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8/15(수) 18:46 (MSIE5.0,Windows98) 211.104.141.17 1024x768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 형 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은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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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될 때 쯤 나는 내가 어느새 늙었다는 것을 알았다. 기형도는 너무 일찍 그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생은 나처럼 둔한 자에게 너그러운 법. 이 빛나는 젊은이를 너무 일찍 늙혀서 데려가버린, 심야극장도 그에겐 하나의 정거장이었을거다. 오지 않는 차를 기다리다 앉은 채 잠들어버린... 앉은 채로 다른 땅으로 옮겨가버린...그의 충고가 문득 머리를 치고 간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은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엉덩이 붙이고 앉은 곳이면 어디나 정거장이다.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어버린, 그의 충고는, 정거장에서 정거장으로 옮겨가버린 그의 충고는, 우중충하고 후덥지근한 저녁을 흔들며 쳐들어온다. 너무 많은 길 중에서 하나를 골랐을 때처럼 곧게....

사람은 가도 시는 남아 이처럼 절절하게 하는구나.

떠나기 전에
이미 떠난 사람의 말을 남긴 그.
그는 이제 정말 그럴듯한 희망을 만난 것일까?

바람 그친 정거장으로 저녁 길이 한 가닥 딱딱하게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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