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5/16(금) 19:51 (MSIE6.0) 220.78.30.225 1024x768
[노천명], 푸른 五月  


    푸른 五月


        노 천 명

    靑磁빛 하늘이
    육모정 塔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당 창포 잎에 ―
    여인네 행주치마에
    첫여름이 흐른다

    라이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같이 앉은 正午
    계절의 女王 오월의 푸른 女神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 밀려드는 것을
    어찌하는 수없어
    눈은 먼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진 길을 걸으면
    생각은 무지개로 핀다

    풀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순이 뻗어나던 길섶
    어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홋잎나무 젓갈나물
    참나물 고사리를 찼던 ―
    잃어버린 날이 그립구나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아니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이 모양 내 맘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오월은 사람을 고무시키는 달이다. 그리운 이는 더욱 그립게, 슬프고 우울하던 이도 햇빛 속으로 걸어 나와 새로운 사랑과 희망을 꿈꾸게 하는 달이다. 봄 아지랑이와 여름 장마 사이에, 틈새처럼 파고드는 계절. 봄도 여름도 아닌 달. 오월은 짧다. 이 짧은 오월에 장미는 첫 꽃송이와 마지막 꽃송이를 차례로 밀어 올리고, 가시를 더욱 단단하고 날카롭게 벼른다. 새잎과 줄기를 다 뜯기고도 살아남은 산나물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쓰고 흰 진액을 머금는다. 들판의 보리는 가느다란 줄기 끝에 인내의 열매를 펼쳐놓는다. 바람이 일 때마다 보리밭에는 파도가 인다. 햇살은 어느 때보다 가볍게 부서지며 튀어 오른다. 산기슭이나 들판으로부터 날아오른 새들은 더욱 높이 솟구치며 높은 소리로 노래한다. 땅속에서도 하늘에서도 들판에서도 물속에서도 새로운 생명들이 꿈틀거린다. 오월은 초록빛이다. 연둣빛과 갈맷빛 사이의 틈새를 파고드는 초록. 사람들은 이 푸르름에 항복하여 ‘계절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바쳐왔다.
  계절의 흐름에 유난히 민감했던 노천명(1911~1957) 시인도 5월 시를 세 편이나 남겼는데, 「푸른 五月」은 가장 섬세하고 선명한 시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나물캐던 봄을, 이제는 보기 드문 보리밭을, 서랍 속에 넣어둔 채 좀체 두르지 않는 행주치마를 생각한다. 내게 생명을 준 땅과 하늘의 빛과 공기를 깊이깊이 들이키며, 지금 내 곁에 없는 것들을 만나는 것이다. 물결치는 보리밭 사이로 오솔길 한 가닥이 마중오고, 종다리 울음에 발이 둥둥 떠오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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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사람들>2003년 5~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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