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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문학관 건립  

청포도 익는 7월에… 초인이 돌아왔다
이육사 문학관, 31일 고향 안동에 개관
탄신 100주년 백일장·콘서트 등 행사다채

안동=신지은기자 ifyouare@chosun.com

입력 : 2004.07.29 18:37 13' / 수정 : 2004.07.29 21:08 26'
 
▲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 건립된 육사 문학관.  
 
항일 민족 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가 순국 60년 만에 살아 돌아왔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청포도’)이라 노래한 그 계절에 시인은 ‘귀향(歸鄕)’한 것이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육사 6형제가 살았던 육우당(六友堂)은 박꽃 속에 옛 모습대로 복원됐으며 2층짜리 현대식 시멘트 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육사 문학관으로 오는 31일 문을 연다. 육사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종길(金宗吉)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제 육사 문학관도 짓고 문학상도 만들었으니 선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를 갖춘 것 같다”고 말했다.

1층 전시실에는 시인의 연보와 사진, 육필 원고 등이, 2층에는 영상물 등이 마련돼있다. 마르지 않은 페인트 냄새가 시인이 견디어냈던 ‘매운 계절의 채찍’처럼 오싹한 느낌이다.

시인의 ‘귀향(歸鄕)’은 10년 전부터 준비됐다. 지난 1994년 안동 지역 인사들과 전국 문인 100여명이 모여 ‘육사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설립취지는 “10년 뒤 육사 탄생 100돌을 맞아 문학관을 만들자”는 것.



그 10년 동안 이들은 육사 기일인 1월 16일이 되면 매년 ‘추모의 밤’을 가졌으며 육사의 발자취를 답사하며 연보를 수정했다. 육사 생가가 안동댐 건설로 수몰선 안으로 들어가자, 조례를 바꾸도록 하고 집터를 돋우고 시비를 세워 결국 그 자리를 보존했다.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광야’)

일제의 탄압이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하던 시기에 시인은 ‘해방이 가까이 왔다’며 민족의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었다.

1930년 첫 작품 ‘말’을 조선일보에 실으면서 등단했으며 1931년 8월부터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활약했다. 1932년 중국을 다녀온 뒤 1934년부터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으로 본보와 자매지 신조선 등에서 국내외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시사 평론을 썼다.

뛰어난 평론가로 이름을 날렸던 동생 원조(源朝), 원창(源昌)씨도 각각 조선일보 학예부(1935~1939), 인천지국 기자(?~1940)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시인은 지사요 투사였다. 5척4촌5분의 키(165㎝)에 말이 없고 단아한 성격이었던 그는 일제강점시기 동안 17번 옥고를 치렀다. 아호인 육사도 자신의 수인(囚人) 번호에서 땄다.

본명은 이원록(源祿). 퇴계 이황의 13대 손인 이가호와 의병장 허형의 딸 허길 사이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운 시인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27년), 광주학생운동(29년), 대구격문사건(30년) 등에 연루돼 감옥을 집 드나들듯 하며 항일 투쟁을 벌여 일경(日警)의 요시찰 인물이 됐다. 1943년에는 일경에 붙잡혀 북경으로 압송, 이듬해 1월 16일 만 40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육사 연구가인 안동대학교 김희곤(金熙坤) 교수는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선비정신과 민족정신으로 끝까지 저항했던 이가 바로 육사”라고 말했다.

오는 31일 육사문학관에서는 개관식에 이어 백일장, 문학토론회, 콘서트 등 육사 탄신 100주년 축제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육사 10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회장인 김휘동(金暉東) 안동시장은 “육사의 삶은 북경 감옥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고향 땅에 남아 우리들에게 끝없는 지혜를 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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