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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이육사/절정  

*이 글은 필자이신 황현산 선생님의 허락을 현대시다락방에서 옮겨둡니다. 귀한 원고를 주신 황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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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육 사 / 하얀 무지개의 꼭대기

                                                                               황  현  산

     
육사의 「曠野」에 관해 이야기하였으니 내침 김에 그의 시 「絶頂」도 마저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絶頂」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여덟 행의 시구로도, 한 순간의 단상을 간결하게 정리한 그 내용으로도 소품에 머문 시이지만, 한 지사가 지녔던 마음의 선렬함을 그의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잘 드러내고 있어서, 자주 인용되고 자주 설명되었다. 좋은 시가 늘 그렇듯이 이 시의 경우에도 명백하게 설명되었다고 여겨지는 순간 그 명백함이 다시 다른 의문을 자극하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매운 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채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시가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역시 「曠野」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종길의 덕택이다. 그는 이 시에서 고난의 <한계상황>에 처해서도 자신의 결의를 <황홀>한 도취에 이르기까지 더욱 굳게 다지는 비극적 인물을 본다.1) 극한에 이른 비극의 한 복판에서 <항복과 타협을 모른 채> 자신의 자리를 자각하는 시인이 <매운 季節>의 겨울로 상징되는 시대의 고통 앞에서 <강철과 같고 냉엄한 무엇에 대한 감각>2)을 포착하여, 그 <객관적인 이미지>를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라는 시구 속에 압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겨울을 무지개로 바꾸어 놓는 이 황홀, <단순한 도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철과 같은 차가운 非情과 날카로운 결의를 내포한> 것으로 파악되는 이 황홀에 김종길은 <비극적 황홀>이라는 그 유명한 표현을 적용하였다.

김흥규는 이 해석을 지지하며, <매운 계절의 채찍>에 관해 <구체적으로는 일제의 폭압과 추적에 의해 모든 자유로운 생명적 존속이 부정된 상황이며, 내적으로는 의존할 아무런 현실적 유대도 없이 홀로 서서 어두운 표량과 자기방기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위태롭고 고독한 긴장의 지점>이라는 정연한 말로 그 깊이를 짚어냈으며, <강철로 된 무지개>에 관해서는 <극한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절대적 긴장의 자리에서 울부짖지 않고 오히려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신의 경지를 획득한>3) 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또렷한 설명을 붙여, 저 <비극적 황홀>에 내포된 시인의 의지를 좀 더 강조하였다.

이후 「絶頂」에 관한 논의는 결정적이라고 해도 좋을 이들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또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렇더라도 고난의 계절을 <강철로 된 무지개>로 만드는 상상력의 비밀에 관해서, 다시 말해 얼핏 상호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강철>과 <무지개>를 결합시킨 비유의 수사적 타당성에 관해서 여전히 의문을 품고 그에 천착한 논자들이 많았다.

<비극적 황홀> 대신에 <비극적 초월>이라는 말을 사용한 오세영은, <강철>의 이미지가 폐쇄?물질?축소?죽음?구속?전체주의 등을 내포하는 반면, <무지개>의 그것이 개방?정신?확대?삶?자유?자유주의?존재성 등을 내포한다는 도식을 세우고, <죽음> 또는 <축소된 삶>을 뜻하는 강철과 무지개를 결합한 이 비유는 결국 의미공간의 축소와 확대를, 또는 <비극적 초월>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고 풀이했다.4) 이 논의는 정밀한 것이 사실인데, 강철에는 강철의 성질이 있고 무지개에는 무지개의 성질이 있는 바, 그 두 성질의 결합인 강철 무지개를 통해 하나의 비극과 그에 대한 초월이 압축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이 말은 해답이기보다는 오히려 문제의 제기이겠다.

최근의 한 논의에서는 강철과 무지개에 관한 이런 도식이 일종의 성분분석에 머문 예를 보여준다. 이 시에 어떤 <초극적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 박호영은, <아름답고, 환상적이고, 긍정적이고, 일시적인> 무지개와 <차겁고, 단단하고, 현실적이고, 부정적이고, 지속적인> 저 <강철로 된 무지개>는 서로 다른 반면, <겨울>과 <강철로 된 무지개>는 동질적이라고 전제하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 <겨울은 봄의 도래를 약속하는, 무지개와 같은 꿈과 희망의 계절이어야 하겠는데, 이 시대의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이기에 그렇지를 못하고 겨울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시인의 염려가 담겨 있다>.5) 전제와 결론 사이에 적잖은 모순이 있지만 그것을 따지려면 장황한 말이 필요하다. 다만, 무지개가 <강철로 되어 있다>는 점은 중시하는 이 논자가 강철이 <무지개로 되었다>는 점에는 왜 눈을 감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질문은 <차겁고, 단단하고, 현실적이고, 부정적이고, 지속적인> 것 속에서는 끝내 아무런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가라는 다른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

이들 논의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오탁번의 그것이다.



시의 화자는 엄동설한에 이제 더 이상 나아갈 수도 없는 북방의 어느 고원에 처해 있다. 그의 앞에는 매운 바람과 햇빛에 반짝이는 무수한 설화가 펼쳐져 있다. 그의 앞에는 매운 바람과 어울려 지금 빙설이 언뜻언뜻 무지개빛으로 비쳐난다. 여기에 곁들여 낫이나 작두날에서 보던 무지개빛이 생각난다.6)



재미 있고 기발한 가설인데, 시인이 <강철로 된 무지개>를 떠올릴 때, 그는 햇빛을 분광하여 반사하는 빙설 같은 것에 눈길이 붙잡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고 말할 처절한 지경에서 <눈 감아 생각해> 보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로 남겠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등식의 균형을 어림하더라도, 바람 속에 언뜻언뜻 비쳐나는 빙설의 반사광이나 작두날의 작은 무지개가 그 모진 겨울 하나를 온전히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게다가 겨울의 고원에서 겪는 고난의 한계상황에 대한 서술을 <강철로 된 무지개>에 대한 상념과 곧바로 연결시키는 접속사 <이러매>도 다른 매개물이 그 사이에 끼어들 여유를 남기지 않는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말하는 <생각할 밖에>의 <밖에>도 같은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그 자체로서 표현이 강렬하고, 따라서 그에 대한 논의에서도 강렬한 표현을 발생시켜 다른 시구들을 압도할 수밖에 없는 이 시구는 시 전체에서 따로 떨어져서 읽히기 쉽다. 이런 경우에 자주 일어나는 난독증에 빠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시의 유기적 구조를 믿어야 한다. 물론 이때 시가 먼저 유기적 구조를 지녔어야 소득이 있을 텐데, 이 시의 조직은 일매지고 탄탄하다. 시를 첫머리부터 다시 읽을 때, <강철로 된 무지개>는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닐 뿐더러 시 자체가 벌써 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인은 시대가 휘갈기는 고난의 채찍에 몰리고, 자기 다짐의 모진 채찍질로 스스로를 몰아붙여, 실제로건 비유로건 지금 북방의 한 고원에 서 있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더 이상의 높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리만치 치솟아 오른 이 고원 위에는 다시 서릿발이 칼날을 이루고 있다. 시인은 바로 그 서릿발 칼날의 길을 딛고 있다. 어디에 등을 부쳐 눕기는커녕 잠시 무릎 꿇어 쉴 자리도 없으며,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겨 놓는 일에조차 혼신의 힘을 다 해야 한다.7) 허공에 걸린 외줄보다 더 고달프고 위험한 길을 그는 걸어가고 있다

시인이 걸어가는 이 길, 하늘에까지 닿게 높이 내걸린 이 칼날의 길이 바로 그 <강철로 된 무지개>이다. 칼날처럼 예리한 이 강철의 다리는 오색으로 영롱한 것이 아니라 금속성의 백색으로 번쩍일 것이 분명하다. 시인은 자신이 서 있는 <겨울>의 정황이 하얀 칼날 무지개의 꼭대기일 수밖에 없다고 <눈감아 생각>함으로써, 그 단순한 원호의 형식과 그 단일한 백색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온갖 고통과 마음 속에서 들끓는 온갖 번민을 간결하게 정리하는 한편, 한 길로 집중된 자신의 의지를 단단하고 엄혹한 물질의 형태로 거기서 다시 확인할 것이다. 그렇게도 추웠을 겨울, 북방의 천애에 하얀 강철의 칼날로 한 번 걸렸던 이 무지개는 아마도 우리의 시문학이 발견한 무지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에 속하리라. 제가 견디는 고난의 높이로 제 의지의 강도를 측량하려는 듯 시인이 밟고 서 있는 그 포물선의 <절정>은 가지가지 불행한 그림자들이 정신적 위의의 통일된 표상으로 바뀌는 날카로운 분기점이며, 오한과 기아, 수모와 폭력으로 얼룩진 시야를 맑게 열어 아득한 한 세상을 가장 가깝게 보여주는 이상한 전망대이다.



1) 김종길, 「한국시에 있어서의 비극적 황홀」, 『詩에 대하여』, 민음사, 1986, p. 410.

2) 김종길은 이 구절을 에이츠의 한 편지에서 인용하고 있다. 위의 책, 같은 페이지 참조.

3) 김흥규, 「陸史의 詩와 世界認識」, 『文學과 歷史的 人間』, 창작과비평사, 1980, p. 101.

4) 오세영, 「이육사의 절정 - 비극적 초월과 세계인식」, 『한국현대시작품론』, 문장, 1981, pp. 264-274.

5) 박호영, 「비유와 이미지에 대한 시교육의 방향」, 『시안』 1999년 봄호, p. 46.

6) 오탁번, 「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1988, p. 215.

7) <재겨 디디다>의 <재겨>에 대해, 김재홍의 『詩語辭典』은 <조심조심 살피면서, 꽉 버티어, 여러 모로 따져 헤아리며>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시인이 <서릿발 칼날> 위를 걷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재겨 디디다>를 <제겨 디디다>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제기다>는 <발끝으로만 걷는다>는 말이며, <제겨 디디다>는 <발끝이나 발꿈치만 바닥에 닿게 디디다>의 뜻을 갖는다(금성사 간행 『국어대사전』과 한글학회 간행 『우리말 큰사전』 참조). 그러나 이 두 풀이가 담고 있는 내용은 모두 운신의 어려움이나 조심스러움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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