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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이육사/광야
*이 글은 필자이신 황현산 선생님의 허락을 현대시다락방에서 옮겨둡니다. 귀한 원고를 주신 황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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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육 사 / 『曠野』에서 닭은 울었는가
황 현 산
조리스의 소설 『종이 집』에서 주인공 화자의 열한 살 먹은 아들은 죽은 지 백년이 넘는 프랑스의 한 시인을 되살려내고 싶어한다 : "나는 제랄드 네르발을 부활시켜 질문을 할 게 있어. 엄마가 나한테 설명해 주지 못한 시구 있잖아, <나는 사랑인가 페뷔스인가...> 거기서 정확히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지 물어볼 수 있을 텐데... 이제는 어쩌면 이런 질문을 받을까봐 부활하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 호기심 많은 아이가 네르발의 시 「廢嫡者 El Desdichado」에서 만났을 이 괴이한 구절은 수많은 해석들을 일렬로 늘어놓게 만드는 그런 시구의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거기서는 모든 주석자들이 저마다 자기 설명을 제시하고 있지만, 어느 설명도 다른 설명을 압도하기는 어렵다.
이 벨기에의 소년이 한국에서 태어났고, 현대문학에 관심이 있었더라면 아마도 陸史 선생을 부활하게 하여, 「曠野」에서 닭이 울었는지 안 울었는지 물어보고 싶어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교과서에 실린 시일 뿐만 아니라, <교과서에 실린 대표적인 난해시>이며, 그에 대한 해석이 두 쪽으로 엇갈려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암송하고 있을 시이지만 그러나 일단 적어 두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山脈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光陰을
부지런한 季節이 피여선 지고
큰 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는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던 그 장엄한 순간을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때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닭 우는 소리가 들렸을까, 들리지 않았을까. 문제의 "들렸으랴"에 관해 그것이 <들렸으리라>의 축약형이며 이 닭울음소리가 "까마득한 날에 대한 상상을 더욱 어울리게 만든다"는 김종길의 해석이 있기 전까지1), 대체적으로 이 구절은 <들렸겠는가>라는 수사적 의문으로, 따라서 닭울음소리를 부정하는 말로 파악되어 왔다. 이 두 해석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설복하지 못했다. 부사 "어데"도 결정적으로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닭이 울었을 것이란 해석에서는 <어디선가>라는 단순한 뜻을 지니지만, 반대편의 의견에서는 이런 종류의 설의적 수사에 적합한 부정의 부사가 된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이 상반된 두 주장은 <닭 우는 소리>에도 각기 다른 성격을 부여하여, 그것으로 그들 입론의 주요한 근거를 삼는다. 닭울음소리를 부정하는 논자들에게 닭은 단지 가금이다. 닭울음이 있는 곳에는 인가와 인간이 있고 그 세속이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 첫 연은 인간의 역사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저 개벽의 시간과 관련하여 "닭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그대로의 광야"2)를 나타낸다. 반면에 이 광야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는 쪽에서는 그것으로 곧바로 인가의 존재를 짐작하거나 인간생활을 연상하지 않는다. 이 주장에서는 가금의 한 종류로서의 닭보다는 하루의 새벽을 알리고 한 위대한 시대의 개막을 선두하는 그 울음소리, 이른바 <鷄鳴聲>에 역점을 둔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늘과 땅이 열리는 그 장엄한 사건의 효과음이며, 우주가 저 자신의 태동을 선포하는 나팔소리와 같은 것이다.
이 닭울음 소리의 각기 다른 성격에 대해 그 타당성을 뒷받침할 만한 전거는 양쪽 모두에게 물론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논의에서는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누를 만큼 더 훌륭하거나 더 강력한 전거란 있을 수 없다. 한 글의 한 문맥에서 닭울음소리에 부여했던 의미나 영상이 아무리 적절하고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글과 문맥을 떠나, 다른 글의 다른 문맥에 나타나는 다른 의미와 영상을 배척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민주주의의 닭울음소리가 울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내일 <산삼은 개와 닭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만 자란다>고 말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의 경우에도 이 닭울음의 성격을 규명하거나 짐작하기 위해서는 「曠野」의 문맥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이 문맥과 관련하여 김종길은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다.
[이를 수사적 의문으로 본다면 그것은]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한층 강조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천지 개벽의 순간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강조하는 것이 됨으로써 이 부분의 문맥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3)
이 주장은 매우 타당한 것이어서, "천지 개벽의 순간 광야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약간은 모호하지만 오히려 의문형의 종결 어미를 구사하여 <들렸으랴>라고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4)는 정도의 말로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육사는 바로 뒷 절에서 "바다를 戀慕해 휘달"린 산맥들도 "차마 이곳을 犯하던 못하였으리라"라고 쓰고 있다. 광야가 지녔을 특별한 성격을 역설하여 산맥도 피해 갔다고 곧바로 말하게 될 사람이 그에 앞서, 더구나 천지 개벽을 말하면서, 그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한 것일 인적과 그 소음의 부재를 먼저 강조해서 말한다는 것은 결코 격에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황소를 도둑 맞은 사람이 그 도난사실을 신고하면서 소와 함께 딸려간 소고삐를 먼저 강조하여 말하는 것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이 닭 울음 소리는 산맥들의 조심성과 맞먹는 무게를 지닌 것으로, 우주의 태동과 관련하여 특별한 상징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닭 울음 소리는 각설하고, 다시 "들렸으랴"에 돌아오면, 그것이 <들렸으리라>의 축약형이라는 것이 사실일까. 이 주장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다음 절이 "였으리라"로 종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어미를 다르게 쓴 데 대해 김종길은 음운상의 고려를 그 이유로 들고 있지만, 비슷하지만 다른 두 어미가 대등한 자리에 놓일 때, 그 외형의 유사성으로 그 내용의 상이성이 더욱 강조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둘째 연의 "못하였으리라"는 첫 연의 "들렸으랴"가 "들렸으리라"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게다가 "정상적인 문법으로 보아 <들렸으랴>는 <들렸으리아>의 축약형은 될지언정 <들렸으리라>의 축약형이 될 수는 없다"5)는 고형진의 말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우리는 두 주장을 모두 받아 들일 수 없다. 한 쪽에 대해서는 닭울음소리가 개벽의 순결성이나 신성성을 더럽히는 소음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며, 다른 쪽에 대해서는 그 닭이 울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말할 차례인데, 이 닭의 정체와 그 발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이 <광야>의 성격을 짚어두고, 시인의 "가난한 노래"와 초인이 "목놓아 부를 노래"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 닭울음소리는 이 두 노래와 같은 선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광야>는 무엇보다도 접근이 금지되었거나 개척하기 어려운 땅으로 그 성격이 특징지어진다. 산맥도 그 땅을 "차마 범하진" 못했다. "바다를 연모해" 한 번 휘달리는 것으로 자신들의 작업를 끝내고 제 위치를 결정해버린 산들은 그 광야에 길닦기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곳을 터부의 땅으로 남겨 두었다. 반면에 "큰 강물"은 피어선 지기를 그치지 않은 긴 세월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이 땅에 자신의 길을 낼 수 있었다. 그 세월이 "부지런"하다는 것은 그 계절이 쉬지 않고 근면하게 이어졌다는 뜻인 것은 물론이고 그 기간 내내 강물의 노력이 또한 그렇게 부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이 광야에는 눈이 내려, 그 험난한 자리에 인간의 길을 개척하려는 시인의 노력이 더욱 큰 고난을 맞이하게 되었다. 홀로 피어 있는 매화의 향기만이 그의 고고한 이상과 지조를 상징하고 증명할 뿐이다. 이 매화향기에는 어떤 아득한 높이가 있다. 이 고결함이자 아득함인 것은 시인의 높은 이상이 실현되는 일의 그 아득함과 다른 것일 수 없다.
이상이 실천되기까지의 이 아득함 앞에서 시인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저 큰 강물의 교훈이다. 그는 아득한 세월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장구함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그의 "가난한 노래", 현재로서는 별다른 힘을 지닌 것도 아니고 합창해 주는 사람도 얻기 어려운 고독한 노래의 씨를 뿌리기로 결심한다.
이 노래의 씨앗은 또다시 "부지런한 季節"을 따라 싹이 돋고 "피어선 지"기를 거듭한 뒤에 "白馬 타고 오는 超人"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초인은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인간이며, 저마다 제 자유의지로 행동하게 될 미래의 인류이다. 이 <초인>이라는 표현에는 고난의 극한에서 노래 부르기를 선택한 자신의 의지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과 높은 정신적 경지를 확보할 미래의 인간에 대한 강렬한 기대가 겹쳐 있다. 이 새 시대의 인류는 지금 시인이 숨죽여 부르는 이 노래를 마음 놓고 "목놓아" 부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초인이 도래할 미래의 시간이 "千古의 뒤"인 것은 야릇하다. 千古는 <긴 세월>을 뜻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먼 옛날>을 말하기 때문이다. 천지 개벽의 시간이야 말로 그 먼 옛날이다. "다시 千古의 뒤"가 이 시의 詩眼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저 태고의 "까마득한 날"을 미래의 아득한 날과 연결시킨다. 그 까마득한 날에 하늘과 땅의 새벽이 있었다면 이제 아득한 날을 거쳐서 와야 할 것은 <인간의 새벽>이다. 인간은 저마다 자유인이 되어 제 새벽을 맞는다. 이 새로운 千古에 초인이 목놓아 부를 노래는 바로 그 인간 개벽의 <닭울음소리>가 된다.
이 초인의 노래와 함께 다시 첫 연으로 돌아가면, 까마득한 날 하늘이 처음 열릴 때 어디선가 들렸으리고 생각될 만한 저 <하늘 닭의 울음 소리>를 시인은 부정하고 있다. 천지가 개벽하는 순간, 하늘이 어떤 지고한 소리를 울려 자신을 진리 그 자체로 선포하고, 신성한 뜻을 하교하여 인간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미리 정해 놓았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천지 개벽의 닭울음소리를 부정할 때, 그것은 이른 바 저 섭리의 목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 천지가 단지 그렇게 열렸을 뿐 어찌 지엄한 닭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겠는가. 인간은 제 운명을 제가 설계해야 하며, 제 노래를 스스로 만들어 불러야 한다.6) 하늘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그 진보를 믿는 자로서의 陸史의 의지가 바로 이렇게 한 <땅의 역사>로 표현된다.
루쉰은 그의 단편소설 「故鄕」에서 수구주의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터부의 자리에 인간의 가치가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었다 :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나는 육사가 「曠野」을 쓸 때, 루쉰의 이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감히 믿는다.
1) 김종길, 「육사의 시」, 『시에 대하여』, 민음사, 1986, pp. 179-180.
2) 김현승, 『韓國現代詩解說』, 관동출판사, 1975, p. 141.
3) 김종길, 「이상화된 시간과 공간」, 앞의 책, p. 166.
4) 최동호, 『시 읽기의 즐거움』, 고대출판부, 1999, p. 174.
5) 고형진, 「시의 난해성」, 유종호/최동호 편, 『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현대문학사, 1995. p. 306.
6) 시인의 이 의도는 시의 중층적 대립구도를 검토하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이 구도는
최소단위에서, 제2연 <산맥의 성급한 포기>가 제3연 <강물의 끈질긴 도전>과 대립하고, 제4연 <시인의 가난한 노래>가 제5연 <초인의 당당한 노래>와 대립하며,
중간단위에서 <자연의 교훈>을 우의하는 제2/3연이 <인간의 실천>을 나타내는 제4/5연과 대립되며,
마지막 단계에서, 첫 연의 <닭울음소리가 없는 천지개벽>과 마지막 연의 <초인의 노래가 있는 인간개벽>이 대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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