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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미당문학상 시부문 관련기사모음 (완료)  

미당문학상 김기택씨 시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황순원문학상 김영하씨 단편소설 '보물선'


   
제4회 미당문학상에 김기택씨의 시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황순원문학상에 김영하씨의 단편소설 '보물선'이 수상작으로 선정됐습니다. 이와 함께 제5회 중앙 신인문학상 수상자도 결정됐습니다.

미당·황순원 문학상은 2000년 타계한 미당 서정주 시인과 소설가 황순원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중앙일보와 '문예중앙'이 2001년 제정한 것입니다. 올해 수상작은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29개 문예지에 발표된 시와 중·단편소설을 대상으로 정성들여 심사해 결정했습니다. 두 작품은 모두 '현대문학' 2004년 1월호에 발표됐습니다. 시상식은 10월 29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서소문동 명지빌딩 20층 대회의실에서 열립니다. 상금은 미당문학상 3000만원, 황순원문학상 5000만원, 중앙 신인문학상은 소설 1000만원, 시·평론 각 500만원입니다. 당선작과 심사평, 수상 소감 등은 오늘자 '문학속으로'섹션에 소개됩니다. joongang.co.kr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게재일 : 2004년 09월 22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김 기 택  


    방금 딴 사과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과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잠깐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윌리암 워즈워드의 시 "The Solitary Reaper"에서 인용.

     *<<현대문학>>(200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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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 심사평]
수상작 김기택 시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삶 관통하는 폭력성 단정한 언어로 묘사


▶ 미당문학상 본심 심사장면. 왼쪽부터 최승호.홍기삼.유종호.김화영.김재홍씨. 박종근 기자

예심에서 넘어온 이 대표적 시인들의 엄청난 다산성에 놀랐다.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밭에 들어선 것처럼 감탄과 기대도 크지만 이 많은 노작 중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단 한편의 시를 뽑아내는 일의 지난함 앞에 걱정이 앞섰다.

어떤 시인의 개별적 시편은 그 자체로 매우 개성적이고 독특한 경지에 도달했으나(시 '별자리''짧은 낮잠' 같은 경우가 특별히 예시되었다) 같은 시인이 발표한 다른 시편들 전체의 수준과 관련지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사실 한 시인이 도달한 시적 성과는 시 한편의 내적 긴장이나 개별적 시상의 높이에 의해 나타날 수도 있지만 결국 한편 한편의 시는 그 시인이 추구하는 시정신의 한 도정으로 다른 시편들의 빛을 받거나 그의 시 작업 전체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해석되고 음미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들의 놀라운 '다산성'은 때로 부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전체 후보 중에서 특히 몇몇 시인이 전체 심사위원들의 호의적 평가 대상으로 오르내리는 가운데 투표에 의해 우선 6명의 후보로 대상이 압축됐다. 그중 4명이 여성 시인이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고, 전체 6명 중 김기택 시인이 압도적인 표를 얻었다.

이후 이어진 토의 과정에서 결국 김기택의 시 '어떻게 기억해냈을까'를 수상작으로 정하는 데 전원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 시인은 우리 시단에서 독특한 묘사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보이면서 일찍부터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현상 속에 잠복해 삶의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으면서도 습관에 의하여 무반성하게,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폭력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힘들을 일정한 거리에서 정밀하게 관찰하며 지극히 고요하고 단정한 언어로 묘사함으로써 대상과 언어 사이에 미묘한 긴장상태를 빚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인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그로테스크한 힘이나 어두운 현실의 단순한 드러냄에만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면 그의 세계를 지배하는 듯한 폭력과 어둠은 오히려 그 사이를 비집고 솟아오르는 연약한 생명의 힘을 더욱 신선한 것으로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가령 '얼룩''소나무''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그리고 수상작 '어떻게 기억해냈을까'는 이런 일련의 연약하지만 끈질긴 생명의 힘을 세상 속으로 곧장 뻗쳐 들이밀고 있는 경우다.

여자의 통통 튀는 듯한 웃음이 싱싱한 사과의 둥근 아니마로 되살아나면서 서류뭉치나 빌딩 같은 우리들 현실의 각이 진 아니무스를 땅속에 깊이 뿌리박은 한 그루 거대한 생명나무로 둔갑하게 하는 이 시의 힘은 과연 미당의 힘찬 시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시인의 젊음이 오래오래 속으로 강건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김재홍.김화영.유종호.최승호.홍기삼(대표집필:김화영)

시인 김기택은…

▶1957년 경기 안양 출생

▶중앙대 영문과

▶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속의 폭풍' '사무원'

▶95년 김수영문학상, 2001년 현대문학상, 2004년 이수문학상


사진=박종근 기자  

2004.09.21 15:14 입력 / 2004.09.21 15:27 수정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이 코너는 중앙일보 지상에 발표되는 대로 업그레이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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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 - 김기택 '무단횡단'
http://news.joins.com/et/200408/22/200408221757010701a000a010a011.html
삶의 연륜이 곧 죽음의 연륜?


중앙일보와 계간 '문예중앙'이 공동 주최하고 LG그룹이 후원하는 제4회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의 최종심에 오른 후보작들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시인이 자신의 미당문학상 후보작들 중에서 직접 고른 시 한편,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소설 한편씩을 묶어 소개하는 기사를 모두 열차례에 걸쳐 게재합니다. 올해에는 시인.소설가의 작품 설명, 2심 심사에 참여했던 평론가들의 작품 해설을 고스란히 정리해 시 한편, 단편소설 한편에 대한 실질적인 감상 길잡이가 되도록 했습니다. 시인.소설가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소개합니다.

    시 - 김기택 '무단횡단'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느린 걸음이었다.

    걸음이 미처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문학 판' 2003년 겨울호 발표>


◇ 약력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89년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
-95년 김수영문학상, 2001년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무단횡단' 외 18편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고 서정주 시인을 기리는 미당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시인 김기택씨는 전문을 소개할 짧은 시 한편을 정해달라고 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단 횡단'을 골라 주었다. 그마저 길다면 '얼룩'이 좋겠다고 밝혔다.

"길이와 상관 없다면"이란 단서를 붙이자 '그루터기''직선과 원''수화(手話)''기이한 은총''물 위에서 자다 깨어보니' 등을 꼽았다. 그러면서 "시편들이 빼어나기보다 고만고만해서 고르기가 그렇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씨는 "'무단 횡단'은 산문시이고 독자 누구라도 읽어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 내용"이라고 소개했다. 하마터면 추돌사고가 날뻔한 상황의 원인 제공자인 할머니는 아직 서울 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시골 출신이다. 김씨는 "삶의 연륜이라는 것은 결국 죽음의 연륜이랄까, 수없이 많은 죽음이 지나가는 상황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무단 횡단과 그에 따른 요동, 그 짧은 순간이 삶은 순간 순간이 다 위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김씨는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태로울지 모르지만 할머니는 교통사고는 물론 죽음의 순간을 수없이 지나쳤기 때문에 죽음의 위험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점에서 젊은이들과 대비된다"고 말했다.

'기이한 은총'에서 시의 화자는 고속 엔진.바퀴 소리.경적 소리.급정거.비명 등 도시 생활의 이런 저런 소음 속에서 음악 소리를 듣고는 기이한 은총으로 여긴다. 김씨는 "도시 생활을 하는 현대인의 감각은 환경에 적응해 무뎌지게 마련인데 나중에는 일상적인 소음조차 음악으로 들을 정도로 몸이 상황에 맞춰 변해간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몸의 깨달음이랄까, 그런 변화와 적응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수이씨는 "'무단 횡단'의 상황은 운전하는 누구라도 경험해 봤을 만한 것이다. 우리 내부의 폭력성.허위.기만같은 것들이 드러나는 순간인데, 공감의 폭이 큰 시"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김기택 시의 특징으로 형용사.부사 사용 없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꼭 필요한 말들만 짧게 하는 언어 구사, 일상적 소재 등을 꼽았다. "때문에 일상의 세부가 건조하게 처리되고, 미학적이고 자연적인 서정으로부터 끊임없이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느낌도 받게 되는 한편 대상은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진다"고 평가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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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2 17:57 입력 / 2004.08.23 08: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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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 김혜순'지평선'
http://news.joins.com/et/200408/23/200408231759116631a000a010a011.html

관습의 언어 깨는 새 이미지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내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 낮과 검은 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문학동네' 2004년 봄호 발표>


◇ 약력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 '불쌍한 사랑기계'
-97년 김수영문학상, 2000년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지평선' 외 14편

시인 김혜순씨는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최종심에 올랐다. 최근 1년간 발표한 15편 중 김씨가 독자에게 전문을 소개하기로 결정한 시는 '지평선'.

김씨는 그러나 시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난감해 했다. 시인 스스로 자기 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해 의미를 확정하는 것을 극도로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시작 과정을 묻는 것으로 에둘러갔다. 김씨의 대답은 "시작 과정 역시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시란 내 몸의 전해질이 어떤 전극의 상태를 띨 때 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예민한 시인의 감성을 빗댄 것이겠지만 '몸의 전해질''전극의 상태'같은 표현은 모호하다. 김씨는 "슬픔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종의 감정상태"라고 설명했다. 또 "언어가 언어 이전의 상태로 몸을 떠다니다가 언어화하는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에두른 길이 알고 보니 더 험난했다. 다시 '지평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굳이 설명하자면 경계를 허물려고 했던 시 같다"고 말했다.

김씨의 설명에 따르면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인 1연의 지평선과 역시 갈라진 흔적인 2연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는 모두 상처의 다른 이름들이다. 김씨는 "'쪼개진 금'들의 자리인 갈라진 흔적, 상처들은 경계이기도 한데 경계는 다가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가장 넓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상처는 상처와 맞닿아야 피가 솟고, 또 그게 우리들의 삶이다.

문학평론가 정효구씨는 "'지평선'은 김씨의 시 중 쉬운 편"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좋은 시인지, 나쁜 시인지를 가리는 판단 기준으로 '대상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얼마나 새로운가''새로운 인식을 얼마나 새로운 이미지로 표출했는가' 두 가지를 꼽았다.

정씨는 '지평선'이 좋은 시의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평했다. 우선 보통 사람이 지평선을 맞닿은 것으로 바라보는데 비해 김씨는 쪼개진 상태라는 데 주목했다. 또 갈라진 하늘과 땅,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에서는 핏물과 눈물이 번져 나온다.

정씨는 "이분법처럼 둘로 갈라진 것들의 통합은 불가능하고, 인간은 결국 그 단절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것 아니냐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고 풀이했다. 이어 "관습의 때가 묻은 언어, 일률적 교육에 의해 우리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들을 우리 의식.정서에 균열을 일으켜 보여주는 게 김혜순의 장기"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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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3 17:59 입력 / 2004.08.24 08:44 수정
http://news.joins.com/et/series/040801c_s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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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3. 시 - 나희덕 '한 삽의 흙'
http://news.joins.com/et/200408/26/200408261739082871a000a010a011.html

흙속에서 퍼낸 영롱한 시어



나희덕 '한 삽의 흙'



밭에 가서 한 삽 깊이 떠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삽날에 발굴된 낯선 흙빛,
오래 묻혀 있던 돌멩이들이 깨어나고
놀라 흩어지는 벌레들과
사금파리와 마른 뿌리들로 이루어진 말의 지층
빛에 마악 깨어난 세계가
하늘을 향해 봉긋하게 엎드려 있다
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를
누가 저렇게 한 삽 깊이 떠놓고 가버렸으면
그러면 처음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엎드려 있을 텐데
물기 머금은 말들을 마구 토해낼 수 있을 텐데
가슴에 오글거리던 벌레들 다 놓아줄 텐데
내 속의 사금파리에 내가 찔려 피 흘릴 수 있을 텐데
마른 뿌리에 새순을 돋게 할 수는 없어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말을 웅얼거릴 수 있을 텐데
오늘의 경작은
깊이 떠놓은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가는 것
<전문, '파라 21' 2003년 가을호 발표>

◆ 약력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 89년 중앙일보로 등단
-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
- 98년 김수영문학상, 2003년 현대문학상
- 미당문학상 후보작 '한 삽의 흙' 외 17편

시인 나희덕씨는 독자들에게 소개하기로 결정한 '한 삽의 흙'에 대해 "최근 몇년 동안 시간 날 때마다 텃밭을 일구고 푸성귀를 키우며 얻은 경험이 토대가 된 시"라고 설명했다.

나씨는 "자동차로 광주 집에서 20분 거리, 무등산 넘어 담양에 있는 텃밭에 하루는 씨를 뿌리러 갔다"고 말했다. 묵은 흙을 한 삽 떴을 때 켜켜히 쌓인 흙의 지층이 보이고 벌레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그날 씨는 뿌리지 않고 우두커니 흙만 바라보다 돌아왔다"고 말했다.

나씨가 삽질을 그만 둔 것은 '드러난 땅 밑'이 자신이 최근 몰두하던 시의 언어에 대한 생각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그는 "'한 삽의 흙'은 일상적 소재에서 얻어졌지만 결국은 말에 관한 시"라고 설명했다. "굳은 묵정밭처럼 느껴지는 나의 언어도 무엇인가에 파헤쳐져 벌레처럼 오글거리며 살아 있고, 생채기 나 생생하게 피흘리고, 물기 머금은 언어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소망 뒤편에는 "흙을 뚫고 잎과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은 그 뿌리를 지층에 대고 있기 때문인데, 지층은 퇴적된 시간층, 시인의 몸 속에 퇴적된 경험"이라는 깨달음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잎.싹.꽃은 모두 시의 다른 표현이다.

나씨는 "사실 시인이 시를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에 의해 시인이라는 흙이 일궈진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시 쓰는 과정은 시가 우리 삶을 들어올리는 순간에 귀기울이는 어떤 수동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시의 의미 전달에 치우치다 보니 시의 어떤 근원적인 것, 쉽게 만져지지 않는 특질이랄까, 그런 부분은 소홀히 한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변화하고 싶고, 그런 소망이 표현된 시가 '한 삽의 흙'이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진수씨는 "나희덕의 시 세계는 '모성적 따스함'으로 요약된다"며 "그 안에서는 서로 대립적인 것들이 한쪽이 지양되는 방식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기 보다는 모순적인 상태 자체로 둘 다 받아들여진다"고 지적했다. '한 삽의 흙'에서도 "빛에 마악 깨어난 세계"가 "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와 대립되지만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 어려운 수사나 상징, 감정 과잉 없이 간명하고 절제된 언어가 돋보이고 나씨의 시에서 최근 자주 보이는 촉각적인 시어도 눈에 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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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6 17:39 입력 / 2004.08.26 17: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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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4. 시 - 문정희
http://news.joins.com/et/200408/29/200408291751136271a000a200a220.html

저 홀로 충만한 존재의 신성함 노래


    문정희 '사람의 가을'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전문, '시안' 2003년 겨울호 발표>

◇ 약력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위하여'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76년 현대문학상, 96년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사람의 가을' 외 18편

시인 문정희씨는 "계절에 어울리겠다"며 자신의 미당문학상 후보작 19편 중 '사람의 가을'을 독자들에게 내놓았다.

'사람의 가을'은 지긋한 중년, 깊은 가을 등을 연상시킨다. 마침 요즘은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환절기. 곧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 것이다.

문씨는 "지난해 가을 미국 체류 중 '사람의 가을'을 썼다"고 밝혔다.

뉴욕주의 한 예술촌에 파묻혀 한국말.한국 음식 등 낯익은 것들을 모두 던져버리고 안으로 침잠하기를 한달여. 문씨는 "어느 날 해질 녘 창밖을 보니 빨갛게 단풍 든 나뭇잎들이 빛나면서 표표히 떨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문득 "모든 존재는 소외된 개별자가 아니라 충만한 단독자로 빛난다는 것, 가을은 인간 존재가 충만한 단독자임을 일깨우는 신성한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디에선가 읽은, 신이 검을 들고와 인간의 사지(四肢)를 차례로 잘라낸 후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도 잘라냈다는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그 이야기의 의미는 인간은 결국 아프고 슬프고 고독할 수밖에 없지만 자체로 완성된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는 "단독자의 신비로운 자유로움이랄까,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자체로 완성품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됐다"고 말했다.

그 같은 사유는 결국 문씨의 머리 속에서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는 마침 "충만한 단독자라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단어들은 한국어에서 모두 한 음절 단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사람의 가을'은 그런 깨달음들을 정신없이 써내려간 것이다. 문씨는 "써놓고 나니 깊은 우물을 길어올려 목욕한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 내가 썼나 싶을 정도로 흡족한 시였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김수이씨는 '사람의 가을'이 "시인의 언어가 노래하고자 하는 대상과 진정으로 일치하는 드문 순간, 그래서 시인이 신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순간을 제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 첫머리를 '나의 신은 나입니다'라고 도발적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언어에 대한 예찬, 시에 대한 예찬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김씨는 "쉽고 평이한 언어로 쓰여졌지만 언어와 존재, 시인의 관계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담고 있다"며 "복잡하고 무거운 해석들은 안에 감춘 채 쉽고 친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문정희 시의 전략이자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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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9 17:51 입력 / 2004.08.30 09: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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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5. 시 - 문태준 '하늘궁전'
http://news.joins.com/et/200408/30/200408301747066831a000a010a011.html
살 냄새 진한 시어로 환생하는 꽃 예찬

    문태준 '하늘궁전'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 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더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 있다
    눈썹만 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먹던 늦은 저녁밥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 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전문, '문학사상' 2004년 5월호 발표>

◇ 약력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미당문학상 후보작 '하늘궁전' 외 11편

시인 문태준씨는 시 쓰는 일을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일에 비유했다. '시 반죽'인 만큼 밀가루와 물 대신 그의 생각과 몸이 재료로 들어간다. 문씨는 "시 한편을 써내고 나면 어떤 거대한 손이 나라는 존재를 마구 주무른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 순간 지극한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시를 오래오래 쓸 수밖에 없을 거라는 각오랄까, 희망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문씨가 독자들에게 소개하기로 한 '하늘궁전'은 물론 잘된 반죽 중 하나다.

문씨는 "아주 어렸을 때 시골집 들마루에 식구들이 모여앉아 저녁 먹으며 바라봤던 목련꽃을 어른이 된 후 어느날 한참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 경험이 시 착상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두 목련꽃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시간적 간격이 배경처럼 깔려 있다. 어느덧 문씨는 30대 중반이 됐다. 늙고 쇠해가다 마침내 죽고 말 것이다. 문씨는 "삶은 고통스럽고 소멸하는 세계라는 인식은 내 시의 땅바닥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소멸.죽음에 대한 인식이 뚜렷해질수록 환생과 영원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열망은 간절해진다. 그런데 꽃은 나이를 먹기만 하는 나무와 달리 때마다 새롭게 피면서 새로운 목숨을 부여받는 존재다. 문씨는 "꽃이 환생의 상징, 소멸이 없는 존재로 생각되었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런 꽃이 만발한 세상은 영원성에 닿아 있는 불멸의 세계, 음악과 같은 그런 세계다.

어둠에 대한 인식을 통해 문씨는 밝은 것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문씨는 "내게는 밝은 것을 보는 재주가 없는 것 같다. 그늘을 보는데 익숙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승에서 머물다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스스로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정효구씨는 "사실 만개한 꽃에서 생명의 완전함, 생명의 신비를 읽는 눈은 새롭지 않다"고 말했다. 많은 시인이 쓰고 있다는 것이다. 정씨는 "문태준 시의 특장은 이미지를 형상화하거나 시를 구성할 때 우리의 살로 느끼게끔 하는 언어, 조작된 언어가 아니라 자기 삶의 뿌리에서 우러나오는 언어를 구사하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하늘궁전'에서 꽃이 만개한 목련나무를 "한 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표현한 게 대표적이다. 정씨는 "그 같은 이미지는 살에 팍팍 감기는 것 같다. 이미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없어진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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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30 17:47 입력 / 2004.08.31 08:5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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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6. 시 - 박형준 '빛의 소묘'
http://news.joins.com/et/200408/31/200408311749246301a000a200a220.html

생의 덧없음을 고요하게 응시

    박형준 '빛의 소묘'

    누가
    발자국 속에서
    울고 있는가
    물 위에
    가볍게 뜬
    소금쟁이가
    만드는
    파문 같은

    누가
    하늘과 거의 뒤섞인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가
    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
    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
    모습을 보고 있는가,
    누가
    고통의 미묘한
    발자국 속에서
    울다 가는가

    <전문, '한국문학' 2003년 가을호 발표>

◇ 약력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91년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2002년 동서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빛의 소묘' 외 17편

시인 박형준씨는 "시적으로 안정됐다는 느낌이 들고, 최근 내 시의 경향을 잘 나타내주는 것 같다"며 자신의 미당문학상 후보작품 18편 중 '빛의 소묘'를 골랐다.

정작 '빛의 소묘'안에는 '빛'이 없다. 한차례 등장할 뿐이다. 박씨는 "삶은 끊임없는 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순간들이 빛"이라고 말했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했다. "기쁘거나 슬픈, 감정이나 느낌, 그것들이 리듬처럼 발산되는 순간들은 삶의 에너지가 되는데 그 순간들이 빛"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미세한 고통 같은 것들, 조그만 소금쟁이가 만드는 떨림이나 발자국 같은 것들, 삶의 숨겨졌던 빛깔이 드러나는 순간들이 빛"이라는 것이다.

궁금증은 문답이 오간 끝에 누그러졌다. "사물.사람들이 순간 순간 빚어내는 빛들이 있다"는 설명이 그중 알기 쉬웠다. 마음에 미세한 파문을 남기는 어떤 장면들, 여운처럼 지속되며 눈길을 붙들어매는 어떤 순간들은 마치 빛의 파장처럼 퍼져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씨는 "최근 2~3년간 지속적으로 빛에 관한 시를 30~40편가량 썼다"고 밝혔다. 빛에 관한 시는 그에게, 자꾸 자신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려는 관성과 사물 속에 숨은 빛깔을 찾고 싶은 욕망 사이에 타협점으로 만들어진 '관성과 욕망이 만나는 자리'라는 의미가 있다.

"시 독자들이 그런 깊은 내용을 읽을 수 있겠느냐.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내 시의 독자들은 의미론적으로 따지기보다는 뉘앙스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노을이나 기차 차창 밖 풍경을 보듯 나름대로 느끼고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문학평론가 김진수씨는 "박씨의 시는 기본적으로 유년의 기억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최근 시에서는 현실과의 서걱거리는 마찰이나 불화 같은 것들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박씨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달.신발.바람 같은 시어들은 삶의 정처없음을 뜻하는데 그런 인식이 허무까지는 나가지 않고, 생의 덧없음을 고요하게 응시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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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31 17:49 입력 / 2004.09.01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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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7- 시 - 이성복
http://news.joins.com/et/200409/01/200409011802280701a000a200a220.html

문드러지고 썩는 육체 또 다른 존재로 이어져


    "아, 입이 없는 것들' - 보유(補遺)'


    1 정선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



    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



    4 식탁

    식탁은 찢긴 크래커 봉지와 반쯤 우그러진

    콜라 깡통과 입 닦고 던져 놓은 종이 냅킨을

    받고 있다 그것들은 서로 과거와 미래를

    모르고 가까이 혹은 멀리 있다



    아이들아, 별자리 성성하고 꿈자리 숭숭하듯

    우리도 세상에 그렇게 있다 하지만 우리를

    받아들인 세상에서, 세상이 식탁일 줄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부분, '작가세계' 2003년 가을호 발표>

◆ 이성복 약력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77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아, 입이 없는 것들'
-82년 김수영문학상, 90년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아, 입이 없는 것들'-보유(補遺)' 외 2편

시인 이성복씨는 "미당문학상 후보에 오른 자작시 한 편을 골라 설명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절차를 거쳐 최종심에 올라야 한다면 차라리 후보에서 빠지겠다"는 말도 했다. 할 수 없이 2심 심사에 참여했던 문학평론가 김수이씨에게 작품 해설을 부탁했다.

이씨의 후보작은 지난해 출간한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에 덧붙이는 형식의 연작시 ''아, 입이 없는 것들'-보유(補遺)' 등 세 편이다.

김씨는 "'빠진 것을 채워 보탠다'는 뜻의 '보유'라는 단서를 붙였기 때문에 '보유 연작시'는 '아, 입이 없는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읽어야 하지만 독립적인 성격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마다 일련번호를 붙인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의 맨 마지막 시는 125번이었는데, 이번 연작시 10편은 126번이 아니라 1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김씨는 연작시 1번 '정선'과 4번 '식탁'을 독자들에게 설명하기로 했다.

우선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에 대한 사전 설명이 필요했다.

김씨는 "시집 제목의 '입'은 모든 육체가 가지고 있는 구멍을 뜻한다"고 지적했다. 입은 씹고 삼키고 싶어하는 욕망의 통로이면서 언어의 통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꽃.돌.달 같은 존재들에는 입이 없다. 특히 이씨는 시집에서 꽃을 회음부만 있을 뿐 말하고 욕망을 표현하는 입은 없는 존재로 그렸다. 김씨는 "때문에 입이 없는 존재들은 추하지 않고 아름답지만 욕망으로부터 유리됐다는 사실 때문에 슬픈 존재이고 연민을 자아낸다"고 지적했다.

한편 존재의 육체성에 대한 이씨의 관심은 인간의 육체가 썩고 변해가서 꽃.이파리 등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과정을 주목했다.

김씨는 "'정선'을 그런 사전 이해 없이 읽으면 황당하고 뜬금없을 수 있다. 하지만 육체성도 결국 변해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연장시키면 나의 육체가 까마귀나 피리와 섞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식탁'의 크래커 봉지와 콜라 깡통, 종이 냅킨 등은 특정 시간 속의 일시적 존재 형태다. 그것들은 세상이라는 더 큰 입에 먹히고 소화돼 또 다른 육체로 변해간다.

김씨는 "이성복 시의 특장은 현실 사회를 다루든 자기 안의 관념을 다루든, 대상을 세계관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진 언어 미학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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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1 18:02 입력 / 2004.09.02 09: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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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시 - 이재무 '돌'
http://news.joins.com/et/200409/02/200409021742139231a000a200a220.html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8
    이재무 '돌'


    모름지기 시인이란 연민할 것을

    연민할 줄 알아야 한다

    과장된 엄살과 비명으로 가득 찬

    페이지를 덮고

    새벽 세 시 어둠이 소복이 쌓인

    적막의 거리 걷는다

    잠 달아난 눈 침침하다

    산다는 일의 수고를 접고

    살(肉) 밖으로 아우성치던 피의

    욕망을 재우고 지금은 다만,

    순한 짐승으로 돌아가 고른 숨소리가

    평화로운 내 정다운 이웃들이여,

    누구나 저마다의 간절한 사연 없이

    함부로 죄를 살았겠는가

    머리에 이슬 내리도록 노니다가

    발부리에 걸리는

    돌 하나 집어 주머니에 넣는다

    <전문, '문학 판' 2003년 겨울호 발표>

*** 낮에 죄지으며 사는 군상 밤엔 모두 선한 인간으로

미당문학상 후보작이 27편이나 되는 시인 이재무씨는 "원래 다작인 편"이라고 밝혔다.

자연스럽게 시작(詩作) 과정이 궁금해졌다. 이씨는 "시상을 머리 속에서 오래동안 가다듬거나 계획하지는 않는다. 영감이나 몸의 감각처럼 시가 다가오는 순간 순발력에 의존해 쓰게 된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는 "퇴고할 필요가 별로 없는 완전한 모습의 시가 초고부터 씌여진 경우 좋은 시가 많았다"고 밝혔다.

이씨는 27편 중 '돌'과 '테니스 치는 여자' 사이에서 고민했다. 두 시 모두 특유의 시작 과정을 거친 좋은 시들일 게다. "지면이 한정돼 가급적 짧아야 한다"는 주문에 '돌'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기로 결정했지만 아무래도 이씨의 마음은 '테니스 치는 여자'에 기우는 듯 했다.

'테니스 치는 여자'는 1980년대 시쓰기를 시작한 자신의 세대가 시대적 중압감에 눌려 그동안 무겁고 진지한 시에 치중해온 데 대한 반작용으로 씌어진 시다.

이씨는 "자유롭게 시를 대하고 싶었고 시와 놀고 싶었다"고 말했다. "테니스 치는 여자는 물 속 유영하는 물고기 같다/그녀의 동작은 단순하지만 매우 율동적이다"라고 시작하는 시는 생동감과 탄력이 넘친다.

'돌'을 쓰던 날 이씨는 "보통 잠자리에 드는 새벽 한 시를 넘겨 세 시가 됐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거대한 묘지, 진공 상태 같은 아파트 단지를 둘러봤다"고 말했다. 순간 낮시간에 제도와 질서가 부과하는 고투를 겪으며 죄지었던 사람들이 한밤 중에는 선한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 잠들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씨는 "이해타산이 지배적인 가파른 시대를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인간에 대한 연민.동정.공감의 차원에서 쓴 시"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내 시는 어렵지 않아 소통에 장애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학평론가 유성호씨는 "최근 이씨의 시편들은 자신의 육체를 원초적으로 구성하고 있던 유년.고향에 대한 강렬한 기억으로부터, 공존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타자들로 시선을 확산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돌'은 그런 시선의 확장이 타자들을 향한 넉넉한 연민으로 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유씨는 "적막한 밤거리, 순한 짐승 같은 이웃들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 하다"고 말했다.

◆ 이재무 약력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83년 '삶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위대한 식사''섣달 그믐'

-2002년 난고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돌' 외 2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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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2 17:42 입력 / 2004.09.02 17:4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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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9
시 - 정진규 '내장산 단풍'
http://news.joins.com/et/200409/05/200409051842572401a000a200a220.html



정진규 '내장산 단풍'



그럴만한 세월이었지 내 안 어디에나 숨어있는 너를 내가 짚어 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토록 꼬리를 감추던 네가 全身(전신)으로 돌아서 달려드는 게 두렵다 충만은 언제나 소멸을 예감한다 그것도 알몸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다만당 한 가지 네 비트를 나 만이 알 수 있도록 네가 나의 감옥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수감되었음을 한동안 나도 몰랐다 내장산 단풍 보러 가서 내장된 단풍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內藏(내장)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이미 제가 내장되었음을 짚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지리산 철쭉바다 細石平田(세석평전)을 보았던 임오년 늦봄 나의 일기에 네가 좀 비치는 걸 적어둔 게 있기는 하다만 이번 가을 내장산 단풍 보고 와서 나는 더욱 확실해졌다 너를 은애하는 사람이 되었다.

<전문, '현대시학' 2003년 11월호 발표>


*** 안의 것이 밖으로 나와 나와 완전히 하나 되다

시인 정진규씨는 "시를 쓸 때 소재가 되는 사실적인 대상과 시적인 실체가 직방으로 함께 올 때가 있다"고 밝혔다. '내장산 단풍'을 쓸 때도 그랬다는 설명이다.

정씨는 "아마 '내장'이라는 말이 어떤 자극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감춰진 어떤 것, 속에 들어 앉은 어떤 것을 만나려는 노력은 어떤 시인이든 죽 하는 것이지만, 대상과의 교감, 화응에 대한 요즘의 간절함이 내장산 단풍을 그렇게 받아들이게 한 것 같다"는 것이다.

교감.화응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그는 "'속 안의 것'이 밖으로 나와 '나'와 만나고, 내가 밖으로 나온 '속 안의 것'에 갇혀,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세계"라고 답했다.

정씨는 자신의 산문시 안에 있는 리듬에 대해서도 공들여 설명했다.

"산문 형태의 시에도 제 나름의 환상적인 파도의 물결과 서정적인 흐름의 억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늘 명제로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서정적인 흐름의 억양'은 말의 흐름으로 깔리는 호흡률 같은 것이다.

'내장산 단풍'에서 그런 대목을 짚어달라고 주문했다. 정씨는 "내장된 단풍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內藏(내장)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이미 제가 내장되었음을 짚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는 구절을 예로 들었다. 과연 반복되는 구절들에서는 분명히 어떤 리듬감이 느껴진다. 정씨는 "'형식적으로 이런 거다'라고 설명하기 곤란하다. 시를 읽어 나가면서 스스로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정효구씨는 "'내장산 단풍'이 '전일성(全一性)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씨에 따르면 한 존재와의 만남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것이 내 몸 안에서 내장(內臟)으로 기능하고 있는가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다.

'내장산 단풍'에서 내장산에는 단풍이 내장돼 있고, 단풍 속에 시인이 내장돼 완벽한 한 몸을 이룬 것으로 그려진다. 정씨는 "우리 삶에는 넘을 수 없는 소외.차이.간격.거리 등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정진규씨의 시는 그런 거리를 무화시키고 초월해 대상과 내가 하나 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씨는 "전율이 올 정도로 대단한 세계"라며 "자기를 완벽하게 지우고 버리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고 지적했다.


◆ 정진규 약력

-1939년 경기 안성 출생

-60년 동아일보로 등단

-시집 '몸詩''本色'

-80년 한국시인협회상, 87년 현대시학 작품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내장산 단풍' 외 1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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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5 18:42 입력 / 2004.09.06 08:1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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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et/200409/07/200409071753124501a000a200a220.html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10·끝

시 - 천양희 '바람을 맞다'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 <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오려나 거위눈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 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전문, '현대시학' 1월호 발표>

*** 부당함에 눈 감지 말고 바람이 일듯 일어서야

시인 천양희씨는 "낙동강변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바람에 대해 상당한 매혹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강둑에 서면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천씨는 "요즘도 바람 부는 날이면 집 근처 수락산에 올라 바람을 맞곤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는 천씨가 가장 좋아하는 시구 중 하나다.

"바람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봤다. 천씨는 "바람은 굉장한 떠돌이 같다. 또 자기 정체성이 없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는 다의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시와 비슷하다. 시의 묘미는 다의성이 아닌가"라고 대답했다.

그런 천씨가 바람에 관한 시를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천씨는 미당문학상 후보작 중 독자에게 소개하기로 결정한 '바람을 맞다'가 "마들 들판과 수락산의 바람을 맞아가며 틈틈이 구상해두었다가 지난해 11월 가다듬은 시"라고 소개했다. "마침 분위기가 새해와 어울리는 것 같아 시 전문지 '현대시학' 1월호에 신년시로 주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천씨는 "'바람을 맞다'에서의 바람은 부는 바람도 되고, 희망을 뜻하는 바람도 되고, 세상의 부당함도 된다"고 밝혔다.

"개인적인 일이든 사회적인 일이든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눈을 감아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바람이 일어서듯 여장부처럼 나도 일어서야겠다는 결의를 담은 시"라는 것이다. 또 "생명에의 외경,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의 숭고함도 담고 있다"고 했다.

"몇 가지 시어의 의미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천씨는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한 이는 괴테였고,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은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라고 답했다. 거위눈별은 실재하는 별로, 촉촉한 모습으로 관측될 경우 비가 온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유성호씨는 "운명과도 같은 가혹한 삶의 고통을 잔잔하게 치유하고 극복해내는 천양희의 시어는 한국 시단에서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한 내성(耐性)과 심미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유씨는 "그런 연장선상에서 '바람을 맞다'가 수난과도 같은 시인의 삶을, 초록빛 생명으로 넘쳐나는 숲 속에서 부는 바람으로 은유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 천양희 약력

-1942년 부산 출생

-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

-96년 소월시문학상, 98년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바람을 맞다' 외 1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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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7 17:53 입력 / 2004.09.07 17:5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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