어 있으나 하나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는다. 그때를 위하여, 온몸을 던져서 찾아다닌 길 안의 기록들을 세 번에 나누어 전하려한다. 고구려의 보름달이 높이 떠서 첫길을 이끌어 주었다. 물굽이 휘어 도는 곳마다 동포들이 있었다. 두근거림과 아픔, 소리쳐 부를 수 없는 아리랑이 내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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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바늘을 뒤로 돌리며
우리 나라의 서해는 중국의 동해다. 바다를 건너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시계바늘을 한시간 뒤로 돌렸다. 오늘 하루는 시계바늘을 뒤로 돌려서 맞춘 시간만큼 낮이 더 길고, 그 시간만큼 길이 더 밝을 것이다. 오늘은 늦더라도 단동까지 가야한다.
만주벌판은 거대한 타임캡슐이다. 나는 시계바늘을 뒤로 돌릴 때 거대한 타임캡슐의 잠금쇠를 함께 열었다. 공항 밖으로 나서니 비가 내린다. 연길에서 달려온 가이드와 기사가 '압록강' 쪽지를 얼마나 여러 번 폈다 접었다 했는지 꾸깃꾸깃해지도록 우리는 늦게 나왔다. 우리 일행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우리 뒤에 구름처럼 모여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새치기를 해서 빠져 나가버리고 우리가 맨 뒤로 처졌기 때문이다. 시계바늘을 뒤로 돌려서 얻은 시간만큼 새치기를 당하고, 내 가방은 얼마나 큰 짐에 떠밀렸는지 모서리가 움푹 들어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차는 8인승 랜드크루즈. 우리 일행은 5면 기사와 가이드까지 7명이나 된다. 발 밑에도 짐, 무릎 위에도 짐, 얼굴 편한 사람이 없다. 이런 자세로 어떻게 백두산까지 가나. 텐트며 침낭이며 도중에 끓여먹을 쌀이며 솥 단지며 밑반찬까지 챙겨들고 왔으니, 가이드는 손님들이 짐을 너무 많이 가지고 왔다고 불평, 손님들은 지붕 위에 짐칸 딸린 차를 끌고 오지 않았다고 불평. 차안의 형편은 이렇지만, 고궁은 둘러보고 떠나기로 하였다. 마침 비가 그쳤다.

봉황루를 등지고 소현세자 생각
심양은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세웠던 후금, 즉 청나라 초기의 도읍지였다. 공항에서 머지 않은 시내 중심부에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머물던 궁궐이  있다. 심양 고궁은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후에도 봉천(奉天)이라 부르며 우대하던 왕도다. 궁궐의 규모는 작지만 짜임새가 있고 토속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문안의 돌사자상은 200년 비바람에 발톱과 코가 뭉그러졌지만, 소맷돌을 겸한 담장에 얹혀있는 노랑 초록 칠보기와는 아름답다. 바깥 풍경은 장터를 방불케 했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한 시대를 호령하던 왕조의 자취들이 눈을 뜨며 다가온다.  
그러나 이곳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불모로 잡혀와 있던 곳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에 패배한 뒤, 청나라는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나중에 孝宗이 된 분)을 이곳 성경(盛京·심양의 옛 이름)으로 데려왔다. 두 왕자는 1644년 청나라 세조가 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이곳에 있었다. 소현세자는 이곳에서의 나날들을 '심양일기'에 남겼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하자마자 죽었고, 아우 봉림대군이 왕위를 이었다. 그분이 바로 효종이다. 효종은 등극하자마자 북벌정책을 썼지만, 하늘은 그 왕과 그 백성을 돕지 않았다.

아리강은 흘러서 구려하(句麗河)가 되고
구려하는 흘러서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심양은 상해, 북경, 천진에 이어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요령성의 주도, 동북지방의 경제 교통 문화 정치의 중심지답게 심양 거리는 복잡하다. 자동차 자전거 릭샤 리어카 사람들이 뒤섞여서 빵빵거리면서도 용케 부딪치지 않고 자기 길을 찾아간다.
'심양은 본디 조선지역이다. …위나라,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는 고구려에 속했던 곳이다 (열하일기).' 그 긴 시간 고구려의 터전이었던 심양. 어디에서도 고구려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 자전거 릭샤 리어카 사람이 뒤섞여서, 저마다 제 길만 찾아서 흘러가는 저 거리에, 고구려의 후손 고구려의 흔적이 왜 없겠나. 지금은 요령성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이곳은 원래 요동성이었다. 고구려 장수왕을 비롯한 왕들을 위나라는 '요동군 ○○공 고구려왕'등으로 불렀다. 고구려가 강국들에게 조공을 받치긴 했지만, 요동 일대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증거다.
심양 시내를 관통하는 강 이름은 혼하(渾河). 예전엔 심수(瀋水)라 불렀다한다. 심양(瀋陽)이란 이름도 심수의 북쪽, 즉 양(陽)의 방향에 있는 마을이라 붙인 이름이라는데, 어느 때부터 생긴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혼하는 옛 이름이 아리강이다. 혼하는 혼강(渾江)과 글자가 같지만, 다른 강이다. 혼하는 요수를 거쳐 서해로 들어가고, 혼강은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보면 '혼하는 일명 아리강(阿利江)이요 또 소료수라고도 부른다.'했다. 요하는 혼하 태자하 등의 지류를 모아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의 발해로 빠져나간다. 요하(遼河)를 한서(漢書) 수경(水經)에서는 '대요하'라 부른다 했고, 요즘 지도에도 그렇게 나와있다. 대요하의 옛 이름은 삼차하(三叉河)였다. 그러나 더 오래 전의 이름은 요하 전체가 구려하(句麗河)였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삼차하는 즉 요수니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국경이던 곳이다.'했고,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요하는 숭덕 서쪽에 있는데 즉 구려하(句麗河)다. 혹은 구류하(枸柳河)라 한다.'했다. 요(遼)나라는 고구려(37-668)보다 900여년 후인 서기907년 거란이 세운 나라였고 '요'라는 이름은 한참 후에야 붙였다. 그러므로 요하의 옛 이름에서 '구려하'를 제외시키는 것은 옳지 않고 본다. '구려'란 곧 고구려다. '구려하'란 곧 고구려의 강이라는 뜻. 혼하가 '아리강'으로 불리던 것도, 그 이름으로 미루어보아 고구려 때였을 것으로 본다.  

봉성에서 보름달을 보며  
'심양∼본계∼봉성∼단동'으로 이어지는 심단고속도로는 281km. '심양-본계' 구간은 도로가 넓고 포장이 잘 되어 있다. 그러나, 본계(本溪) 남쪽 남분(南芬)이라는 곳에서부터는 비포장도로다. 길옆은 도처에 옥수수밭이다. 해바라기 밭도 넓다. 우리는 꽃으로만 보는 식물을 중국인들은 열매를 받기 위해 심는다. 초원이 지나가고 바위 봉우리를 이고 있는 산도 지나갔다. 돌도 검다. 흙도 검다. 옥수수 꽃대들도 검은빛이다. 남분(南芬)에 도착할 무렵 해까지 졌다. 길은 아직 절반도 못 왔다. 길옆의 작은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 집 탕수육은 내가 먹어본 탕수육 중 가장 맛이 있었다. 7명이 배불리 먹고 90위안(12,800원)을 지불했다. 남분은 태자하(요하의 지류) 강변에 위치한 길목마을이다. 길은 좁지만, 자동차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남분에서 봉성 까지는 천산(千山)이라는 산맥을 넘는다. 천산산맥을 넘으면 비로소 압록강 지류들을 만나게 된다. 봉성의 동쪽을 흐르는 물은 '초하(草河)'라고 부른다. '초하는 도수곡에서 나온다. 도수곡은 봉황성 서북쪽 150리에 있으니 청석, 마천, 두 개 령(嶺)의 남쪽으로 뻗은 지맥이다. …초하는 또 동남쪽으로 봉성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 애하에 들어간다.(정약용, 大東水經)' '애하'는 구련성앞에서 압록강과 합류한다.
좁고 비에 젖어 울퉁불퉁하던 길은 봉성이 가까워지면서 끝났다. 길은 다시 넓어졌지만, 비포장도로는 계속된다. 나는 언제부턴가 잠이 들어 있었다. 너무 고요해서 눈을 떠보니, 차안엔 나만 남았다. 일행들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다리 운동을 하고 있다. 좁은 차안에 웅크리고 긴 길을 달리는 탓이다. 가로등도 없는데 길이 환하다. 빛이 오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겨갔다. 달이다. 둥글고 밝다. 고구려의 보름달! 이 길의 서쪽에 있는 봉황산(836m)에는 아직 고구려 산성이 남아있다. 저 달은 그 산성에도 비추고 있을 것이다. 고구려 700년을 비춰주고, 1331년 비워두었던 시공(時空)을 건너와서 내 얼굴을 비춘다.
봉성(鳳城)은 중국 발음으로 '펑징'. 북경, 심양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이다. 옛 이름은 개주(開州)또는 봉황성이라 불렀고, 거란 현종 6년 고려를 정벌을 위해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그 대안에 보주성(保州城)을 쌓고 '개원군절도사(開元軍節度使)'를 두었던 곳이다.  
1780년 청나라로 가는 사신행차를 따라 이 길을 지나갔던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봉성에 대하여 긴 술회를 남겼다. '방금 봉황성을 새로 쌓고 있는 중이다. 이성을 안시성(安市城)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고구려 방언에 큰 새를 '안시'라고 하고 지금도 우리네 속어에 왕왕 봉황을 '안시'라 부르고, 배암을 '백암(白巖)'이라고 음을 따서 붙인다. 수(隋)나라 당(唐)나라 시절에는 우리 나라 말을 따라 봉황성을 안시성이라 불렀고, '사성(蛇城)'을 배암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연암의 주장은 이곳 봉성은 고구려의 양만춘이 당태종 이세민의 눈알을 화살로 쏘아 뽑은 그 안시성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곳은 그 안시성이 아니라 또 하나의 평양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사관들이 중국 측 기록만 믿고 고증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긴 질책이 함께 했다. 나는 감히 말하려 한다. 정확한 지형도를 만들 수 없던 시절, 굴곡 많고 사연 많고 입장 다른 땅덩어리에 관한 사연들을 문자만으로 서술해서 남긴 때문이라고.
박지원은 210년 전에 이 길을 거슬러 열하(熱河)로 갔고, 나는 오늘 물길을 따라 압록(鴨綠)으로 간다. 수양버들 사이로 길이 간다. 압록으로 길이 간다. 불빛이 다가가면 휙휙 돌아 서버리는 가로수들 단동 42km 표지판이 보이다 사라졌다. 잠깐 사이에 안개를 뚫고 나왔다. 단동 30km 표지판도 사라졌다.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 향나무 가로수 행렬이 끝나고 답답한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 동방대주점이란 간판 앞에 차를 세웠다. 드디어 압록강변에 왔다. 1999.8.29. 21시30분. 천장은 한없이 높고 침대는 푹푹 꺼진다.

장산포구 건너편엔 용암포가 있다
둘째 날이다. 5시 15분에 출발했다. 단동 강변에서 해뜨는 압록강을 보고, 동항을 거쳐 장산 포구로 갔다. 압록강 하구에 있는 신도를 보고 싶었다. 비단섬이라 일컫는 신도 갈대밭을 먼발치에서나마 건너다보고, 집안으로 떠나자고 했었다. 그러나 단동에서 대동구로 이어지는 강변에는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강변으로 나가는 통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을 물어물어 한참동안 하류로 더 내려왔다. 결국, 너무 많이 내려와 버렸다. 논둑 길에서 흔들리며 강변을 찾아 나왔지만, 강은 어디선가 이미 끝나버리고 싯누런 바다가 펼쳐진 곳까지 와 버린 것이다. 바다 앞까지 가려면 긴 둑방길을 걸어나가야 하는데, 강이 이미 끝났다면 굳이 바다까지 걸어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압록강 하구보다 몇십km 더 하류로 내려온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장산이란 마을은 포구의 수문이며, 뻘밭에 들얹힌 어선들이며 서해안 포구들의 썰물 때 모습 그대로다. 난 소래포구에서 저런 풍경을 보았다. 싯누런 바다 저쪽엔 조기잡이로 유명하던 용암포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서해는 중국의 동해다. 잔고기를 들고 가는 어부가 잇어서 이 고기 어디서 잡았느냐니까 동해에서 잡았다고 했다. 바다 건너 용암포에도 지금쯤 이런 풍경이 벌어져 있을 것 같다. 그곳 어부들은 이 고기 서해에서 잡았다고 할 것이다. 그것의 차이다. 그러나 그 틈은 얼마나 넓은가. 한참을 머물다 차를 되돌렸다. 포구 뒤편에는 벼가 익어 가는 들판이 끝간데 없이 펼쳐져 있다. 압록강 하구의 충적 평야가 얼마나 기름진 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백두산까지 거슬러 오르는 일만 남았다.


단동 강변에서 신의주를 보다
강은 온갖 것을 실어 나른다. 최초의 한 방울일 땐 맑고 영롱하였겠지만, 땅에 떨어져 진흙을 머금은 뒤론 아무리 맑고 싶어도 저렇게 탁류가 되는구나. 역사의 물줄기도 그렇다. 청류의 역사보다는 탁류의 역사가 더 길고 더 넓고 더 도도하다. 그 물빛이 오리머리처럼 푸르다하여 압록강이라 했다던가. 그러나 우리 앞의 강물은 황하의 물빛과 무엇이 크게 다른가. 아아, 압록강도 우리 마음처럼 흐리고 아프구나. 우리처럼 아프다는 말을 꿀꺽 삼키고 있구나. 꿀꺽 삼키고 흔들리며 흐르고 있구나. 저 싯누런 침묵의 물결 거슬러 2천리를 올라가면 백두산이 있다. 오리머리처럼 푸른 물은 그 산정에 있다. 그 최초의 한 방울에 함께 머리를 대는 순간, 저 강과 우리의 아픔도 함께 나을 수 있을까.
강 건너 우리 땅을 보자 마음이 한없이 여려졌다. 강 건너편 도시는 평안북도 신의주시. 서울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개성과 평양을 거쳐와도 6-7시간이면 닿는 곳. 그러나 그 길은 분단과 함께 끊어져버린 길. 쾌속보트를 빌리면 압록강 철교, 폭격으로 끊어진 옛 교각 밖을 돌아 신의주 강변까지 접근했다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한바퀴 돌았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이 번다는 속담을 되새기면서 구명조끼까지 차려입고 회오리바람처럼 돌았다. 강변에 나온 사람들은 강물을 향해 앉아있었다. 고기잡이에서 돌아온 배들은 옆구리를 맞대고 소근소근 출렁이는 모습이었지만, 쾌속보트의 엔진 소리 때문에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샘물 앞까지 다가갔으나 목을 축이기는커녕 목마름만 더하고 돌아온 길. 이 강은 조·중 국경선을 겸하고 있지만, 드넓은 강심 어디에도 철조망 같은 건 없다.

절반만 남은 압록강 철교
압록강 철교는 끊어졌다. 그 예전 압록강철교는, 1911년 일제의 만주 침략에 일익을 담당했던 '압록강교(鴨綠江橋)'는, 6.25때 폭격으로 끊어져 중국 쪽 절반만 남았다. 남은 쪽은  관광객들의 전망대로 쓰이고 있다. 압록강교 상류 쪽에 붙여서 새로 놓은 다리는 '압록강대교(鴨綠江大橋)' 조중우의교라고도 한다. 길이는 끊어진 다리보다 1m가 짧은 943m. 이 철교를 통해 '모스크바-내몽고-단동-신의주-평양'간을 연결하는 국제특급열차가 다닌다.
단동(丹東)은 얼마 전까지 안동(安東)이라 불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독부를 만주로 옮겼는데, 그때부터 안동이라 불렀던 것 같다. 이곳은 만주에서 한반도로 통하는 주요 길목이다. 그래서 만주 안동성(지금은 요령성)의 성도가 되었을 것이다.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이 '선·만(鮮滿) 일관 경영적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단동은 중국에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고종황제의 둘째 왕자이며, 순종황제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공을 상해로 탈출시켜 망명정부의 구심점을 삼으려했으나,  만주에서 붙잡혀 허사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다. 이름하여 '대동단(大同團)사건'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11월의 일이다. 의친왕 이강이 붙잡힌 만주라는 곳이 바로 이 단동, 그 당시의 안동이었다. 단동은 현재 교통, 상업, 무역, 공업의 중심지로 번성 일로를 걷고 있다. 우리 나라의 인천과 단동 사이를 왕래하는 정기 여객선 '단동페리(02-713-5522)'가 매주 두 차례씩 다닌다.  

구련성과 의주, 통곡정 이야기  
단동에서 관전까지는 길이 좋다. '201공로(公路)'를 따라가면 107km다. 그러나 우리는 압록강변을 따라 오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강변로는 얼마가지 않아서 끝났다. 위화도가 보이는 곳에서 돌아서서 관전으로 향했다. 구련성 쪽으로 돌아나오는 길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신의주 맞은 편 강변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구련성은 우리와 명·청 관계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길목이다. 의주에서 검동도(黔同島)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온 사신 행렬이 입조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치던 관문이다. 청나라는 심양-봉성-압록강변에 책성(柵城)을 둘러쳐 놓고, 우리의 사신들을 그 바깥 길을 통해 봉성으로 들어오게 했다. '황명통기(皇明通紀)에 말하기를, 성화(成化) 15년에 조선 사신이 건주 여진에게 중로에서 피습되었으므로, 사자(使者)가 공물을 바치러 가는 길을 다른 곳으로 바꾸기를 청하였더니 …"조선에서 조공하러 오는 길을 아골관에서부터 요양-광녕을 경유하고 전둔(前屯)을 지나서 산해(山海)로 들어오게 하고 있으니, 이것은 조종(組宗)의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압록강에서 전둔∼산해로 이르게 한다면 가장 가까운 길이지만, 다른 날의 근심을 끼칠까 두려워 들어주지 않았다"고 하였다(이수광, 지봉유설. 제국부 도로편).' 우리가 어제부터 달려온 길을 돌아보니 '산해'는 봉성, '전둔'은 단동이 아니었나 싶고, 아골관이란 바로 구련성일 것이다. 청나라는 만일을 염려하여 우리 사신에게 지름길을 두고, 도둑이 들끓는 먼길로 돌아다니게 했던 것이다.
구련성(九連城)은 성 이름과 촌락 이름을 겸하고 있다. 중국 지도에는 '尖古城遺址(첨고성유지)'라고 나와있다. 한나라 때는 안평구(安平口), 당나라 때는 박작성(泊 城) 또는 박삭(博索)라 하였고, 금나라 때는 구성(九城)을 이어 쌓았다 한다. 정약용은 대동수경에서 '애하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구련성 동쪽을 지나는바 그 성은 우리나라 의주와 상거가 30리이니 명나라의 진강성이다.'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성 이름도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생각컨대, 구련성이란 고구려의 별칭인 '구려(句麗)', '구려성(句麗城)'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서울∼의주 1,186리, 의주∼북경 2,012리.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평양도 빼앗기고 의주까지 쫓겨왔다.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망명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명나라의 원병은 이르지 않고, 의주 통군정에서 압록강 건너 호산과 구련성을 건너다보자 복받치는 설움에 통곡을 터트렸다 한다. 옆에 있던 신하들도 왕을 따라 울어, 통군정이 통곡정이 되었다 한다. 그 모든 치욕과 아픔을 조용히 쓸어안고 압록강은 흐른다.  
 

애하를 거슬러 호산장성으로
단동 시내를 등지고 진주포를 지날 때까지의 압록강변 길은 정말 아름답다. 강 안의 섬들이 갈대와 버들을 키워 강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구름도 걸음을 멈추고 제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달리는 것은 우리 뿐. 우리는 잠시도 멈출 수가 없다. 저 섬 이름이 '어적도'냐고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다. 소관매도, 대관매도가 어디쯤일까 두리번거리며 불쑥 튀어나온 산모퉁이를 돌아들 무렵,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안개가 깔리고,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압록강도 하중도들도 소나기와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소나기를 뚫고 계속 달렸다. 갈수록 산이 높아진다. 길 오른쪽에는 좁고 깊은 협곡이 따른다. 구련성 앞에서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애하다.
애하를 거슬러 한참을 더 달리니, 저 멀리 오른쪽에 산봉우리가 아름다운 산이 하나 나타났다. 산머리로부터 안부로 이어지는 능선에 만리장성을 닮은 성곽을 둘러놓았다. 산 아래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호산이란 곳이다. 구련성이 성 이름과 마을 이름을 겸하듯, 호산도 산 이름과 마을 이름을 겸했다. 호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쳐 비탈길을 얼마쯤 더 오르니, '호산장성(虎山長城)' 입구가 있다. '호산장성은 요령성의 관전 만족자치현 경내에 있다. 남쪽은 중조 경계가 되는 압록강이고, 서쪽은 애하다. 단동까지는 26km, 관전현 성 있는 곳까지는 80km다. 호산장성은 1469년(500년전)에 쌓았고, …1992년에 100m를 복구했다.' 10위안씩의 입장료를 내고 컴컴한 입구로 들어갔다. 북경 쪽 만리장성과 구조는 비슷하다. 우리의 옛 기왓장 같은 검은 벽돌을 구워 쌓은 성이다. 묵은 향기는 없어도 깔끔하다. 만리장성은 벽돌 한 장마다 그것을 만든 도공의 이름이 적혀있다던데, 그 정도는 아니어도 정성이 깃들었다. 이 한적한 곳에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은 이 산성을 복원 시켜놓은 것은, 만족들이 정신적인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주란 그만큼 기댈 곳 없는 허허벌판이다.  이곳은 이 성 이전의 성이 있기 전에 이미 고구려가 머물었던 땅. 고구려인들이 쌓았던 성곽 자리에, 다시 성을 쌓았고, 그 자리에 만리장성을 옮겨놓았을 것이다. 만리장성은 이곳까지 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은 죽고, 땅 주인은 자주 바뀌지만, 대지는 그 모습을 자주 바꾸지 않는다. 우리도 지나가는 길손일 따름.


수풍댐, 수풍과 라구소촌 사이의 압록강
소나기가 다시 쏟아졌다. 우리가 차를 달리고 있을 동안은 비가 오고, 구경을 할 때는 비가 멎는다. 하늘이 돕는 것 같다. 배고픈 것도 피로한 것도 잊어버리고 어느 길로 가면 압록강을 다시 만날까, 그것만 궁리한다. 우리 중 아무도 와본 적 없는 길. 1:100,000으로 축소된 교통지도 한 권이 유일한 길라잡이다. 확실한 것은 압록강은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의 오른쪽에 있다는 것이다.
장전(長甸)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신의주 건너편 강변을 떠난 지 약 3시간 만이다. 겉모습만 근사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수풍댐을 찾아 나섰다. 장전 삼거리에서 '拉古哨 15km' 표지판이 가리키는 소로로 접어들어 20-30분 달리면 강변에 닿게 된다. '랍고초'는 중국 발음으로 '라구소'다.
나직하던 산자락들이 점점 높아지고, 굵은 전선들을 떠 매고 있는 송전탑들이 불쑥 불쑥 나타나기 시작하면 압록강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언제부턴가 산들이 멀찍이 물러나고, 길은 지붕 낮은 농촌 집들과 텃밭 사이를 지나간다. 구불구불 가던 좁은 길이 갑자기 넓어지고, 물비린내가 덮치는 곳. 강 건너편 산자락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라구소촌 집들은 모두 압록강을 향해 앉아있다. 마을과 강 사이엔 집들보다 높직한 강둑이 있다. 수풍댐으로 통하는 강둑 길은 넓고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둑길이 끝나는 상류에는 거대한 시멘트 옹벽이 강줄기를 막고 서있다. 말로만 듣던 수풍댐. 우기를 지난 탓인지 수문을 전부 닫아놓아서 물때 앉은 옹벽만 보인다. 댐 위로는 올라갈 수가 없다. 가까이 갈 수도 없다. 수풍호 푸른 물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던 꿈도 접는다. 수풍호는 내륙의 바다로 불릴 만큼 드넓은 인공호수다. 수풍댐은 수력발전소를 겸하고 있다. 1944년에 완공되었다. 생산되는 전기는 중국과 반씩 나눈다.
강 건너편은 평안북도 삭주군 수풍마을이다. 수풍마을 뒷산은 철봉산(563.8m)이다. 주봉은 뒤에 있어서 보이지 않고 작은 봉우리들만 보인다. 산자락은 대부분 밭으로 변하고 나무들이 어리다. 사태가 져서 생살이 돋아난 곳도 있다. 집들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좀 더 하류에 있다. 강변에는 사람들이 나와 있지만 무엇을 하는 지는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면 대답이 들릴 것도 같은 거리. 나는 아무도 부르지 못했다. 중국 쪽 강변엔 쇠로 만든 쪽배들이 수십 척 묶여서 출렁거리는데, 저쪽 강변엔 배 한 척 보이지 않는다.
강둑을 걸어 내려가서 강물에 손을 담그기도 하고, 작은 바위 위에 앉아서 철봉산 자락을 건너다보기도 했다. 언제 저 산엘 올라보나, 귀를 쫑긋거리기도 했다. 강둑 위에 조선족이 경영하는 '새마을밥점'이 있어서, 모처럼 우리말로 주문도 하고 매운탕과 볶음밥도 먹으며, 두 시간 이상을 머물렀다.
출발 때의 계획에 의하면 오늘은 집안에 도착해야 한다. 그것은, 이곳 도로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세운 계획이었다. 수풍댐에서 집안까지 강변을 따라서 바로 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내륙 쪽으로 우회하는 길밖엔. 장전에서 32km를 더 와서 관전(寬甸)이라는 곳에서 묵는다.


졸본성(卒本城)과 오녀산성(五女山城)
셋째 날이 밝았다. 관전에서 집안까지 가는 날이다. 요령성 관전현에서 길림성 집안시까지는 284km. 대부분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는 길이다. 관전에서 116km 달려와서 환인(桓仁)이라는 곳에 닿았다. 환인이 바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卒本)이다. 현재의 행정구역명은 길림성 환인현. '동명제(東明帝)는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였다.(삼국유사)' 졸본이란 지명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와있고,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홀본(忽本),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나와있으나, 모두 지금의 환인을 가리키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고구려 역사를 깊이 알지 못하고 떠났던 나는, 우리가 거쳐가야 할 길 안에서 환인이란 지명을 발견하는 순간, 고조선 건국신화 속의 천제 환인(桓因)을 먼저 떠올렸던 것이니….  
관전-환인 경계인 감천령을 넘어 환인으로 들어서는 순간, 세상은 음지에서 양지로 바뀌었다. 관전에서 감천령까지의 길이 새벽비에 젖어있어서 무척 추웠던 때문이다. 길을 따라 내려올수록 드넓어지는 들판. 온 세상 아침햇살은 모두 이곳에만 모여 있는가 싶었다. 환인현의 지형은 그만큼 아늑하면서도 드넓었다. 주변의 산들은 들판을 멀찍이 벗어나서 가슴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인자한 아버지 팔을 벌리고 마중하는 것 같았다. 흰 구름은 느릿느릿 산봉우리를 오르고, 바람은 먼 곳에서 잠들어 있었다. 옥수수 밭만 보면서 달려온 눈에 누렇게 익어 가는 벼이삭,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황금들판. 아, 이런 곳을 보여주려고, 압록강은 강변 길을 끊어 우리를 내륙으로 우회하게 했구나 싶었다.
동로대(東老臺) 갈림길에 이르러, 관전에서부터 타고 온 '201공로'를 버리고 우회전하여 환인 시내 쪽으로 향했다. 201공로는 우리가 집안에서 임강으로 가던 날, 통화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동로대에서 환인 쪽으로 꺾어지지 않고, 통화 쪽으로 8km 정도만 더 갔더라면 오녀산산성을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녀산산성은 교통지도에도 나와있고 가이드로부터 얘기도 들었지만, 집안 도착이 계획보다 하루 늦어졌고, 압록강을 거슬러 백두산에 오르는 것이 우리의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들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녀산산성(五女山山城 : 서길수, '고구려역사유적답사' 참고) 옆을 지나오면서도 그곳이 '졸본성(卒本城)'인 줄 몰랐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환인현 경계로 들어서면서부터 내가 느꼈던 아늑함, 비류수 강변으로 내려오며 만났던 기름진 충적평야, 때맞춰 영글어가는 알곡들, 험준한 산세에 의지하여 쌓았다는 왕성, 유사시에 적들을 물리치기 좋았을 곳. 환인, 아니 졸본이 고구려의 서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만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구려여, 우리도 졸본에서 아침을
'환인교(桓仁橋)'라는 다리 앞에서 나는 정차를 부탁했다. 혼강(渾江), 아니 비류수가 거기 있었다. 201공로를 버리고 남쪽 길을 따라 온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다. 오녀산 졸본산성 이끼 앉은 성벽을 적시고 흘러왔을 비류수. 나는 내 앞의 강이 비류수인 것도 모르고, 누구에겐가 이끌린 사람처럼 "덩차!"를 외치고 땅으로 내려섰던 것이다. 일행들은 의아해하며 아무도 따라 내리지 않았다. 나는 혼강을 보았다. 환인교 난간을 만져보고 '桓仁'이란 글자를 쓰다듬어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변 풍경이 아름다운 것도, 다리 모습이 시선을 끄는 것도 아니다. 강바닥은 수량이 줄어 모랫등이 드러나 있었지만 강폭은 넓다. 강물이 실어온 모래알갱이들이 하상을 높이고 수많은 모랫등들을 만들어 놓았다. 젖은 땅에서도 마른 땅에서도 잘 살 수 있는 풀들이 자욱히 돋아나서 모랫등을 가렸다.
내 발 앞의 혼강이, 주몽이 부여왕 해부루(解夫婁)의 손자들에게 쫓겨 '오이, 마리, 협부 등 세 사람과 벗을 삼아 엄사수(개사수)에 이르러, 건너가려 했으나 다리가 없었다. 뒤쫓는 군사에게 잡힐가 두려워 물에게 물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해 가는데 뒤쫓는 자가 거의 닥치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하겠느냐?" 이에 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몽을 건너가게 하고는 곧 흩어지니 뒤쫓는 기병은 건널 수 없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던 그 '엄사수'와 같은 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 이 혼강 가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비류국 쪽에서 떠내려오는 채소 이파리를 기대할 수 없겠다. 이 강이 이만큼 수량이 줄어든 것은 상류에 환인댐이 생겼기 때문이다.
백두산에서 중국 대륙 쪽으로 달려가던 장백산맥 서쪽 줄기가 임강(중강진과 마주보는 도시) 서북쪽 강원(江源)이라는 지방의 서북쪽 산록에서 큰 강 하나를 낳는데, 그게 바로 혼강(渾江)이다. 혼강은 강원∼백산∼통화 시내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7도강(七道江)-6도강-5도강-4도강-해니하( 泥河)등의 지류를 합한다. 환인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상류에는 환인수고(桓仁水庫)로 불리는 인공호수가 있고, 환인을 지난 혼강은 회룡산 부근에서 또 하나의 인공호(回龍山水庫)를, 그 하류에 또 하나의 인공호(大平哨水庫)를 만든다. 세 개의 인공호를 채우고 남은 물이 집안 서남쪽 혼강구(渾江口)로 빠져나가 압록강 원류와 합류한다.
환인교를 건너서 환인 시가지로 들어서는 입구의 풍경은, 심양 고궁 입구에서 받았던 느낌을 되살려주었지만, 환인시장 골목 안 조그만 식당에서 옥수수죽과 물만두 호떡처럼 생긴 쌀떡으로 아침을 먹으면서 나는 다시 환인의 따스함을 느꼈다. 환인 시장 안에는 대대로 이어온 환인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참기름, 참깨 볶음, 좌판 위의 살코기들, 리어카나 좌판 위의 수박, 포도, 복숭아, 사과배…. 15위안을 썼을 뿐인데 나는 두 손이 그득했다. 나에게 복숭아와 포도를 판 중년 남자는, 말을 하지 않아도 내 표정을 알아보고 거스름돈을 주었다. 나에게 참기름을 판 할머니는 깨소금도 같이 사가라고 소매를 잡아 당겼다. 나는 환인이 아니라, 홍성이나 구례나 하동이나 인제 장터에서 5일장을 보고 나오는 것 같았다. 대지에 뿌리를 박고 농사를 짖는 사람들은, 임금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쉽사리 땅을 떠나지 못한다. 깨닫지 못했으나 그때 나는 고구려의 초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수풍호반 강구촌(江口村)에서 쪽배를 타고
환인을 등진 후론 계속 비포장도로다. 집안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안 좋을 줄은 몰랐다. 오리전자란 마을길에선 오리를 몰고 가는 남자를 보았다. 소떼가 마주 오면 차가 멈춘다. 그러나 이 궁벽한 변경, 오지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서 삶의 활기를 만나면서 가는 이런 길이 나는 오히려 좋다. 차가 너무 덜컹거려서 물을 마실 수도 메모를 할 수도 없지만…. 이 길이 정말 집안으로 가는 길이 맞을까? 의심이 들 때쯤 되면 이정표가 하나씩 나타난다. 오전 9시에 환인을 떠났는데, '集安90km' 이정표를 통과한 것이 10시 50분이다. 환인에서 집안까지는 168km. 1시간 50분만에 겨우 78km를 왔으니, 시속 40km를 낼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단동-집안, 관전-집안, 등을 왕래하는 시외버스들도 모두 이 길로 다닌다.
'환인-집안' 경계가 되는 고갯마루를 통과하여, 대로진(大路鎭) 마을을 지나, 수풍댐 상류라도 볼 수 있을까하고 강으로 통하는 길을 찾아서 내려가다, 마을이 가까운 강변에서 [封河]라는 표석을 보았다. 청나라가 개국초기에 만주 일대에 봉금령을 내렸던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그러나 거기서도 길이 끊어져 호수를 만나지 못하고 상류로 차를 돌렸다.
양수라는 곳으로 나와서 '환인-집안'을 연결하는 기존도로에 합류했다. 그러나 육전자촌이라는 곳에서 그 길을 다시 등지고 '얄루장'을 찾아 내려갔다. 도가촌이라는 곳에서 다리를 건너자, 있다던 길은 길이 아니었다. 아무렇게 쌓아놓은 흙더미 돌덩이에 걸려 차가 언제 시동이 꺼질지 조마조마했다. 그런 구간을 30분 이상 덜컹거린 후에야 마을로 통하는 좁은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20가구쯤 되는 집들이 모여있고, 그 길마저 끊어진 곳에 호수가 있었다. '얄루장(鴨綠江)'을 찾아 헤맨 지 두 시간이 지났다. '환인-집안'을 연결하는 비포장도로마저 등지고 길 아닌 길을 넘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선물. 수풍댐에서 볼 수 없었던 수풍호를 훨씬 상류로 올라와서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호수 저쪽이 '한꿔어런'이라고, 거기는 갈 수 없다고, 고개를 젓는 중국 아가씨가 쪽배를 내어 호수 가운데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저쪽 호반 낮은 언덕에선 무엇인가 곡식이 익어가고,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강물은 잔잔하기만 했다. 저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독로강 하구가 있을 것 같고, 저쪽 마을 이름은 강계강구가 아닐까 싶었지만, 물어볼 곳도 물어볼 사람도, 물어서 어디에다 쓸곳도 없었다. 다만 느끼고, 흔들릴 뿐.

광개토대왕비를 찾아서
강구촌을 등진지 1시간 반 만에야 집안시내로 들어왔다. 차가 고장이 났었기 때문이다. 오후 5시가 넘었다.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을 보기 위해 태왕촌대비가(太王村大碑街)로 달려갔다. 문을 닫았을까봐 조마조마 했지만, 입장을 허락했다. 광개토대왕비! 사진으로만 보던 유물의 실체를 대하는 순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비신의 높이만도 6.39m에 이른다는 거대한 비석이 석양을 등지고 서서 우리를 맞이했다.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이 죽은지 2년 만인 414년에 완성해 세웠다는 비석.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가, 청나라의 봉금령이 풀린 뒤인 1880년경에야, 이 일대를 개간하던 청나라 농부에 의하여 발견되었다한다. 각력응회암(角礫凝灰巖)을 방주형으로 다듬어 만든 비신의 4면에 담긴 글자 수는 1,775자. 한민족 5000년 역사에 가장 빛나는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것. 나는 감동을 안으로 삭이며 묵념부터 올렸다. 너무나 늦게, 너무나 늦은 시간에 허둥지둥 찾아와서, 관리인의 재촉을 받으며, 묵념부터 올렸다.
비의 훼손을 막으려고 지은 비각은 비의 크기에 비하여 작고 답답하다. 크지도 않은 지붕인데, 들보가 너무 내려와 있어서 가까이 가지 않으면 비석의 상부가 보이지 않는다. 비 자체를 생각하지 않고, 비각과 지붕모양에만 신경을 쓴 것 같다. '광개토대왕비'라는 비명은 어디에도 없다. 입구에서부터 비각에 이르기까지, 중국풍이 지배한다. 비각 정면에는 [好太王碑]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광개토대왕비를 '호태왕비'로 부르게 된 데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묘호(廟號) 중에서 마지막 세 글자를 본떠서 붙인 것이라 하는데, 우리에겐 낯설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비바람, 풀 더미, 이민족의 탄압에도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서있는 고구려 정신을….


장군총이 아니라 장수왕릉입니다
장수왕릉은 광개토대왕비와 가까운 곳에 있다. 자동차로 잠깐 사이에 도착했다. 조잡한 철책과 관리소 건물 처마를 비켜서 왕릉 앞으로 걸어갔다. 붉은 빛을 띤 화강암들이 계단을 만들어 하늘에 닿았다. 밑면은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게 만들었다. 피라미드처럼 접근할 수 없는 삼각뿔 모양이 아니라, 일곱 계단 돌무덤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우람하다. 계단 한 층마다, 3층의 돌을 겹쳐 쌓았다. 계단은 7층이지만 겹쳐놓은 돌까지 합하면 21층이다. 무덤 꼭대기엔 흙이 살짝 덮였고 풀이 자란다.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남은 터가 증거다. 무덤 안에는 주인 없는 석곽 둘이 뚜껑이 열린 채 나란히 누워있다. 관광객들이 던져놓은 1각, 2각, 5각, 1위안 짜리 지폐들이 빈 관을 덮었다. 무덤 안에도 무덤 밖에도 왕은 없다. 지하에 있는 무덤에서 느끼는 습기 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 무덤은 무덤냄새를 풍긴다. 흙 속에 몸을 눕혀 대지로 돌아가지 않고, 높직한 하늘 가운데 돌을 쌓아 관을 눕히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죽어서도 땅으로는 돌아가지 않고 하늘로 돌아가려 했던 왕의 뜻이 아닐까? 무덤 문이 활짝 열린 지금, 그 왕은 어디에 있는가? 동쪽 벽면에는 철 계단을 만들어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철 계단과 그 난간에서 흘러내리는 쇳물은 두고두고 돌에 스밀 것이다. 무덤 밖의 돌들은 점점 더 붉어지고, 빛깔이 퇴색할 것이다. 뒷담 구석에 지석묘처럼 생긴 곁 무덤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이 거대한 적석총의 주인은 고구려 20대왕 장수왕이라 한다. 장수왕은 98세까지 살았고, 79년이나 왕위에 있었다. 아버지 광개토대왕에 이어, 79년이나 이 일대를 호령하던 왕의 무덤에 장군이란 칭호는 마땅치 않다. 장수왕릉을 왜 장군총이라 하는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유추할 수 있다. '장수왕79년[서기471년] 겨울 12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98살이었다. 시호를 장수왕이라 했다. 위나라의 효문제는 이 말을 듣고 흰 위모(委貌)와 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를 표했다. [또] 알자복야(謁者僕射) 이안상을 보내어, 왕을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車騎大將軍 太傅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에 책봉하고 시호를 강왕(康)이라 했다.' 장수왕이란 고구려 조정에서 추존한 시호이다. '將軍塚'이란 장수왕 사후에 위나라 황제가 내린 벼슬 이름 '車騎大將軍'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고구려왕을 위나라의 장군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중국은 자기네 위상을 드높인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 우리가 이 유적을 위해 한 일은 무언가? 동국여지승람 강계도호부편에, '황제묘(皇帝墓): 황성평(皇城坪)에 있으니, 세상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금나라 황제묘라 하는데 돌을 갈아 만들었다. 높이가 가히 10장이고 안에는 침상이 셋이 있다. 또 황후묘와 황자묘가 있다.'하여 장수왕릉을 금나라 왕의 무덤으로 규정해버렸다. 황성평은 어딘가? '만포에서 30리의 거리가 되는 곳으로 금(金)나라가 도읍했던 곳이다.' 지금의 집안, 곧 국내성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남겼던 것일까? 뒤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황성평 : 만포와의 상거 30리인데, '금국소도(金國所都)'에 말하기를 "황제의 무덤이 황성에 있어 세상에 전하기를 '금나라 황제의 무덤에 초석(礎石)을 고가(高哥) 십장(十丈)이 만들었는데, 안에 세 침(寢)이 있으니 황후의 무덤과 황자의 무덤이다'하였다 한다."하였다.' 그 근거라는 것이 '금국소도'라는 자료 하나였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지 않은가. 장수왕의 성은 동명성왕 이래로 이어온 고(高), 이름은 거련(巨連)이라 했다. 고가 십장이 왕릉을 만들었으니, 죽은 장수왕이 제 무덤을 만들었던 것인가? 장수왕릉을 장군총이라 불러도 우리는 항의 할 근거조차 잃었던 것 아닌가? 오호, 통재!

지안(集安) 강변에서, 만포로 갔다
또 다시 압록강으로 왔다. 또 다시 쾌속보트를 탔다. 또 다시 아픔이 도졌다. 강폭은 신의주 쪽보다 10분의 1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또 다시 보트를 탔다. 굉음을 울리며 만포 쪽으로 갔다. 상류로 올라갔다. 배를 타지 않고는 거슬러 오를 수 없는 강물. 저쪽 강둑 위에 길이 하나 가고 있었다. 우리와 나란히, 한순간이나마 남과 북이 나란히, 만포를 향해 강물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아이 어른 여자 남자…. 그들의 등과 머리를 비추는 저녁 해. 우리의 등과 머리를 비추고 있을 저녁 해. 압록강 수면 위를 달리는 우리들의 머리보다 더 높은 곳엔 걸어가는 이들의 길이 있고, 걸어가는 이들의 머리 위보다 더 높은 곳엔 옥수수들이 우두커니 서있는 비탈밭들이 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잎사귀가 말라도 저 비탈밭 옥수수들은 스스로 내려와 압록강 물을 마실 수 없다. 나무들이 떠나버린 산비탈에서 흙덩이가 구르고 돌덩이가 구르지만, 무심한 압록강물은 산비탈 초목들의 목마름을 모른다. 만포로 통하는 물목은 노을만 아름답구나. 강물은 노을을 싣고 부풀었다, 흔들리고, 흔들리다간 다시 부풀며 우리를 흔든다. 높직한 굴뚝이 보이는 곳에서 우리는 돌아섰다. 굴뚝만큼 높은 크레인이 접안시설 공사를 돕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이라도 더 가까이 가서 우리가 보고자 했던 것이 고작 이런 것들이었던가. 새하얀 물보라를 끌고 하류로 되돌아오는 길. 나는 나를 향해 돌을 던지고 싶었다.

달밤에 떼무덤을 찾아간 까닭
취원빈관에 짐을 풀었다. 중국인 기사와 릭샤를 타고 압록강변으로 나갔다. 석양 무렵에 보트를 타던 강변. 강물은 캄캄해졌지만, 강 건너편엔 등불이 세 개,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돋아 있었다. "벙위(鳳宇)! 저 별 좀 봐!" 한족 기사는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그때 우리를 태우고 왔던 릭샤꾼이 한국에서 오셨어요! 인사를 하더니 통역을 해주었다.
나는 조선족 릭샤꾼을 따라 밤중에 국내성을 둘러보았다. 내일 아침 5시면 집안을 떠나 임강으로 가야한다. 내가 집안의 유적들을 둘러 볼 수 있는 시간은 이 밤뿐이다. 담을 두르고 자물쇠를 채워둔 것들은 밤에 볼 수 없어도 노천에 있는 것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427년.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것은 668년이다. 그로부터 1331년이 흐른 국내성의 모습은 처참하다. 집안 시내 중심부에 있는 아파트 뒤편에, 거의 다 무너지고 잡초에 덮인 채, 방치되어 있다. 남아있는 성곽의 높이는 겨우 2∼3m 정도. 올라가 보니 잡초가 무성하고, 여기저기 휴지가 널려있다. 길림성 인민위원회에서 세웠다는 [國內城] 표지판. 그 초라한 표지판마저 없다면, 이 성곽의 존재를 알기는 어려울 것 같다. 2000여년을 비바람 속에서 버텨왔는데, 우리조차 너무 무심했구나 싶다. 호산장성에서는 그렇게 좋아하던 중국인 기사가 릭샤에 앉은 채 내려와 보지도 않는다. 국내성은 머지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내 동포는 내 마음을 헤아렸다. 천천히 릭샤를 몰아 남아있는 성곽을 다 보여주었다. 그리고 환도산성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중국인 기사를 호텔에 데려다주고, 옷을 한 겹 더 입고, 랜턴과 카메라를 챙겨 들고 생면부지의 동포를 따라 나섰다.
가로등도 없고 건물들의 창에서 비치는 불빛마저 어두워진 거리, 시간은 이미 밤10시를  넘어있었다. 길은 갈수록 울퉁불퉁하고 질척거리기까지 했다. 릭샤의 배기가스는 금방 목구멍을 메이게 했다. 그러나 나는 바람막이 비닐 막을 걷어치우고 운전석에 앉은 동포와 이야기를 하면서 갔다. 떠나기 전에 내 동포는 그랬다. 밤이라 산성 안에는 못 들어가십니다. 그러나 그 아랜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이 뭐냐고 재차 물어도, 가보면 아십니다하고 자세한 말을 않았다. 이 수수께끼 같은 사내를 동포라는 이유 하나만 믿고 따라가는 내가 미쳤지. 길이 더 좁아지고 더 흔들리고 사방이 잠들어 괴괴한 적막 속으로 딸딸딸딸 소리를 내면서 릭샤는 간다. 30분 정도 달렸을까, 다리를 하나 지났다. 이 다리 이름이 뭐냐니까 자세히 모른다. 돌아오면서 보니 '산성자교(山城子橋)'다. 다리를 건너자 내 동포는 릭샤를 세우더니 "보세요! 다 왔어요!"한다. 뭘 보란 말인가. 그가 헤드라이트를 비추는 곳에 [洞 古墓群] 표석이 나직하게 서있다. 아하, 내 동포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통구떼무덤. 통구떼무덤 중에서도 산성하떼무덤 앞이다. 나는 밤중에 목욕재계하고 1500여년전 조상들의 공동묘지를 찾아온 것이다. 내가 생면부지의 동포를 따라 딸딸거리며 온 길은 무덤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 젊은 릭샤꾼, 내 동포는 밤중에 떼무덤을 보러 간다고 하면 내가 안 갈까봐, 가보면 아신다고 말꼬리를 숨겼던 것이다. 아하, 그러나 정말 잘 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한쪽 귀퉁이가 살짝 베어 먹힌 열 이레 달이 떠있다.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내가 아는 별들은 내가 오기 전부터 하늘에 떠서, 무덤과 나 사이의 길을  반짝반짝 닦아놓았다. 환도산성은 휘영청 휘도는 능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내려다본다. 나는 동포에게 명령했다. 릭샤의 헤드라이트를 최대한 밝게 하라고. 그는 나에게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죄가 있으므로 시키는 대로 예예 불을 밝혔다. 나는 거듭거듭 후래쉬를 터트렸다. 릭샤의 엔진소리가 적막을 깨트리며 퍼져나간다. 무덤 안에 계신 분이 할아버지신지 할머니신지는 몰라도, 오늘밤 편한 잠 주무시기는 틀렸다.
장군총만큼 우람하지는 않아도, 내 평생 이렇게 큰 무덤들은 처음 보았다. 달밤에 보기 때문에, 햇빛 아래서 보는 것보다 체감 치수가 상승된 것인지도 모른다. 같이 있는 흙무덤들은 모양이 언덕 같고, 잡초가 잔뜩 돋아있어서 모양이 낯설지 않은데, 적석총들은 기단만 남아 잔돌들을 잔뜩 이고 있는데도, 내 삶이 준 경험들을 압도한다. 진시왕릉도 보고, 명13릉도 보고, 천마총도 보았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보는 무덤보다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똑 같은 높이의 지면에 발을 붙이고,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주 바라볼 수 있는 무덤이 더 크게 느껴진다. 오늘 밤 이 공동묘지에는 죽은 자는 떼를 지었고 산 자는 단 둘뿐이다.
환도산성(丸都山城)은 졸본성, 국내성에 이어 고구려의 세 번째 왕성이 있던 곳이다. 능선안부에는 성을 쌓고 높은 곳에는 망대를 세웠을 것이다. 산성 모양은 이름 그대로 둘레가 둥그렇게 생겼을 것이다. 산성 안에는 말먹이는 연못도 있고 군사훈련장도 있고, 성곽 위에는 장대도 남아 있다지만, 나는 오늘 이 떼무덤을 본 것만으로도 조상들께 감사한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나를 이 공동 묘지로 안내해 준 내 동포에게도. 내 동포가 이 밤중에 나를 이리로 유인(?)해오지 않았더라면 어찌 만날 수 있었을 것인가. 자정이 가깝도록 나는 거기 있었다. 너무나 조용한 사자(死者)들의 마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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